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 세계의 한의사-233화 (233/250)

< 깨우다 >

베리타스에게 접촉하는 조건은 간단했다.

본인이 베리타스라고 생각하면 된다.

자신이 베리타스임을 강하게 자각할 때, 무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베리타스의 자아에 도달할 수 있다.

처음에 시혁이 베리타스의 기억에 접촉했을 때도 그러지 않았나.

자신을 가로막는 진아(眞我)에게 그랬었지.

내가 곧 베리타스인데, 왜 막는 거냐고.

그 한 마디에 무의식의 공간이 찬연하게 빛났고, 시혁의 영혼을 베리타스가 숨은 곳까지 끌고 내려갔다.

정말이지 쉬운 일 하나 없다.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베리타스라고 생각하다 보면, 시혁의 자아는 사라지고 베리타스의 자아가 그 자리를 차지할 게 뻔했다.

“쯧……”

시혁은 짧게 혀를 찼다.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그건 너무 아쉽다.

베리타스의 마법 지식도 지식이지만, 대재앙 당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알 기회가 아닌가.

불현 듯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최지혜처럼 정신을 복사하거나, 녹스처럼 인공 영혼을 만들면 어떨까?

그것들이 스스로를 베리타스라고 생각하게 만들어, 베리타스의 기억을 하나둘 꺼낸다면?

아니다.

너무 위험하다.

최지혜랑 똑같은 상황을 맞이할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더 치명적일지도 모르고.

계속 생각을 하다가,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왜 베리타스는 이런 조건을 걸었을까?

조건이 성립하려면 자신의 전생을 이미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시혁도 오랜 아르거스 경험 덕에 전생의 정체를 알아냈는데, 아르거스에 오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한참 동안 분석한 끝에, 그 이유를 알아냈다.

시혁의 영혼에 자리 잡은 마법은 단순한 지식 전달 마법이 아니다. 무척 고위의 마법이었다.

조건을 만족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뭔가 골똘히 고민하고 있으면, 저절로 그에 해당되는 지식이 흘러가게 했다. 본인이 느끼기에는 그냥 영감이 팍 하고 떠오르는 것처럼 방향을 지도 받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스스로의 정체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다. 나중에는 시혁처럼 영혼 파장을 분석하든, 자신의 무의식 속으로 침잠하든 전생에 대해 알아차린다.

시혁이 베리타스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뜻.

아르거스에 오지 않았어도 상관없었다. 결국은 같은 길을 밟았을 것이다.

여기까지 알아내자, 소름이 확 끼쳤다.

“베리타스, 대체……”

경계심이 강하게 들었다.

한 가지 더.

의식적으로 지식을 꺼내 쓰지 않아도 결과는 같았다. 무의식은 광대한 영역이고, 그 안에 위치한 베리타스의 지식은 결국 시혁에게 조금씩 영향을 끼친다. 가랑비에 옷 젖듯, 시혁의 영혼이 베리타스의 색채로 점차 물든다는

얘기다.

입을 앙다문 채 생각을 했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베리타스의 자아를 도려내야 한다.

지금 상황은 시한폭탄을 품은 것과 같았다. 언젠가 베리타스가 깨어날 테고, 시혁을 잡아먹고 말겠지.

방법은 있다.

단, 무척 위험했다.

최지혜를 파멸시킨 방법을 역이용하는 거다. 최지혜는 비록 모든 것을 잃었지만, 죽음 왕좌를 자신에게서 떨쳐내는 것에 성공했으니까.

시혁을 보호할 인공 영혼을 만든다. 그걸로 베리타스의 지식을 뽑아낸다. 그 다음 베리타스가 각성할 때, 인공 영혼과 함께 새로운 몸을 줘 버린다.

어렵다.

한 끗만 빗나가도 자살 행위가 될 테니까.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앞이 막막하지만, 여기서 망설이면 성공 확률이 더 낮아질 뿐이다. 기필코 성공시켜야 했다.

지금까지 한동안 평탄한 인생을 살았으니, 그 위험을 몰아서 받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차원 이동.

이미 준비가 거의 끝난 상태다. 충전도 지구 시간으로 1주일이면 끝날 터였다. 그 안에 모든 일을 끝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구에 가서 하면 되지 않느냐고?

반신인 지금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힘이 제한되는 지구에서 시도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좀 늦춰야겠다.

핑계야 얼마든지 있으니까.

잠시 쉰 후, 인공 영혼의 제작에 들어갔다.

예전에도 한 번 만들어 본 적이 있었지.

최지혜를 지구로 소환할 때.

그 정도로는 모자랐다. 그때 만든 인공 영혼이라고 해봐야, 아주 조악해서 한낱 귀신만도 못했으니까.

