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 세계의 한의사-229화 (229/250)

< 담화 >

라무를 성지에 들였다.

어째 기분이 좋아 보였다.

성지에 들어오자마자 들뜬 얼굴로 시혁에게 말했다.

“현왕님. 제가 곧 반신이 될 것 같습니다.”

“아직 군주 계급 아니었나?”

“군주 계급 맞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르거스에 들어오니까, 천상도에서 초대 편지가 와 있었습니다.”

초대 편지?

벌써 반신의 시련을 시작할 리가 없는데……

시혁은 금방 그 의미를 깨달았다.

대적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나 보다. 시혁에게 그러했듯, 세 가지 권리를 들어 꾀면서 충성 맹세를 하라고 하겠지.

어떻게 말을 꺼낼까?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반신 때문에 그런 게 아닐 거다.”

“그러면요?”

“혹시 대적자에 대해 들어봤나?”

“대적자요? 처음 들어 봅니다.”

시혁은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신위 경쟁의 마지막 단계.

최종 확장 단계의 반신들에게 대적자가 선정 된다. 그들을 상대로 특수한 임무에 달성하면, 반신은 신위 경쟁에서 승리하여 아르거스의 신이 된다.

라무가 고개를 갸웃했다.

“반신과 영웅이 상대가 됩니까? 아무리 성지에 묶여 있어도, 영웅 하나는 가볍게 처리할 수 있을 텐데요.”

“그야 그렇지. 그래서 대적자는 세 가지 권리를 가진다.”

천상도의 지원, 대적자의 무구, 현신의 도움.

라무도 시혁이 화산 전갈 길누아와 싸웠던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금방 납득을 했다.

“이제 이해하겠습니다. 어라, 그럼 저와 대적하는 반신은 누굽니까? 제가 대적자면, 대적하는 반신도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나다.”

“예?”

“라무, 네가 내 대적자다. 나는 네 영혼을 지우고 다른 영혼을 복구하라는 임무를 받았지.”

라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더니, 오른손에 든 지팡이를 시혁에게 겨누었다.

겁에 질린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오, 오지 마!”

시혁은 혀를 끌끌 찼다.

엉뚱한 상상을 한 모양이다.

“이상한 생각하지 마라. 내가 네 영혼을 뽑아서 소멸시킬 것 같았으면 이런 걸 무엇 때문에 설명해 주겠느냐? 성지에 들어오자마자 제압하고 말았지.”

라무의 얼굴이 비로소 좀 편안해졌다.

그래도 한 가닥 의심을 지우긴 어려운 듯했다.

여전히 경계하는 얼굴로 시혁에게 물었다.

“하지만 대적자를 끝장내야 신위 경쟁에서 승리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난 신위 경쟁에는 관심이 없다. 신이 될 생각도 없지. 그러니 안심해도 좋다.”

라무는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만도 했다.

라무는 아직 아르거스 신들의 세뇌에서 자유롭지 못하니까.

시혁은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라무, 너는 어떻지? 신이 되고 싶나?”

“당연한 거 아닙니까? 신이 되고 싶습니다. 신위를 얻어, 제 신분의 한계를 넘기를 원합니다.”

“델로크가 어찌 되었는지 뻔히 봤으면서도?”

“아……”

라무의 말문이 막혔다.

멸망의 입을 통해, 델로크가 어떤 처지에 빠졌는지 소상히 알려져 있었다.

아르거스에서 자란 자아에 의해 신위도 빼앗기고, 아일리케의 모든 세력도 빼앗겼다는 것.

라무는 억지를 부렸다.

“상관없습니다. 신이 된 다음에는 어떻게 되어도 좋습니다. 전 기필코 강해지고 말 겁니다.”

세뇌가 작용한 듯했다.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하고 있었다.

시혁은 라무의 아픈 곳을 찔렀다.

“너는 노예가 되는 것을 죽기보다 더 싫어했지. 그래서 나와 계약을 맺고, 심장의 금제를 무력화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결국 다시 노예가 되겠다고? 신만 되면 다라니, 난 이해가 되질 않는다.”

“으음……”

라무의 얼굴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노예 출신.

신분 상승에 대한 욕구와, 노예 신분에 대한 격렬한 혐오감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한동안 말을 못했다.

신은 되고 싶지만 노예는 되기 싫었으니까.

이곳이 아일리케였다면 보다 이성적인 대화가 가능했겠지.

시혁은 쐐기를 박았다.

“라무, 너는 세뇌 당해 있다. 너만이 아니라 모든 소환자가 그렇지.”

“세뇌라뇨?”

