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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 세계의 한의사-218화 (218/250)

< 신위 등극 -1- >

시혁은 경이로운 얼굴로 아르거스 행성을 지켜보았다.

지금 이곳은 아르거스 행성 밖의 우주 궤도.

하늘마루를 높이 올린 참이었다. 낫슈바켈과 성역의 주요 원주민들, 그리고 뭇 영웅들까지 탑승해 있었다.

“장관이구나.”

낫슈바켈이 한 마디 툭 던지듯 말을 내뱉었다.

실라가 낫슈바켈의 양 다리를 끌어안았다.

“엄마, 무서워.”

“그래그래, 무서워하지 마렴. 엄마 여기 있어.”

“어휴, 뭐가 무섭다고 그래? 좀 대범하게 있어 봐. 이건 아무 것도 아냐. 넌 공허의 바다 아래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기절 하겠다.”

싱트파헬이 의자에 앉은 채 다리를 까딱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혁은 아르거스 행성을 정신없이 내려다보았다.

세계가 변혁하고 있었다.

죽음 지혜의 성역이 크게 자라났다. 저 멀리 행성 반대쪽에 있던 으깨진 땅이 뭉쳐져서 속속 날아와 하나로 뭉치는 것이다.

아울러 공허의 힘이 크게 약화되었다. 그 안에 포함되어 있던 죽음의 힘이 죽음 지혜의 성역으로 흡수되는 까닭이었다.

여덟 개의 신역이 재배치되었다. 수천 개를 넘는 성역도 그랬다. 원래 있던 자리를 이탈하며 새로운 자리로 나아갔다. 예전보다 각 성역과 신역과의 거리가 가까운 게, 새로운 신의 탄생이 영향을 미친 듯했다.

그러던 중, 행성 중앙 공허의 중심에서 거대한 별이 두둥실 떠올랐다.

질척질척한 느낌의 검은 별이다.

그 별은 죽음 지혜의 성역 중앙으로 파고들었다.

바로 죽음 지혜가 머물고 있을 신전을 향해서.

신전이 박살났다.

대신 죽음의 왕좌가 자라났다.

발밑에는 시체 산을 깔고 앉았다. 의자의 팔걸이는 수많은 인골이 모여 마치 거인의 뼈를 보는 듯했다. 등받이는 두개골을 쌓아올려 만들었고, 회색 유령이 그 위를 배회했다.

왕좌에는 한 존재가 앉아 있다.

고귀하되 천박하고, 거룩하되 사특한 어떤 존재.

시체 같기도 하고 유령 같기도 했다. 보는 순간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존재가 주위를 굽어보았다.

가볍게 손짓을 했다.

성역으로 속속 편입되던 땅의 주민들이 비명을 질렀다.

죽음의 기운이 그들을 덮쳤다.

종족을 가리지 않았다.

몸이 피 모래로 변해 허물어지더니, 잠시 후 죽음에서 부활했다.

다름 아닌 언데드로.

그들은 스스로의 상태를 확인하고 기쁨의 노래를 불렀다. 존재를 찬양하고 엎드려 절을 했다. 이미 영혼까지 존재에게 결박된 것이다.

시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죽음 지혜가 저리 충동적이고 폭압적인 성격이던가?

아니다.

아무리 새로운 힘을 얻었어도 멋대로 발현할 리가 없었다. 먼저 철저히 궁구한 다음에나 조금씩 시전해 보겠지.

시혁이 이상하게 생각할 무렵, 존재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일으켰다.

세상을 굽어보았다.

두 팔을 벌리고 세계를 자신의 것이라고 선언하려는 순간이었다.

어떤 것이 튀어나왔다.

시체처럼 흉측하고, 늪처럼 진득한 그 무엇.

지독한 악의.

혹은 모든 존재를 말살하려는 의지.

그것이 존재를 잠식했다. 죽음 왕좌로부터 천천히 영역을 넓혀 존재의 육체로 타고 올랐다.

존재가 반항했다.

강렬한 기운이 뻗어지지만 소용없었다.

그것이 존재를 장악했다.

존재는 겨우 자신의 자아만 보존했다. 머리에 쓴 왕관에 자아를 몰아넣고, 그곳만 지켰다.

시혁은 그걸 다 지켜보았다.

덕분에 확인할 수 있었다.

방금 전 세계가 재배치되던 와중에, 공허 속에서 어떤 존재가 힐끔 모습을 드러낸 것을.

기괴한 괴수, 혹은 파괴신.

24개의 일그러진 얼굴이 뭉쳐 공처럼 보였다. 얼굴 사이로 팔과 다리, 꼬리와 날개 같은 게 튀어나와 무척 괴상하게 생겼다.

“엄마야!”

느긋하던 싱트파헬이 화들짝 놀랐다.

용수철 튀어 오르듯 의자에서 폴짝 뛰더니, 잽싸게 시혁의 분신 등 뒤로 숨었다.

분신에게 매달린 채 부들부들 떨었다.

