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생과 후생 -2- >
뒤로는 인부들을 보내 마나 집중점에 마나 저장고를 건설했다.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태도에, 설원 공작이 시혁에게 비웃음을 보냈다.
[백색 현왕. 그 드높은 이름은 익히 들었다만 막상 마주하니 별 것 아니로구나. 이렇게 무모할 수가 있느냐? 다섯 살바기 아이도 너 정도는 아닐 것이다.]
무시했다.
군대는 늪을 헤치고 가장 가까운 마나 집중점으로 향했다.
걸어오는 싸움을, 설원 공작도 마다하지 않았다.
모든 병력을 집결시켰다.
그림자 마왕, 3명의 영웅, 수백에 이르는 도플갱어까지.
설원 공작이 선공을 했다.
이렇다 할 전략도 전술도 없었다. 영웅들을 앞세우고, 그림자 마왕을 하늘에 띄운 다음 전 병력이 돌진해 왔다.
자신의 전력이 시혁보다 훨씬 더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나 보다.
시혁의 얼굴이 실룩였다.
설원 공작이 자신을 어지간히 얕잡아 본 듯했다.
그냥 당해줄 수 없지.
두 군대가 맞부딪친 순간, 미리 준비해둔 이적을 사용했다.
절대엄금 이적과 대규모 광폭화.
대규모 광폭화는 아군만 아니라 적군에게도 사용했다. 마나를 아끼지 않고 사용한 까닭에 고레벨 영웅들은 물론 그림자 마왕까지 걸렸다. 두 눈에서 핏빛 안광을 빛내며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설원 공작은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고작 그거냐? 정화!]
발동하지 않았다.
시혁이 괜히 절대엄금 이적을 쓴 게 아니다. 예전에 영혼 약탈자를 상대할 때 그랬던 것처럼 정화 계열 이적을 봉인해 버렸다. 시혁과 설원 공작 모두, 소환자들끼리 개싸움을 벌이는 걸 보기만 해야 한다는 소리다.
설원 공작은 그 사실을 깨닫고 으르렁거렸다.
[이 교활한 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전황을 주시했다.
어떻게든 그림자 마왕을 끝장내야 했다. 다른 영웅과 도플갱어를 다 죽여도 그림자 마왕이 살아남거나, 부활 이적으로 되살리면 시혁의 패배였다.
설원 공작도 입을 다물었다.
힘을 끌어올리는지 하늘에 옅은 하늘색 빛이 어렸다.
시혁도 마찬가지.
하늘에서 백색과 청색의 힘이 세력 다툼을 벌였다. 금방이라도 구체화되어 지상으로 강림할 것처럼, 서로에게 적의를 드러냈다.
곧 전장이 정리되었다.
일반 소환자는 모두 죽었다.
남은 것은 그림자 마왕과 여섯 영웅 뿐.
“크아앙!”
그림자 마왕이 괴성을 질렀다.
지금은 여섯 영웅에게 합공을 받고 있었다.
광전사는 피아를 식별하지 못한다. 본능적으로 아무나 공격하게 되는데, 그림자 마왕의 존재감이 워낙 막강하여 합공을 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아무리 그림자 마왕이라도 여섯 영웅을 동시에 상대하긴 힘들었다. 저 혼자 광폭화되었다면 가능하겠으나, 영웅들도 광폭화된 것은 마찬가지니까.
설원 공작이 이적을 발현했다.
강철의 비가 내렸다.
시커먼 창이 영웅들의 몸을 꿰뚫었다. 영웅들이 그것을 느끼고 분노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그림자 마왕만 무사했다.
형체가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강철 창을 유유히 흘려보내며 영웅들을 유린했다. 팽팽하던 전세가 순식간에 그림자 마왕에게 기울었다.
시혁은 차분히 다음 이적을 준비했다.
하늘에 모인 백색의 마나가 천천히 회전했다.
어떤 이적이 구체화되자, 설원 공작이 아연실색하여 소리쳤다.
[너, 너 이놈! 설마 권세의 추방을 쓰려는 건 아니겠지?]
권세의 추방.
추방 계열의 고급 이적이다.
현세의 생물이 아닌 모든 존재에 효과가 있었다. 천사장이나 악마 군주는 물론, 그림자 마왕에게도 통한다는 얘기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마나 소모가 많고 준비 시간이 길다는 것. 반신이 보고 있다 명령만 내리면 끝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다.
[젠장, 피해라!]
설원 공작이 안타깝게 부르짖지만, 결국 이적이 완성되고 말았다.
강렬한 백색 빛이 내리꽂혔다.
거대한 기둥이 섰다.
그 빛의 기둥 안에서, 그림자 마왕의 몸이 점차 투명해졌다. 한 차례 긴 울음을 토하고, 저 멀리 이계로 추방되었다.
