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생과 후생 -1- >
그 의미는 명약관화하다.
라무가 바로 대적자다.
시혁이 언젠가 가졌던 예감이 현실화된 것이다.
놀랍지는 않았다.
비록 라무는 모든 면에서 시혁보다 모자라지만, 어쨌든 어둠 대종사 녹스의 후생이니까.
방문주기가 1일이고, 아르거스의 모든 일을 기억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많은 업적을 남겼고, 그 중에는 시혁이 경탄할 만한 일도 있었다.
그나저나 가짜 영혼 삭제 및 진짜 영혼 복구라……
이게 무슨 소리지?
지금 라무의 영혼은, 진짜 영혼이 아니라는 뜻일까?
곧 그 의미를 알아차리고 옅은 신음을 흘렸다.
“녹스……”
뭔가 수작을 부린 모양이다.
아르거스의 신들은 녹스의 영혼을 끌어내어 뭔가를 하려는 것 같고.
어떻게 할까?
그대로 진행해서 신위 경쟁의 끝을 승리로 장식해?
아니면 죽음 지혜 때처럼 라무와 협력해서 그냥 넘겨버려?
어느 것을 선택해도 된다.
고민한 결과, 후자를 택하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무와 시혁은 계약 관계다.
살려두면 두고두고 아일리케의 마법 지식을 얻을 수가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치가 커질 텐데 굳이 거위의 배를 가를 필요는 없지 않겠나.
한 가지가 아쉽기는 했다.
녹스의 영혼을 복구한다?
그러면 예전에 아르거스에 발생했던 일을 정확히 알 수 있을 테니까.
그건 확 끌렸다.
‘기억만 좀 보자고 해야겠다.’
동맹의 대가로 그 정도는 요구할 수 있겠지. 영혼에 뭔가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니까.
문득 소름이 돋았다.
시혁 본인은 어떻지?
혹시라도 내부에 베리타스의 영혼이 숨어 있는 거 아냐?
확인해 봐야겠다.
하지만 지금은 전투부터 치러야지.
녹스의 영혼을 복구하여 신위 경쟁에서 승리하든, 라무와 협력하여 신들에게 대항하든 나중 문제다.
시혁은 전장을 확인했다.
규모 자체는 평범했다. 그런데 지형이 마뜩찮았다. 전장 전체가 거대한 늪지대였던 것이다.
동쪽과 서쪽에 있는 본성, 전장 전체에 산재한 일곱 개의 마나 집중점만 땅이 단단했다. 그 외에는 늪을 헤치고 다녀야 했다.
시혁은 난감한 감정을 느꼈다.
환상 진영의 종족은 도플갱어다. 상대 진영의 병종을 흉내 내는 것에 능했다. 물론 일반적인 생물도 흉내 낼 수 있었고.
늪에도 여러 생물이 산다. 중립 괴물도 많았다.
그 중 기동력이 뛰어난 괴물을 복사하면 어쩔 것인가. 본성에서 가까운 마나 집중점을 빼고는 모든 마나 집중점을 빼앗길 수도 있었다.
시혁은 궁리를 하다 가장 먼저 암흑가부터 지었다.
도둑과 암살자, 자객으로 이뤄진 부대를 꾸렸다.
대장은 만보신궁 정종명.
정종명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절 첫 번째로 소환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항상 태양성검 유태진과 새벽 성녀 백혜진부터 소환해서 그러나 보다.
시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번 전장은 늪지대입니다. 그 두 분은 기동성이 너무 낮아서 힘들어요. 다음 영웅도 서예리 씨를 소환할 겁니다. 천상 진영 출신이라 비행 마법에 능숙하니까요.]
“알겠습니다. 전 뭘 하면 됩니까?”
[마나 집중점을 확보해 주세요. 최소한 3개는 확보해야 대등한 전투가 가능합니다. 상대가 환상 진영 반신이니 쉽지 않겠습니다만 힘을 내주세요.]
“휴, 어렵겠네요.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정종명이 부대를 이끌고 떠났다.
시혁은 어떤 병종을 위주로 가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답이 안 보였다.
권세 진영은 무난한 병사와 우월한 성당 병종, 강력한 마법 병종과 쓸 만한 공성 병기의 조합이 강점이다. 늪지대에서는 기사 종류의 병종과 공성 병기를 쓰기 힘드니, 보병과 사제, 마법사만으로만 전투를 치러야 했다.
날개 하나가 꺾인 셈이다.
어쩔 수 없다.
이적을 최대한 활용해야겠다. 고급 특수 이적인 전원 환생은 매우 강력하니 최소한 정면 대결에서는 시혁이 설원 공작을 압도하겠지.
