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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 세계의 한의사-232화 (232/250)

< 준비 >

많은 사실을 털어놓았다.

최지혜도 현 상황을 제대로 알아야 도움이 될 테니까.

그 중에는 시혁 자신이 베리타스의 후생이라는 것도 있었다.

최지혜는 놀라워하면서도 납득했다. 그러면서 시혁의 영혼을 연구하게 해달라고 졸라서, 겨우 진정시켰다.

사실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고심 끝에 수락을 했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시혁이 최지혜의 목줄을 쥔 형국이니까.

최지혜가 신바람을 냈다.

온갖 신기한 영혼 탐색 기구를 만들었다. 아르거스에서도 보기 힘든 물건들이었다. 그 동안 좀 얼굴을 못 봤더니, 어느새 이런 걸 만들고 있었나 보다.

“자, 여기 누워.”

시혁은 최지혜가 가리킨 침대에 누웠다.

침대가 진동을 했다.

원통형 관이 천천히 내려왔다. 그게 시혁의 머리는 물론이고 몸까지 온통 감쌌다.

꼭 MRI 기계에 들어온 듯했다.

기계는 시혁의 정신과 영혼을 정밀하게 조사했다. 그 결과를 시각화하여 대형 모니터에 쏴주었다.

최지혜가 모니터를 살피다가 말했다.

“여기 있네.”

“뭐가?”

“잠깐만 기다려 봐. 보여줄게.”

최지혜가 키보드를 두드렸다.

시혁의 눈에 빛 정보가 입력되었다.

최지혜가 보는 화면을, 시혁에게 공유해준 것이다.

검은 원이 나타났다.

오색으로 빛나는 별이 떠도는 밤하늘 같았다.

아래쪽 부분에 황금색 안개가 흐리게 어려 있었다. 특히 가장 아래쪽에는 또렷한 황금색 점이 찍혔다.

최지혜는 바로 그 황금색 점을 가리켰다.

“여기 황금색 점 보이지? 이게 베리타스의 영혼이야. 아니, 자아라고 봐야 더 맞겠네.”

“영혼이 아니라 자아라고?”

“그래. 네가 생각했던 것처럼 인공 영혼을 만든 게 아냐. 그냥 자기 자아를 씨앗처럼 응축해서 깊이 숨겨둔 거지. 너 조심해야겠다. 베리타스가 언제 각성해서 네 영혼을 차지할지 몰라.”

“끄응, 산 넘어 산이네.”

“오색으로 빛나는 널 봤다고 했지? 그건 아마 네 무의식일 거야. 널 가로막으려고 했다는 걸 봐선 베리타스의 기억을 엿보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일 수도 있어.”

“그럴 것 같았어.”

“잘못하면 너도 나랑 똑같은 실수를 저지를지도 몰라. 최소한 베리타스의 자아가 네 영혼을 차지하지 못하게 대책은 세워두고 탐구해야 돼.”

“네 말이 맞아.”

시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편해졌다.

아르거스의 신들이 라무를 두고 이상한 소리를 해서 시혁의 추론이 빗나간 모양이다.

최지혜는 한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

“라무의 영혼은 네가 생각한 게 맞을지도 몰라. 걔는 녹스의 후생이라며? 내가 알기로 베리타스와 녹스는 그 성향이 매우 달라. 베리타스는 오직 효율만을 중시한다면, 녹스는 증오와 분노를 기저에 깔고 움직이잖아. 녹스라

면 정말로 인공 영혼을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어.”

“일단 내가 따온 라무의 영혼 특질을 분석해 보자. 직접 데려다 분석하는 것만은 못해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을 거야.”

결론이 나왔다.

라무는 일종의 복제 영혼이었다.

녹스의 영혼을 기본으로 하고, 모자란 부분은 심연의 힘으로 채웠다. 워낙 고도의 마법 지식이 동원되어 겉보기에는 별 이상이 없으나, 치명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운명이 제한된다.

반드시 노예나 그에 준하는 신분으로 태어나고,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한다.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되며, 청년기에 이르러 영혼에 각인된 심연의 힘을 자각한다.

그 다음 마음껏 폭주하다가, 저절로 영혼이 무너져 강력한 힘이 발생한다. 그 힘에 의해 녹스가 깨어나고, 단번에 상당한 수준의 마법사로 올라선다.

생전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고, 반신만도 못한 힘이지만 어쨌든.

시혁은 어째서 라무가 심연의 힘을 깨닫지 못했는지 눈치 챘다.

