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녹스 추적 >
셋이 나란히 둘러앉았다.
실라는 낫슈바켈 옆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까 짝니와 신나게 뛰어놀더니, 슬슬 체력이 방전된 모양이다.
시혁은 지팡이를 꺼내 한쪽에 꽂아두었다.
베리타스가 봉인된 지팡이.
싱트파헬이 관심을 드러냈다.
“뭐야? 못 보던 지팡이인데.”
하여간 보물 냄새는 잘도 맡는다.
지팡이 자체야 별 것 아니지만, 베리타스가 봉인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가 엄청났다.
머리 쪽에 박힌 영혼석이 흐린 황금빛을 뿌렸다.
빛이 낫슈바켈과 싱트파헬을 한 번씩 훑었다.
[익숙한 느낌이군. 낫슈바켈인가?]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낫슈바켈이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두 눈을 부릅떴다.
“설마, 베라티스?”
“뭐?”
건들대던 싱트파헬이 깜짝 놀랐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지팡이를 보자, 낫슈바켈이 추궁하듯 물었다.
“어째서 네가 거기 있는 거지?”
[말하자면 길다. 백색 현왕에게 들어라.]
시혁은 간단히 설명했다.
베리타스의 자아를 뽑아낸 후 인공 영혼과 결합시켰다는 것. 지금은 영혼석에 메인 신세이고, 녹스에게 복수하기 위해 합류했다고.
싱트파헬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어…… 아빠?”
베리타스는 아무 말이 없었다.
싱트파헬이 몇 번 더 부른 다음에야 자기를 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소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빠라니, 대체 무슨 말이냐? 나는 생전에 씨를 뿌린 적이 없다만……]
싱트파헬은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시혁이 대신해서 소개를 했다.
“베리타스. 여기 이 용은 싱트레아의 자식, 싱트파헬이야. 네가 보호하던 알에서 깨어났지.”
[무슨 소리인지 알겠다. 녹스가 변이시켰다더니 정말이구나. 황금용의 광채는 사라지고 이토록 짙은 어둠만 남다니…… 내 불찰이 크다. 그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녹스를 죽여야만 했어.]
싱트파헬의 얼굴에 짙은 의문이 떠올랐다.
이게 무슨 소리냐는 것.
시혁은 베리타스에게 들은 사실을 털어놓았다.
천 년 전의 비사(祕史).
낫슈바켈과 싱트파헬, 두 용 모두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녹스가 만악의 근원이었구나.”
“그럼 넌 내 아빠가 아냐?”
[아니지. 나는 네 수호자, 실패한 수호자일 뿐이다.]
칼날처럼 단호한 말에 싱트파헬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낫슈바켈이 시혁을 쳐다보았다.
“녹스가 각성했을 가능성이 있나?”
“충분히 있지요. 라무를 직접 대면하진 못했습니다만, 최근 행동하는 게 예전의 라무와 무척 다릅니다.”
“큰일이군. 멍청한 현신들 같으니, 녹스가 각성한 것 같으면 재깍재깍 알아내서 조치를 취해야 할 것 아냐?”
[천 년 전만 해도 심부름이나 하던 자들이다. 하위신들, 아니 현신들에게는 기대하지 마라.]
베리타스가 그런 말을 했다.
고신들은 그나마 신다운 권능과 지혜를 가지고 있었으나, 현신들은 그렇지가 않다던가. 대부분 짐승 출신이라 그런지 권능은 강해도 지혜롭지는 않다고 했다.
그러니 예전에는 상위신과 하위신으로 불렸겠지.
일단 라무를 목표로 움직이자고 했다.
지금 상태를 정확히 알아내자는 것.
녹스가 깨어나지 않았다면 그것으로 좋다. 이미 녹스가 깨어났다면 현신들에게 증거를 제시하여 현실을 납득시킨다. 아울러 마지막 우환거리를 제거한다.
다른 건 몰라도 녹스만큼은 없애놓고 봐야 했다. 그렇지 않고 방치하면, 녹스가 아르거스를 정복한 후 지구를 공격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가 없었다.
박살난 차원문?
복구하면 그만이다.
지금처럼 개판인 상태라면 모를까, 녹스에 의해 통일된 아르거스라면 별로 어렵지 않겠지.
낫슈바켈이 시혁에게 물었다.
“라무도 임관한 반신이 있지 않느냐? 그 반신의 성역을 공격하면 일이 해결될 것 같다만.”