“내 말만으로는 믿기 힘들 테니 직접 확인해 봐라. 영혼술사 출신이니 쉽겠지. 영혼 구덩이의 세뇌 위치는 알고 있겠지? 거기서 더 깊이 들어가 봐라. 아주 은밀하게, 3가지 세뇌가 숨어 있을 거다.”

라무는 시혁을 빤히 쳐다보았다.

잠시 망설이더니, 편히 앉은 후 명상을 시작했다.

회색 마나가 그 주변을 감돌았다. 이내 마나의 흐름이 안정되면서, 라무가 본인의 내부로 깊이 침잠해 들어갔다.

차분히 기다렸다.

곧 라무가 깨어났다.

충격을 받은 듯, 눈동자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현왕님, 이게 대체 뭡니까? 왜 이런 게 제 머릿속에 있지요?”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나? 소환자들이 왜 그렇게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승급에 목을 매는지? 모든 소환자가 그렇다. 아르거스로 처음 소환되는 시점에, 세뇌 당해 개목걸이를 목에 거는 거야.”

라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뭔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현왕님은 어떻습니까? 만약 이 세뇌에 걸리셨다면, 당연히 신이 되겠다고 하셨을 것 같습니다만.”

시혁은 씩 웃었다.

“난 진작 세뇌를 풀었다. 델로크 역시 마찬가지였지. 나와 델로크 말고도, 내 성역을 출입하는 대부분의 영웅들은 세뇌를 푼 상태다.”

“그게 효과가 있습니까?”

“있다마다. 세뇌를 풀어서 델로크가 대비를 할 수 있었고, 그걸 바탕으로 부활했지. 지금은 내 고향 세계에 와 있다. 만약 세뇌된 상태였다면 애초에 신위를 얻은 채 아일리케로 돌아가지도, 부활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라무가 생각에 잠겼다.

골똘히 고민을 하더니, 시혁에게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현왕님. 제 세뇌를 풀어주실 수 있습니까? 그 대가는 충분히 치르겠습니다.”

“세뇌를 푸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 대신 내게 줄 게 있느냐? 아르거스에서나 아일리케에서나, 네가 가지고 있는 것 중 딱히 구미가 당기는 게 없다만.”

“그것이……”

라무가 입을 우물거렸다.

시혁은 선심 쓰듯 말했다.

“뭐, 좋다. 내가 손해를 좀 보도록 하지. 네 영혼을 한 번 조사할 수 있게 해다오. 그러면 대가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겠다.”

“제 영혼이요?”

“그래. 내게 떨어진 임무는 네 가짜 영혼을 지우고 진짜 영혼을 복구하라는 거였다. 그게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싶다.”

라무는 의문어린 눈으로 시혁을 쳐다보았다.

가짜 영혼? 진짜 영혼?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였다.

잠깐 생각을 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다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제게도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실은 예전부터 저도 의심하고 있던 게 있어서요.”

영혼술사 출신이다 보니 뭔가를 감지한 듯했다.

라무를 침대에 눕게 했다.

잠시 심호흡을 했다.

세뇌를 푸는 것은 쉽다. 대한민국의 이능력자들을 다루면서 수백 번도 더 해보았다.

문제는 라무에게서 녹스의 영혼을 발견하고, 더 나아가 그 기억을 추출하는 일이다.

몇 시간 전 썼던 기구들을 다시 썼다.

스스로에게 그랬던 것처럼 라무의 의식 안으로 뛰어들진 않았다. 그랬다가 라무가 나쁜 마음을 먹으면 시혁이 끝장날 테니까.

대신 외부에서 최대한 집중했다. 신중하게 영혼 계열 마법진과 기구를 조작하여 살피자, 언뜻 이질적인 뭔가가 감지되었다.

선명한 어둠.

그것을 접한 순간, 시혁의 귀에서 이명이 찌이잉 하고 울렸다.

익숙했다.

암흑 황제, 혹은 심연의 마왕을 보는 듯했다.

라무 역시 시혁과 같았다.

그 내부에, 스스로의 영혼 안에 녹스의 영혼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시혁은 누군가 머리를 후려친 듯한 충격을 받았다.

지금 알아낸 사실은, 한 가지 진실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시혁과 라무가 실은 만들어진 영혼일 수 있다는 점.

바로 아르거스의 열다섯 대종사에게 의해서.

시혁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무리 대종사들이 대단했어도 그렇지, 영혼을 아예 만들 수가 있을까?

가능할 지도 모른다.

대종사들 모두가 그렇게 하기는 힘들더라도, 몇몇은 가능하지 않겠나. 진리 대종사 베리타스나 영혼 대종사 네프, 어둠 대종사 녹스 같은 자들은.

