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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 세계의 한의사-221화 (221/250)

< 델로크 -2- >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젤시나 다른 언데드들은 뭐가 놀랍냐는 반응을 보였다.

[역천님은 원래 여성체로 태어나셨어요. 그게 왜요?]

하기야 해골 바가지가 남자인지 여자인지가 뭐가 중요할까.

시혁은 내심 쓰게 웃었다.

얼음수정 관에 가까이 다가갔다.

관 안의 여성은 완전히 발가벗은 상태였다. 부장품이라곤 청색 옥을 깎아 만든 인간 조각상과 장신구 여럿, 그리고 작은 병에 든 황금색 물약이 전부였다.

[우와.]

젤시가 감탄을 했다.

[엄청 귀한 것들이에요. 영혼상에 부활의 성약, 역천의 장신구까지 모여 있네요.]

그러면서 말하기를, 이것들은 대상을 되살릴 때 흔히 쓰는 물건이라고 했다. 그 결과는 조금 다르지만, 태양신도 부활의 의식에 쓰곤 한다나.

알면 알수록 참 용의주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어떻게 될 줄 알고 이런 걸 배치했을 줄 누가 알았겠나.

델로크가 이 모양이 되지 않았더라면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다. 작은 언데드들이 협조하지 않았을 테고, 접근하는 순간 델로크가 침입자의 존재를 알아챘을 테니까.

[이제 어쩌죠?]

젤시가 날개를 파닥였다.

얼음수정 관은 굉장히 무거운데다 이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걸 밖으로 꺼내기는 힘들어 보였다.

결국 이곳에서 남은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뜻.

먼저 뚜껑부터 열게 했다.

뚜껑을 여는 것은 쉬웠다. 젤시와 작은 언데드들이 힘을 합쳐 금방 끌어내렸다.

냉기가 화악 번졌다.

부장품 중 영혼상을 사용하면 델로크의 영혼이 이 몸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장담할 수는 없다.

영혼상이 죽음 지혜의 영혼을 불러들이는 힘이, 죽음 왕좌가 영혼을 속박하는 힘보다 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궁리하다가 한 가지 방안을 생각해냈다.

아르거스와 아일리케, 양쪽에서 흔들면 어떨까?

아일리케에서는 불러들이고, 아르거스에서는 밀고.

그게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시혁은 젤시에게 당부를 했다.

[문 닫고 조금만 기다려. 아르거스에 좀 다녀와야겠다.]

[언제 오세요?]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두 곳에서 동시에 작업을 하려면 아르거스에 가는 게 좋다. 지구에서 두 곳에 접속하기는 힘들지만, 세계수 안에 의식을 옮긴 다음에는 아일리케에 접속한 채 아르거스의 분신을 움직이는 게 가능하니까.

마침 시간이 꽤 지나 밤이 되어 있었다.

아르거스로 들어간 후, 세계수로 의식을 옮겼다.

아일리케의 분신에 재접속하는 한편, 아르거스에 있는 분신 중 하나를 활성화시켰다.

신역 망혼산으로 보냈다.

모종의 조치를 취했다. 시혁이 개입했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불사 장로처럼 꾸민 것이다.

심장도 죽음 속성의 보석을 썼다. 마법도 사령 마법만 쓰기로 했다. 그 상태로 죽음 왕좌에 잠입했다.

죽음의 마나가 시혁을 반기듯 한 차례 훑고 지나갔다.

잠시 고민에 잠겼다.

기세 좋게 아르거스에 온 것까진 좋은데, 어떻게 해야 죽음 지혜의 영혼을 흔들지 막막했던 것이다.

죽음 왕좌를 돌아다니다 보니 해결책이 보였다.

현재 망혼산의 언데드들은 권력 개편이 한참이었다. 델로크가 직접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만큼, 여기서 승리하는 자가 권력을 틀어쥘 테니까.

정쟁이 격화되는지,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크게 두 개의 세력.

불사회와 파멸회.

불사회는 마법사들이 주축이고, 파멸회는 기사들이 주축이었다. 그 밖에 망령회와 시체회도 있으나 세력이 좀 약했다. 몇 조각으로 갈라져 불사회와 파멸회에 흡수되는 분위기였다.