“이미 계약이 끊어졌습니다. 자기 하나 살겠다고 전장에서 고향으로 바로 돌아갔거든요. 설원 공작은 라무에게 현상금까지 붙여 놓았습니다.”
“이런, 난감하게.”
“우리도 현상금 걸면 되지 않아? 내가 보물을 댈게. 녹스, 이 자식. 잡히기만 하면 잘근잘근 씹어 먹고 말겠어.”
싱트파헬이 눈에서 으스스한 빛을 뿜었다.
베리타스가 원래의 공허 변환 마법을 보여준 다음이었다. 그거라면 변이 없이도 공허 변환이 가능했다. 지금 자신이 돌연변이가 된 게 녹스 때문이라고 하니, 저절로 화가 솟구치는 것이다.
시혁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현상금은 진작 걸었지. 9대 신역 전부에 사자도 파견했어. 그런데 다 허탕이더라.”
어디에 숨은 걸까.
이만하면 종적을 알아낼 법도 한데 전혀 소식이 없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
낫슈바켈이 비스듬하게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너처럼 하는 거 아니냐?”
“나처럼?”
“너도 영웅일 때 변신해서 돌아다니지 않았느냐. 라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지.”
일리가 있다.
전장에서야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야겠지만, 아르거스 행성에서는 얘기가 다르지 않나.
과연 어떤 모습으로 변신했을까?
어둠 진영의 흑마법사가 가장 가능성이 크다. 녹스의 지식 몇 개만 받았어도, 충분히 흑마법사 노릇을 할 테니까.
하지만 이걸 알아냈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낫슈바켈이 그 점을 지적했다.
“아르거스를 돌아다니는 어둠 진영 흑마법사 출신 영웅은 수천 명이 넘을 거다. 그들을 일일이 다 조사하려고?”
“다 방법이 있지요.”
방문주기를 응용하면 된다.
매일 아르거스에 오는 소환자가 흔하겠나.
근두운에 탑승하는 대한민국 소환자들을 제외한다면, 오직 라무만 남는다.
당장 그렇게 했다.
특히 라무가 주로 활동하던 빙설원을 위주로 살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암흑지에도 정보원을 파견했다.
암흑지에서 발견했다.
어둠 지배자.
군주 계급 흑마법사인데 이전에 칭호를 들었다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더구나 고향 세계로 귀화한 후 아르거스 시간으로 8일이 지나면 돌아온다고 했다.
시혁은 쾌재를 불렀다.
정체를 파악한 이상, 잡아들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싱트파헬과 낫슈바켈이 직접 나섰다.
하지만 실패.
충분히 위장을 하고 접근을 해도 라무는 둘의 존재를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즉시 자취를 감추거나 아일리케로 귀환해 버렸다. 영웅들에게 의뢰를 해도, 시혁이 분신 부대를 움직여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한 가지 사실을 확인했다.
멀리서 본 라무.
얼굴이 바뀌어 있었다.
하얗던 피부가 검게, 두 눈동자는 붉게 변했다. 귀는 뾰족해지고, 몸이 전반적으로 가늘어졌다.
베리타스가 그걸 보고 신음을 흘렸다.
[녹스?]
아닌 게 아니라 비슷하긴 했다.
완벽히 각성한 것은 아니다.
낫슈바켈이나 싱트파헬, 둘 중 누구도 당해내지 못했다. 시혁의 분신 몇 명만 접근해도 꽁지가 빠지게 도망을 쳤다. 가끔 부리는 어둠 마법도 녹스의 것에 비하면 확실히 모자랐다.
하지만 그 수준이 빠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녹스의 영혼이 점차 깨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이후에는 라무가 아예 잠적해 버렸다. 새로운 신분으로 돌아다니자, 더 이상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시혁을 경계하여, 활동 자체를 멈춘 것 같았다. 스스로 방문주기까지 조정하는지, 흔적 자체를 찾아볼 수 없었다.
처음에 잡아 족쳤어야 했는데……
베리타스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녹스가 거의 부활했다고 봐야겠다. 네가 말하던 멍청한 마법사가 아니야. 권모술수로 따지면 열다섯 대종사 중에 제일 가던 게 녹스다. 절대 얕보면 안 된다.]
시혁은 녹스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았다.
지금 녹스가 가장 바라는 게 뭘까?
간단하다.
전생의 힘을 되찾는 것이겠지.
그러려면 라무의 영혼을 으깨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뭔가 결정적인 계기가 필요했다.
베리타스가 명쾌한 해답을 내놓았다.
