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 세계의 한의사-214화 (214/250)

< 화산 전갈 길누아 >

성역 전체가 뒤틀리며 울부짖었다.

그 파장이 매우 격렬했다.

성역에 머무르고 있던 시혁도 그걸 느꼈다. 하늘마루의 심장이 파장에 공명한 까닭이었다.

즉각 의식을 하늘마루로 옮겼다.

그것을 느꼈는지, 죽음 지혜가 말을 걸어왔다.

[강력한 존재가 다가오고 있다.]

[누구야?]

[불의 힘을 가진 존재다. 길누아 같다.]

[좋아. 우리가 바라던 녀석이네. 연습한 대로만 하자. 신이 되는 걸 미리 축하한다.]

[고맙다. 반드시 길누아를 쓰러뜨려 신이 되고 말겠다.]

죽음 지혜가 다짐하듯 말했다.

사실 시혁은 걱정이 좀 되었다.

암흑 황제의 처지를 봤기 때문이다. 박제된 채 공허만 흡수하여 정화하고 있던 그 상태를.

그래서 만류도 해봤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세뇌도 이미 풀었을 텐데 꼭 신위를 얻어야겠다고 했다. 신역에 박제되는 것은 자기도 대책이 있다고.

다만 시혁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젤시를 찾아다오.]

[젤시는 왜?]

[내가 역천의 법을 깨닫고 가장 먼저 만든 게 젤시다. 꽤나 공을 들여 만들었지. 젤시를 활용한다면, 내가 어떤 상황에 빠져도 재기를 노릴 수가 있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네게도 크게 감사 표시를 하겠다.]

[그런 걱정은 하지 말고 길누아나 생각해. 길누아한테 지면 네 성역은 1차 확장 수준으로 떨어질 거야.]

[알겠다. 나중 일이니 나중에 생각하도록 하자.]

시혁은 상황실의 중앙 화면을 지켜보았다.

대부분의 화면에는 잡히는 게 없었다. 하늘마루가 공허 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대신 에테르 간파 화면에 붉은 원이 하나 잡혔다.

공허를 뚫고 감지될 정도면 보통 강력한 게 아니다.

죽음 지혜의 신전에 있는 분신의 시야도 활용했다.

성역의 하늘 한쪽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화산이 폭발하기라도 한 듯, 적색 화염이 보호막 너머에서 넘실거렸다.

언데드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비전투원은 대피를 하고, 전투원들은 지정된 자리로 움직였다. 절반 이상이 죽음의 기사, 불사 장로, 피 골렘, 망령 귀족 등 고급 병종이었다. 중급 이하는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기이잉.

땅 속에 숨어 있던 방어 시설들이 솟구쳤다. 특히 곳곳에 고드름처럼 자라난 푸른 탑이 심상치 않았다.

“크아앙!”

해골용들이 편대 비행을 했다.

무려 9마리.

그 뒤를 따라 해골 비룡이 날아갔다. 최소한 수백 기는 되고, 위에 죽음의 기사와 흑마법사를 태워서 이들의 전력만 해도 상당했다.

죽음 지혜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를 한 것 같았다. 여기에 하늘마루까지 더해지면 결코 쉽게 패하지 않을 것이다.

길누아의 존재감이 서서히 가까워졌다.

언데드들도 그것을 느꼈다.

함성을 지르는 대신 조용히 침묵했다. 세계 전체가 죽어버린 듯, 자그마한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성역을 감싼 보호막이 사정없이 찢어졌다.

화염이 폭발하며, 길누아가 그 흉측한 모습을 드러냈다.

길누아가 손에 든 삼지창을 휘두르며 외쳤다.

[죽음 지혜! 신이 되고 싶으냐? 그렇다면 나를 넘어야 한다. 어디, 분출하는 화산을 막아 보아라!]

이름처럼 전갈을 닮았다.

하체는 전갈, 상체는 악마.

손에 든 삼지창에서는 시뻘건 용암이 쉬지 않고 분출되었다. 아랫배에서는 전갈 형태의 악마들이 태어났다. 절반은 날개가 있고, 나머지 절반은 커다란 집게발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길누아가 들어오자마자 세계가 불타기 시작했다.

서 있는 곳부터 땅이 쩍쩍 갈라지고 용암이 분출했다. 화산재가 자욱이 터져 나왔다. 존재만으로도 죽음 지혜의 성역을 박살내 버릴 듯했다.

익히 예상했던 상황.

죽음 지혜가 코웃음을 쳤다.

[그럴 줄 알았다.]

성역 전체에서 청색 광채가 번뜩였다.

고드름처럼 생긴 방어 시설에 깃든 마법이 발동했다.

절대 영도.

성역 전체의 기온을 획기적으로 낮춘 것이다.

덕택에 세계가 꽁꽁 얼어붙었다.

분출하던 용암이 싸늘하게 식고, 화산재도 그저 돌이 되었다. 세계를 불사르려던 화염도 사라졌다.