“재미있지 않아?”

우연히 만난 시체 골렘 영웅이 시혁에게 물었다.

“아주 개판이라니까. 덕분에 반신들은 사자를 보낼 생각을 하지도 않고 있어. 대신 의뢰는 많아서, 막 입문한 영웅들이 몰려오고 있지.”

“그런 것 같아.”

시혁은 창밖을 내다보며 대답했다.

이곳은 죽음 왕좌의 심장부다.

박제된 신에게는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불사회와 파멸회가 거리에서 맞붙고 있었다.

죽음의 기사가 돌진하고, 불사 마법사가 뼈의 벽을 세웠다. 거대한 뼈 골렘이 일어서고, 해골 기사들이 나란히 거창 돌격을 하고 있었다.

델로크가 원주민 왕을 세우지 않고, 권력을 분산시킨 후유증이라고 할까.

시혁에겐 잘 된 일이다.

혼란을 부채질하다 보면, 죽음 왕좌를 흔들 기회를 얻지 않겠나.

분신을 하나 더 만들었다.

양쪽 진영에 참가하여 기름을 부어주자, 안 그래도 격화되던 대립이 순식간에 절정으로 치달았다.

대규모 난전이 벌어졌다.

곳곳에서 죽고 죽였다. 죽음의 마나가 충만한 까닭에 얼마 지나지 않고 부활했다. 처음에는 영웅들도 신이 나서 끼어들었으나, 이내 곧 질려 신역을 떠나고 말았다.

시혁이 바라던 순간.

제 3의 분신을 투입했다. 이번에는 은밀성을 극도로 강화한 분신이었다. 그걸로 죽음 왕좌 곳곳을 돌아다니며 까만 구슬을 설치했다.

영혼의 결속력을 흔드는 마법이 담겨 있었다.

일반인이라면 하나만 써도 영혼이 이탈하여 식물인간이 된다. 델로크에게는 그것으로 모자랄 것 같아, 360개의 구슬을 사용하여 마법진까지 만들었다.

언데드들이 최후의 전투를 벌일 때, 시혁은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어어, 뭐야?”

“혼이 분리된다!”

“도망쳐!”

언데드들이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막대한 힘이 방출되었다.

그 힘이 죽음 왕좌를 흔들었다. 영혼의 진동이 일어나며, 죽음 왕좌에서 당황한 음색이 흘러나왔다.

[이게 무슨……]

[더, 더 필요하다. 이걸로는 약해!]

반가운 목소리도 있었다.

델로크.

영혼의 속박이 풀리면서 서서히 깨어나는 모양이다.

아일리케에서도 일을 시작했다.

델로크가 직접 자기 관에 넣어 놓은 부장품.

역천의 장신구를 일일이 채우고 영혼상에 불을 붙였다. 희끄무레한 연기가 퍼지더니 시체의 콧구멍으로 빨려들어갔다. 마지막으로 부활의 성약까지 복용시켰다.

시혁은 손발이 없어서 작은 언데드들이 수고를 했다.

딱 시간이 맞아떨어졌다.

부활의 성약이 시체의 목으로 넘어간 것과, 아르거스의 마법진이 폭주한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크아악!]

죽음 왕좌에서 긴 비명이 터졌다.

신역 전체가 흔들렸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 같았다. 급기야 왕좌 곳곳이 허물어지기까지 해서, 언데드들도 다툼을 멈추고 왕좌를 쳐다보았다.

검은 기운이 솟구쳤다.

사람 두개골 형상이었다.

죽음 왕좌에서 질척한 촉수 같은 것들이 나왔다. 그게 두개골 형상을 얽어매려고 했지만, 간발의 차이로 두개골이 촉수를 피했다.

쩌렁쩌렁한 광소가 울려퍼졌다.

[으하하하! 드디어 풀려났다! 개 같은 아르거스의 종자들 같으니, 내 오늘의 수모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두개골 형상은 쭉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저 멀리 차원문을 통과하자, 아일리케에서 시체가 눈을 파르르 떨었다.