일단 본성을 발전시키는 것에 치중했다.
영웅 없이, 대가 계급 기사를 대장으로 삼아 부대 하나를 내보냈다. 기사가 몇 포함되었으나 모두 말에서 내려 도보로 걷고 있었다. 갑옷까지 벗어 던져서, 전투력이 절반 이하로 떨어진 상태였다.
두 개까지는 점령을 했다.
문제는 세 번째에서 생겼다.
정종명이 부대를 이끌고 세 번째 마나 집중점을 점령하려고 하자, 저 멀리서 웬 도마뱀 떼가 접근을 했다.
늪지대에서 흔히 관찰되는 중립 괴물들.
무력은 떨어졌다. 다만 늪에 숨어 있다가 은밀하게 덮치는 게 특기였다.
도마뱀들이 부대 앞에서 스르륵 변신을 했다.
정종명.
그리고 도둑과 암살자, 자객.
도플갱어들이었다.
정종명이 활을 겨눴다.
“한 판 해보자는 거냐?”
도플갱어들은 일정 거리 이하로는 접근하지 않았다.
수는 비등하다.
그렇다면 권세 진영이 더 유리하다. 도플갱어들은 능력을 똑같이 복제하지만, 특기까지는 복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혁은 정종명에게 주의를 주었다.
[도마뱀들이 기습할 확률이 높습니다. 주의하세요.]
[예, 저도 간파했습니다. 제 특기로 감지하니, 오른쪽에서 접근하는 놈들이 느껴지네요.]
이미 대비책을 세워둔 모양이다.
그럼 시혁이 더 개입할 필요는 없겠지.
가만히 지켜보았다.
전투가 벌어졌다.
정종명은 뒤에서 계속 화살을 날렸다. 도둑과 암살자, 자객들이 앞에서 단검을 맞부딪쳤다. 불꽃이 튀고, 피가 뿌려지는 치열한 혈전이 전개되었다.
도플갱어들이 밀렸다.
아직 결정적인 승기는 못 잡아도, 인간 군대가 차분하게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도마뱀들이 튀어나온 것은 바로 그때.
늪에 숨어 지척까지 접근했다. 몸에 진흙을 덕지덕지 발라서 육안으로는 판별하기 어려웠다. 간 크게도, 일반 소환자도 아닌 정종명을 직접 공격했다.
정종명이 높이 뛰어올랐다.
가볍게 공중제비를 몇 차례 돌더니, 허공을 딛고 저 멀리 떨어진 곳에 착지했다.
“어디서 같잖은 수를!”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힘을 담고 있어, 정종명을 기습한 도마뱀들이 금방 주검으로 변했다.
거기서 승부가 갈렸다.
도플갱어들이 얼른 후퇴했다. 더 싸워봐야 손해만 볼 테니, 복구할 수 있는 지금 군대를 물린 것이다.
소환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겼다!”
“우리가 승리했어!”
하지만 전황이 좋지는 않았다.
7개의 마나 집중점 중 4개가 설원 공작에게 넘어갔으니까. 최악의 경우는 피했지만, 시혁이 불리하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마나를 모아 두 번째 영웅을 소환했다.
섬광 폭격자 서예리.
이때쯤 시혁의 본성도 상당히 발전을 했다. 지금까지는 상급 병종까지만 운용을 했으나, 고급 병종들도 소환할 수 있게 되었다.
주력으로 삼은 것은 성자와 대마법사.
기사단장이나 광휘 기사는 소환하지 않았다. 대신 중장보병이나 저격수, 암살자와 자객 등 하위 병종을 대량으로 운용했다. 이들은 호위를 하면 그럭저럭 군대 모양이 나올 것이다.
그 즈음 설원 공작의 두 번째 영웅이 출현했다.
정신 압제자 라무.
라무는 신기하다는 듯 시혁에게 마법 전언을 보냈다.
[백색 현왕님을 전장에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안 봐 드릴 테니, 각오하시기 바랍니다.]
[하하, 내가 불리한 상황이긴 하다만 네게 당할 정도는 아니다. 과연 누가 이기는지 두고 보도록 하자.]
일단 세 곳의 방어를 굳혔다.
쉽지 않았다.
자원을 운송해 갈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저 인부만 보내서 마나를 때려 박아야 했다.
잠시 대치 구도가 이어졌다.
정종명과 서예리는 열심히 중립 괴물을 때려잡고 다녔다. 강한 괴물들이 많아서 둘의 레벨이 상당히 올라갔다. 어쩌면 50레벨을 찍는 것도 가능할 성 싶었다.
시혁과 설원 공작 둘 다 눈치만 보고 있었다.
