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일리케 -3- >
[지구 출신이다. 아는지 모르겠군. 마나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곳이지.]
[어딘지 알겠습니다. 지구 출신 영웅과 같은 반신에게 임관한 적이 있어서요. 기계 문명이 발달한 곳이라지요? 그럼 귀하는 아르거스에서는 어디 계십니까?]
[나는 권세 진영의 반신, 백색 현왕이다. 내 성역은 광명지와 대수림 사이에 있지. 영웅일 때는 오색 현자라 불렸다. 엘프들과 적색 고룡 낫슈바켈의 분쟁을 중재했고, 다크 엘프 황태자의 광증을 치료한 적이 있다.]
[아, 오색 현자!]
라무가 탄성을 질렀다.
[반신이 됐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만 권세 진영일 줄은 몰랐습니다.]
[네 칭호는 뭐지?]
[정신 압제자입니다. 지금은 신령 왕자에게 임관했습니다.]
[영혼술사에서 진화한 거냐? 왜 고급 병종까지 전직하지 않고?]
[전 배운 게 없는 몸이라 기본 병종에서 시작했습니다. 상급 병종이 한계였지요.]
라무가 씁쓸하게 웃었다.
하긴 노예 출신이라고 했지.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눈 뒤, 라무가 묘한 눈으로 시혁을 쳐다보았다.
[현왕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제 짐작이 맞는 것 같습니다. 현왕께서도 아르거스를 온전히 기억하시는 거지요?]
[맞다.]
[역시!]
라무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 같은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입니다. 현왕님은 아르거스에 가신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2년이 조금 넘었지. 1년 만에 영웅이 되었고, 다시 1년 만에 반신이 되었다.]
[저보다 빠르십니다. 전 벌써 3년이 지났습니다.]
[3년? 아하, 영혼 진영에서 소환되었다고 했지? 그럴 만도 하다.]
[제가 아르거스를 매일 오갈 수 있다는 걸 깨닫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거의 1년을 허비했지요.]
[지금은 무슨 계급이지?]
[군주 계급입니다.]
[상당한데. 몇 달 뒤에는 반신이 되겠어. 전장에는 자주 가나?]
[임관한 반신의 방문 주기가 닷새라서 힘듭니다. 반신들에게 임시 임관을 청해서 전장에 가기는 합니다만, 쉽지 않았지요.]
시혁도 공감했다.
처음 영웅이 되었을 때 느꼈던 거니까.
그나마 나중에는 근두운을 만들어서 해결했다. 손문철도 매일같이 아르거스에 가니까, 정 뭐하면 손문철에게 임관하면 됐다.
넌지시 물어보았다.
[마도 제국에서는 지원이 없나? 네 방문 주기가 1일이고, 기억을 보존하는 점까지 감안하면 밀어줄 법도 한데.]
라무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보안 장치를 힐끗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 출신이 미천하여 지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아……
듣는 즉시 납득했다.
아일리케는 찬란한 마도 문명을 건설한 세계이나, 여전히 신분제가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다른 곳으로 가면 되지 않나? 델로크도 널 거두고 싶어하는 눈치던데.]
라무는 불가능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마도 제국은 라무를 해방시켰다. 라무를 노예로 부리던 상인을 처벌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한 가지 금제를 했다.
바로 심장에다가.
본인도 신분제가 없는 공화국이나 신적인 존재 휘하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마도 제국을 떠났다간 심장이 박살나 죽을 판이다. 어찌 모험을 감수할 수 있겠나.
시혁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심장의 금제?
이미 아르거스 신들의 세뇌를 푼 시혁이다. 그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해제할 수 있었다.
단 지금은 불가능하다.
화신으로 쓰고 있는 마나 생명체가 너무나 연약하니까. 마법도 복잡한 건 못 쓰고 비행이나 통역 마법을 고작 아닌가.
하지만 라무의 금제를 풀어준다고 시혁이 득 볼 게 없다.
죽음 지혜만 좋아하겠지. 시혁과의 인연을 빌미 삼아 라무의 호의를 사는 거야, 아주 간단한 일이다.
한동안 얘기를 나누다가, 라무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전 곧 탑에 들어가 봐야 합니다. 저녁 일정이 있어서요. 나머지 이야기는 아르거스에서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좋지. 마법도와 천상도를 거쳐서 광명지로 와라. 천상 관문 통과 권한은 있나?]
[제가 선 성향 신역에서는 활동하질 않아서 없습니다.]
