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 세계의 한의사-209화 (209/250)

< 아일리케 -2- >

그야 그렇겠지.

태양신과 전쟁신은 죽음 지혜의 적들일 테니까.

친구, 혹은 동료라 할 수 있는 시혁과는 경우가 다르지 않나.

젤시의 뒤를 따라 도서관으로 갔다.

도서관은 꽤 특이했다.

책이 가득 쌓여 있는 광경을 상상했으나, 책은커녕 해골새들이 긴 횃대에 줄지어 앉아 있었다. 해골새를 선택하면 두 눈에서 음침한 빛을 뿌려 허공에 글을 새기는 것이다.

대부분은 마법 지식 종류.

시혁은 젤시에게 질문을 했다.

[마법 말고, 아일리케의 역사나 신들에 대한 내용은 없어? 델로크의 자서전이나 이런 것도 좋고.]

[당연히 있죠. 시혁 님은 엉뚱한 곳에 관심이 있으시네요? 아래층으로 내려가야 돼요. 절 따라오세요.]

젤시는 시혁을 아래쪽으로 데려갔다.

마주치는 언데드들이 시혁을 보더니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죽음 지혜에게 받은 두개골이 귀중한 물건인 듯했다.

여러 가지 궁금한 것을 물었다.

[아까 태양신과 전쟁신에 대해 말했었지?]

[어, 제가 그랬나요?]

[태양신은 악독하고 전쟁신은 잔인하다고 했잖아.]

[아! 맞아요. 그런데 그게 왜요?]

[궁금해서. 아일리케에는 신들이 많나 보지? 내가 사는 세계에서는 신들의 존재를 느낄 수가 없거든.]

[이상한 세계네요. 그럼요. 아일리케에는 신도 많고 신적인 존재도 많아요. 탑의 주인이신 역천께서도 신적인 존재 중 한 분이신 걸요. 아직 필멸자이긴 하시지만, 조만간 신성을 얻고 불사의 신으로 등극하실 거라고 믿고 있어요.]

젤시가 신들의 이름을 줄줄이 나열했다.

참 많았다.

특징적인 점은 처음부터 신이었던 존재는 적다는 것이다. 죽음 지혜처럼 마법에 통달하거나,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스스로 신위를 얻은 자가 대부분이었다.

젤시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요즘 새롭게 신적 존재가 되신 분도 많아요. 역천님의 휘하 사천왕 중에 암흑대장군이라고 죽음의 기사가 한 명 있거든요? 그 분도 필멸자를 벗어나고 계세요. 곧 역천님과 격이 같아질 거예요. 벌써부터 그 분을 멸망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그러면서 덧붙이길, 최근 차원문을 통해 마나가 많이 유입되어서 그렇다고 했다.

원래 아일리케는 마나가 풍족한 세계였다. 그걸 바탕으로 필멸자들이 불멸자로 거듭나는 경우가 많았다. 요즘은 뭐 말할 것도 없고.

시혁은 슬며시 젤시를 떠보았다.

[아르거스에 대해 많이 알려졌나 봐?]

[그럼요! 아르거스와 아일리케가 연결되고 시간이 꽤 지났는 걸요. 얼마 전에는 아르거스의 일을 생생히 기억하는 사람도 나왔대요!]

뭐라고?

시혁은 순간 몸을 움찔했다.

해골에 갇혀 있는 까닭에 젤시는 시혁의 행동을 눈치 채지 못했다. 계속 부리만 딱딱거렸다.

[원래는 노예였대요! 그러다가 영혼 마법사로 각성하면서 도망쳤고, 지금은 제니스 마도 제국의 마법 학교에 입학해서 마법을 배우고 있답니다.]

[아르거스의 일을 기억한다면 탐내는 사람이 많겠어.]

[그럼요. 역천께서도 그 자를 데려오려고 했었어요. 마도 제국의 황제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바람에 실패했죠.]

그 자를 만나봐야겠다.

시혁처럼 대종사의 환생일 가능성이 높지 않나.

얘기를 들어보니 아직 영웅인 듯했다. 그렇다면 아르거스에서도 충분히 만날 수 있겠지.

아래층 도서관에 도착했다.

시혁은 아일리케의 신들에 대해 중점적으로 살폈다. 특히 신위를 얻는 방법을 찾았다.

생각보다 간단했다.

세계의 비의를 깨닫고, 그걸 체화시켜 자신의 몸을 마나로 재구성하면 된다.

아니, 이건 신위를 얻는 방법이 아니다.

신적인 존재가 되는 방법이다.

죽음 지혜가 그렇게 하지 않았나. 역(逆)과 반(反)의 이치를 깨달아 아일리케 모든 언데드의 대부가 되었지.

여기서 신이 되려면 한 발짝 더 나아가야 했다.

죽음 지혜의 경우에는 불멸.

