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신 -1- >
최종 확장은 쉬우면서도 어렵다.
조건은 단 하나.
각 진영의 최종 병기를 만드는 거였다.
예전에 낫슈바켈을 굴복시키려고 했던 반신, 파멸 왕자를 기억하는가?
파괴 진영의 최종 병기는 적색용이다. 과욕을 부려 낫슈바켈을 자신에게 종속시키려고 한 게 문제였다. 하필 시혁이 낫슈바켈과 인연을 맺는 바람에 모든 계획이 어그러졌지.
권세 진영의 최종 병기는 화신.
본연의 전투력도 강력할뿐더러, 반신이 직접 그 몸에 들어가 조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반신의 역량에 따라 어떤 최종 병기든 압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세계 지식에 화신을 만드는 방법이 자세히 나와 있었다. 진귀한 보물이 필요하고, 뛰어난 마법사는 물론 공학자, 신성력을 부여할 사제단까지 힘을 합쳐야 했다.
시혁에게는 문제될 게 없다.
재료만 좀 구해오면 될 테니까. 솔직히 화신을 만드는 것보다 하늘마루를 만드는 게 훨씬 어려웠다.
“흠……”
그렇게 생각하니 좀 아쉽다.
남들 다 만드는 똑같은 화신을 만드는 건 좀 그렇지 않나.
기왕이면 더 강한 화신을 만드는 게 좋겠지.
단순히 검만 휘두르고 신성력만 발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각종 마법을 발현하면 어떨까? 거기에 더해, 얼마 전 봤던 길누아처럼 스스로 권속을 생산한다면?
한 번 해보자.
다만 시혁 혼자서 하기는 어려웠다. 낫슈바켈과 대화를 해보는 게 좋겠다.
남서쪽 저 멀리 화산 지대로 시선을 옮겼다.
낫슈바켈의 둥지를 들여다보았는데, 뜻밖에도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경비병 역할을 하는 용암 골렘들만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디 있나 했더니, 다름 아닌 광장에 나와 있었다.
싱트파헬과 실라가 숨바꼭질을 하며 노는 중이었다. 낫슈바켈을 그 장면을 흐뭇한 얼굴을 하고 쳐다보았다.
둘이 나이 차이는 많아도 정신연령은 비슷하다 보니 잘 어울리는 모양.
“어, 백색 현왕!”
시혁의 존재감을 느낀 싱트파헬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내 까딱까딱 손짓을 했다.
“이리 와! 같이 놀자!”
시혁은 쓰게 웃었다.
어린 용을 친구로 삼았더니, 시혁 자신도 어려진 느낌이었다. 온갖 유치한 놀이를 강요하고 있었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지금은 할 일이 있어. 낫슈바켈 님,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그러지.”
“나도, 나도!”
싱트파헬과 실라도 따라왔다.
성지 안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화신을 강화해서 만들겠다고 하자, 낫슈바켈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곧 아르거스와의 연결을 끊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굳이 화신을 만들 필요가 있느냐? 지금 상태로도 차원 이동이나 연결 절단에 필요한 마나는 충분하다만.”
딴은 그렇다.
시혁은 어깨를 으쓱였다.
“앞날은 모르지 않습니까? 조금이라도 강해지는 게 좋지요.”
“그야 그렇지. 어떤 식으로 만들 거냐?”
불현 듯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시혁은 지금까지 한 가지 연구를 계속 진행하고 있었다.
하늘마루와 세계수를 합치는 것.
둘이 하나가 되면 엄청난 상승효과가 발생한다. 무한과 불멸의 힘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테니까.
이걸 바탕으로 화신을 만들면 어떻게 되지?
이 정도면 화신 정도가 아니다.
그 자체로 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저번에 상대했던 화산 전갈의 무력을 비추어 볼 때, 설령 아르거스의 신이라고 해도 맞설 수 있을 것이다.
시혁의 구상을 듣고, 낫슈바켈이 질렸다는 얼굴을 했다.
“미친, 그건 이미 화신이 아니라 또 하나의 신이 아니냐? 넌 인공신을 만들려는 거냐?”