깨어나는 것 같았다.

눈이 천천히 뜨였다. 처음에는 초점이 맺지 않아 멀거니 천장만 쳐다보더니, 이내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호수처럼 푸른 눈이 시혁을 직시했다.

입 꼬리를 비틀면서 웃는데, 워낙 오래 근육을 쓰지 않아 그런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백색 현왕. 네게 또 신세를 졌다. 고맙다.”

[고맙기는. 그런데 여기 안전한 거 맞아? 네 분신이 네 몸을 장악한 것 같은데.]

“곧 위험해지겠지. 내가 이중삼중으로 방어를 해놨다만 얼마 버티지는 못 할 거다. 그 전에 탈출을 해야지.”

델로크는 가볍게 몸을 풀었다.

얼음수정 관에 손을 대고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관이 네 갈래로 갈라지며 마법진이 하나 드러났다.

공간이동 마법진.

시혁은 한눈에 그 목적지를 알아보았다.

제니스 마도 제국의 수도, 제일리아다.

델로크가 그걸 보고 입맛을 다셨다.

“정말로 이걸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참, 젤시. 멸망은 어떻게 됐지?”

[멸망님은 얼마 전에 사라지셨어요.]

“어째서?”

젤시가 현재 상황을 간략히 설명했다.

결계가 붕괴하여 추종자들이 전멸하고, 거의 모든 언데드가 자유의지를 빼앗겼다고 전하자 델로크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내 영토를 망가뜨리다니…… 제길, 정신을 복사하는 게 아니었어.”

시혁은 가만히 델로크를 재촉했다.

[일단 자리를 피하는 게 좋겠다. 여기 오래 있으면 네 몸에도 좋지 않아. 벌써부터 몸이 붕괴하고 있다.]

델로크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톱 끝이 까맣게 변색되었다. 어쨌든 지금은 생명체이니, 세상에 가득 찬 죽음의 마나에게 영향을 받는 것이다.

끌끌 혀를 찼다.

“이런 몸이라는 걸 잊고 있었군. 좋아, 지금 바로 탈출하지. 젤시, 따라와라.”

[저도요?]

“그래. 그리고 너희들은 당분간 숨어 있도록 해라. 여기에는 굳이 접근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내가 돌아오는 날, 너희들에게 크게 상을 내리마.”

[예, 역천님!]

[기다리겠습니다!]

시혁과 젤시, 델로크 셋이서 마법진을 탔다.

도착한 곳은 커다란 저택이었다.

꽤 많은 하인과 하녀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인간 같지만, 실은 환영 마법이 걸린 언데드들이었다.

말쑥하게 생긴 중년 신사가 델로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설마 역천님이십니까?”

“호오, 너도 여기 와 있었나?”

“그런데 그 육체는 이미 5백 년 전에 버리신 것 아니었습니까? 힘도 다 흩어지신 듯한데……”

신사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델로크는 연약한 인간 여성에 불과하다. 간단한 마법이야 쓸 수 있지만, 이전의 강대한 힘을 되찾으려면 적어도 백 년은 걸릴 것이다.

낙담할 만도 하건만, 델로크는 크게 개의치 않은 모습이었다.

“상관없다. 길은 다 알았으니까. 아르거스에 붙잡혀 있는 동안 세계의 비밀도 조금 엿보았지. 나는 단순히 역천이 아니라, 생명과 죽음의 진정한 비밀을 깨달은 생사신으로 거듭날 것이다.”

문제는 시간.

포부는 좋으나, 그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시혁은 한 가지를 지적했다.

[네 땅을 차지한 죽음 왕좌는 자기의 본신을 똑같이 아일리케에 구현하고 있어. 탑을 개조 중이라는 얘기는 들었지? 그게 완성되어 왕좌 형태가 되면 그때는 끝이야. 아르거스의 죽음 왕좌와 비슷한 역할을 할 거야.]

“그게 무슨 말이지?”