자신을 신으로 추앙하는 이들도 필요했다. 괜히 탑을 세우고, 결계를 세워 영토를 확보한 게 아니다.

‘나도 가능하려나?’

잠시 보다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막대한 마나가 필요했다.

아일리케에서도 신적인 존재가 태어나면 행성 전체가 술렁이곤 했다. 신이 태어나면 엄청난 변화가 뒤따랐다. 그걸 감당하기에는 지구의 마나가 너무나 모자랐다.

그렇다고 검은 천체를 내버려두면 계속해서 재앙이 잇따를 테고.

고민이 깊어졌다.

[제니스 마도 제국은 여기서 멀어?]

[좀 거리가 있어요. 왜요?]

[아까 말한 그 마법사를 만나보고 싶어서.]

[콧대 높은 사람이라 가능할지 모르겠어요. 신적인 존재의 사자들도 곧잘 퇴짜를 놓는 사람이어서요.]

[델로크에게 소개장이라도 받아가야지. 그리고 이계에서 온 존재가 흔하겠어? 그 점을 부각하면 될 것 같아.]

[하긴 저도 이계에서 오신 손님을 보는 건 처음이에요. 소문으로 들어본 적도 없고요.]

당장 죽음 지혜를 찾아갔다.

시혁의 부탁을 듣더니, 흔쾌히 승낙했다.

[애초에 너의 활동을 최대한 지원하기로 하지 않았느냐? 소개장쯤이야 쉽지. 기왕이면 마법사를 설득해서 내 휘하로 들어오게 하면 좋겠다.]

[장담 못해. 제안은 해보마.]

죽음 지혜는 시혁에게 마차 한 대를 내주었다.

거대한 해골마들이 끄는 마차였다. 뼈로 만든 마차이고, 날개가 달려 하늘을 날아다녔다. 온갖 마나 보석이 박히고, 마법진이 설치되어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젤시가 그걸 보고 부리를 우물거렸다.

[저건 역천님의 전용 마차인데……]

시혁의 화신 접속 장치가 탐나긴 탐났나 보다.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마차에 타자, 해골마들이 길게 울부짖고 허공을 날기 시작했다.

하늘 높이 올라가자 투명한 도로가 나타났다.

그 위를 달렸다.

속도가 기이할 정도로 빨라졌다. 구름이 휙휙 지나가는 게, 거의 지구의 제트기와 비슷할 정도였다.

동행한 젤시에게 묻자, 별 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천공왕이 만든 천공로에요. 아일리케의 주요 도시들을 연결하고 있어요. 이게 나오고 나선 아일리케의 교통이 획기적으로 좋아졌지요.]

[신기하네.]

[시혁 님의 고향 세계에는 이런 게 없나요?]

[응. 대신 비행기가 있지.]

[비행기요?]

[하늘을 나는 기계야. 대충 3백 명에서 4백 명 정도가 타지.]

[그렇게 많이요?]

[별로 많은 건 아니지.]

이런저런 얘길 하며 마차에 탄 채 이동했다.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인간의 육체로 탔으면 참 재미난 경험이었을 텐데, 시각과 청각만 있는 몸이니 뭘 제대로 느낄 수가 없었다.

하긴 그랬으면 당장 호흡 곤란부터 느꼈겠지. 다소 이질적인 아일리케의 지표면을 내려다보며 아쉬움을 달랬다.

몇 시간 뒤 제니스 마도 제국 상공에 도착했다.

시혁이 아일리케에 온지 정확히 8시간이 지난 시점이다. 밤은 지구에서 보내야 할 테니, 4~5시간 정도 더 체류하는 게 한계였다.

젤시가 부리를 까딱였다.

[저기가 제니스의 황도, 제일리아에요.]

황금빛 아름다운 도시였다.

높은 탑들이 하늘을 찌를 듯 서 있었다. 태양이 그 끝에 걸려 있는 게, 지구의 마천루를 보는 것 같았다.

마차가 천공로를 벗어났다. 저절로 속도가 급격히 줄었다. 길게 원을 그리며 제일리아를 향해 낙하하자, 제일리아에서 작은 빛 무리가 날아올랐다.

빛 무리가 해골 마차에 내려앉았다. 작은 요정으로 변하더니, 기계적인 어조로 말했다.

[역천의 마차로군. 제일리아에는 무슨 일이지?]

젤시가 대답했다.

[이분은 이계의 마법사 시혁 님이시다. 역천님의 친구 분이시지. 황립 마법 학교의 라무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방문하셨다.]

[역천의 친구? 이계의 마법사?]

요정이 멍청하게 되물었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으로 시혁을 살피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 밝혀지겠지. 대륙 마도 협정에 따라 착륙을 허가한다. 제 4 착륙지에 착륙하고, 이후 기사들의 안내를 받아라.]

[알았다.]

