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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 세계의 한의사-231화 (231/250)

< 유령 여왕의 창 >

투명한 창이다.

회색으로, 건너편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창날과 창대가 연결된 부위는 무지갯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영롱한 빛이 사람들의 시선을 잔뜩 사로잡았다.

겉보기에는 예쁘지만, 실은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무기다.

기본적으로 영혼 속성의 마법을 강화시킨다.

또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속성의 힘을 빨아들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힘을 응축시켜 일점에 터뜨리는 게 특기였다. 방금 전 전투에서도, 시혁의 영웅 하나가 그렇게 터뜨려 증폭시킨 마법에 당해 죽었다.

이런 건 아무래도 좋다.

핵심은 공허 변환 마법이다.

어떤 속성의 힘도 빨아들이지만, 공허가 그 대상일 때 더 효과적으로 작용한다는 뜻.

이게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가면 갈수록 의심이 커졌다. 제베가 남긴 말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백색 현왕, 뭐해?”

창을 연구 중인데, 싱트파헬이 성지 안으로 들어왔다.

가만히 창을 내밀었다.

“마침 잘 왔다. 이거 한 번 봐라.”

“뭔데? 이야, 예쁜 창이네.”

싱트파헬이 창을 요리조리 살폈다.

그러다가 몸을 멈칫했다.

알아본 것이다.

무지갯빛 화려한 빛 뒤에, 공허 변환 마법이 숨어 있다는 것을.

다시 창을 천천히 감상하더니, 시혁을 보고 실쭉 웃었다.

“창 잘 만들었네. 그런데 왜 하필 영혼 속성 강화 마법을 건 거야? 차라리 네가 잘 쓰는 오행 순환체를 집어넣지.”

시혁이 만든 건 줄 알았나 보다.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이거 내가 만든 거 아냐. 어제 전장에서 라무가 쓰던 걸 빼앗아 온 거야.”

“라무? 네 대적자 아냐?”

“맞아.”

“뭐야? 네가 만든 게 아니면, 왜 내 공허 변환 마법이 여기에 있어?”

싱트파헬이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시혁도 그게 의문이었다.

그나마 털어놓고 얘기할 존재는 싱트파헬이나 낫슈바켈 밖에 없지.

일단 싱트파헬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쭉 얘기했다.

제베와 시혁 둘이서만 대화를 해서 싱트파헬은 몰랐던 이야기다. 공허 변환을 쓰는 것도 숨어 있느라 보지 못했고.

싱트파헬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그러게. 싱트파헬, 네 알에 보호 마법을 새긴 건 베리타스가 확실하지?”

“응, 맞아. 그건 왜?”

“혹시 녹스가 너한테 공허 변환 마법을 가르쳐 준 건 아닐까 생각이 들어서.”

싱트파헬이 헛웃음을 지었다.

강력히 부인했다.

자신에게 전달된 각종 지식이나 기억을 볼 때, 녹스가 손을 댔을 확률은 희박하다는 것이다.

싱트파헬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래도 시혁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의구심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확인할 방법이 없을까?

방법은 있다.

분신 한 기를 짝니와 함께 천상도로 보냈다.

반신이 되고 난 이후로는 처음.

대적자가 되는 것을 거절했더니 다들 냉담한 태도를 보였었지. 시혁도 아쉬울 게 없어서 발길을 끊었다.

신전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라크라가 시혁을 맞이했다.

[여긴 왜 왔어? 요즘 잘 나간다던데?]

쌀쌀맞은 태도다.

시혁은 허공에 손을 가리켰다. 손끝에서 옅은 광선이 뿜어졌다. 광선이 뭉쳐 어떤 장소에 위치한 한 물건을 그렸다.

백색으로 가득 찬 한 성지.

회색의 투명한 창이 도드라져 나타났다.

라크라는 심드렁한 얼굴로 창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몸을 꽈배기처럼 뒤틀 정도로 크게 놀랐다.

[뭐야! 그거 유령 여왕의 창이잖아?]

창의 이름인가 보다.

시혁은 짝니에서 내려와 편히 앉았다. 근처 기둥에 기댄 채 슬슬 입을 열었다.

[이 창이 유령 여왕의 창인가 보지? 어제 내 대적자를 쓰러뜨리고 얻었다. 재미 있는 기능을 가졌던데?]

[돌려줘!]

라크라가 돌진했다.

무직갯빛 섬광이 터졌다.

하지만 시혁은 느긋하기만 했다.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까.

“크앙!”

짝니가 반응했다.