“저, 저것 좀 어떻게 해 봐!”

다행히 괴수는 금방 사라졌다.

언제 나타났냐 싶게 공허 속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싱트파헬도 진정했다.

다시 거만한 태도로 의자에 앉아 다리를 까딱거렸다. 그걸 보고 실라가 싱트파헬의 다리를 꼬집었다.

“언니도 무서우면서!”

“아니거든! 안 무섭거든!”

“그런데 다리는 왜 떨어?”

“떨고 싶어서 떤 거거든!”

둘이 잘도 논다.

시혁은 옆에 있던 해골 마법사을 돌아보았다.

“이봐, 괜찮겠어?”

해골 마법사가 두 눈에서 으스스한 광채를 뿌렸다.

“좋지 않군. 파괴적인 욕구가 솟구치고 있다. 그래도 견딜 만하다. 미리 대비를 하길 잘 했어. 세뇌를 못 풀었거나 암흑 황제 이야기를 못 들었다면 나 또한 아르거스에 못 박혀 노예 신세가 됐을 거다.”

죽음 지혜가 마련한 대비책은 간단했다.

자신의 정신을 복사한 후, 죽음 왕좌에 남겨 놓고 영혼을 탈출하는 것이다.

남은 정신은 아르거스가 멸망할 때까지 죽음 왕좌에 남아 있게 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영혼은 아일리케로 돌아갈 수 있다. 거기서 죽음 지혜가 모종의 조치를 취하면, 다시는 아르거스에 올 일이 없겠지.

죽음 지혜가 감회 어린 눈빛을 했다.

“이제 이곳도 끝이군. 많은 것을 배웠다. 갈망하던 신위도 얻었고, 이계의 지식도 많이 배웠으니 다시 올 일은 없다.”

“아르거스에 안 오면, 지구에도 못 오겠는 걸?”

“그렇겠지. 아쉽군. 아르거스를 통하지 않고 지구에 가는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만 결국 찾아내진 못했다. 무사히 신위를 얻은 것으로 만족해야지.”

“어쨌든 축하한다. 네 숙원을 이뤘구나.”

“고맙다. 하지만 갈 길이 멀다. 내 신위는 어디까지나 아르거스의 것이야. 네가 보여준 불멸을 깨달아야만, 완벽히 아일리케의 신이 되겠지.”

“축하드립니다.”

“축하해요.”

죽음 지혜는 아일리케로 돌아갔다.

지금도 거대한 영역을 구축한 상태였다. 이제 신위를 얻었으니, 아일리케에서도 손꼽히는 강자로 거듭날 것이다.

옆에 있던 손문철이 불쑥 말했다.

“죽음 지혜는 모든 걸 다 얻었네요.”

“그런 셈이죠.”

“신위라는 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자기 세계도 아니고, 이세계의 신위인데요.”

“신위를 얻으면 기본적으로 죽질 않습니다. 영혼의 격도 높아지고요. 세계의 법칙을 뜯어고치는 것도 가능하지요. 죽음 지혜는 태양신과 전쟁신에게 핍박받는 처지이니 그게 더 절실했을 겁니다.”

요즘은 손문철과 이미라도 시혁이 제공한 화신을 쓰고 있었다. 비록 다중 사고는 불가능하지만, 이렇게 외유용 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일이 가능했다.

슬슬 세계의 변혁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하늘마루를 하강시켰다.

시혁의 성역도 자리를 옮겨갔다. 기존에는 광명지에 더 가까웠는데 대수림 쪽으로 밀려난 것이다.

성역으로 돌아오자 바뀐 공기가 시혁을 반겼다.

마나가 더 풍부해졌다.

생명이 더욱 풍성하게 움트고 있었다. 주민들의 얼굴에도 생기가 돌고, 두 눈에 총기가 어렸다.

성역 자체가 조금 넓어지기까지 했다. 성향이 다른 신이 탄생한 거라 별로 영향이 없을 줄 알았는데 꽤 의외였다.

주민들이 희망에 차 대화를 나눴다.

“새로운 신께서 탄생하셨나 봐!”

“이제 곧 좋은 세상이 오겠지?”

“암암. 공허를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올 거야!”

좋은 소식만 있지는 않았다.

손문철은 진작 최종 확장을 끝냈는데, 곧 대적자가 지목된다는 사실이 공표된 것이다.

과연 현신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까?

시혁은 가능성이 낮을 거라고 봤다.

손문철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침중한 얼굴로 먼저 말을 했다.

“저는 죽음 지혜 같은 재주가 없습니다. 현신이 공격해 오면 적당히 싸우다 내줄 테니, 위원장님도 하늘마루를 보존하도록 하십시오.”

사실 그게 낫다.

손문철이 신이 되면, 대한민국에서의 인생은 종치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이 이사님은 막 3차 확장을 했다고 했죠?”

“네. 전 멀었어요.”

“전 4차 확장을 했으니 서너 달이 지나면 대적자를 만나게 되겠네요. 미리 대비를 해야겠습니다.”