“만들지 말란 법은 없잖아?”
“굉장하다! 나도 끼어 줘!”
듣고 있던 싱트파헬이 끼어들었다.
마법적 지식은 낫슈바켈보다 모자라도, 공허에 대한 지식은 싱트파헬을 따라갈 수가 없다. 당연히 싱트파헬도 화신 제작에 도움이 될 것이다.
“나도! 나도 할래!”
어린 실라도 괜히 신을 냈다.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다른 이들이 화신 제작에 참가할 듯하자 따라나선 것이다.
낫슈바켈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겠다. 함께 연구를 해보자. 원 참, 세계수와 하늘마루를 결합하는 것도 어마어마한데 인공신까지 만들겠다고? 네겐 아르거스의 신위가 굳이 필요가 없겠다.”
연구를 시작했다.
먼저 하늘마루와 세계수를 합치는 것부터.
덮어놓고 둘을 결합시키면 안 된다. 그랬다간 당장 세계수가 말라죽고, 하늘마루도 그 기능을 상실할 것이다.
낫슈바켈이 한 가지를 지적했다.
“하늘마루가 더 커져야 한다. 지금 상태로는 안 돼.”
힘도 부족하다.
하늘마루의 심장이 무한한 힘을 생산한다고 하지만, 세계수가 소모하는 힘도 만만치 않게 컸다. 심장을 하나 더 만들거나, 아니면 다른 방법을 써야 했다.
간단히 해결책을 강구했다.
근원의 나무.
그걸 대량으로 심는 거다. 세계수가 소모하는 일정 이상의 힘만 공급하면 되니 그걸로 충분했다. 일단 충분한 힘이 공급되면, 세계수는 스스로 영원불멸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하늘마루의 크기가 문제가 된다.
지금보다 10배는 더 커져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낫슈바켈이 혀를 내둘렀다.
“이건 숫제 성이 아니라 하나의 도시로구나. 아예 여기서 계속 살아도 되겠다.”
“크기가 커져도 너무 커지네요. 덩치가 크다고 꼭 좋은 것은 아닌데……”
그만큼 둔중해지고, 방어막에 가해지는 부담도 커지니까.
조금 크기를 줄일 방법이 없을까?
지금의 2, 3배 정도만 더 커지면 좋겠다. 그러면 저번에 봤던 길누아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이니, 화신을 구동시키면 적당히 우위를 점할 것이다.
시혁은 가만히 대략적인 개념도를 내려다보았다.
형태는 단순하다.
지금의 하늘마루 위에 세계수를 심은 상태.
이래서 크기가 커졌다. 세계수를 지탱할 수 있게, 땅 부분이 커져야 했기 때문이다.
“이걸 안으로 들일 수는 없을까요?”
시혁이 개념도의 세계수를 손가락으로 짚자, 낫슈바켈이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안으로 들인다니?”
“지금은 아래가 하늘마루, 위는 세계수잖습니까? 공간 효율이 너무 나쁩니다. 낭비되는 것도 많고요.”
“으음…… 무슨 말인지 알겠다만 얼른 감이 안 잡힌다. 세계수의 가지가 넓게 자랄 텐데, 그걸 어쩌려고 그러느냐?”
“변형시켜야지요. 하늘마루를 구형으로 만들되, 외부는 금속, 내부는 세계수로 채울 생각입니다.”
시혁의 구상은 간단했다.
세계수로 하늘마루의 심장을 감싸자는 것.
이 경우 공간을 획귀적으로 절약할 수 있다. 대신 세계수가 기존의 형태를 잃을 테니, 엘프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겠다.
낫슈바켈도 그 점을 지적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만 엘프들이 용인하겠느냐? 그 치들은 세계수에 대해서는 물불을 안 가리는 족속들이다.”
“대신 그들에게도 새로운 세계수를 하나 안겨주면 되지요. 지금 그들이 제 성역에 눌러앉아 있는 이유가 자기들 손으로 세계수를 복원하려고 그러는 거 아닙니까. 그 점을 들어 잘 설득하면 됩니다.”