[간단해. 아르거스의 죽음 왕좌는 공허 안에 있는 죽음의 힘을 분해해서 일반적인 마나로 만들잖아? 여기 건 좀 달라져. 아일리케의 마나를 죽음의 마나로 만들겠지. 나중에는 오로지 죽음의 마나만 아일리케를 채우게 돼.

그러면 아일리케는 오직 하나의 법칙만 지배하게 되겠지.]

몇 년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자유 의지를 박탈한 언데드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해서, 탑이 순식간에 왕좌 형태로 변하고 있으니까.

델로크는 별 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상관없다. 해결할 방법이 있으니까.”

그러더니 옆에 앉은 중년 신사를 불렀다.

“이봐, 멸망.”

“예, 하명하십시오.”

“널 내 공식적인 후계자로 지명하겠다.”

“예?”

중년 신사, 멸망이 놀란 눈으로 델로크를 쳐다보았다.

시혁도 속으로 의아함을 느꼈다.

웬 후계자?

물론 가능하긴 하다. 멸망은 아직 델로크에게 예속된 처지니까.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독립을 했겠으나, 지금은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델로크는 소파에 길게 몸을 묻었다.

“어쩔 수 없어. 현실적으로 내가 힘을 회복하기 전에 죽음 왕좌가 아일리케를 박살낼 판이니까.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멸망이 내 권좌를 차지하는 게 더 낫지.”

“과연 역천님의 권속들이 저를 따르려고 할까요?”

멸망이 신중한 얼굴로 말하자, 델로크가 코웃음을 쳤다.

“흰소리 할 것 없어. 받아들여. 지금 아일리케는 온통 포화 상태야. 아르거스에서 쏟아져 나온 마나 때문에 신적인 존재들이 너무 많이 나타났어. 새로운 존재가 자리 잡을 곳이 없다. 고생해서 비집고 들어가던가, 아니면 죽

음 왕좌와 싸워서 쟁취하던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 다행히 죽음 왕좌는 막 태어나서 본능밖에 없는 존재니까, 상대하기 어렵진 않을 거다.”

결국 멸망이 후계자 선언을 받아들였다.

무슨 의미가 있냐고?

지금 역천의 영역에 있는 언데드들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다.

힘 자체는 죽음 왕좌가 더 강하지만, 우선 순위는 멸망이 앞선다. 언데드의 계약은 영혼에 새겨지기 마련이고, 멸망이 그것을 인계 받았으니까.

막상막하의 싸움이 될 터.

승리는 더 집요하고 교활하며, 악독한 자가 가져가겠지.

멸망은 잔뜩 고무되었다. 델로크에게 정중히 마지막 인사를 한 후, 동맹군을 소집하기 위해 저택을 떠났다.

시혁은 델로크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델로크, 괜찮겠어?]

델로크가 담담하게 반응했다.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내 몸으론 상대가 안 되니까. 더구나 벌써부터 이상 증세가 보이고 있다.”

[또? 이번에 몸을 빼앗기면 회복하기가 힘들 텐데?]

“맞다. 그래서 젤시 너에게 부탁이 있다.”

[저, 저요?]

젤시가 화들짝 놀랐다.

“그래. 나와 몸을 바꾸자. 내가 다시 몸을 찾아갈 때까지, 꼭 지켜주기 바란다.”

[우와! 진심이세요? 그럴게요! 마법 공부 정도는 해도 되죠?]

“그 정도야 괜찮지. 하지만 내 몸에 이상한 짓을 한다면 나중에 각오하는 게 좋을 것이다.”

[걱정 마세요. 저도 그 정도 머리는 있어요!]

몸을 바꿔서 어쩌려고?

문제는 영혼이다.

아르거스의 죽음 왕좌는 델로크의 영혼을 감지하고 잠식해 오는 거였다. 정신을 복사하지 않았던 현재의 몸이나 젤시의 몸은 속도가 느리지만, 결국 잠식되어 붙잡혀 가게 된다.

델로크가 시혁을 직시했다.

“백색 현왕. 네게도 한 가지 부탁이 있다. 염치없지만, 부디 날 도와줬으면 한다.”

[뭔데 그래?]

“내 영혼을 지구로 옮겨다오.”

순간, 시혁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 델로크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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