영혼 진영의 힘 때문이다.

모자란 라무의 영혼을 이 힘이 보충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아직까지 본인의 의지를 유지했다.

하지만 붕괴는 시간문제일 뿐이다.

결국 라무의 영혼은 소멸하고, 녹스는 온전한 상태로 부활하게 된다.

그런 말을 하자, 최지혜는 콧방귀를 뀌었다.

“너는 네 영혼이나 잘 간수해. 날 끈 떨어진 뒤옹박 신세로 만들지 말고.”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어?”

“책에서 배웠지. 어감이 재미있어서 외워 뒀어.”

어쨌든 좋다.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지 않나.

아르거스로 들어왔다.

이번에 시혁이 찾을 자는 다름 아닌 싱트파헬.

그나마 베리타스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는 존재니까.

다만 무턱대고 찾아가지는 않았다.

싱트파헬은 베리타스를 자기 아버지 격으로 생각한다.

시혁의 영혼 안에 베리타스의 자아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 도리어 베리타스를 부활시키려고 할 가능성이 존재했다.

어떻게 해야 베리타스 각성의 조건만 알아낼 수 있을까.

우선 낫슈바켈과 상담을 했다.

낫슈바켈이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베리타스가 네 안에 있다고?”

“예. 특정한 조건을 만족하면 깨어나는 것 같습니다.”

“이상한 일이군. 베리타스는 죽으면 죽은가 보다 하지, 굳이 부활을 택할 자가 아닌데?”

“뭐 연구하고 싶은 거라도 있었나 보지요.”

“죽음 지혜처럼 말이냐? 아냐. 그 언데드와는 달라. 베리타스는 옹고집에 이기주의자고, 편집증적인 성격이었지만 세상사에 초탈한 면모가 있었지. 본인의 자아를 봉인한 것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거다.”

이상한 일이다.

시혁이 무의식 속에서 느꼈던 베리타스의 영혼에서는 그런 분위기가 풍기지 않았다. 오히려 음침하고 암울한 느낌이 드는 게, 충분히 음모를 꾸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까지 이야기하자 낫슈바켈이 알 수 없는 일이라고 고개를 흔들었다.

“대재앙으로 변화가 있었던 걸까?”

“모르겠습니다. 일단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고 움직이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야겠다. 그리고 싱트파헬에게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게 좋겠다. 아니면 아예 말을 하지 않던가. 나는 좀 둔감하다만, 싱트파헬은 상대가 뭘 숨기고 있으면 금방 눈치 챈다.”

공허에 의해 변형되었지만, 싱트파헬은 원래 황금용이다. 황금용은 공통적으로 진실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게 지금도 발휘되는 모양이었다.

정면으로 돌파를 해야 한다는 것.

시혁은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그런 다음 싱트파헬을 불러 얘기를 나눴다.

싱트파헬은 소파에 비스듬하게 누운 채 다리를 까딱였다.

“할 말이라는 게 뭐야?”

시혁은 저간의 상황을 설명했다.

처음에는 시큰둥한 얼굴이더니, 싱트파헬이 어느 순간부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는 꼰 다리도 풀고 상체를 시혁에게 기울인 채 이야기를 들었다.

설명이 끝나자, 싱트파헬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네가 내 친구이면서 내 아빠인 거야?”

응?

도대체 어떻게 이해를 해야 저런 반응이 나오지?

시혁은 머리를 흔들었다.

“난 베리타스와는 다른 사람이야. 저번에도 말 했잖아. 베리타스는 자기 자아와 기억을 봉인해서 내 영혼 깊숙이 숨겨뒀어. 나는 그게 베리타스가 부활하려고 그런 건 줄 알았는데, 낫슈바켈은 의견이 다르더라.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하던데.”

“흐응. 그래서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내 안에 숨은 베리타스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 그래야 무슨 일이 있어도 대처할 수 있을 테니까.”

“몸을 내주기 싫은가 봐?”

싱트파헬은 금방 맥을 짚었다.

시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소리 아닌가.

아무리 전생의 자신이 대단했다 해도, 현생에서 이룩한 것을 송두리째 넘겨주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나.

싱트파헬은 몸을 좌우로 흔들며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싱트파헬이 실쭉 웃었다.

“좋아! 그렇게 해. 나도 네가 이상하게 변하는 건 싫어. 아빠라고 해도 나한테 공허 변환 마법을 걸어준 것 말고는 뭐 없었고…… 그런데 내가 널 어떻게 도와줘야 돼?”