동시에 방어 병력들의 몸에서 그걸 중화하는 녹색 광채가 반짝였다. 원래대로라면 모두 얼어붙어서 꼼짝을 못하게 되지만, 시혁과 죽음 지혜가 머리를 맞댄 결과 이런 걸 만들어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광량한 음성이 세계 전체에 울려 퍼졌다.

[모두 돌격하라!]

시작은 언데드 군대부터.

피 골렘과 뼈 골렘이 대열을 맞추어 전진했다. 시체 골렘들이 그 뒤를 받쳤다. 하나 같이 진귀한 무구로 무장하고 있어서 위압감이 폴폴 넘쳐흘렀다.

그 뒤로는 마법사들이 자리를 잡았다. 사령술사와 불사 장로들이었다. 골렘들을 지원할 준비가 끝이 났다.

죽음의 기사들은 해골마를 타고 창을 높이 들어올렸다. 안광이 섬뜩하게 빛나는 게, 기회만 있으면 거창 돌격을 해서 치명타를 입힐 것 같다.

길누아가 기가 찬 듯 콧방귀를 뀌었다.

[제법 준비를 했구나.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지, 암! 사랑스런 나의 아이들아, 저 시체들을 불태워 화염지옥에 던져 버려라!]

전갈 악마들이 벌떼처럼 튀어나갔다.

집게발 전갈들은 땅을 질주했다. 날개 전갈들이 하늘을 번개처럼 가로질렀다. 워낙 수가 많아서 검은 구름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죽음 지혜는 차분히 맞섰다.

골렘들로 전갈들의 질주를 막았다. 해골 비룡들도 공중전을 시작했다. 사령 마법이 그들을 지원하는 가운데, 해골용들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죽어라!]

길누아가 삼지창을 길게 뻗었다.

진득한 용암 세례가 날아왔다.

거기 닿았다간 해골용이고 죽음의 기사고 모조리 쓸려 나갈 판이다.

죽음 지혜가 직접 대처했다.

돌연 오색의 광채가 솟구쳤다.

자기 나름대로 해석한 오행 순환체.

그 힘이 폭발적으로 자라났다. 영구한 순환을 이뤘다. 세상에 얼어붙은 별을 구현하자, 용암은 그 별을 뚫지 못하고 막히고 말았다.

길누아가 대노하여 소리쳤다.

[이놈! 감히 내 앞에서 그 따위 힘을 사용하다니! 모리에타와는 무슨 관계냐?]

얼음 도마뱀 모리에타의 신자라도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죽음 지혜는 대답하지 않았다.

휘하 군대를 지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죽음의 기사들이 거창 돌격을 해 길누아의 옆구리를 공격하고, 머리 위에서는 강화된 냉기 숨결이 쏟아졌다.

시혁도 서서히 긴장을 했다.

전투가 점입가경으로 들어가고 있다.

곧 하늘마루를 출격시켜야 한다는 이야기다.

길누아가 광분하여 마구 땅을 짓밟았다.

[죽어라, 죽어! 죽어!]

현신은 역시 현신이다.

길누아의 발밑에서 용암이 분출했다. 용암이 길누아의 전신을 뒤덮었다. 기세 좋게 돌진하던 죽음의 기사들이 화들짝 놀라 말머리를 돌렸다.

어디 그뿐이냐.

길누아가 팔을 힘껏 뒤로 젖혔다.

삼지창을 던졌다.

검은 하늘에, 유성과 같은 붉은 선이 그어졌다.

위기를 느낀 죽음 지혜가 삼지창의 궤적을 간신히 뒤틀었다. 그 바람에 방향이 틀어졌다. 당초 길누아가 노렸던 신전이 아닌, 한참 옆의 요새에 직격한 것이다.

꽈르릉!

천지가 붕괴하는 듯한 굉음이 터졌다.

땅이 갈라졌다.

용암이 분출했다.

동시에 지각이 위로 튀어올랐다.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작은 화산 하나가 생겼다.

화산은 신전 주위의 도시를 절반 이상 파괴했다.

그것만으로도 경악할 노릇인데, 한 가지 더 끔찍한 사실이 있었다.

화산 속에서 길누아의 권속들이 폭죽처럼 튀어나왔다.

길누아가 낳던 전갈 모양 악마들만이 아니다.

거미, 전갈, 진드기, 집게벌레 등등.

화산 자체가 일종의 차원문 역할을 하는 듯했다. 죽음 지혜가 대단위 빙결 이적을 사용했으나 끄떡도 하지 않았다.

길누아에게도 상당히 강력한 기술인가 보다.

다소 지친 기색이었다. 대신 온도가 확실하게 올라갔다. 길누아의 성지에서 용암의 마나가 흘러나와, 죽음 지혜의 성역을 차츰 잠식하고 있었다.

시혁은 직감적으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이 승부의 분수령이라는 것.