[미리 사자를 보내 놓으마. 천상 관문을 타면 금방 도착할 거다.]
[현왕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라무가 정중히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시혁도 이제 접속을 끊어야 할 시간이다.
젤시를 부르자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다가왔다.
[담화는 즐거우셨어요?]
[응. 고맙다. 난 내 세계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내일 아침에 다시 올게.]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제가 해야 할 게 있나요?]
[아니. 특별한 건 없어. 내 몸만 잘 지켜줘. 이게 소멸되면 난 여기로 오기가 힘들거든.]
[네. 걱정마세요. 제가 소멸되는 한이 있더라도 시혁 님의 화신을 반드시 지키겠어요.]
젤시가 결의에 찬 태도로 말했다.
사실 소멸되어도 괜찮지만, 시혁은 고맙다는 말만 했다.
지구로 돌아왔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접속을 끊었다.
약간 어지러웠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래도 속이 미식거리거나 그러지는 않는 게, 건강에 심각한 문제는 없는 듯했다.
시혁이 접속을 끊었다는 얘기는 금방 퍼졌다.
지리산에 와 있던 손문철과 이미라, 그 외 주요 이능력자들이 모여들었다.
“이사님! 좀 어떠셨습니까?”
“아일리케는 어떤 곳이에요? 아르거스랑 비슷한가요?”
“얘기 좀 해주세요!”
시혁은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얼른 아르거스로 가야 했다. 라무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이다.
“제가 나중에 공식적으로 보고서를 쓰겠습니다. 그걸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밤도 늦었으니, 슬슬 아르거스에 가도록 하지요.”
“하긴 벌써 밤 9시에요.”
“이사님 피곤하실 테니 좀 쉬다 가시려면 그래야겠네요.”
씻고 밥도 먹었다.
잠자리에 들 때는 벌써 밤 11시가 넘어 있었다. 아르거스에서는 벌써 하루가 지났을 테니, 어쩌면 좀 늦을지도 모르겠다.
아르거스에서 눈을 뜨자마자, 광명지의 하늘 도시로 파견 보낸 사자와 의식을 연결했다.
사자가 화들짝 놀랐다.
[허억, 백색 현왕님! 어쩐 일이십니까?]
주민 이주도 끝나고 영웅 등용도 필요 없어서 놀고 있었나 보다.
시혁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지시할 일이 있다.]
[예, 예! 말씀만 하십시오!]
[백금 장성으로 가라. 그곳에 정신 압제자라는 능란 계급 영웅이 있을 것이다. 그 자를 데리고 내 성역으로 와라. 혹시 없으면 조금 기다리도록 하고.]
[예, 그리 하겠습니다.]
라무와 금방 연락이 닿았다.
곧 천상 관문을 타고 시혁의 성역으로 오겠다고 했다. 성역에서 가까운 곳에 광해 도시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서 출발하면 금방이라는 것이다.
몇 시간 후, 시혁은 라무가 성역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영혼 진영 출신답지 않게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보석 박힌 지팡이에, 금실 은실로 짠 예복을 입었다. 손가락마다 보석 반지를 끼고, 작은 관도 하나 썼다.
시혁은 내심 의아하게 생각했다.
강력한 보물도 아닌 것 같은데 저리 화려하게 다닐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라무가 감명 깊다는 듯 말했다.
“아르거스에서 현왕님을 뵈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저 천공성도 현왕님께서 직접 만드셨다면서요?”
[그랬지. 구경해 볼 테냐?]
“허락해주신다면, 기꺼이 보고 싶습니다.”
시혁은 라무를 하늘마루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었다.
호기심에 찬 눈을 반짝이며 하늘마루 곳곳을 돌아다녔다. 특히 심장 인근을 지날 때는 스스로의 감각을 의심하기까지 했다.
라무가 마른 침을 삼켰다.
“저건 대체 뭡니까?”
“하늘마루의 심장입니다. 현왕님께서 직접 만드셨지요.”
아달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라무가 조심스러운 얼굴을 했다.
“천공성이 대단한 것은 알겠지만, 저 정도로 강력한 물건이 필요합니까? 제 고향 세계에 있는 신적인 존재들도 저런 걸 가지진 못했을 겁니다.”
“이유는 간단하지요. 이 천공 요새는 공허 속에서 건설되었거든요. 공허 속에서 몇 천 년이든 버틸 수 있습니다. 자급자족도 가능해요.”
