< 준비 속의 준비 -1- >
1백.
참 의미심장한 숫자다.
수백 년에 걸친 현신들의 준비가 드디어 끝났다는 얘기 아닌가.
그렇다면 곧 아르거스 행성을 완전히 복구할 수도 있었다. 대적자들이 자기 무기에만 익숙해지면, 굳이 시간을 끌 필요가 없으니까.
시혁은 천상도에 잠입시켜 둔 분신을 통해 그 사실을 알았다. 천상도의 마을이 별안간 웅성거리더니, 100 대적자 완성을 기념한 축제를 벌인 것이다.
잠깐 생각에 잠겼다.
이 일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가장 먼저 현신들이 자신을 찾아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유령 여왕의 창을 돌려주지 않은 상태니까. 부탁을 하든 압박을 하든 어떻게든 창을 돌려받으려고 하겠지.
돌려줘? 말아?
아직은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시간을 끌어야 한다.
어떻게?
이런저런 생각에 골머리를 싸맬 때였다.
낫슈바켈이 홀로 시혁을 찾아왔다.
“백색 현왕, 잠시 괜찮을까?”
“아, 네. 괜찮습니다. 말씀하시죠.”
시혁은 낫슈바켈에게 차를 권했다.
누가 성질 급한 적색용 아니랄까봐, 낫슈바켈은 단숨에 차를 입에 털어 넣었다.
찻잔을 내려놓더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백색 현왕. 나와 약속했던 걸 지킬 때가 된 것 같다.”
그래, 언제 그 이야기를 하나 했다.
4차 확장만 되어도 차원 이동이 가능했다. 이제 최종 확장도 끝났고, 현신의 공격도 이겨냈으니 아르거스에는 더 볼 일이 없다.
가만 있자.
이걸 어떻게 잘 엮으면 유령 여왕의 창을 돌려주지 않을 명분으로 써먹을 수 있겠다.
시혁은 최소한 녹스는 처리하고 갈 생각이었다. 아르거스에서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는 거야 알 바 아니지만, 녹스는 나중에 지구를 공격해 올지도 몰랐으니까.
시혁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제 고향 세계에서는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만, 슬슬 준비를 하는 게 좋겠습니다. 언제라도 건너갈 수 있게요.”
많은 논의가 있었다.
대세는 아르거스와의 연결을 끊자는 쪽.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았으나 대세는 이미 굳어졌다. 검은 천체에서 비롯되는 폐해가 워낙 크기 때문이었다.
낫슈바켈의 얼굴이 화악 밝아졌다.
“그래도 되겠느냐?”
“예. 만에 하나 구명줄이 될 수도 있고요.”
처음에 낫슈바켈이 구상했던 것대로 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은 하늘마루가 있으니까. 무한과 불멸의 힘을 이용하면, 성역을 소모하지 않고도 단독으로 차원 이동이 가능했다.
“좀 아쉽구나. 차원문을 가만히 놔두면 이계 왕복도 가능할 것 같다만.”
낫슈바켈의 한 마디에, 시혁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랬다간 지구에서 야단이 납니다. 이능력자들이 각성하는 것만도 감당하기 어려워요. 하늘마루가 차원문을 통과하면 최소한 10배 이상 커질 텐데, 그건 재앙입니다.”
“지구는 원래 마나가 없는 세계라고 했지? 그럼 그럴 만도 하다. 마나는 축복이지만, 또한 저주이기도 하니까.”
시혁과 낫슈바켈, 싱트파헬 셋이 머리를 맞댔다.
하늘마루 자체를 개조하기로 했다.
많은 자원과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성역에 마법진을 설치하려고 했지만, 그러면 흔적이 남는다는 단점이 있었다. 후에 누군가가 지구로 쫓아올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다.
거의 하늘마루를 해체했다가 재조립했다. 불평할 만도 하건만, 드워프들은 눈에 불을 켜고 달라붙었다.
“이게 아예 차원을 이동한다고?”
“세상에, 공허 요새라고만 해도 놀라 뒤집어질 판에 차원 요새를 만들어?”
“이런 대역사에 참가하지 않으면 드워프가 아니지!”
엘프, 천사, 인간, 수인족 할 것 없이 모두 참가했다.
시혁이 곧 아르거스를 떠날 거라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졌다. 다들 그 이후를 걱정하면서도, 차원 요새에 대한 호기심을 감추지는 못했다.
이때쯤 현신들의 사자가 찾아왔다.
익숙한 존재.
라크라였다.
시혁은 짐짓 농담을 건넸다.
[너 안 잘렸구나? 인맥이 대단한가 보지?]
푸르륵!
라크라가 고개를 돌리고 투레질을 했다.
짝니가 슬그머니 나타났다. 그림자 속에서 고개만 슬쩍 내밀더니, 라크라의 푸짐한 엉덩이를 스윽 핥았다.
라크라가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으악! 뭐, 뭐야?]
둘의 눈이 마주쳤다.
라크라의 털이 올올이 일어났다.