일단 베리타스가 남겼던 모든 유산을 넘겨달라고 했다.

보물만 빼고.

싱트파헬에게도 어려운 얘기는 아니었다. 공허 변환 등 핵심 마법은 이미 시혁에게 다 가르쳐 줬으니까.

분신을 기동시켜 싱트파헬의 둥지를 방문했다.

깨끗해졌다.

예전에는 보물과 잡동사니가 마구 뒤섞여 있었으나, 이젠 구획을 나누고 종류 별로 모아두었다. 등급 별로 분류가 되어 있어 찾아보기도 쉬웠다.

일꾼들도 돌아다녔다.

골렘들.

시혁의 분신을 본 따 만든 거였다. 공허 변환 마법이 새겨져 공허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많이 좋아졌네.”

“그렇지? 정리해 놓고 보니까 좋긴 좋더라. 자, 이쪽으로 와. 내가 모아둔 걸 보여줄게.”

싱트파헬이 모은 것 중에는 검이나 갑옷 같은 보물만 있는 게 아니었다. 대재앙 이전의 마법서도 많았다.

비록 대부분이 손상되어 있지만, 하나같이 귀중한 지식을 품고 있었다. 이것만 살펴봐도 시혁의 마법 실력이 한 단계 성장할 것이다.

하지만 시혁이 원하는 것은 이런 게 아니었다.

“베리타스와 관련된 건 없어? 그런 게 필요한데.”

“베리타스는 뭘 남긴 게 없어서…… 아, 내 알이라도 보여줄까?”

“알?”

“응. 베리타스는 내 알 껍데기에 공허 변환 마법이랑 여러 마법을 새겼거든. 고등한 마법인 것 같아서, 알을 보관해 뒀어.”

알은 둥지 가장 깊은 곳에 있었다.

싱트파헬이 태어났던 곳이다.

지금은 몸이 커져서 잘 머무르지 않았다. 인간 형태로 변신한 다음에나 들어가곤 했다.

싱트파헬이 간단한 주문을 외웠다.

환영 벽이 사라지며, 그 안에 있던 알이 드러났다.

두 조각으로 갈라진 상태.

까맣다.

싱트파헬의 본체 색깔과 같았다. 그런 가운데, 알 표면에서 흐릿한 어둠 같은 게 뿜어지고 있었다.

어둠은 기하학적인 무늬와 신비로운 글자, 문양을 형성했다. 천 년도 전에 걸었을 마법이,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공허 변환 마법이다.

마법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외에 온도 유지, 압력 유지, 마나 성분 조절 등 자질구레한 마법이 보였고.

별 것 없네, 싶은 순간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 챘다.

이 작은 둥지 안에 다른 마법들이 추가로 걸려 있었다.

지식 전달 마법이다.

공허 속에서 생존하기 위한 갖가지 지식과 마법을 전달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싱트레아의 지식까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시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일반적인 지식 전달 마법과는 다르다.

대개의 마법은 전달하고자 하는 지식을 무작위로 쭈욱 주입한다. 전달 받은 자가 나중에 곱씹어 소화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시혁이 예전에 낫슈바켈에게 받았던 게 딱 그랬다.

이건 달랐다. 미리 지식이 계통별, 항목별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리고 특정 조건이 만족되면 저절로 개방된다.

불과 얼마 전에 겪어본 마법이다.

다름 아닌 시혁 본인의 무의식 속에서.

검은 공간에 떠돌던 황금빛 지식들. 그게 이 마법을 응용한 게 분명했다.

마법진을 더 자세히 살폈다.

조건은 세세하게 걸려 있었다.

알 속에서 첫 비늘이 생성되었을 때, 자아가 생겼을 때, 알이 갈라졌을 때, 처음 음식을 먹었을 때, 100살이 되었을 때 등등.

싱트파헬이 걱정스런 눈으로 시혁을 보았다.

“알아낸 거 있어? 난 봐도 잘 모르겠던데.”

“실마리는 찾았어. 이걸 가지고 잘 연구해 봐야지.”

“그래? 다행이다.”

마법을 기억한 채 성지로 돌아왔다.

이미 확신을 가졌다.

어떻게 해야 베리타스의 자아에 접근할지.

위험한 게 문제.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고, 시혁은 성지에 틀어박혔다.

목표는 하나.

베리타스에게 도달하는 것이다.

< 준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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