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 세계의 한의사-215화 (215/250)

< 암흑용 -1- >

4차 확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재료를 구하는 거다.

손문철도 그랬지 않나.

심연의 보석, 오크 군주의 두개골, 천사의 눈물이 필요 했었다. 천사의 눈물을 구하러 시혁이 강찬과 함께 광명지를 방문했고, 그곳에서 아달과 인연을 맺었지.

사실 시혁은 앞서 언급한 물건을 미리 구해 두었다. 그런데 막상 필요한 것은 전혀 다른 물건이었다.

순수의 보주, 악마 군주의 심장, 흡혈귀의 혈정, 세계수의 씨앗, 질서의 막대.

시혁은 머리를 한 차례 흔들었다.

“별 게 다 필요하네.”

악마 군주의 심장이나 흡혈귀의 혈정을 구하는 것은 쉽다. 영웅들에게 현상금을 걸면 될 문제니까. 세계수의 씨앗도 마찬가지였다. 저번에 심은 세계수에서 얻어도 되고.

문제는 순수의 보주와 질서의 막대.

시혁도 처음 들어보는 물건이다.

고민하다가 낫슈바켈을 찾아갔다.

“순수의 보주와 질서의 막대라고?”

[예. 전 처음 듣는 물건입니다. 들어본 적이 있는지요?]

“모르겠다. 나도 처음 듣는다.”

물색 모르는 실라만 놀아달라고 무릎에 매달렸다.

시혁은 입맛을 다셨다.

분신을 써서 아달과 브라이트, 엘프 사령관 데프니르에게도 질문을 했으나 모르는 건 다 마찬가지였다.

단서는 엉뚱한 곳에서 나왔다.

정례 종족 회의에서 그 두 보물의 이름을 듣더니, 마그누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순수의 관과 질서의 홀이 아니고 보주와 막대입니까?”

“그건 또 뭐야?”

“까마득한 옛날에 존재했던 절대자가 가지고 있던 보물이라고 들었습니다. 저도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만……”

듣고 있던 낫슈바켈이 고개를 끄덕였다.

“권세 대종사 카로스의 일곱 보물 중 일부지. 이제 기억이 난다. 최후의 대전에서 카로스의 일곱 보물은 산산이 깨어져 아르거스 전역으로 흩어졌다. 순수의 관에 장식된 보석 중 가장 큰 것을 순수의 보주라 부르고, 질서의

홀의 몸 부분을 질서의 막대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 두 개를 어디서 찾지?

질문을 하자 낫슈바켈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다른 부위는 반신들의 보물 창고를 떠돌고 있다만, 그 두 부위는 아직 발견된 적이 없다. 아직 복구되지 않은 부분에 남아 있을 거다.”

낭패였다.

복구되지 않은 부분은 공허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그나마 신들의 희생으로 생명체들이 살아 있지만, 끔찍한 삶을 살아야 했다.

영웅들에게 의뢰를 넣어 봐야 얼마 못 버티고 되돌아올 터.

하늘마루라면 그곳으로 진입하는 게 가능하다.

거길 한 번 쭉 돌아봐야겠다. 두 보물을 발견하면 좋고, 그게 아니더라도 새로운 이주민들을 데려올 수 있을 것이다.

즉석에서 원정을 선언했다.

대부분 놀란 눈치였지만, 낫슈바켈은 괜찮겠다며 머리를 끄덕였다.

“하늘마루가 있으니 거길 갈 수 있겠지. 그래도 조심해라. 심장에 문제가 생기면 대형사고가 날 것이다.”

[걱정 마세요. 저번에 대대적으로 보강을 해서 매우 튼튼합니다. 낫슈바켈 님 용암 숨결도 몇 번은 견딜 걸요?]

“그렇겠지.”

원정에는 아달과 마그누스, 군터, 수왕 등 성역의 핵심 전력이 대부분 참가했다.

낫슈바켈도 데려가려고 했으나 극구 거절했다.

거의 천 년 가까이 공허 속에서 생활했던 경험 탓에,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절대 싫다는 것이다.

아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시혁의 분신을 몇 집어넣고, 영웅들을 대동한 채 하늘마루를 발진시켰다.

아르거스 행성은 대략 6할 정도 복원된 상태다.

대수림 쪽으로 날아간 후 수십 개의 성역을 지나쳤다. 그러자 공허의 바다가 드넓게 펼쳐졌다.

마그누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기가 공허의 바다입니까? 보기만 해도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전사의 영혼이 약해지는 것 같다.”

“제 아버님은 공허의 바다에서 출생하셨습니다.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고 들었습니다. 해는 뜨지 않고, 먹을 것도 부족하고……”

하늘마루가 고도를 높였다.

