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지혜 -2- >
델로크의 복제 정신이다.
그것을 밖으로 끄집어냈다.
깊은 수면에 빠진 상태라 쉬웠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질질 끌려 나왔다.
옅은 흑색의 광채가 솟구쳤다.
극도로 무미건조했다. 시혁이 뭘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듯, 그 자리에 그저 존재하기만 했다.
미리 준비한 보석에 복제 정신을 담았다.
다음에는 마멉진을 통해 천왕봉 수정의 힘을 보석에 주입하면 끝.
이것으로 인공 영혼이 완성되었다.
보석이 음울한 흑색의 빛을 사방에 뿌렸다.
특히 한지호 쪽을 향해 덜그럭거렸다. 자신이 거기서 나왔다는 사실을 아는지, 육체를 탐내는 듯한 모습이었다.
한지호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 느낌이 안 좋네요.”
“그럴 겁니다. 제가 미리 봉인해둬서 얌전한 거지, 그렇지 않으면 지호 씨 몸을 차지하려고 들었을 걸요?”
“히익! 혹시 귀신 같은 겁니까?”
“비슷합니다.”
마지막으로, 천왕봉 수정으로 작동하는 마법진을 그렸다.
만들어둔 기계 몸을 중앙에 배치했다.
꼼꼼이 확인했다.
하나라도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되었다. 시간이 조금만 어긋나거나, 소환하는 힘이 조금만 부족해도 델로크는 다시 죽음 왕좌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될 것이다.
결행일은 그 날 밤.
아르거스에 자리를 잡았다.
설악산 기지에 있는 본신은 잠들어 있지만 분신으로 멀쩡히 활동하는 게 가능했다.
지구와 아일리케는 준비 완료.
문제는 아르거스였다.
대규모 폭주를 일으키고 얼마나 지났다고, 불사회와 파멸회의 전쟁이 진정되고 있었다.
죽음 왕좌가 직접 타격을 입은 게 영향이 컸다.
지금은 합심하여 수상쩍은 이들은 잡아들이고 있었다.
시혁도 걸릴 뻔 했다.
“거기 너,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해골 기사가 시혁을 불러 세웠다.
속으로 뜨끔했지만 태연한 척 돌아보았다.
“나? 나는 흑색 현자 글라아스다. 잠깐만, 그 뒤에 당신. 나 알지 않나?”
“아, 글라아스! 죽은 줄 알았다.”
“죽기는. 간신히 살아남았다. 간신히 상처를 치료하고 밖으로 나왔는데 분위기가 좀 묘하군.”
해골 기사 뒤쪽에 있던 사령술사와 대화를 나눴다.
전쟁 때는 불사회 소속이던 사령술사다. 지금 시혁이 깃든 분신도 불사회에 몸을 담갔던 터라 안면이 있었다.
경계하던 해골 기사와 병사들이 긴장을 풀었다.
“뭐야, 불사회 쪽 영웅이었나.”
“진작 말을 할 것이지.”
“자, 어서 가자! 감히 죽음 왕좌께 피해를 입힌 도적놈을 반드시 붙잡아야 해!”
언데드들이 우르르 떠났다.
보보마다 언데드 병력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들의 눈을 피해 뭘 어떻게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특히 죽음 왕좌에 접근하는 것은 모조리 막았다. 죽음 지혜 시절 충성심을 입증했던 고위 언데드만이 접근할 수 있었다.
곤란하다.
백색 현왕으로서 사자를 보낼까? 그럼 간단히 죽음 왕좌의 심장부까지 접근할 수 있다.
금방 기각했다.
그럼 시혁의 정체가 밝혀질 테니까. 망혼산의 언데드들은 극도로 분노할 것이고, 배신감까지 겹쳐 시혁의 성역을 격렬히 공격하겠지. 그 정도의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다.
환상 마법도 당연히 못 쓴다. 언데드들이 모든 환상과 변형 마법을 해제하는 결계를 쳐 놓았으니까.
서성이다가 세 번째 분신에 생각이 미쳤다.
직접 마법진을 설치하고 폭주시켰던 분신이다. 지금은 은신처에 꼼짝없이 숨어 있었다.
그 분신을 드러내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모든 언데드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것이다. 그 사이, 두 개의 분신을 활용하면 수가 생길 것 같았다.
시혁은 입맛을 다셨다.
세 개의 분신을 만드느라 자원을 적잖이 썼었다. 아무래도 오늘 여기서 셋 다 소모해야 할 모양이다.
신전을 벗어나 적당한 곳을 찾았다.
꽤 멀리 이동을 했다.
세 개의 분신 모두에, 심장에 마법진을 추가했다.
폭주 및 자폭.
분신 하나만 죽음 왕좌에 접근하면 충분하다. 하늘마루의 주포와 비슷한 원리에 의해 거대한 힘이 투사될 것이다. 그럼 죽음 왕좌도 델로크의 영혼에 그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하겠지.