그런 걸 들이밀어 봐야 꿈쩍도 않겠지.

저번에 검사했던 라무의 영혼을 참고했다.

심연의 힘을 응용하면 불완전한 인공 영혼의 완성도를 확 끌어올릴 수 있다.

너무 위험했다. 심연의 힘 대신, 다른 힘을 찾았다.

영혼 진영의 힘.

그리고 시혁 본인의 이적, 영령.

인공 영혼을 만들어 영혼 진영의 힘을 충분히 주입한다. 그리고 영령 이적을 쓰면 자연스럽게 영혼의 힘이 강화된다. 영령 이적을 주기적으로 써줘야 하는 단점이 있지만, 거의 완벽에 가까운 인공 영혼이 탄생하는 것이다.

유령 여왕의 창은 의식적으로 쓰지 않았다. 이게 아니더라도 제작이 가능한데, 굳이 변수를 늘릴 이유가 없지 않나.

이렇게 할 경우 한 가지 장점이 있었다.

영령 이적이 필수적이라는 것.

이걸 받지 못하면 영혼의 결속이 점차 해체된다. 훗날 문제가 생겨도 영령 이적을 쓰지 않는 것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영령 이적의 역이적을 개발하면 더 좋고.

시혁은 성지를 벗어났다.

인공 영혼을 만들려면 몇 가지 물건이 필요했다. 마법도에서 영혼 진영 반신의 생산품을 사오는 게 좋겠다.

“일은 잘 됐어?”

시혁의 존재감을 느꼈는지, 싱트파헬이 팔랑거리며 날아왔다.

실라가 싱트파헬에게 업힌 채 곤히 자고 있었다.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잘 됐다. 방법을 찾았어.]

“다행이다!”

할 말이 있는 걸까?

싱트파헬이 시혁이 있는 곳 주변을 맴돌았다.

넌지시 물어보았다.

[무슨 일 있어? 할 말 있으면 해.]

“그게…… 네 영혼 안에 마법 지식이랑 기억이 다 있다고 했지?”

[그래, 맞아.]

“혹시 싱트레아에 대한 기억이 있으면 나한테도 보여주지 않을래? 말은 많이 들었지만 어떤 용인가 궁금해서……”

싱트파헬이 짐짓 딴청을 부리며 말했다.

시혁은 피식 웃었다.

[좋아. 싱트레아에 대한 기억이 있으면 저장해서 너한테 줄게. 마법 수정구 같은 거 하나 줘. 그런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기억을 탐색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

“고마워! 얼마든지 기다릴게!”

싱트파헬이 신바람을 냈다.

자고 있던 실라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싱트파헬을 뒤에서 한 번 보더니, 고개를 갸웃하곤 금방 다시 잠이 들었다.

그런 싱트파헬을 보니 마음이 좀 짠했다.

낫슈바켈에게도 말해서 싱트레아에 대한 기록이나 기억이 있으면 싱트파헬에게 달라고 해야겠다. 둘의 사이가 썩 좋지는 않으니, 싱트파헬이 직접 말하기는 좀 그렇겠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마법도에 파견한 분신을 통해 시장과 경매장을 돌아다녔다.

필요한 물건을 구입했다.

영혼석, 혼백 봉인의 가루, 유령 등불, 영력의 수정 등등.

하나같이 최종 확장을 마친 영혼 진영의 반신이 만든 거였다. 비싼 값을 치렀지만, 그 만한 가치는 톡톡히 하겠지.

몇 명의 영웅들이 물건을 가지고 시혁의 성역에 방문했다.

바로 인공 영혼 제작에 들어갔다.

혼백 봉인의 가루로 마법진을 그렸다. 영력의 수정을 요소요소에 박았다. 유령 등불을 깨뜨려 힘을 증폭하고, 영혼석을 중앙에 배치한 후 영령 이적을 썼다.

순조로웠다.

최지혜를 소환하기 위해 만들었던 조악한 인공 영혼이 아닌, 어엿한 하나의 영혼이 완성되었다.

영혼석이 순수한 백색 빛을 뿌렸다.

이제 됐다.

이걸 시혁의 무의식 안으로 접속시키기만 하면 된다.

설령 베리타스가 인공 영혼을 장악하더라도, 영혼석에 갇히는 신세가 될 터.

그래도 방심하지는 않았다.

몇 가지 안전장치를 더 만들었다.

그런 다음, 인공 영혼을 시혁의 것처럼 개조했다. 시혁의 영혼 파장을 인공 영혼에 덧씌운 것이다.

한 가지 의념을 주입했다.

[나는 베리타스다.]

이것으로 준비는 끝.