[참전하겠다.]

한 마디를 선언한 뒤, 하늘마루를 진격시켰다.

하늘마루에 머물던 분신으로 명령을 내리자, 아달이 소리를 높여 외쳤다.

“진격하라! 주포를 충전하되,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여라! 죽음 지혜의 성역에 진입하는 즉시, 주포를 발사하겠다!”

천천히 전진했다.

이동 속도는 느렸다. 은밀함을 유지하면서 주포를 충전하는 게 쉽지는 않았으니까.

죽음 지혜는 잘 버텼다.

신전까지 용암이 밀려들어 왔지만 어떻게든 막아내고 있었다. 대신 그 와중에 병력들이 차츰 소모되는 게, 무한정 방어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그렇게 준비를 하고도 이 정도라니……

과연 현신은 현신.

하지만 이제부터는 얘기가 달라질 것이다.

하늘마루가 도착했다.

길누아가 한참 날뛰던 순간이었다.

정확히 그 배후로 돌아갔다. 때마침 죽음 지혜가 강공을 퍼붓는 탓에, 길누아는 하늘마루의 난입을 감지하지 못하고 말았다.

하늘마루의 주포가 길누아의 뒤통수를 정조준 했다.

“발사!”

아달의 명령과 함께 주포가 작동했다.

쿠구구구궁.

파멸적인 빛이 쏟아졌다.

고룡의 숨결보다 훨씬 더 강력한 공격이다. 폭격하듯 길누아를 강타하자, 그 몸이 갈가리 찢어졌다.

끔찍한 비명이 터졌다.

[끄아아아! 이건 뭐냐!]

척 보기에도 심각한 상처.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하늘마루에서 천사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천사들은 길누아를 직접 공격했다. 위험도 무릅쓴 채, 눈이 벌게져 신성 마법과 성 속성의 마나탄을 뿌려댔다.

모든 방어 시설을 작동시켰다. 마법 대포가 불을 뿜고, 기계 석궁이 번개처럼 화살을 날려댔다. 방어막이 작동하여 이어질 반격을 대비했다.

죽음 지혜도 가세했다.

중첩 저주를 순식간에 66개나 뿌렸다.

하나하나는 별 것이 아니었으나, 일단 완성되자 길누아의 속성이 반전되어 화산신이 아닌 빙하신이 되었다. 길누아는 순간 당황하고 어이가 없어 아무 행동도 못했다.

대신 권속들이 방어하려고 달려들었다.

날개를 단 권속들은 천사와 하늘마루를 공격했다. 지상의 권속들은 죽음 지혜의 군대를 상대했다.

[반격하라!]

시혁은 인간과 오크, 수인족 병사들을 동원했다.

하늘마루의 방어 시설이 치열하게 마법 공격을 퍼부었다. 벽을 뚫고 들어온 악마들과 혈전이 벌어졌다. 곳곳에 피가 뿌려지고 시체가 널브러졌다.

전투는 꼬박 하루 동안 전개되었다.

결과는 시혁과 죽음 지혜의 승리.

성역의 기온이 절대 영도까지 떨어졌다는 점, 하늘마루의 주포를 무방비 상태에서 얻어맞았다는 점, 중첩 저주가 제대로 먹혀들었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길누아의 목이 잘렸다.

심장이 있어야 할 곳에는 구멍이 뻥 뚫렸다.

사지는 잘려나갔고, 전갈 꼬리는 가루가 되어 소멸되었다.

길누아가 길게 한탄을 했다.

[내가 하잘 것 없는 필멸자들에게 죽을 줄이야……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내가 부활하는 즉시, 죽음 지혜 네놈의 성역을 다시 방문할 것이다. 그때는 이렇게 쉽게 끝날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지금 죽인 것은 단지 길누아의 육체일 뿐.

시간이 지나면 길누아는 자신의 신전에서 부활한다. 그 전에 죽음 지혜는 신위 경쟁을 끝마쳐야 했다.

죽음 지혜가 냉소를 날렸다.

[네가 깨어났을 때, 네 앞에는 내 궁전이 건설되어 있을 것이다. 기대해도 좋다.]

[흥!]

길누아는 콧방귀만 뀌었다.

그것으로 종료.

길누아의 육체가 불덩이가 되어 사라졌다.

시혁은 죽음 지혜에게 축하 전언을 날렸다.

[축하한다. 가장 큰 산을 넘었구나.]

죽음 지혜도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맙다. 네 덕분이다. 네가 아니었다면 길누아와의 전투에서 패배했을 것이다.]

[네가 곧 신이 되겠지? 조심해. 그리고 신이 된 다음 상황에 대해서 나한테 알려주고.]

아직은 큰 변화가 없다.

용암 마군의 타락이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모양이었다.

죽음 지혜의 신위 등극보다, 시혁의 성역이 4차 확장 단계에 접어드는 게 더 빨랐다.

< 화산 전갈 길누아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