델로크에게는 미리 얘기를 해두었다.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를 하자, 걱정 말라며 두 눈을 빛냈다.
설악산 기지의 분신도 상황을 확인하고, 세 번째 분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은 자연스럽게.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죽음 왕좌를 향해 걸어갔다.
언데드들도 깜빡 속았다. 서로 상대편 파벌 소속이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무심코 통과시킨 것이다.
오래 가진 못했다.
앞서 시혁을 검문했던 해골 기사가 세 번째 분신 앞을 가로막았다.
“멈춰라! 정체를 밝히고, 전쟁 다시 어느 파벌 소속이었는지 말해라!”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시혁은 멀뚱멀뚱 해골 기사를 쳐다보았다.
해골 기사가 재차 추궁하려는 찰나, 시혁은 품에서 작은 구슬 같은 것을 꺼냈다.
“그건 뭐냐?”
시혁은 미묘하게 웃음을 지어주었다.
다름 아닌 저번 마법진 폭주 때 썼던 것과 동일한 마법 폭탄이다.
그걸 한쪽에다 던졌다.
폭발이 일어나고, 회색의 섬광이 부챗살처럼 퍼졌다.
언데드들의 안광이 폭발하듯 짙어졌다.
“범인이다!”
“죽여!”
“사지를 찢어!”
“죽음 왕관께서 널 심판하실 것이다!”
폭발은 죽음 왕좌 근처 어디서나 잘 보였다.
언데드들이 달려들었다.
벌통을 건드리자 벌떼가 공격해 오는 것과 같았다. 심지어 죽음 왕좌를 지키던 고위 언데드들까지 시혁을 향해 돌진했다.
겨우 도망쳤다.
사전에 온갖 마법 주문을 걸어놓은 상태이지만, 아무래도 기계 몸이다 보니 좀 느렸다. 시혁은 현자 출신이지, 자객 등 민첩한 병종 출신이 아니기도 했고.
곧 따라잡혔다.
언데드들이 시혁을 완전히 포위했다.
온갖 결계와 방해 마법이 시혁을 압박하고 있었다.
빠져나갈 틈은 없다.
하지만 시혁은 웃고 있었다.
충분히 많은 언데드들을 끌어들였고, 이들의 시선을 빼앗는 사이 두 분신은 죽음 왕좌에 가까이 접근했으니까.
심장을 폭주시켰다.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시혁을 포위했던 언데드들이 지대한 피해를 입었다. 대부분 상급 이상 병종이라 즉사하지는 않았으나, 당분간 움직이기는 힘들어 보였다.
죽었어도 사실 상관없다. 곧 신역 전체에 충만한 죽음의 마나에 의해 부활할 테니까.
그 사이, 시혁의 두 분신이 돌진했다.
온갖 가속 마법을 걸어놓은 상황.
단거리 공간 도약까지 거푸 사용했다. 그것을 본 언데드들이 놀라 앞을 막았다.
“막아라!”
“수상한 놈들이다!”
필사적인 저지에, 분신 하나가 그만 파괴되고 말았다.
심장을 폭주시키진 않았다. 잠깐 유보했다.
마지막 남은 분신이 잡히려는 순간 폭주시켰다.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고, 언데드들이 잠깐 시선을 돌린 사이 탈출하여 죽음 왕좌를 향해 달렸다.
언데드들이 혼비백산했다.
“안 돼!”
“어떻게든 막아!”
이미 늦었다.
시혁은 달리면서 두 손을 살짝 벌렸다.
지구와 아일리케의 분신들도 그랬다.
입을 벌렸다.
“하나, 둘.”
숫자를 셌다.
지구의 마법진이 그 시동어에 반응했다. 흐릿한 회색의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아일리케에서는 델로크가 자기가 그린 마법진으로 들어갔다. 젤시가 긴장한 채 시혁의 입을 주시했다.
달리면서 계속 숫자를 읊었다.
쫓아오는 언데드들의 무기가 거의 머리카락에 닿을 지경이 되었다.
천만다행히도, 잡히기 직전 죽음 왕좌에 도달했다.
“아홉, 열!”
동시에 숫자 세는 것도 끝났다.
세 개의 차원에서 동일한 숫자가 울려 퍼졌다.
마법진이 일제히 발동했다.
지구에서는 영혼 소환.
아일리케에서는 소환 좌표 응답.
아르거스에서는 마법진 폭주.
해골 새에 깃들어 있던 델로크의 영혼이 천천히 빠져 나왔다. 세계수를 중계 기지로 하여, 차원문을 넘어 아르거스로 향했다.
죽음 왕좌의 지배력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폭발이 지배력을 약화시킨 찰나의 순간 동안, 아르거스에 나타났다가 다시 차원문으로 빠져나간 것이다.
검은 천체를 통해 델로크의 영혼이 빠져나왔다.
영혼은 성공적으로 기계 몸에 안착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시혁이 만든 인조 영혼에 깃들었다.
보석이 달그락거렸다.