남은 것은 여섯 영웅.
그들은 서로 치고 박고 싸웠다. 하나둘 레벨이 낮은 영웅부터 쓰러지더니, 결국 모두 동귀어진하여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설원 공작이 부들부들 떨었다.
[이놈! 본때를 보여주마!]
전투가 치러지는 동안, 설원 공작은 새로운 부대를 만들었다.
그걸 진격시키고 이적을 마구 때려 박았다.
시혁은 적당히 저항하다가 마나 집중점 하나를 내주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시혁이 가진 마나 집중점이 하나 더 많으니까. 최종병기는 한 전투에서 한 번만 소환이 가능하니, 이대로 방어를 굳히면 결국 시혁이 승리하게 된다.
설원 공작도 그냥 당해주진 않았다.
중앙의 마나 집중점에 한 가지 이적을 썼다.
늪 지형이 설원 지형으로 변했다.
괴상한 일이 생겼다.
그곳으로 진입하는 도플갱어 병력의 수가 수십 배로 불어난 것이다.
환영이다.
문제는 진짜처럼 공격도 가능하고 존재감도 느껴진다는 것.
진실의 시야 이적을 썼지만 소용없었다. 환영 무효화도 마찬가지였다. 다 무시해버리고, 시혁의 요새를 무너뜨린 후 마나 집중점을 점령했다.
설원 공작의 고급 특수 이적.
게다가 전투가 끝난 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설원 공작이 배치한 병력은 기껏해야 십여 명인데, 수백 명의 도플갱어가 마나 집중점에 득실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시혁은 차분히 마나를 축적했다.
목표로 한 분량이 눈앞에 있었다.
설원 공작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시혁을 압박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끝을 내겠다는 듯, 이적을 퍼붓고 대대적인 공세를 가했다.
시혁은 최소한의 마나로 방어를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모인 마나로 화신을 소환했다.
빛나는 거인.
설원 공작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여기에 더해, 시혁은 전원 환생을 사용했다.
지금까지 죽은 모든 소환자가 되살아났다.
세 영웅은 물론, 일반 소환자들까지 전부 다.
그것으로 승리가 결정되었다.
설원 공작은 영웅 한 명 없는 상태다. 도플갱어들의 레벨도 낮았다. 초기에 축적해 놓은 마나도 모두 사용했으니, 시혁에게 탈탈 털일 일만 남았다.
화신과 세 영웅을 몰아쳐서, 간단히 승리를 따냈다.
힘든 승리였지만, 시혁은 그저 무덤덤했다.
솔직히 말해서 전장에서의 승패는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그보다는 시혁 본인의 영혼을 확인하는 것과 라무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가 더 중요했다.
다음날, 아르거스에 들어오자마자 라무에게 전언을 보냈다.
할 얘기가 있으니 성역으로 오라는 것.
[예, 백색 현왕님. 금방 가겠습니다. 설원 공작이 저한테 의뢰한 게 있어서, 몇 시간 정도는 걸릴 것 같습니다.]
[알겠다. 기다리마.]
시혁은 성지 내에 여러 기구를 소환했다.
스스로의 영혼을 살피기 위한 장비였다.
그 안에 들어갔다.
예전에 신들의 세뇌를 알아냈을 때와 같았다. 하지만 그때보다 더 정교하고, 고등한 기법의 확인이 필요했다.
무의식 깊은 곳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기구들이 작동했다.
깊고 깊은 곳에서 또 하나의 자신과 대면했다.
언뜻 보기에는 시혁 본인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다만 몸 전체에 오색의 빛이 어려 있었다.
녹적황백청.
오행 순환체의 색과 같았다.
진아(眞我).
마법적으로 구현된 또 하나의 시혁이다.
시혁은 잠시 동안 그것을 감상했다.
또 하나의 시혁이 눈을 떴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마주 보는 시혁이 얼굴을 굳혔다. 고개를 살짝 젓자, 시혁의 몸이 빠르게 부상했다.
“어어?”
시혁은 당황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실패.
어째서인지, 시혁의 무의식이 더 이상 접근하는 것을 막아선 것이다.
포기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시도했다.
그때마다 실패하여 성지로 돌아와야 했다.
강렬한 안타까움에, 시혁은 또 하나의 자신 앞에서 짧게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왜 나를 방해하는 거냐? 난 베리타스와 다른 사람이지만, 분명히 베리타스의 후생이기도 해. 내가 베리타스라고. 옛 나를 찾으려는데, 왜 이러는 거지?”
그 말에 또 하나의 시혁이 몸을 움찔했다.
안타까운 눈으로 시혁을 쳐다본다.
잠깐이었다.