공허의 바다 위를 지났다. 가끔 공허의 파도가 몰려오지만, 그 정도는 가뿐히 무시했다.

이 영역의 땅덩어리도 기본적으로 성역, 그리고 신역과 비슷하다. 거대한 섬처럼 공허의 바다 위를 둥실둥실 떠다니는 것이다.

다만 그 동선이 꽤나 불규칙했다. 인접한 섬과 연결되었다가 끊어지고, 하염없이 흘러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24 고신이 주기적으로 만들어내는 빛의 구슬이 중요했다. 그걸 수거해서 작동시켜야, 공허의 침식을 막는 결계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빛의 구슬이 있는 쪽으로 하늘마루를 움직여라.]

“예, 현왕님.”

대단위 탐지 마법을 가동시켰다.

모든 곳이 깜깜한 가운데, 이질적인 빛이 흘러나오는 곳이 있었다.

빛의 구슬이 떠 있는 지점이다.

마침 가까운 곳에 하나가 있어 그쪽으로 날아갔다.

아달이 직접 빛의 구슬을 수거해 왔다.

제법 컸다.

직경 1미터로, 사람 하나가 들어가 웅크릴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시혁은 빛의 구슬을 보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희한하게도, 과거 시혁이 만들었던 칠색 저항체와 비슷한 느낌이 났다.

다만 지금은 죽음의 힘이 빠지고 권세, 철, 바다, 영혼, 파괴, 피의 힘만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육색 저항체라고 할까.

“백색 현왕님. 접근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빛의 구슬을 보고 있자, 아달이 경고를 했다.

[어떤 자들이냐?]

“드워프 다섯, 고블린 셋, 인간 둘로 이뤄진 무리입니다. 무장은 했습니다만 위협적이지는 않습니다.”

시혁은 마법 수정판을 통해 그들을 살펴보았다.

누덕누덕 기운 배에 타고 있었다. 작은 보트인데, 뱃머리에 단 백옥 반신상에서 영롱한 빛이 뿜어졌다. 그 빛이 공허를 밀어내고, 배에 걸린 마법이 작동하여 천천히 전진을 했다.

배에 탄 자들이 하늘마루를 보고 손가락질을 했다. 겁도 없이 하늘마루에 접근하더니,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아달이 시혁을 쳐다보았다.

“현왕님, 어떻게 할까요?”

[얘기나 들어보도록 하자. 하늘마루에 들여라. 단, 병사들을 소집하는 것을 잊지는 말고.]

“예, 현왕님. 응접실로 데려오겠습니다.”

곧 하늘마루의 상부 성문이 열렸다.

무리는 눈치를 보더니 자기들 배를 하늘마루의 상부 갑판에 댔다. 저마다 칼을 가슴 속에 숨긴 채 경계하며 자기들 배에서 내렸다.

천사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하나같이 빛의 날개를 가진 천사들이었다. 그 날개를 본 무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곧 응접실에서 시혁과 대면했다.

시혁은 인간, 오크, 수인족 병사들을 병풍처럼 대동하고 있었다. 모두 중갑을 입고 마법 무기로 무장한 상태라, 처음에는 기세등등하던 자들이 주눅 들어 눈치만 살폈다.

그들을 보며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하늘마루의 주인이자 반신 백색 현왕이다. 너희는 누구냐?]

한참 머뭇거리더니, 개중 다부진 체격의 드워프가 간신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저희는 까마귀 상단입니다. 비루하지만, 공허의 바다에서 빛의 구슬을 주워다 팔아서 먹고 살지요.”

[그런데?]

“아까 전까지 이곳에 빛의 구슬이 있는 것을 발견해서 찾아왔습니다만…… 혹시 고귀하신 분께서 빛의 구슬을 획득하셨는지요?”

[그렇다. 내가 쓸 곳이 있어서 가져왔지.]

“그렇습니까……”

드워프가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시혁은 그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너희가 내게 도움을 준다면, 빛의 구슬 하나 정도는 내어줄 수도 있다.]

“진심이십니까?”

[물론이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기꺼이 고귀하신 분의 제안에 따르겠습니다!”

시혁이 요구한 조건은 간단했다.

공허의 바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길잡이를 해줄 것.

어렵지 않은 조건이었다. 대장 드워프가 당장 승낙했다.

시혁은 협상이 타결된 기념으로 식량 창고에서 빵과 고기, 포도주를 꺼내 대접했다. 그러자 상단 무리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게걸스럽게 음식과 술을 먹고 마셨다.

넌지시 물어보았다.

[식량 사정이 좋지 않은 모양이지?]