라무의 영혼이 가진 특질을 모두 기억해 두었다.

시혁 본인의 영혼과 비교해보기 위해서였다. 어쩌면 공통점을 발견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억을 읽는 것은 실패했다.

녹스의 영혼을 포착하고, 기억 판독 마법도 사용했으나 막혔다. 아무래도 강력한 보안 마법이 걸려 있는 듯했다.

다만 한 가지 변화가 있었다.

외부의 접근에 힘입어, 라무의 영혼과 녹스의 영혼과 살짝 뒤섞였다가 흩어졌다.

시혁이 베리타스의 기억과 접촉했을 때, 외부 기구가 기록한 모습과 같았다. 라무도 녹스의 지식이나 기억 중 일부를 받아들인 듯했다.

이것으로 끝.

녹스의 영혼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현재 시혁의 능력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곳으로 숨은 모양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뒤 라무의 세뇌를 풀어주었다.

잠시 후, 라무가 천천히 눈을 떴다.

주변을 돌아보다가 시혁과 눈이 마주쳤다. 잠시 생경한 눈빛을 보내다가, 겨우 시혁을 알아보았다.

“아, 현왕님! 다른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일은 잘 해결된 겁니까?”

“그래. 세뇌는 완벽하게 풀렸다. 네 안에 있는 다른 영혼의 존재도 확인했지.”

“그랬습니까……”

라무는 이상하게도 붕 뜬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더니 처량한 얼굴로 말했다.

“저는 노예로 태어나 박해 받을 운명일까요? 방금 어떤 기억을 접했는데, 그 기억 속에서 저는 철저히 박해받고 있었습니다.”

녹스의 기억이다.

엘프와 다크 엘프의 혼혈로 태어났다던가. 노예보다 더 비참한 꼴을 당했다고 들었다. 그게 한이 맺혀 흑마법을 익혔고, 종국에는 심연의 마왕을 소환하여 모든 다크 엘프를 노예로 만들었지.

시혁은 라무를 위로했다.

“네 전생의 기억을 봤나 보지? 그래, 시작이 불우할 수는 있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네 전생의 영혼은 결국 신들조차 두려워하는 강력한 마법사가 되었다. 너 또한 그렇게 하면 될 게 아니냐? 델로크가 그 숱한 역경을 극복하

고 신위를 얻었고, 함정에서 벗어나 다시 도전하는 것처럼 말이다.”

라무가 크게 공감하는 얼굴을 했다.

시혁에게 공손히 절을 하더니, 힘을 주어 말했다.

“현왕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이제는 남들에게 휘둘리지 않겠습니다.”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상의했다.

최지혜가 아르거스에 올 수 없는 이상 가장 큰 우군이 될 인물이었다. 자연히 시혁도 신경을 썼다.

가장 급한 것은 대적자를 포기하게 하는 것.

라무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대적자가 되는 것 자체는 상관없지 않습니까? 현신에게 도움 요청만 하지 않으면 되지요. 천상도의 지원과 고유 무구를 포기하는 건 좀 아깝습니다.”

“신들이 네게 충성 맹세를 강요할 것이다. 그건 조심해야 한다.”

“세뇌가 풀렸으니 그리 치명적이진 않을 겁니다. 제 나름대로 대비도 할 거고요.”

자신 있다는 투에 알아서 하라고 했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으나 어디까지나 라무의 선택에 달린 일.

아무리 시혁이라고 해도 뭘 하라고 강제할 수는 없었다.

대신 대적자로서 알게 되는 사실은 시혁과 공유하기로 했다. 그래야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을 테니까.

라무가 천상도로 떠났다.

시혁도 대비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이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몰랐다. 최악의 경우, 라무의 요청 없이 공격할 수도 있지 않겠나.

아니, 그 정도가 최악은 아니지.

정말로 최악의 상황이라면, 신들이 녹스를 부활시키는 거겠지.

시혁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들에게도 녹스는 강력한 적일 텐데, 과연 그렇게 할까 싶어서였다.

모르는 일.

대비를 했다.

최지혜와 손을 맞췄을 때를 생각하며 예행연습을 했다. 상성 상 권세 진영에 강한 현신이 기습해 온다고 가정하고, 전투 및 대피 연습을 몇 번이나 시행했다.

정보망을 확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자를 사방으로 보내 놓고, 공허 속에는 정찰용 마나 생명체를 뿌렸다. 공허 변환 마법 덕에, 거의 영구적으로 활용이 가능했다.

시혁의 짐작이 들어맞았다.

며칠 후, 혼돈 포식자 제베가 시혁의 성역을 급습했다.

< 담화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