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흑용 -2- >
장소를 옮겨가며 탐지 마법을 가동했다.
이질적인 것이 하나 잡혔다.
공허와 비슷하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은 무엇. 공허보다 흐릿한 악의와 심연보다 얕은 광기가 느껴졌다.
이게 싱트파헬의 둥지일까?
그쪽으로 다가갔다.
[크아앙!]
엉뚱한 놈이 튀어나왔다.
거대한 지렁이 형상에, 전신에 칼날 같은 가시가 빼곡했다.
까마귀 상단원들이 혼비백산하여 놀랐다.
“공허 마수다!”
“도망쳐야 합니다!”
시혁은 교전을 지시했다.
대부분의 힘은 방어 마법진에 들어가지만 저 정도 마수를 잡을 힘은 있었다. 천사들이 빛의 날개를 펴고 밖으로 나가고, 방어 시설을 작동시키자 금방 마수를 패퇴시켰다.
까마귀 상단원들이 시혁을 칭송했다.
“역시 고귀하신 분이십니다. 저는 고귀하신 분께서 저런 지렁이 따위는 금방 잡아 족치실 거라는 걸 믿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고귀하신 분께 귀순한 게 제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습니다!”
[잔말 말고, 싱트파헬의 둥지에 대해 아는 사실이나 말해 보아라.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좋다.]
상단원들은 자기들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인간 하나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 말했다.
“싱트파헬의 둥지는 계속 공허의 바다를 옮겨 다닌다고 들었습니다. 1달에 1바퀴씩 공허의 바다를 돈다던가요?”
“맞아. 나도 그런 소리를 들었어.”
“내가 듣기로는 바다 정중앙에 있다고 하던데?”
“나도 그렇게 들었는데……”
이들만 믿고 있어서는 안 되겠다.
시혁은 탐지용 마나 생명체를 만들었다. 그걸 풀어 사방으로 내보낸 후, 그것들이 보내온 정보를 취합했다.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이 보였다.
공허의 바다는 변두리로 나갈수록 공허가 옅어졌다. 그리고 중심이라 할 부분은 꽤 짙은데, 그 부분이 천천히 원을 그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바로 저곳이 바다 정중앙인가 보다.
그곳에 싱트파헬의 둥지가 있겠지. 고정되지 않고 움직이고 있어 금방 찾지 못했던 모양이다.
과연 그러했다.
가까이 가자 싱트파헬의 둥지가 탐지되었다.
기괴하게 변형된 짐승의 뼈로 만든 거대한 구조물. 아무래도 공허 마수의 뼈 같았다.
적당한 거리에서 정지했다.
가만히 흰 깃발을 올리자, 둥지에서 반응이 있었다.
호통치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는 누구냐? 감히 나 위대한 싱트파헬의 영역에 발을 들이다니,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보구나!]
시혁은 담담하게 용건을 밝혔다.
[그대가 암흑용 싱트파헬인가? 나는 공허의 바다 바깥에서 온 반신 백색 현왕이다. 내게 필요한 보물을 그대가 가지고 있다 해서 그걸 구입하려고 왔다.]
[흐음, 반신이라고?]
싱트파헬의 목소리가 한 풀 꺾였다.
공허의 바다 바깥에서 왔다는 게 관심을 끈 것 같았다.
얼마 동안 더 말이 없더니, 싱트파헬의 둥지가 흐릿한 검은빛으로 반짝였다.
[좋다. 말이라도 해보도록 하지. 내 둥지로 들어와라. 아, 그 요새는 거기 놔두고.]
시혁 혼자 가기로 했다.
지금 시혁은 화신에 불과하니까. 싱트파헬이 수작을 부려도 골렘 하나 박살나는 것에 불과하다.
심장에서 육색 저항체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 상태 그대로, 비행 마법을 사용하여 싱트파헬의 둥지로 향했다.
둥지의 문이 열렸다.
하늘마루가 통째로 들어갈 정도의 거대한 크기.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자연스럽게 불이 켜졌다.
거대한 보물 창고였다.
온갖 금은보화와 마법 무구가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양으로만 따지면 낫슈바켈의 보물 창고와 맞먹었다. 다만 정돈되지 않고 혼란한 상태라, 원하는 물건을 찾기는 힘들었다.
그 중 산처럼 쌓인 금화 위에 한 존재가 누워 있었다.
인간 형체.
키는 작고 몸이 깡말랐다. 흑단 같은 머리칼을 제멋대로 늘어뜨리고, 까만 흑요석 같은 눈으로 시혁을 곁눈질했다.
처음에는 관심 없는 척 하더니, 몸을 살짝 굴려 옆으로 누워 시혁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야, 반신이라더니 제법이네? 기계 골렘 몸으로 직접 탐사를 나왔어?”