번개처럼 몸을 일으켰다. 돌진해 오는 라크라를 역으로 덮쳤다. 목덜미를 깨물고, 몸을 회전시켜 라크라를 바닥에다가 패대기쳤다.

이어 전신으로 라크라를 찍어 눌렀다. 빛의 발톱이 위협하듯 주위에서 번뜩이자, 라크라가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었다.

시혁은 혀를 찼다.

[그러게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대야지 무턱대고 질러놓고 보면 어떻게 하니?]

라크라가 이를 갈았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짝니가 목덜미에 이를 들이댔다. 오색 송곳니가 찬연히 자라나자, 라크라가 눈을 꾹 감았다.

짝니가 시혁을 보며 물었다.

[이놈, 먹어도 되오?]

[머, 먹지 마! 나 맛없어!]

[배고프오.]

시혁은 손을 저어 짝니를 내려오게 했다.

짝니는 아쉽다는 눈빛을 보냈다. 꺼끌꺼끌한 혀로 라크라의 목을 한 차례 훑자, 라크라가 거의 경기를 일으키다시피 했다.

시혁은 라크라의 눈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라크라가 겨우 일어났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사시나무 떨 듯 떨리고 있었다.

무시하고 물었다.

[이 창, 대적자 전용 무기 맞지?]

대답이 없다.

가볍게 손짓을 했다.

짝니가 으르렁대며 일어나자, 라크라가 기겁하며 대답했다.

[맞아, 맞다고! 다 알고 왔잖아! 알고 있으면서 왜 날 괴롭히는 거야?]

라크라가 하소연하듯이 말했다.

[그럴 것 같았다. 이런 건 몇 개나 있지?]

[내가 대답할 것 같아? 차라리 죽여! 무지개 천마의 긍지를 걸고, 억압에 굴하지 않겠어!]

글쎄, 다리가 벌벌 떨리는 것을 봐선 긍지 같은 건 있어 보이지 않는다만.

시혁은 잠깐 머리를 굴렸다.

지나치게 압박하는 건 좋지 않을 것 같다.

아무리 하늘마루가 강해도, 현신 여럿을 동시에 상대하기는 힘드니까.

100 현신들은 신위 경쟁을 유지하느라 힘을 쏟고 있다. 따라서 여럿이 동시에 움직이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니, 시혁도 적당히 하는 게 좋았다.

살짝 미끼를 던졌다.

[이 창, 돌려줄 수도 있어.]

[응? 진짜?]

라크라가 미끼를 덥석 물었다.

시혁은 느긋하게 말했다.

[창이 좋긴 한데, 나한테는 그렇게 쓸모 있는 물건이 아냐. 속성 상으로 별로 안 어울려. 차라리 내가 직접 만드는 게 좋지.]

[네가 직접 만들어봐야 신성이 깃들지는 않…… 아차.]

라크라가 입을 다물었다.

신성?

짚이는 게 있었다.

현신들이 직접 만든 모양이다.

그럼 방금 전 시혁이 했던 질문의 답이 나온다.

[대적자 전용 무기는 총 100개가 있나 보지?]

정곡을 찔렀다.

라크라의 눈이 흔들렸다.

시혁은 손을 휘저었다. 그에 따라 허공에 그려진 그림이 파도치듯 일렁였다.

[뭐, 100개 중에 1개면 없어도 되겠네. 그렇지?]

[안 돼!]

라크라가 비명을 질렀다.

[하나라도 빠지면 안 돼! 파괴신에게 맞설 수가 없단 말이야!]

시혁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이런 멍텅구리 같으니라고.

애초에 시혁은 대적자의 존재 이유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신위 경쟁의 종료를 늦추는 게 다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드디어 현실로 드러난 것이다.

파괴신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뻔했다.

죽음 왕좌가 탄생할 때 봤었지.

24 고신이 한데 뭉쳐 탄생한 기괴한 존재.

그걸 두고 말하는 게 분명했다. 다가올 재앙을 대비하여, 현신들이 육성한 신의 전사들이 바로 대적자였다.

[좋아, 어쨌든 나는 이 창을 너희에게 돌려줄 용의가 있어. 하지만 공짜로 줄 수는 없지. 대가를 제시하도록 해.]

[대가? 그냥 주는 거 아니었어?]

[무슨 소리야? 난 제베가 공격해 오는 바람에 적잖이 피해를 입었다고! 그런데 그냥 줄 줄 알았어? 말도 안 되는 소리! 더 이상한 소리 하지 마. 그럼 확 이 창을 차원의 틈에 빠뜨려 버린다?]

[아, 안 돼! 그러지 마!]