안전장치를 다시 한 번 점검한 후, 영혼석에 손을 뻗었다.

그걸 두 손으로 쥔 채 편하게 앉았다. 각종 기구들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의 무의식에 침잠해 들어갔다.

아득히 넓은 공간이 펼쳐졌다.

저 아래, 오색으로 빛나는 시혁이 보였다.

가볍게 손을 떨쳤다.

흰색 인공 영혼이 시혁의 손을 떠났다. 오색으로 빛나는 시혁의 앞을 맴돌자, 오색 시혁이 몸을 움찔했다. 곧 찬란한 빛이 터지며 인공 영혼을 집어삼켰다.

성공.

시혁은 즉시 무의식의 바다 밖으로 부상했다.

소환한 기구들을 통해 인공 영혼의 상태를 추적했다.

원래는 순일한 백색이던 인공 영혼이다.

그 색깔이 바뀌고 있었다.

다름 아닌 음울한 황금색, 시혁의 내부에 있는 베리타스의 자아의 색깔로.

한 번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진행된 다음, 변화가 멈췄다.

시혁은 인공 영혼을 영혼석으로 되돌렸다.

내부를 확인했다.

상당히 많은 마법 지식이 들어 있었다. 예전에 낫슈바켈에게 전수 받은 지식보다 최소 몇 등급은 우위에 있었다.

바로 다음으로 진행하려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서두를 것 없지.’

천천히, 신중하게 해야 한다.

그나마 베리타스의 자아가 잠들어 있는 상태니 시혁이 뭘 하는 게 가능했다. 만약 깨어 있었다면 시혁이 호되게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영혼석에 깃든 지식을 뽑아냈다.

간접적인 방법을 동원했다. 당연히 이 지식을 시혁이 익혀도 문제가 안 된다. 직접 전달 받는 것만은 못해도, 베리타스의 손길이 미치지 않게 하는 게 더 중요하니까.

몇 번이나 반복했다.

베리타스의 지식은 넓고도 깊었다. 세계 지식 열람보다 더 뛰어날 정도였다. 자연히 시간이 오래 걸렸다.

성지에서 인공 영혼으로 베리타스의 지식을 빼오고, 전장에서 틈틈이 그걸 공부하고……

한동안 정체되어 있던 시혁의 마법 실력이 쑥쑥 자라났다.

지구 시간으로 한 달이 지났을 무렵, 베리타스의 모든 지식을 수습하는데 성공했다.

물론 시혁이 베리타스와 같은 수준이 된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머리에 박아놓은 것에 불과했다. 그걸 소화시키는 과정도 필요하고, 구현할 마나도 쌓아야 했다.

다만 하늘마루를 이용한다면 얘기가 달랐다.

미리 저장해 놓고 하늘마루가 구현하게 하면 될 것 아닌가. 하늘마루에 탄 상태라면, 유성을 부르고 정령의 군세를 생성하는 일도 가능했다.

시혁은 차가운 눈으로 자신의 영혼 속에 숨은 황금색 빛을 노려보았다.

마지막 단계만 남았다.

베리타스의 기억을 엿보는 것도 자아를 뽑아낸 다음에나 가능할 터.

인공 영혼을 진입시켰다.

잠시 후, 인공 영혼이 완전히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진리 진영의 색과 비슷하나, 이상하게도 음울한 느낌이 드는 그것.

영혼석이 달그락대며 진동했다.

시혁은 자신의 영혼에서 황금색 빛이 완벽히 사라진 것을 감지했다. 설계한 대로, 베리타스의 자아가 인공 영혼을 점령한 것이다.

인공 영혼을 되돌렸다.

그 즉시, 영혼석이 화산재처럼 퇴색한 금색의 빛을 뿜기 시작했다. 덜그럭거리는 게 더 심해져서, 영혼석이 어디론가 튀어나갈 성 싶었다.

간단히 해결했다.

영령 이적을 썼다.

시혁이 설치해둔 안전장치들이 작동했다. 영혼과 영혼석의 결속을 견고하게 만들었다. 영령 이적까지 동원되자,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영혼의 그물이 완성되었다.

영혼석이 덜그럭대던 게 멈췄다.

다만 주기적으로 황금색 빛만 깜빡였다.

시혁은 자세히 영혼석을 살폈다.

감지되는 영혼 파장이 천천히 꿈틀대고 있었다.

그 의미는 아주 명백하다.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베리타스.]

반응이 없다.

다시 이름을 불렀다.

[베리타스.]

몇 번이나 반복한 끝에 대답이 돌아왔다.

[……누구냐?]

잔뜩 지친 노인의 목소리.

천 년의 시공을 넘어, 진리 대종사 베리타스가 깨어난 것이다.

< 깨우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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