[자고로 힘을 빠르게 키우는 방법은 강한 힘을 가진 육체를 차지하는 거였다. 녹스도 그걸 노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강한 힘을 가진 육체?
아르거스에 그런 게 어디 남아 있나.
대재앙 당시 다 죽고 사라졌을 텐데……
아니지.
하나 있다.
그것도 시혁의 바로 옆에.
시혁은 번개처럼 싱트파헬을 돌아보았다. 싱트파헬은 베리타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아깝다며 이만 우드득우드득 갈고 있었다.
녹스가 괜시 싱트파헬의 알에 새겨진 공허 변환 마법을 변형시킨 게 아니었다.
훗날 이뤄질 자신의 부활을 염두에 둔 것이다.
싱트파헬은 어지간한 반신과 맞먹는 힘을 가지고 있다. 녹스 자신만은 못해도, 그 힘을 다시 닦을 기반을 가지게 되는 셈이다.
아르거스로 불려오는 바람에 계획이 엉클어지기는 했으나, 앞으로의 행보가 여기서 크게 뒤틀어지지는 않을 듯했다.
[싱트파헬……]
“응? 왜 불러?”
싱트파헬은 아무 것도 모르는 기색이다.
낫슈바켈은 얼굴이 창백했다.
한때는 돌연변이라고 배척했지만, 알게 모르게 정이 든 참이다. 게다가 변이된 게 녹스의 음모였다고 하니, 뭐라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본인도 알아야겠지.
시혁은 잠깐 심호흡을 했다.
[녹스가 앞으로 어떻게 할 거라고 생각해?]
“어떻게 하긴? 우리 추격을 피하려고 이리저리 도망다니겠지.”
[그 다음엔?]
“어…… 부활한다고 해서 당장 우릴 공격하진 못하겠지? 내 생각에는 자기 힘을 키울 것 같아. 최소한 나랑 1대 1을 할 정도는 되어야 뭘 해도 할 테니까.”
[그렇지. 그러려면 어느 방법이 가장 좋을까?]
“잘 모르겠어.”
시혁은 싱트파헬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알아들을 수 있게, 천천히 또박또박 힘을 주어 말했다.
[간단해. 다른 존재의 육체를 뺏는 거야.]
“그게 가능해?”
[속성이 비슷하다면 가능하지. 녹스야말로 어둠 대종사이고, 지금 아르거스에 퍼진 공허가 녹스에게서 비롯되었으니까. 그리고 녹스가 육체를 빼앗기 좋은 존재가 딱 하나 있어.]
“그거 참 불쌍한…… 어어?”
이때쯤 되자 둔감한 싱트파헬도 말뜻을 알아들었다.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혁을 한 번 봤다가, 옆에 있는 창백한 얼굴의 낫슈바켈, 기이한 황금빛을 뿌리는 베리타스의 지팡이까지 시선을 한 번 주었다.
곧 의자의 팔걸이를 사정없이 움켜쥐었다.
용의 힘이 발동하면서, 팔걸이가 톱밥 뭉치처럼 박살나 흩어졌다.
싱트파헬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존재가 설마, 나는 아니겠지?”
왜 아니겠나.
시혁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싱트파헬은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후 아랫입술을 깨물자, 몸 전체가 부르르 떨렸다.
“녹스, 이 나쁜 새끼. 몸이 변이된 것도 억울한데 내 몸을 빼앗겠다고? 어디 두고 보자. 내 몸을 어쩌려고 하면, 공허 속의 잡귀로 만들어서 영원히 고통 받게 만들어 줄 테다!”
그러다가 당할 것 같은데?
산전수전 다 겪은 낫슈바켈도 아니고, 싱트파헬은 녹스가 조금만 미끼를 흔들어도 덥석 물 게 분명했다.
꼭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걸 역이용할 수도 있지 않겠나.
함정을 파놓고, 녹스가 싱트파헬에게 접근하게 한다면?
몸을 차지하려 들 때, 역으로 녹스를 봉인하는 거다.
쉽진 않겠다.
녹스는 음모를 잘 꾸미기로 소문난 대종사니까.
잘 고민해봐야겠다.
녹스가 이쪽의 의도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중삼중으로 덫을 깔아야겠지.
시혁은 직접 움직이기로 했다.
낫슈바켈과 싱트파헬은 물론, 베리타스에게도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적을 속이려면 먼저 아군부터 속여야 하는 법이니까.
이때, 한 가지 이변이 일어났다.
100번째 대적자가 탄생했다.
그에 따라 아르거스 행성의 정세가 격변하기 시작했다.
< 녹스 추적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