[영웅들과 원주민들에게만 맡겨 놓을 수는 없지. 그대가 싱트파헬인가?]
“맞아. 내가 싱트파헬야.”
시혁은 싱트파헬을 찬찬히 관찰했다.
겉보기에는 10대 여고생 같았다. 하긴 싱트파헬은 대재앙 이후 태어났다고 하니 용으로서의 나이를 따져도 그 정도이긴 하다.
싱트파헬은 어울리지 않게 화사한 새끼용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신발도 앙증맞고, 두 손목에 찬 팔찌도 귀엽게 생긴 구름 털실 팔찌였다.
낫슈바켈이 실라에게 가끔 입히던 옷과 비슷하다.
속으로 괴이쩍게 생각했지만 굳이 내색하진 않았다. 뭔가 사연이 있지 싶어서였다.
싱트파헬이 누운 채 다리를 까닥였다.
“그래, 구입하고 싶은 물건이 있다고? 뭔데 그래?”
[순수의 보주와 질서의 막대다. 각각 순수의 관과 질서의 홀 부속품이라고 들었다. 너에게 그 두 가지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순수의 보주? 질서의 막대?”
싱트파헬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 뭔지 알겠다. 내 순수 위성과 질서 수호자 재료로 쓴 것들이잖아. 이거 안 되겠는 걸? 순수 위성과 질서 수호자는 나한테도 소중한 물건이야. 뭘 줘도 못 팔아.”
[방법이 없나?]
“안 돼. 절대로 안 팔 거야. 저 요새를 준다고 해도 마찬가지야.”
싱트파헬이 떼를 쓰듯 말했다.
이거 곤란하다.
무력으로 제압하기도 힘들다. 하늘마루가 전력을 사용할 수 있으면 가능하겠으나, 이곳은 공허의 바다 한복판이니까. 괜히 보물을 빼앗으려다 다 죽는 수가 있었다.
고심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싱트파헬을 달래고 두 보물을 받을 수가 있을까?
[다른 거 뭐 가지고 싶은 거 없나?]
“가지고 싶은 거?”
[그래. 네가 가지고 싶은 게 있다면 내가 찾아주마. 그걸로 교환을 하자. 네 수집을 내가 돕겠다.]
“흐응……”
싱트파헬이 고양이 같은 웃음을 지었다.
이내 웃음을 지우고 빈정거리는 듯한 말을 던졌다.
“내가 갖고 싶은 걸 네가 찾을 수 있을까?”
[말이라도 해보지 그러냐? 어차피 밑져봐야 본전이다.]
“천만에. 너는 내가 원하는 걸 찾을 수 없을 걸. 내가 원하는 건 대재앙 때 죽은 엄마랑 아빠니까.”
순간, 시혁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엄마랑 아빠?
구할 수가 없어서 그런 거냐고?
아니다.
이 말에서, 싱트파헬의 정체를 간파했기 때문이다.
시혁은 믿기 힘들다는 눈으로 싱트파헬을 쳐다보았다.
싱트파헬이 눈살을 찌푸렸다.
“너 왜 그런 눈으로 날 봐?”
[네가 말하는 둘이, 혹시 싱트레아와 베리타스를 말하는 거냐?]
싱트레아.
전대 용왕의 이름이다.
낫슈바켈이 그랬었지.
베리타스의 마법 실력이 워낙 뛰어나서, 당시의 용왕이 자신의 알을 맡기기까지 했다고.
그 용왕의 이름이 바로 싱트레아다.
싱트파헬이 얼굴을 찌푸렸다.
“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알지?”
당연히 알 수밖에.
시혁은 잠깐 망설였다.
자신이 베리타스의 후생이라는 것을 밝혀야 하나?
곧 결정을 내렸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부딪쳐 보기로 했다.
[당연히 알지. 내가 베리타스의 후생이니까.]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전생에 베리타스였다는 뜻이다.]
싱트파헬이 놀라 눈을 부릅떴다.
시혁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다가왔다. 뒤이어 시혁의 주위를 돌며 몇 분 동안이나 계속 관찰했다.
날카로운 눈으로 질문을 던졌다.
“증거 있어? 말로만 베리타스의 후생이라고 주장하면, 아르거스에 베리타스가 천 명은 훌쩍 넘겠다.”
[나와 베리타스의 영혼 파장이 같다. 너도 알겠지만 영혼 파장은 각 영혼마다 다르지 않느냐? 비슷한 영혼은 있을 수 있지만 완벽히 똑같을 수는 없지. 못 믿겠다면 직접 내 성역에 와서 내 영혼 파장을 측정해 봐라.]
싱트파헬의 눈이 흔들렸다.
확신에 찬 말에, 정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손을 뻗어 시혁의 뺨을 만져보고, 머리카락의 냄새를 킁킁 맡아보더니 두 주먹을 꾹 쥐었다.