엘프들의 기술이 접목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3차 확장 때 많이 확장을 해서, 내부에서 농사를 짓는 것도 가능했다.
라무가 쉬지 않고 경탄했다.
심장을 직접 보고 싶어 했지만 불허했다.
라무도 대종사의 환생일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러나 그 이유 때문에 시혁의 가장 큰 보물을 구경시켜 줄 수는 없었다.
하늘마루를 구경하고, 라무가 시혁의 신전으로 왔다.
부럽다는 듯이 말했다.
“현왕님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저도 많은 반신들을 겪었습니다만, 저런 천공성을 가진 분은 처음입니다.”
[너도 시간이 지나면 가능할 거다. 단, 네 세계의 마법 지식을 충분히 활용해야겠지.]
“아, 혹시 천공성의 심장이 현왕님 세계의 지식에서 비롯된 겁니까?”
[내 고향의 지식으로만 만든 것은 아니지만,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역시……”
라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혁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라무. 네 심장에 새겨진 금제를 풀고 싶은 마음이 없나?]
“어찌 없겠습니까? 제니스 황실은 절 노예에서 풀어주었다고 대단히 생색을 내고 있지만, 지금의 저는 형식만 다를 뿐 노예나 다름이 없습니다.”
[네가 적절한 대가를 낸다면, 나는 네 금제를 풀어줄 용의가 있다.]
“그게 가능합니까? 마법 학교에서 봤던 현왕 님의 화신은 고위 마법을 쓰기 힘들어 보였습니다.”
[가능하다. 이곳에서 대응하는 마법을 네 육신에 먼저 새긴 후, 그걸 아일리케로 전이시키면 된다. 원래는 델로크, 너희가 말하는 역천이 만든 마법이지.]
“아……”
라무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러더니 무릎을 꿇고 신전 내 시혁의 석상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부탁드립니다. 제 금제를 해제시켜 주시면 무엇이든 다 하겠습니다. 개가 되라면 짖고, 목숨을 달라면 바치겠습니다.”
[쯧!]
시혁은 혀를 찼다.
[이봐, 정신 압제자. 그랬다가 내가 다른 금제를 슬쩍 걸면 어쩌려고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하고 판단해야지. 무턱대고 수락부터 하면 되겠나? 내게 이런 걸 해주면, 나는 저런 걸 해주겠다는 식으로 협상을 해야 둘이 동반자가 되어 끝까지 잘 가는 거지, 그렇게 행동
하면 아무리 마법적으로 높은 경지에 올라도 결국 노예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라무는 아무런 말도 못했다.
이미 한 차례 경험했던 일이었으니까.
시혁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맹한 것을 보니 과연 대종사의 환생이 맞나 싶었다. 다른 원인이 있어 아르거스의 기억을 보존한 게 아닐까 생각이 든 것이다.
확인해봐야겠지.
시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네 금제를 풀어주겠다. 대신 너는 네 세계의 마법 지식을 내게 전해주었으면 한다.]
“단지 그걸로 됩니까?”
[쉽게 생각하지 마라. 나는 델로크에게 너희 세계의 마법을 배웠다. 그 정도 수준의 마법을 원한다.]
“아…… 제가 출신이 미천하고 실력이 부족한 터라 그 정도의 마법에는 접근하기 힘듭니다.”
[괜찮다. 네가 아는 수준부터 시작하지. 나도 델로크에게 물어물어 배운 거라 체계적이진 않거든. 대신 앞으로 네가 배우는 모든 마법 지식은 내게도 알려줘야 한다.]
“좋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현왕님께 전하겠습니다.”
정식으로 계약서를 썼다. 마나의 계약이라 강력한 구속력이 있는 물건이었다.
그 다음 성지 안으로 초대했다.
라무가 어색한 얼굴을 하고 들어왔다.
시혁을 보더니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인간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으니까.
검사를 몇 가지 했다.
아일리케에서 정확히 금제에 대해 알아봐야 한다는 조건이 있으나, 충분히 해제할 수 있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 가지 더.
시혁은 슬쩍 필요 없는 검사를 끼워 넣었다.
영혼 파장 검사.
좀 맹한 구석이 있지만, 라무는 열다섯 대종사 중 하나의 환생이 맞았다.
어둠 대종사 녹스.
어쩌면 이 모든 사태를 초래한 장본인의 후생일지도 모르는 인물이, 눈을 멀뚱거리며 시혁을 보고 있었다.
< 아일리케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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