무지갯빛 털이 순간적으로 검게 변했다. 부리나케 뛰어 수십 미터는 멀어졌다. 커다란 나무 뒤에 숨더니, 고개만 삐죽 내밀었다.
라크라가 이를 갈며 소리쳤다.
[그 큰 고양이 좀 치워!]
왜?
놔두면 라크라를 제대로 무너뜨릴 수 있는데.
시혁은 모른 척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이냐? 넌 천상도 신전을 떠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만.]
라크라가 나무 뒤를 빙글빙글 돌았다.
짝니는 관심 없는 척 자기 앞발을 핥았다. 그러면서도 라크라를 힐끔거리는 게 기회만 되면 물어뜯을 듯했다.
라크라는 그런 짝니를 경계하며 말했다.
[유령 여왕의 창, 너한테 있지? 이제 돌려줘.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어.]
[많이 지나기는 무슨. 자일 님이랑 얘기하고 아르거스 시간으로 한 달 밖에 안 된 것 같은데.]
지구 시간으로 따지면 고작 사흘이다.
시혁은 한참 공사 중인 하늘마루를 가리켰다.
[난 요즘 너무 바빠서 창에 신경을 쓸 수가 없어. 공사 끝나면 얘기하자.]
[뭘 하는 건데?]
[공허 요새를 차원 요새로 개조하는 중이야. 이제 지구로 돌아가려고.]
[지구로 돌아가? 그게 무슨 소리야?]
간단히 설명을 했다.
아르거스와의 연결로 인해 지구가 너무 많은 피해를 입었다는 것.
그래서 연결을 끊고, 소환자들이 오가지 못하게 할 거라고 하자 라크라가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말도 안 돼! 그렇게 일방적으로 하는 게 어디 있어?]
[무슨 헛소리야? 너희가 일방적으로 우리를 소환해서 부려먹었지. 세뇌까지 해놓고. 그걸 원래대로 되돌리겠다는데 일방적이라고 하면 안 되지.]
라크라가 말을 잃었다.
그러더니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뭐 좋아. 마음대로 해. 네가 그러든 말든 상관없어.]
그럴 테지.
현신들이 목적한 바는 다 이뤘을 테니까.
자기들이 잘못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뻗대는 걸 보자 슬금슬금 열이 올라왔다.
슬쩍 어깃장을 놓았다.
[그래서 기념품 삼아서 창을 지구로 가져가려고. 괜찮지?]
[뭐? 안 돼!]
라크라가 소리를 빽 질렀다.
시혁은 라크라가 들으라고 코웃음을 쳤다.
[왜 안 돼? 너희도 마음대로 했잖아? 나도 마음대로 할게. 그게 공평하지 않아?]
[안 돼!]
라크라는 막무가내였다.
지금 당장 유령 여왕의 창을 돌려받아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시혁은 가볍게 묵살했다.
하도 시끄럽게 굴기에 짝니를 그 앞에 들이밀었다. 라크라가 놀라 딸꾹질을 했다. 그 다음에는 좀 조용해져서, 시혁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라크라를 방치한 채, 하늘마루를 꾸준히 개조했다.
차원이동 마법 설치는 끝이 났다.
그 다음은 기계 골렘 생산 설비를 개조할 차례.
세 용을 제외하고는 지구로 데려갈 생각이 없었다. 따라서 빈 자리를 메꿀 인공지능 선원들이 필요했다.
일종의 로봇이라고 할까.
외부로 나가 공격과 방어를 할 천사 로봇, 수리를 맡을 드워프 로봇, 세계수 부분을 유지할 엘프 로봇, 전반적인 운용을 보조할 인간 로봇, 하늘마루 내부에서의 육박전에 대비할 오크와 수인족 로봇까지.
최종 확장 때 만들었던 설비로는 모자란 감이 있었다. 그래서 더 확충하고, 더 정교한 로봇을 만들게 했다. 하나같이 진귀한 마나 보석이 들어가서, 각자 마법을 쓸 수도 있었다.
[고장난 것들이 좀 있구나. 그것들은 내 신전으로 옮겨놓아라. 쓸 데가 있다.]
시범적으로 생산할 때 불량품이 좀 나왔다.
그것들은 시혁의 성지로 옮겼다. 시혁이 곧 긴히 쓸 곳이 있었으니까.
한동안 구경만 하던 라크라가 시혁에게 말을 붙였다.
[정말 고향 세계로 돌아갈 거야?]
[그래. 결정했어.]
[차라리 신위 경쟁에 다시 도전하는 게 어때? 최후 관문만 남아 있잖아. 내가 현신님들께 말해서 쉬운 시련을 달라고 할게.]
어처구니없는 소리다.
더 이상 대적자가 발생하지 않는다. 현신들이 어느 정도는 최후의 시련에 개입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걸 빌미로 창을 돌려받을 심산인가 본데, 사람 잘못 봐도 단단히 잘못 봤다.
단숨에 거절했다.
[됐다. 관심 없어. 신이 돼 봤자 노예 신세인데, 뭐 하러 그런 신이 되려고 아득바득 경쟁을 하겠어?]