라크라를 닦달하고, 을러대며 대화를 했지만 소득은 없었다. 심지어 공허 변환에 대해서도 모르는 눈치였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을 때, 라크라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올빼미 신 자일과 직접 얘기를 해보는 게 어떠냐는 것.

현신 중에서는 그나마 연락이 닿는 자였다. 나머지는 신위 경쟁을 유지하느라 온 정신을 쏟고 있다나.

금방 수락했다.

짝니는 신전에 남겨두고, 혼자만 선택의 탑으로 갔다.

반신이 될 때 방문한 적이 있는 공간.

올빼미 신, 자일이 시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놀라운 일을 해냈더구나.]

시혁은 그저 씩 웃었다.

본인에게는 별로 놀랄 일이 아니었으니까.

자일이 날개를 가볍게 퍼덕였다.

[네게는 면목 없는 일이다만, 부디 유령 여왕의 창을 우리에게 돌려주었으면 한다.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다. 그게 없으면, 아르거스 행성은 결국 멸망하고 말아.]

[조건이 맞으면 못 돌려드릴 일도 없지요. 대신 제 질문에 성실하게 답해 주셨으면 합니다.]

[좋다. 무엇이든 물어보아라.]

물어볼 것은 산더미 같다.

머릿속에서 한 차례 정리한 후, 차례차례 질문을 던졌다.

[유령 여왕의 창을 보니 공허 변환 마법이 숨겨져 있던데, 그건 누구에게 배운 겁니까?]

[녹스다. 공허 변환 마법은 녹스가 만들었으니까.]

시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베리타스가 아니라 녹스?

싱트파헬 얘기는 굳이 꺼내지 않았다. 어쨌든 현신들은 잠재적인 적이니, 정보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녹스는 아닐 거고, 천 년 전에 배운 겁니까?]

[그렇다. 고신들과 대종사들이 격돌한 후, 녹스가 치명상을 입은 채 우리를 찾아왔지. 그때 전수 받았다. 다만 공허의 침식을 막지는 못하는 마법이어서 본격적으로 쓰지는 않았지. 파괴신에게는 즉효약이니 그걸 이용한 무

구만 만들었다.]

[천 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나도 모른다. 현신들 다 그렇지. 당시의 우리는 고신들의 심부름꾼에 불과했으니까. 중요한 일은 고신들이 다 했다. 고신들과 대종사들이 맞붙은 것도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야 알았다.]

자일이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시혁은 화제를 돌렸다.

[라무가 녹스의 후생이라는 것은 아시지요?]

[알다마다.]

[녹스를 어째서 대적자로 맞아들인 겁니까? 제가 알기로, 지금 이 사태에는 녹스의 책임도 어느 정도 있는 것 같습니다만.]

자일의 대답은 간단했다.

[라무는 녹스가 아니니까. 전생이나 후생, 이런 건 의미 없다. 둘은 서로 다른 사람이 아니냐?]

하긴 그렇다.

시혁이 베리타스가 아닌 것처럼, 라무는 녹스가 아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라무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와, 영혼 관찰 당시 보였던 장면이 그러했다.

지금의 라무가 과연 라무이긴 할까?

어쩌면 이미, 녹스가 깨어나 활동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자꾸 들었다.

의견을 말했으나 씨알도 안 먹혔다. 자기들끼리 이미 검증을 끝냈다고 하는데, 믿음이 가질 않았다.

정말 녹스가 부활을 했다면, 현신들을 속아 넘기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테니까.

유령 여왕의 창은 차차 돌려주기로 했다.

모처럼 주도권을 쥐었으니 좀 써먹어 봐야지. 지나치게 무리한 요구를 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돌려줄 생각도 없었다. 현신들이야 그렇다 치고, 라무의 무력이 강화되는 일이니까.

자일이 조바심을 냈다.

[100 대적자가 모이는 게 머지않았다. 최대한 빨리 돌려다오. 그래야 라무가 창에 익숙해지고, 제대로 된 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알겠습니다.]

대가로 막대한 보물을 받았다.

아울러 더 이상 현신들이 공격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아냈다.

라무와 대면하게 해달라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앙갚음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걸 봐서는, 현신들이 라무를 철썩 같이 믿는 듯했다.

밀어붙여 볼까?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대안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성역으로 돌아왔다.

유령 여왕의 창을 보다가, 더 이상 베리타스의 자아와 접촉하는 걸 늦춰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턱대고 접촉할 수는 없다.

안전장치를 마련하든, 살짝 우회하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 첫 단계로, 지구에서 최지혜의 의견을 구했다.

< 유령 여왕의 창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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