미루는 방법도 있다.

낫슈바켈이 부탁한 차원 이동을 실행하면 그만이니까.

각국 정상들이 검은 천체 파괴를 결의해도 마찬가지이고.

신위를 얻으면 좋긴 하다. 하지만 시혁은 지금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에, 유명한 이능력자인데 바랄 게 뭐가 더 있겠나.

내친 김에 아일리케의 상황을 확인했다.

이쪽도 술렁이고 있었다.

마법 학교의 교수며 학생들 모두, 죽음 지혜의 신위 등극을 화제로 삼았다.

“역천이 신이 됐다며?”

“맙소사. 세상이 망할 징조로군.”

“도대체 어떻게? 어떤 전조도 보이지 않았잖아. 추종자 수도 턱없이 적고.”

“아르거스에서 됐다고 들었다. 그게 우리 세계에도 영향을 미치는 모양이야.”

“태양신은 뭐하는 거야?”

“예전처럼 세계 대전을 벌이려고 들지는 않겠지?”

“그렇겐 못하지. 이제 역천도 만신전의 조정을 받아야 하니까. 다만 역천이 영역을 넓히려고 할 텐데 그게 걱정이야. 우리 제국의 영토 말고 내어줄 게 또 있겠어?”

“젠장. 위대하신 황제 폐하의 영토를 눈 뜨고 뺏기게 생겼군.”

라무는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신위 경쟁에서 승리하다니, 과연 역천은 역천입니다.”

[하늘에 검은 구름이 진하게 꼈군.]

“역천이 죽음을 거부하고 부활했을 때도 그랬지요. 그때는 나라 하나 정도였습니다만, 이번에는 대륙 전체에 검은 구름이 끼었다고 합니다.”

[그래? 슬슬 델로크에게 돌아가야겠다.]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할 일이 있다.

라무를 보며 말했다.

[오늘 밤 아르거스에 오는 즉시 날 찾아와라. 네 심장에 걸린 금제를 깨뜨리겠다.]

라무가 두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드디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시혁이 바빠서 그렇기도 했고, 라무의 심장에 걸린 금제가 꽤나 복잡해서 그렇기도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시혁이 본신의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점.

마나 생명체를 원격으로 조종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지구만 같았어도 하루면 끝났을 문제를, 조심조심 마법진을 새겨 가며 금제를 파악해야 했다.

금제의 정체는 간단했다.

심장 석화.

조건은 오로지 하나였다.

금제의 명령권을 가진 이가 마법을 사용하면 발동했다. 심장을 돌로 만들고, 라무를 단숨에 죽이는 것이다.

그 밖에는 보안 마법 말고는 뭐가 없었다. 라무가 어떤 생각을 하든, 칼을 거꾸로 쥐어 반역을 하든 작동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시혁은 라무에게 천천히 설명을 했다.

[나는 아르거스에서 금제에 대한 대응 마법을 걸 것이다. 그것을 차원 전이시켜서, 네게 걸린 금제를 변형시키겠다.]

“해제하는 게 아니고요?”

[그래. 완전히 해제할 수는 있다만 그렇게 하면 네게 금제를 건 자도 그 사실을 알지 않겠느냐? 약간, 아주 약간 변형시킬 생각이다. 네 금제는 특정한 마법의 파장에 반응하여 작동한다. 그 결과만 좀 뒤틀려고 한다. 네 심장

을 석화시키는 게 아니라, 가볍게 한 번 박동하게 만들면 어떻겠느냐?]

두 가지 이점이 있다.

아무리 상대가 마법을 발동해도 실질적인 피해가 없게 된다. 또, 라무가 죽었을 줄 알고 상대가 방심하게 하는 효과도 얻는다.

처음에는 다소 떨떠름한 기색이더니, 설명을 해주자 라무의 얼굴이 서서히 펴졌다.

짐짓 감탄하는 얼굴로 말했다.

“과연 백색 현왕님이십니다. 그게 좋겠습니다. 제게 금제를 강요한 자에게 복수를 할 수도 있겠습니다. 궁정마법사가 이건 절대로 못 푼다고 자신을 하더니, 현왕님에게는 미치지 못한 모양입니다.”

[델로크의 지식이 큰 역할을 했다. 차원 전이를 쓰는 게 아니라면 이렇게 쉽게 끝내진 못해. 보안 마법이 같이 걸려 있어서, 잘못 건드리면 그 즉시 마법이 발동하거든.]

“예. 저도 그래서 손도 못 대고 있었습니다.”

[오늘 하루는 몸을 조심하도록 해라. 해제 방법을 알았다는 티도 내지 말고. 금제가 풀린 다음에도 마찬가지다. 궁정마법사가 걸었다고 했지? 지금 네 능력으로는 그들과 대적하지 못해. 복수를 하든, 뭘 하든 지금은 참고 견

뎌야 할 때다.]

“예, 백색 현왕님. 그 지혜로운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 신위 등극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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