[노예 신세? 아, 아르거스 복구를 말하는 구나. 지금까지는 그랬지. 하지만 조금만 더 견디면 돼. 아르거스 복구가 끝나면, 신들은 지금까지 고생했던 대가를 받을 거야. 신으로서 권세와 복락을 누리게 된다고. 현신님들도 그때는 열다섯의 새로운 신들에게 무릎을 꿇
게 돼.]
아르거스 행성이 복구된 다음을 얘기하나 보다.
잠시 솔깃했지만 곧 관심을 접었다.
어떤 식으로 뒤통수를 칠지 누가 아나.
시혁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라크라가 다급해졌다. 시혁의 신전으로 아예 들어오더니, 신상 앞에 앉은 채 조용히 물었다.
[어떻게 하면 창을 돌려줄 거야? 바라는 거 있어?]
시혁은 짐짓 딴청을 피웠다.
그렇게 라크라를 애태운 다음에야 본심을 드러냈다.
[내 조건은 간단해. 라무를 검증하게 해 줘. 그럼 유령 여왕의 창을 돌려주겠어.]
[안 돼! 우리 대적자를 팔아먹으라는 말이야? 그건 불가능해. 그런 조건을 가지고 갔다간 자일 님이 내 목을 뽑아버릴 거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고, 현신님들이 납득할 수 있는 조건을 말해 봐.]
시혁은 라크라를 살살 구슬렸다.
[라무를 어떻게 하려는 게 아냐. 라무가 어둠 대종사 녹스의 후생인 건 알지? 혹시 현신님들이 이러는 게 녹스에게 속아서 그런 거면 어떻게 해? 그래서 녹스가 완전히 각성했는지 어땠는지만 알아보려고 그래. 나한테 라무를 넘겨줄 필요도 없어. 중립 지역에서 현신
들도 입회하고 검사해 보자. 어때?]
라크라가 눈을 깜빡였다.
[라무가 녹스의 후생이라니?]
현신들은 알던데, 라크라는 들은 적이 없나 보다.
시혁은 깜짝 놀랐다는 감정을 강하게 전달했다.
[몰랐어? 다 아는 줄 알았는데? 라무가 녹스의 후생이잖아. 내가 얼마 전에 보니까, 녹스는 그 속에 여전히 숨어 있더라. 언제든 각성할 수 있을 것 같았어.]
[그게 진짜야?]
[못 믿겠으면 현신들한테 물어 봐. 그럼 되잖아?]
라크라가 살며시 눈을 감았다.
전신에서 찬란한 광채가 뿜어졌다.
신들과 교신을 하는 모양.
곧 눈을 떴다.
믿기지 않은 말을 들은 듯, 두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라무가 녹스라고? 신들께서는 괜찮다고 하시는데?]
[녹스의 후생이라고 해도, 완전히 동일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둘은 엄연히 다른 사람이야. 나도 그 의견에 동의해. 하지만 확실하게 해두는 게 좋지 않겠어? 라무가 자기 의지로 대적자가 된 거라면 괜찮겠지만, 녹스가 현신들을 속인 거라면 어떻게 해?]
시혁은 한 가지 사실을 꿰뚫어 보았다.
신들의 권속과, 현신들이 녹스에 대해 갖는 태도는 확연히 온도차가 존재한다.
라크라를 비롯한 권속들은 열다섯 대종사 모두를 극도로 싫어했다. 그들 때문에 대재앙이 발생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전생에 대종사였다는 소리만 들어도 질색을 했다.
반면 현신들은 전생은 전생, 후생은 후생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녹스도 이 점을 호소하여 대적자가 된 듯했다. 아니면 현신들 중에 녹스의 조력자가 있을 수도 있고.
그 온도차를 파고들었다.
[다른 권속들이랑도 얘기를 해 봐. 마을의 신녀와 장로들에게도 의견을 구하고. 나도 유령 여왕의 창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아. 굳이 빼앗아 갈 생각은 없어. 라무가 녹스가 아니라는 보장만 있으면 얼마든지 넘겨줄게.]
[음……]
라크라가 앓는 소리를 냈다.
신상 주변을 몇 번이나 돌더니, 결심을 한 듯 발을 크게 한 번 굴렀다.
[좋아. 네 제안을 받아들일게. 생각해 보니까 녹스한테 대적자의 무구가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아. 현신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천상도 전체가 의견을 모으면 무시하시진 못하겠지.]
[잘 생각했어. 아무렴, 뭐든 확실하게 하는 게 좋지.]
라크라는 곧 성역을 떠났다.
시혁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것으로 시간을 꽤 벌었다.
천상도에서 중지를 모으고, 그걸 들어 현신들을 압박하고, 라무를 데려다 검사를 하려면 얼마나 걸릴까?
모르긴 몰라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겠지.
천금 같은 시간이다.
시혁은 계속해서 하늘마루 개조를 진행시켰다.
사실 이것은 연막일 뿐.
진짜는 따로 있었다.
라무를 잡기 위한 함정.
이번 검사에서, 라무가 과연 마각(馬脚)을 드러낼까?
그럴 리 없다.
< 준비 속의 준비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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