설원 공작이 먼저 세 번째 영웅을 소환했다.
진리 진영의 마법 기사 출신인 뇌전 검사.
그에 질세라 시혁도 강철 돌진 김세인을 불렀다. 아직은 전투가 벌어질 것 같지 않아, 역시 중립 괴물을 잡게 했다.
그 뒤로는 특별한 변화가 없었다.
본성의 건물을 늘리지도, 병력을 확충하거나 새로운 영웅을 소환하지도 않고 있었다.
시혁은 금방 설원 공작의 의도를 간파했다.
최종병기를 소환하려는 게 뻔했다.
환상 진영의 최종병기는 그림자 마왕.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면서 공격을 퍼붓곤 했다. 그게 소환되면, 시혁은 순식간에 마나 집중점을 모두 빼앗기고 본성에 내몰릴 것이다.
시혁은 입맛을 다셨다.
방법은 하나 뿐.
지금 진격해야겠다.
한 판의 대승으로 마나 집중점 두 개는 뺏어 와야 한다. 그래야 승리할 가능성이 생긴다.
시혁은 전군을 휘몰아쳐 진격하기 시작했다.
영웅들은 50레벨에 도달하지 못한 시점이었다.
정종명은 33레벨, 서예리는 27레벨, 김세인은 19레벨.
설원 공작도 반응했다.
가장 중앙에 있는 마나 집중점에 전력을 집중시켰다. 세 명의 영웅도 불러들이고, 곧 벌어질 전투에 대비했다.
시혁은 전투 초반부터 강수로 나갔다.
대규모 광폭화와 영령을 바로 사용했다.
인간 군대 전원이 광전사가 되었다. 그것도 이성을 멀쩡하게 유지한 상태였다.
설원 공작도 대응 이적을 뿌렸다.
환상 군대를 만들어 광전사들을 유혹했다. 그 앞에 함정도 깔았다. 꽤나 심혈을 기울였으나, 안타깝게도 속아 넘어가는 소환자가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혼란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승리가 눈앞에 보였다.
힘을 냈다.
짝니도 지목 소환으로 불러냈다. 영웅들과 짝니가 앞장서고, 군대가 그 뒤를 받쳤다. 몇 차례 이적 공방이 더 이뤄졌으나, 결국 중앙 마나 집중점 점령에 성공할 수 있었다.
설원 공작은 순순히 물러났다.
마나 집중점을 지키는 것보다 전력을 보존하는 것에 더 신경쓰는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그림자 마왕 소환까지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가만히 두고 봐서는 안 된다.
바로 진격하여 다른 마나 집중점을 공격했다.
이번에도 설원 공작은 적당히 싸우다가 후퇴했다. 그럴 줄 알고 시혁은 상급이 아닌 중급과 하급의 이적을 써서 마나를 아꼈다.
이로서 시혁이 차지한 마나 집중점이 다섯 개가 되었다.
잠시 숨을 돌렸다.
이제 됐다.
아무리 지형이 나빠도 마나 집중점이 두 개나 더 많으면 압도할 수 있다. 조만간 영웅 둘을 더 소환하고, 화신까지 갖추면 간단히 승리를 쟁취할 듯했다.
하지만 일이 생각대로 되진 않았다.
“크아앙!”
설원 공작의 본성에서 괴이한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어두운 파장이 전장 전체로 퍼졌다.
그림자 마왕이다.
시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빨리 공격한다고 공격했으나 좀 늦었나 보다. 어쩐지 설원 공작이 마나를 과도하게 아낀다 했다.
영웅들도 그것을 알아차렸다.
즉각 시혁에게 건의를 했다.
[위원장님, 후퇴해야 합니다!]
[지금 전력으로는 그림자 마왕과 싸울 수 없어요!]
[마나 집중점마다 방어를 강화하고, 종명 씨를 50레벨까지 성장시키는 게 최선입니다!]
시혁의 생각은 달랐다.
[아뇨. 계속 진군합니다.]
[예? 농담이시죠?]
[저흰 아직 그림자 마왕을 상대할 수 없어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이 아니면 결국 패하게 됩니다. 지금 그림자 마왕을 끝내야 해요. 나중에 제가 전원 환생을 사용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전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림자 마왕만큼은 죽여주세요.]
영웅들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전원 환생은 고급 특수 이적이다. 4차 확장 때부터 사용이 가능하니, 여기 있는 영웅들 모두 겪어본 적이 있었다.
일단 그림자 마왕을 죽이기만 하면, 충분히 전세를 뒤집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좋습니다. 위원장님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힘든 싸움이 되겠네요.]
군대를 진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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