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원 분신 >
3차 확장을 마치자 여유가 좀 생겼다.
미뤄두었던 연구 과제에 정신을 다시 집중했다.
차원 전이.
시혁은 특히 차원 전이라는 이름 자체에 주목했다.
죽음 지혜가 이런 이름을 쓴 것은 단지 연막이었을까? 아니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일까?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죽음 지혜는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으니까.
영혼이라도 전이시키나?
그 생각을 하고, 시혁은 픽 웃어버렸다.
불가능한 일 아닌가.
정신이나 육체라면 몰라도, 영혼 자체를 전이시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잠깐.
시혁의 몸이 경직되었다.
정신이나 육체는 가능하다?
혹시 죽음 지혜는 이런 방법을 쓴 게 아닐까?
먼저 본인의 정신 중 일부를 복사한다. 그 다음 미리 계약을 한 소환자에게 전이시킨다. 목적지를 탐험한 후 전이를 취소하고 취합한 지식을 가져온다.
어찌 보면 시혁이 얼마 전 만든 분신과 비슷한 원리 아닌가.
엄밀히 말하면 좀 다르긴 하다.
시혁은 자신의 정신을 복사한 게 아니고, 인공지능에 자신의 인격을 일부 부여한 거니까.
어쨌든 이 방법이라면 가능하겠다.
좀 거추장스러운 절차가 필요하긴 했다. 차원 전이를 시도할 때마다 본인의 정신을 복사해야 하니까.
아니면 시혁이 쓴 방법을 응용해도 좋지. 여러 부작용이 예상되니, 통제를 잘 해야겠지만.
시혁은 머리를 흔들었다.
“누가 언데드 아니랄까봐……”
여간해서는 생각하기 힘든 방법이다.
자신의 육체는 물론, 정신까지 소모품 취급할 수 있어야 가능하지 않겠나. 복사된 자신의 정신이 무슨 일을 벌일 줄 알고.
순간 소름이 끼쳤다.
복사된 죽음 지혜의 정신이 천왕봉 수정을 얻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거절하길 잘 했다.
자칫 지구에 제 2의 델로크를 탄생시킬 뻔 했지 않나.
더 자세한 것은 아르거스에서 연구를 해봐야겠다.
죽음 지혜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방법을 그대로 쓰든, 아니면 시혁 방식대로 응용을 하든.
밤이 되었다.
아르거스에서는 대부분의 일을 원주민들에게 맡겼다. 그리고 성지에 틀어박혀 연구에 골몰했다.
정신 복사부터 시작했다.
쉬웠다.
영혼석 같은 보물을 쓰면 간단했다. 시혁의 정신을 그대로 구현하여 부여할 수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다음 두 정신을 하나로 합쳤다.
순간, 시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기분이 더러웠다.
아주 작은 상자 속에 갇힌 것 같았다. 아무 것도 지각할 수 없고, 인지할 수 없는 상태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아주 잠깐이어서 망정이지, 오랜 시간 갇혀 있었다면 거의 미치기 직전까지 갔을 것이다.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아일리케에 복사된 시혁의 정신이 다녀온다면 그건 시혁 본인이 맞나? 아니면 단순히 시혁의 복제 인간일 뿐인가?
그나마 이 경우에는 정신을 합치니 다행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약간의 충격이 생기는 게 문제였다. 그 충격은 시간이 갈수록 누적될 테고, 종국에는 시혁의 인격을 둘로 갈라놓을 수도 있었다.
이건 폐기.
시혁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역시 분신을 응용해야 할까?
인격을 부여한 인공지능을 쓰는 건 위험하다. 하지만 온전히 시혁에 의해 움직이는 분신이라면 괜찮지 싶었다. 일종의 원격 조종 인형처럼 사용하는 거니까.
하지만 그게 가능해야 말이지.
죽음 지혜가 괜히 정신을 전이시키는 게 아니다.
일단 지구와 아일리케를 직접 오가는 방법은 없다. 반드시 아르거스를 통해야 했다. 그나마 차원을 통과할 때 정보가 변형되니, 지구나 아르거스에 앉아 아일리케의 분신을 조종할 수가 없었다.
고작 수 킬로미터에 불과한 공허의 틈을 지나기만 해도 정보가 변형되는 판이다. 아예 차원을 건너면 오죽하겠나.
순간, 한 가지 영감이 시혁의 머리를 스쳤다.
공허로 인한 정보 변형을 어떻게 해결했지? 바로 불멸의 힘을 부여해서 해결했다.
그렇다면 차원을 넘는 정보도 불멸을 응용하면 보존이 가능하지 않을까?