“그도 그렇군. 뭐, 알아서 해라. 난 설계도를 그려보마.”
가만히 보고 있던 싱트파헬이 손을 번쩍 들었다.
“공허 변환 마법을 쓰면 어때? 크기가 아무리 작아도 세계수를 유지시킬 수 있을 거야!”
베리타스가 만들어서 싱트파헬의 알에 새겨놓았던 마법이다. 공허의 힘을 거꾸로 뒤집어, 유용한 마나로 사용할 수 있게 했다.
다만 그 부작용이 극명했다.
싱트파헬만 봐도 황금용이 암흑용으로 변하지 않았나.
대재앙 이전 같았으면 용들이 사악한 존재라고 봉인을 했을 것이다. 낫슈바켈도 경계를 하는지, 실라와 단 둘이 놔두는 경우는 아예 없었다.
또 있다.
“안 돼. 공허 안에 들어가 있을 때보다 밖에 있을 때가 더 많은데 그 동안은 어떻게 하라고?”
“충전하면 되지! 나도 그렇게 하는 걸?”
충전이라고?
생각지도 못한 개념이었다.
굳이 공허 변환 마법이 아니어도 좋다. 평소에 하늘마루의 심장이 생산하는 힘의 일부만 어디 저장해 놓아도 좋지 않을까.
공허 변환으로 얻는 힘이 방어막에만 적용해도 좋다. 마나 소모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혹시나 공허 속에서 싸울 상황이 온다면,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것이다.
낫슈바켈도 찬성했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오히려 더 낫겠군. 다만 공허에 침식되지 않게 주의하는 게 좋겠다.”
“예. 외부 방어막은 그렇게 처리하고, 내부 방어막을 하나 더 만들면 될 것 같습니다.”
“방어막은 내가 만들게!”
“그래, 부탁한다. 난 엘프들한테 다녀올게.”
설계도는 낫슈바켈이, 공허 방어막은 싱트파헬이 맡았다.
실라는 심심하다고 칭얼대더니 성지 밖으로 나갔다. 나가자마자 짝니를 찾는 것이, 또 올라타서 승마 놀이를 할 모양이었다.
둘을 남겨두고 세계수로 시선을 옮겼다.
언제나 그렇듯, 엘프들이 세계수의 향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반면 심각한 얼굴을 한 엘프들도 보였다.
델피니르와 대수림에서 파견된 엘프 사자였다.
“또 실패했다고?”
“예. 분명히 영원을 구현했고, 싹튼 세계수에 주입했습니다만 금방 말라죽고 말았습니다.”
“큰일이야. 이제 씨앗도 몇 개 안 남지 않았나?”
“최고 평의회에서는 세계수 복원을 중단하기로 의결했답니다. 섭정님께서는 백색 현왕에게 직접 협조를 구하자는 의견이십니다.”
“그게 낫겠지. 하지만 우리 스스로 세계수를 싹 틔울 방법을 찾아야 해. 백색 현왕이 우리와 동맹 사이라고 해도, 언제까지나 백색 현왕에게 의지할 수는 없어.”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시혁이 보고 있는 줄 모르나 보다.
슬며시 존재감을 드러냈다.
신전에서부터 이동하는 듯 나타내자, 얘기를 나누던 두 엘프가 대화를 종료했다.
“백색 현왕께서 오시나 봅니다.”
“섭정님의 뜻을 전하겠다. 자네는 물러가 있게.”
“예, 사령관님. 모쪼록 좋은 일이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데프니르는 시혁을 정중히 맞이했다.
그런 다음 공식적으로 섭정의 제안을 말했다.
시혁은 짐짓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상한 일이구나. 너희가 구현한 영원의 힘이 있으면 세계수가 충분히 자랄 거라고 생각했다만.]
“저희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옛 세계수 씨앗 말고도, 세계수의 잎과 껍질도 썼다고 했지?]