“좋아. 네 성역에 가서 네 본신을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겠어. 나한테 거짓말을 한 거면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각오하고 있어.”
[거짓말을 한 적이 없으니, 후회할 일도 없다.]
싱트파헬을 데리고 하늘마루로 돌아왔다.
병사들과 영웅들이 경계하는 기색을 보이면서도 싱트파헬을 정중히 맞아들었다.
싱트파헬은 도도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하늘마루 곳곳을 살피는 게 호기심이 드는 모양이었다. 하긴 이런 종류의 구조물은 처음 볼 테니까.
성역으로 되돌아갔다.
순수의 보주나 질서의 막대에 대한 이야기는 굳이 꺼내지 않았다. 일단 시혁의 정체를 알린 다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였다.
대신 질문을 하나 했다.
[싱트파헬. 궁금한 게 있다.]
“뭐야?”
[어째서 베리타스를 아빠라고 생각하는 거지? 넌 온전히 싱트레아의 자식이라고 들었다.]
아르거스의 용들은 기본적으로 양성이다.
다른 종족으로 변신할 때는 남성과 여성 중 하나를 선택하지만, 자식을 낳을 때 굳이 다른 용과 성행위를 할 필요가 없었다.
배우자가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러나 시혁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싱트레아는 홀로 알을 낳았다고 했다. 베리타스가 싱트파헬의 아빠일 확률은 없다는 뜻이다.
싱트파헬이 입을 삐죽였다.
“흥, 모르면 말을 말아. 아빠가 없었으면 난 이 세상에 남아 있지 못했어!”
이게 무슨 말일까?
한 가지 짚이는 게 있었다.
싱트파헬은 암흑용이다. 그 어미인 싱트레아가 황금용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속성이 정반대라는 뜻이다.
베리타스가 뭔가 조치를 취해서 그런 거겠지.
당시 싱트파헬은 알 상태였고, 대재앙을 견딜 능력이 없었으니까.
아니, 이거 뭔가 이상하다.
이 말인즉슨, 베리타스가 대재앙이 발생할 것을 미리 예측했다는 소리 아닌가.
그저 일반적인 방어 마법으로는 대재앙에서 싱트파헬을 보호할 수 없었을 터.
상념에 빠져 있다가 무심결에 한 마디를 했다.
[내 성역에 오면 낫슈바켈이 있다. 그녀가 너와 좋은 이야기 상대가 될 거다.]
“아, 낫슈바켈? 그 멍청한 아줌마? 됐어. 그 아줌마랑 얘기해봤자 나만 열 받지. 그 아줌마도 난 싫다고 할 걸?”
둘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에 대해 묻자, 싱트파헬이 콧방귀를 뀌었다.
“글쎄, 껍질로 자기를 꽁꽁 싸매고 있어서 내가 공허를 힘의 원천으로 삼는 방법을 알려주러 갔었어. 그랬더니 문전박대를 하더라? 나보고 타락했느니 어쩌고저쩌고. 그래서 고생 좀 해보라고 결계에 구멍을 뚫고 도망갔지.
아마 고생 좀 했을 걸?”
시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결계에 구멍을 뚫었다고?
낫슈바켈이 싱트파헬을 보는 즉시 달려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 성역에 도착했다.
밭을 갈던 농부들이 하늘마루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순찰을 돌던 병사들이 경례를 올리는 게 보였다.
싱트파헬이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네 성역에는 여러 종족이 사네?”
[하늘마루의 병사들을 보면 알 텐데? 나는 여섯 개 종족을 거느리고 있다.]
“신기하다. 반신들은 대부분 한 개 종족 정도만 데리고 살던데……”
신전이 있는 마을에 접어들었다.
하늘마루가 정박하자, 영 불퉁한 얼굴의 낫슈바켈이 마중을 나왔다.
“저 돌연변이는 왜 데리고 온 거냐?”
“흥. 꽉 막힌 아줌마가 누구한테 돌연변이래? 어디 한 번 해볼까?”
싱트파헬이 발칵 성을 냈다.
시커먼 기운이 폭발하듯 용솟음쳤다.
낫슈바켈도 지지 않았다.
눈썹을 꿈틀대자 용암 같은 힘이 날개 펼치듯 뿜어졌다.
두 기운이 으르렁대며 힘겨루기를 했다. 그 힘이 어찌나 강한지, 공기가 증발하여 바람이 불고 대지가 진동할 지경이었다.
[그만!]
시혁이 제지했다.
세계 전체가 부르르 떨었다.
목소리에 실린 힘에 낫슈바켈과 싱트파헬 모두 움찔했다.
둘 다 강력한 존재이지만 이곳은 시혁의 성역 안이다. 성역에 있는 한 시혁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 암흑용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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