마침 시혁의 성역에 딱 좋은 게 있지 않나.
세계수.
영원과 불멸의 힘을 가지고 있으니, 이걸 중계기지로 쓰면 되지 싶었다.
바로 실험을 했다.
세계수로 시선을 옮겼다.
엘프들이 한가롭게 노닐고 있었다. 엘프 사령관, 데프니르의 모습도 보였다.
시혁은 세계수에 손을 뻗었다.
화려한 빛이 쏟아졌다.
엘프들이 그걸 느끼고 동요했다.
“백색 현왕이시다!”
“세계수에 뭘 하시는 거지?”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긴 거 아냐?”
시혁은 묵묵히 세계수를 조작했다.
겉보기에는 변화가 없었다.
다만 내부에 몇 가지 마법을 품었다.
아르거스와 아일리케, 두 세계로 정보를 오가게 만든 것이다. 당연히 그 정보에 영원불멸의 힘이 묻게 되었다.
또 있다.
시간 비율 조절.
지구와 아일리케는 시간이 비슷하게 흐른다. 하지만 아르거스는 12배가 늦다. 당연히 그걸 조율하는 마법이 필요했다.
이것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해결이 됐다.
여전히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다.
정보만 교신하면 뭘 하나?
시혁이 아일리케에서 쓸 몸이 필요했다. 기계 골렘이든 생체 키메라든.
당연한 말이지만 직접 아르거스에서 아일리케로 물질을 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아무리 불멸의 힘을 부여해도 마찬가지였다.
죽음 지혜에게 협조를 구해야 하나?
기왕이면 시혁 스스로 일을 모두 처리하는 게 좋은데……
모든 것을 검토했다.
전장에서 직접 실험을 해보기도 했다.
그 결과, 물질을 이동시키는 건 불가능해도 마나 생명체를 이동시킬 수는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를테면 오행 순환체. 혹은 칠색 저항체.
다만 변이가 곧잘 일어나곤 했다. 차원을 이동하는 중 사라질 때도 많았다. 마나 생명체를 활용하려면, 이에 대한 조치를 미리 취해야 한다는 뜻이다.
시혁은 한 가지 구상을 했다.
마나 생명체를 보내 목표 행성에서 성장하게 하면 어떨까?
어차피 무한으로 커지기는 힘들다. 오행 순환체가 10 분열에서 끝났듯이 일정 수준이 한계였다.
그렇게 만든 마나 생명체와 시혁이 교신을 한다면?
처음부터 세계수를 통해 마나 생명체를 만든다고 생각해 보라. 그렇다면 영원불멸의 힘 덕에 변이가 되지도 않을 테고, 일단 도착한 다음 교신을 하기도 쉬울 것이다.
시혁이 직접 가는 것만은 못해도 목적인 지식 수집은 충분히 가능할 터.
조금은 아쉬웠다.
비단 아르거스에서만이 아니라 지구에서도 아일리케 방문이 가능하면 좋을 텐데……
어라?
시혁은 조금 생각해 본 후, 한 가지 의문을 가졌다.
그게 왜 안 되지?
어차피 세계수를 중계기지로 쓰는 것은 똑같다. 시간 비율에도 보정이 들어간다.
당연히 지구와 아일리케를 이어줄 수도 있었다. 죽음 지혜처럼 꼭 아르거스에 앉아서 차원 전이를 쓸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음……”
시혁은 성지의 의자에 앉은 채 팔걸이를 두드렸다.
생각하면 할수록 시도해볼 가치가 있었다.
마나 생명체부터 만들었다.
오행 순환체가 기본. 다만 성장하면 인간 형태를 취하게 된다. 빛나는 안개 형상이라 꼭 유령 같아 보일 터였다.
수집하는 정보는 빛과 소리가 전부였다. 시혁과 연결되면 원격으로 게임을 하는 느낌이 들겠지.
그 다음 다시 세계수에 눈을 주었다.
데프니르가 불안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백색 현왕님? 혹시 세계수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겁니까?”
자꾸 세계수를 조작하니 걱정이 되었나 보다.
설마하니 시혁이 세계수를 어떻게 하진 않겠지만, 세계수야말로 엘프들의 가장 큰 보물이니까.
시혁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 별일 아니다. 내가 세계수를 쓸 일이 있어서 그런다.]
“세계수에 무리가 가지는 않겠지요?”
[당연하지. 세계수는 내게도 소중하다. 세계수를 어쩔 생각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라.]
아까 설치했던 마법을 살짝 손보았다.
단순히 아일리케만이 아니라, 지구와도 정보 교신이 가능하게 했다. 시간 조율 마법도 손을 봐서, 아일리케와 지구를 오가는 정보는 그냥 전해지게 했다.