요정이 빛과 함께 사라졌다.

이제 보니 흔히 말하는 요정 종족이 아니라 마법사의 종복이었나 보다.

해골 마차가 저절로 움직였다.

요정이 말했던 제 4 착륙지에 내려앉자, 중무장한 기사들이 여럿 다가왔다.

장비가 특이했다.

중세의 갑옷이 아니라 SF 영화의 전투복을 보는 듯했다. 날렵하면서 희미한 빛이 어린 무구로 장비하고 있었다. 투구도 계란처럼 둥근 형태를 했다.

기사들이 정중한 어조로 물었다.

[역천에서 오셨습니까?]

[맞습니다.]

[저흴 따라오시지요. 연락은 받았습니다. 황립 마법 학교로 모시겠습니다.]

기사들이 자기들 탈것에 올랐다.

비늘이 있는 말이었다. 눈에서는 푸른 안광이 일렁이고 있었다. 가볍게 손을 뻗자, 말들이 소리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도로는 상당히 넓었다. 지구의 8차선 정도는 되는 듯했다. 비록 차선의 구분은 없지만, 인도와 차도는 구분되어 있었다.

마법 학교는 꽤 멀었다. 한참을 달려간 후에야 도착했다.

시혁은 마법 학교 내의 객실로 안내를 받았다.

생김새만 보면 지구의 호텔과 비슷했다. 다만 마법사들을 위한 공간이라 마법 실험실이 딸려 있다는 게 특이했다.

젤시가 재잘거렸다.

[공식적으로 면회 요청을 넣어야 돼요. 시혁 님은 아일리케의 문자를 모르시죠? 제가 대신 적을게요!]

[그래, 고맙다.]

시혁은 간략하게 자신을 소개하고 만나보자는 내용을 구술했다. 그걸 젤시가 받아적었다.

이것만 적어보내기는 좀 밋밋하다.

고민을 하다가 젤시에게 펜을 받아들었다.

사용자의 의도에 따라 색이 변하는 펜이었다. 그걸로 종이에다 색색이 점을 찍었다.

‘라무가 영혼 계열 마법사랬지?’

그렇다면 아르거스에서는 영혼 진영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 자연히 빙설원 인근에서 활동하고 있겠지. 진리 진영보다는 환상 진영이 친숙할 테니까.

시혁이 찍은 점은 바로 빙설원 인근의 세력 분포를 나타낸 지도였다.

빙설원은 옅은 하늘색 원으로 크게.

영혼 진영은 회색, 환상 진영은 청색, 진리 진영은 금색 점으로 표현했다. 거기에 더해 중요한 반신의 위치에는 각자의 문장까지 그려 넣었다.

시혁의 문장은 오색 원을 품은 천공성이다. 아일리케의 종족들이 아르거스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 몰라도, 각 반신의 문장까지 이리 세세하게 알지는 못하겠지.

그 지도를 편지와 함께 넣었다.

젤시가 봉투를 입에 물고 날아갔다.

시혁은 무심코 침대에 누웠다. 무척 푹신해 보여서 그런 거였는데, 아무 느낌도 들지 않자 그저 쓴웃음을 지었다.

잠시 후 젤시가 돌아왔다.

[라무 마법사는 탑에 없었어요. 집사에게 편지를 맡겼으니까 늦어도 내일까지는 전달할 거예요.]

[내일이라…… 난 이제 몇 시간만 지나면 돌아가야 한다만.]

[어, 체류에 제한시간이 있어요?]

[당연하지. 한 9시간은 지나야 들어올 거야.]

그때까지 시혁의 화신은 가만히 이 자리에 있게 된다. 애초에 인공지능 같은 건 부여하지 않았으니까.

기대를 접었다.

젤시와 함께 마법 학교를 구경할 때였다.

마법 방울이 동동 떠다니는 정원 저 편에서, 한 인간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오는 게 보였다.

머리를 박박 깎은 남자였다. 두 눈이 매처럼 매서웠다.

시혁의 앞에 멈추더니 가볍게 숨을 골랐다.

[귀하가 내게 편지를 보낸 이계의 마법사요?]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 정말 아르거스의 기억을 보존하는 모양이군?]

[어찌…… 그 문양들을 알아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는데……]

상당히 놀란 모양이다.

시혁은 자신의 객실로 라무를 초청했다.

젤시는 알아서 물러났다. 어떻게 하면 비밀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객실 내 보안 장치를 작동하는 방법까지 알려주었다.

라무와 함께 마주 앉았다.

진정하지 못하는 모습이라, 객실에 비치되었던 차를 한 잔 권했다.

차를 마시자 비로소 라무의 호흡이 안정되었다.

조금 망설이다가, 시혁을 정면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귀하가 이계에서 오셨다고 했는데…… 어느 세계 출신이신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 아일리케 -2-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