“예. 벌써 3번이나 실패했다고 합니다. 이제 씨앗도 몇 개 남지 않아서, 더 이상 무모하게 시도하기는 힘듭니다.”
시혁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성역에 머무는 엘프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친 뒤였다. 당연히 세계수를 복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혁이 재료로 삼았던 세계수의 가호는 없어도, 영원과 불멸의 힘은 모두 구현해냈으니까.
대수림은 생명의 마나가 충만한 공간. 그곳에 세계수를 심었다면 실패할 리가 없는데……
한 가지 가능성이 생각났다.
이미 세계수가 있는 곳에는 새로운 세계수가 자라지 못하는 것 아닐까?
그 말을 하자, 데프니르가 고개를 저었다.
“충분한 영역을 확보하고 씨앗을 심었습니다. 대재앙 이전 세계수만은 못해도, 여기 있는 세계수 크기까지는 자랄 정도였습니다.”
[그런 뜻이 아니다. 대수림이 아닌, 광명지나 대밀림에 세계수를 심어보는 게 어떠냐? 내 생각에는 신들이 만든 세계수가 새로운 세계수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 같다.]
“아……”
데프니르의 눈이 흔들렸다.
지금 아르거스에 있는 세계수 대부분은 복제 세계수.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한 번 건의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해라. 참, 난 세계수를 다른 곳으로 옮겨 심으려고 한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다. 내 하늘마루는 잘 알지? 거기에 이식하려고 한다. 세계수의 크기는 작아지겠지만, 대신 하늘마루의 심장을 이용할 수 있으니 그 힘이 더 강해지겠지.]
“위험하진 않겠습니까? 옮겨 심는 도중에 세계수가 상처 입을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너희의 도움을 받고자 한다. 나 혼자서도 가능하지만 아무래도 좀 거칠지 않겠느냐.]
“성역 내의 모든 것은 현왕님의 것이니 저희가 가타부타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저희가 세계수를 성장시키는 것을 조금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얘기가 잘 되었다.
시혁은 아예 분신을 보내서 세계수의 잔해를 확인했다.
자세히 살피자, 세계수가 왜 말라붙었는지 알아낼 수 있었다.
시혁의 짐작이 맞았다.
성장에 필요한 마나는 풍족했으나, 세계수의 영원성이 어디론가 새어나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걸 역추적했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대모 세계수가 그 힘을 품고 있는 게 관찰되었으니까.
엘프들이 망연자실했다.
“맙소사, 세계수가 세계수의 힘을 빼앗다니……”
“사악한 기생목들이나 할 짓 아닙니까?”
“어찌 이런 일이 발생할 수가 있나?”
영원의 힘을 흡수해서였을까.
대모 세계수가 더 커진 것 같았다. 한층 청량해진 공기가 그 잎사귀에서 뿜어졌다.
시혁은 새로운 세계수를 심는 것을 도와주었다.
장소는 대밀림.
숲 진영의 신역으로, 다른 신역처럼 강력한 원주민 세력이 존재하진 않았다. 숲 진영 자체가 통일된 종족이 아닌, 동물과 식물, 곤충 병종의 연합이기 때문이다.
엘프들은 대밀림 한쪽 귀퉁이를 점령하고 세계수를 심었다.
성공이었다.
순식간에 자라나, 거대한 그림자를 대밀림에 드리웠다.
엘프들이 허무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렇게 쉬울 줄이야……”
이러는 동안, 시혁의 성역에서는 세계수 이식 및 하늘마루 재건축 작업에 들어갔다.
“어이, 조심해!”
“잘못 건드리면 성역 전체가 불바다가 돼!”
하늘마루를 낱낱이 해체했다.
드워프들이 대규모로 몰려와 있었다.
원래는 손문철의 성역에 살던 드워프들이다.
얼마 전 손문철은 얼음 도마뱀 모리에타에게 박살이 났다. 대적자가 천상도에서 현신들에게 도움을 청한 까닭이다. 자연히 수많은 드워프가 터전을 잃었고, 손문철의 제안에 따라 시혁의 성역에 이주를 해 왔다.
< 거신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