단단히 고정시켜 놓은 상태인데 찌직찌직 소리가 났다. 델로크의 영혼과, 방금 태어난 인조 영혼이 주도권 다툼을 벌이는 것이다.
곧 조용해졌다.
애초에 상대가 안 된다.
델로크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한때 신위까지 가졌던 인물이다. 인조 영혼은 사실 영혼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다. 끽해야 잡귀 수준이고,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흩어져 사라질 운명이었다.
잠시 후, 인형이 천천히 눈을 떴다.
다소 이질적인 쨍한 눈이 시혁을 직시했다.
“정신이 들어? 날 알아보겠어?”
인형의 얼굴에 어색한 웃음이 떠올랐다.
“백색 현왕 아니냐. 음, 생각 외로 몸이 괜찮군. 마법을 쓸 수도 있고…… 그런데 속성이 이게 뭐냐?”
“속성이 왜?”
“나와 정반대되는 속성이 아니냐. 이 몸으론 사령 마법은커녕 흑마법도 제대로 못 쓰겠다.”
“그럼 네가 새로운 몸을 만들던가. 아, 시체나 키메라를 쓰지는 마. 지구는 그런 것에 대해 혐오감이 극심하니까. 그런 걸 썼다간 나도 널 보호해주지 못해.”
“알고 있다. 흠, 나는 마도 공학에는 별로 재주가 없는데…… 뭐, 당분간 심심하지는 않겠다.”
마지막 작업을 서둘렀다.
인형의 머리를 드러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두개골 역할을 하는 곳으로, 델로크의 영혼이 심어진 보석을 보호하는 부위였다.
그 안쪽에 마법진을 빼곡하게 새겼다.
모든 외부의 침습을 방어하는 마법진이었다. 아울러 위치를 숨기는 기능까지 있으니, 단 한 차례 영혼이 통과했던 흔적을 가지고는 잠식해 오지 못할 것이다.
델로크가 거울을 보고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3번째 몸이구나…… 정말로 아일리케를 떠나게 될 줄은 몰랐다.”
“지구에 온 걸 환영한다. 행복한 새 인생이 됐으면 좋겠다.”
“행복한 인생이라…… 글쎄, 과연 가능할지 모르겠다.”
델로크는 다소 울적한 기색을 보였다.
하긴 아일리케에서의 인생이 평탄하진 않았다고 들었다.
학대 받고, 착취 받고, 탄압 받고……
시혁은 좋은 말로 델로크를 위로했다.
“지구에는 네 원수들이 없어. 너에 대해 아는 사람도 적고, 그나마 아르거스의 모습에 대해 아는 게 전부지. 과거는 흐르는 물에 흘려보내고, 지구가 제 2의 고향이라고 생각하고 살아. 나도 도와줄게.”
“고맙다. 생각해 보면, 내 인생에서 있었던 단 하나의 행운은 바로 네 제안을 받아들였던 것 같다. 음, 그럼 개명을 해야겠다.”
“웬 개명?”
“델로크는 내가 역천의 법을 깨닫고 새로 지은 이름이다. 고대 아일리케 어로 질서의 파괴자라는 뜻이지. 그 전에는 피니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됐으니, 새로운 이름을 짓는 게 마땅하지 않겠나?”
시혁도 동의했다.
현재 이름은 아일리케의 일을 상기시킬 테니 지우고 싶을 것이다. 아예 이름을 바꿔서 새롭게 시작하는 게 좋겠지.
델로크가 시혁을 빤히 쳐다보았다.
“백색 현왕. 네가 지어다오.”
“응? 내가?”
“그래. 네게 받은 이름을 쓰는 한, 나는 네게 받은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다. 너를 위해 봉사하고, 신의를 다하겠다.”
갑자기 이름이라니?
시혁은 집게손가락으로 옆에 놓인 탁자를 두드렸다.
문득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들었다.
“최지혜라고 하자.”
“최지혜?”
“그래. 넌 아르거스에서 죽음 지혜라고 불렸잖아. 거기서 딴 거야. 성이 필요한데, 죽을 사(死)를 성으로 쓰기는 좀 이상해서 내 성을 따 왔어.”
“최지혜라, 최지혜……”
아르거스의 발음과는 적잖이 차이가 있다.
하지만 델로크, 아니 최지혜는 새로운 이름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표정 근육을 잡아당겨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좋다. 새로운 이름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나야말로.”
최지혜는 빠르게 적응했다.
이전부터 지구에 계속 드나들었던 게 결정적이었다. 그 경험 덕에, 지리산 기지에서 여러 연구 과제에 투입되었다.
자신이 화신으로 써먹었던 계약자의 정보를 알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을 찾아내어, 한지호의 경우처럼 복제된 정신을 모조리 정화했다.
그러는 동안, 지구에서는 아르거스와의 연결을 끊는 것에 대한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
근두운 제작 초기부터 함께 했던 누리 공격대의 이능력자들.
그들이 거의 비슷한 시점에 반신의 시련을 겪게 된 까닭이었다.
< 최지혜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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