곧 또 하나의 시혁이 사라지고, 찬연한 섬광이 세상 전체로 뻗어나갔다.
성공인가?
시혁은 의식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빛이 걷혔다.
괴상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어둡다.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공간이다.
황금색 글자와 문양들이 주변을 떠돌았다.
색깔은 밝은데, 이상하게도 음침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글자와 문양마저 얼어붙은 듯했다.
‘이건 뭐지?’
그런 생각을 할 때, 황금색 글자 한 무더기가 시혁을 향해 다가왔다.
아니, 다가온 게 아니라 그냥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시혁은 강렬한 전율을 느꼈다.
지금은 잊힌 고대의 마법.
유성 소환의 마법 공식이 시혁의 뇌리에 주입되었기 때문이다.
위력이 무시무시했다.
반신들의 고급 이적 정도는 가뿐히 씹어 먹을 정도였다.
그것을 안 순간, 희열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쳤다.
드디어 성공한 것이다.
이곳은 베리타스의 기억이 저장된 공간이 분명했다.
다른 글자 무더기에 접근해 보았다.
살짝 닿았다가 떼자, 역시 고대의 마법 공식이 시혁의 영혼으로 흘러들어왔다.
이번에는 악마 군주 소환.
대재앙 이전에 존재하던 천계와 마계가 소멸한 이상 쓸 수 없는 마법이다. 그게 아쉬웠지만, 옛 마계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었다.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베리타스 이전의 전생은 그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유독 베리타스의 기억만 이렇게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는 게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그럴 리가 없지.
시혁은 공간 안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광대한 곳이다. 시혁이 느끼기에 위쪽에 금색 글자와 그림이 많고, 아래쪽으로 갈수록 그 수가 줄어들었다.
고민하다가 아래쪽으로 향했다.
천천히 내려가자 이내 글자와 그림들이 사라졌다. 오직 싸늘한 어둠만 가득 차 있었다.
이질적인 것이 하나 보였다.
저 아래.
까마득히 깊은 곳.
인간의 능력으로 인지하기 어려운 곳에 흐릿한 금색이 빛이 어려 있었다.
옅고, 미약하다.
반딧불이 뿌리는 빛을 보는 듯했다.
시혁은 홀린 듯 그 빛을 향해 다가갔다.
곧 빛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한 노인이었다.
자궁 안에 있는 태아처럼, 눈을 감은 채 웅크리고 있었다. 노인의 존재 전체에서 음울한 황금색 빛이 새어 나왔다.
낯이 익었다.
몇 번 초상화를 통해 봤기 때문이다.
베리타스.
시혁이 의심했던 게 현실로 드러났다.
바로 그때였다.
베리타스의 존재를 확인한 순간, 시혁의 영혼이 급격히 부상했다.
더 이상은 이곳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것처럼.
혹은 누군가가 시혁의 멱살을 잡고 끌어올린 것 같기도 했다.
“하아!”
시혁은 정신을 차렸다.
저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소환한 기구들이 묘한 빛을 뿜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하자, 깨어나기 직전에 시혁의 영혼 파장이 극도로 불안정했던 게 보였다.
깨어나지 못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몰랐다.
한 가지 더.
시혁의 영혼 속에 숨어 있던 황금색 빛이 한 차례 빛났던 것도.
그 빛이 한 조각 시혁의 영혼에 날아왔던 장면이 기록되었다. 뭔가 해서 자세히 살펴보자, 다름 아닌 유성 소환 마법과 악마 군주 소환 마법이었다.
“음……”
이건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
심신을 안정시킨 후, 다시 시도를 해보았다.
충분히 대비를 한 상태였다. 말 그대로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아쉽게도 아까 봤던 공간으로 진입할 수는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무의식 아래 가장 깊은 공간에 숨어 있던 또 하나의 자신에게 막혔다.
이젠 시혁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눈을 감은 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시혁은 답답함을 느꼈다.
괴상한 공간에 있던 베리타스는 그렇다 치고, 오색으로 빛나던 자신에 대해서도 알아봐야 할 것 같은데……
몇 번 더 시도를 해봤으나 모두 실패했다.
한 가지 짚이는 게 있었다.
오색으로 빛나는 자신에게 했던 말.
그게 열쇠가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 말을 또 하려니 좀 꺼려졌다. 베리타스와 자신을 동일시 해야 하니, 왠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럼 다른 방법을 써 봐야겠지.
시혁은 이미 대책을 궁리해 두었다.
라무.
혹은 녹스.
그 영혼을 파헤쳐 보면 뭔가 방법이 나오지 않을까.
[백색 현왕님! 저 왔습니다!]
시간도 잘 맞췄다.
기다렸다는 듯, 라무가 시혁의 성역에 도착했다.
< 전생과 후생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