이것으로 세계수 문제는 끝.
이제 아일리케로 마나 생명체의 씨앗을 보내야 한다.
그 날 진입한 전장에서, 시혁은 모든 소환자의 정보를 수집했다.
[너는 어느 세계 출신이냐?]
[네 고향 세계에서, 너는 무슨 일을 하고 있지?]
소환자들은 순순히 대답했다.
당연한 일.
이런 사소한 질문에도 반신의 강제력이 작용하고 있으니까.
“저는 가탈트에서 왔습니다. 그곳에서는 경비병입니다.”
“아라드 출신입니다. 치료사가 되기 위해 신전에서 글과 약초에 대해 배우고 있습니다.”
아일리케 출신도 여럿 있었다.
현재 아르거스와 연결된 것으로 알려진 세계는 백여 개 남짓. 시혁이 전투에서 소환하는 게 수천 명이 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일리케 출신 소환자들에게 슬쩍 마나 생명체를 묻혔다.
전투가 끝나면 그들의 영혼을 따라 아일리케로 이동할 것이다. 그것을 목표 삼아 화신 마법을 가동하면 되겠지.
전투는 순조롭게 끝났다.
무난하게 승리를 했고, 모든 소환자의 영혼이 자기 고향 세계로 뿔뿔이 흩어졌다.
시혁도 지구에서 눈을 떴다.
천천히 접속 장치를 만들었다.
어차피 며칠 뒤에나 시도를 해봐야 한다. 아일리케로 갔을 마나 생명체가 성장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니까.
근두운을 응용했다.
마나 공급 장치도 달고, 외부에서 탑승자를 보호할 투명 캡슐도 만들었다. SF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동면 장치를 보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도 관심을 보였다.
이미라가 얼쩡거렸다.
“여기 타면 진짜 아일리케로 가는 거예요?”
“직접 가는 건 아니고, 원격으로 탐험하는 겁니다. 게임하는 것처럼요.”
“신기하네요. 저도 탈 수 있어요?”
“글쎄요. 힘들 것 같네요. 저한테만 반응하는 물건이라서요.”
정확히 말하면 아일리케로 보낸 마나 생명체와, 정보 중계 역할을 하는 세계수 때문에 그렇다.
마나 생명체는 시혁의 영혼 파장에 의해 작동을 한다. 세계수도 자신을 탄생시킨 반신인 시혁에게만 우호적으로 나왔다. 이 두 가지가 맞물려서, 본의 아니게 본인 인증 체계가 이루어졌다.
이미라가 입을 삐죽였다.
“쳇, 저도 이계에 가보고 싶은데……”
“연구는 해보겠습니다만 기대는 하지 마세요. 제가 타고 갈 거 만드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다른 중요한 것도 많은데요, 뭐.”
말은 그렇게 해도 미련이 남는 모양이다.
시혁은 한지호를 불렀다.
“지호 씨. 델로크가 혹시 접속하면 제가 곧 아일리케에 갈 거라고 전해주세요.”
“우와, 진짜 가시는 겁니까?”
“네. 정확히 말하면 원격 탐사에 가깝습니다만, 사실 크게 다르지도 않지요.”
“알겠습니다. 델로크의 존재를 느끼면 바로 전하겠습니다.”
충분한 시간이 지난 다음 접속 장치에 몸을 실었다.
오전 9시.
오늘 하루를 온전히 아일리케 탐험에 쓸 생각이었다. 시험 운행을 해봐야 알겠지만, 시혁은 내심 접속 장치가 잘 작동할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접속 장치를 작동시켰다.
머리맡에 박아둔 오색 수정이 반짝 빛났다. 그 빛이 접속 장치로 스며들자, 접속 장치 곳곳에서 복잡하게 그려진 마법진이 나타났다.
웅웅웅.
접속 장치 전체가 진동했다.
시혁은 눈을 뜬 채 그 진동을 느끼고 있었다.
이윽고 모든 마법진이 활성화되었다.
시혁의 감각이 하나둘 차례로 닫혔다.
눈앞이 깜깜하게 변하고,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진동도 사라진 듯하고, 오직 본인의 육체만 느끼게 된 바로 그 시점이었다.
별안간 흰빛이 터졌다.
눈을 찌푸리는 순간 시야가 회복되었다.
회복?
아니다.
방금 전까지 시혁이 있던 지리산 비밀기지가 아닌, 시푸른 임야가 시혁의 눈앞에 펼쳐졌다.
아일리케.
바로 그곳이었다.
< 차원 분신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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