“고귀하신 분은 좋은 땅을 가지신 모양입니다. 대부분이 그렇지요. 이런 곱고 부드러운 빵은 특별한 날에나 먹을까 말까 합니다. 딱딱한 귀리빵만 해도 별식이지요. 이끼 죽이나 벌레 수프가 주식입니다.”

[공허의 바다가 생명체가 살기 힘들다고는 들었는데,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야 당연…… 어, 그럼 고귀하신 분께서는 공허의 바다에 살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나는 복구된 아르거스의 성역을 다스리는 반신이다. 내가 찾아야 할 것이 있어서 공허의 바다를 방문했다.]

“아……”

대장 드워프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러더니 별안간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렸다.

심한 사투리를 섞어가며 호소하는데, 그 내용을 들어보니 자기들도 시혁의 성역으로 데려가 달라는 거였다.

다른 이들도 눈치를 보고 얼른 엎드렸다. 손이 발이 되게 빌고, 머리를 쿵쿵 찧으며 울부짖었다.

시혁은 근엄하게 말했다.

[내가 찾는 것은 순수의 보주와 질서의 막대다. 각각 순수의 관과 질서의 홀 부속이라고 들었다. 그것들을 찾는데 공을 세운다면, 너희를 내 성역으로 데려가도록 하겠다.]

상단 무리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두 보물을 찾겠습니다!”

까마귀 상단은 공허의 바다 내를 떠도는 소문에 밝았다. 빛의 구슬을 따라 정처 없이 떠돌다가, 가장 비싼 가격을 제시한 땅에 팔러 가기 때문이다.

그들이 머리를 맞대고 난상 토론을 벌였다.

“순수의 관과 질서의 홀이라고 했지?”

“들어본 적이 있어. 대재앙 전의 인간 마법사가 가지고 있던 보물이래.”

“아, 그 마법사들?”

“그러고 보니까 몇 년 전에 순수 어쩌고 하는 보석이 빛의 구슬 100개로 거래된 적이 있지 않았어?”

“맞아! 암흑용 싱트파헬이 그걸 강탈해 갔지. 그때 아주 대단했잖아.”

“나도 생각이 나. 루트로 영감이 그 일 때문에 홧병 나서 죽었잖아.”

암흑용 싱트파헬?

들어 보니 1천살도 안 된 어린 용이라고 했다. 특이하게도 공허 속을 마음대로 오갈 수가 있다고. 언제든 복구된 세계로 빠져나갈 수 있을 텐데, 그러지 않는 게 이상했다.

고블린 하나가 뺨을 긁었다.

“싱트파헬이 자랑하는 보물 중에 질서의 수호자라는 지팡이가 있는데, 그게 질서의 홀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질서의 수호자?”

“듣기에는 그럴 듯한데……”

일단 가봐야 알겠다.

싱트파헬의 둥지를 향해 하늘마루를 이동시켰다. 까마귀 상단원들이 불안감을 나타냈으나, 공허의 바다를 탈출하고 싶은 욕망이 강한지 도망치진 않았다.

둥지는 공허의 바다 정중앙, 그것도 바다 아래에 위치해 있었다. 하늘마루는 접근할 수 있겠지만, 빛의 날개를 단 천사들도 오래 버티기는 힘들어 보였다.

아달이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진입은 가능합니다만 전투는 자제하는 게 좋겠습니다. 심장의 힘이 5할 이상 공허 방어 마법진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알겠다. 말이 통해야 할 텐데, 걱정이 되는구나.]

까마귀 상단의 말에 의하면 싱트파헬은 성격이 좀 극단적이라고 했다. 마음에 들면 한없이 퍼주지만, 틀어지면 잔인하고 가학적으로 군다고.

잠깐 하늘마루를 점검한 뒤 공허의 바다로 잠수했다.

공허가 출렁였다.

이 지역의 공허는 윗부분과는 차원이 다르게 짙었다. 예전에 장현을 담가서 침식시켰던 곳과 비슷할 정도였다.

더구나 강하할수록 공허의 힘이 강해졌다. 당초 예상과는 다르게, 심장의 힘을 7할 이상 방어 마법진에 써야 할 정도가 되었다.

시혁은 까마귀 상단에게 들은 싱트파헬의 둥지 위치에 하늘마루를 정박시켰다.

탐지 마법을 가동시켰으나 아무 것도 걸리지 않았다.

짙은 안개에 막힌 듯, 깜깜하기 그지없었다.

[여기가 맞나?]

대장 드워프가 우물우물했다.

“그것이…… 싱트파헬의 둥지는 공허의 바다 정중앙에 있다고만……”

이들도 정확히는 모르는 모양이다.

< 암흑용 -1-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