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수와 하늘마루 -3- >
아이들이 따르는 모습을 본 젊은 수인족들이 슬슬 모여들었다.
“최시혁 님!”
“전설로만 듣던 분을 뵙다니, 영광입니다.”
전설?
좀 어색했다.
하긴 수인족에게 24년 전은 인간 종족으로 치면 72년 전과 비슷하다. 어릴 때부터 시혁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을 테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이해가 갔다.
수인족들과 어울려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그들에게 자신의 성역으로 오라는 제안을 하자, 귀가 솔깃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권세 진영의 성역이라고요?”
“인간들이 많지 않습니까?”
[인간만 아니라 천사, 오크, 드워프도 있다. 곧 엘프도 추가되겠지. 내 성역은 빠르게 발전한 까닭에 땅은 넓고 인구는 부족하다. 너희가 온다면 넓은 영역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젊은 수인족들은 확실히 반응이 달랐다.
주변이 엘프 마을로 꽉 찬 상황.
뭐만 하려고 해도 엘프들이 딴지를 걸었다. 아직까지 식량 문제가 불거지거나 하진 않았으나, 이런 상태를 답답해하는 수인족이 많았다.
한참 성역을 홍보하며 돌아다닐 때였다.
대수림에 나가 있는 사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백색 현왕님. 엘프들이 곧 최고 평의회를 개최한답니다. 백색 현왕님의 참석을 부탁드린답니다.]
[알았다. 금방 가마.]
수인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대수림으로 이동했다.
어차피 대회의에서 결정될 사항이었다. 의학자 시절 경험으로 볼 때, 최소한 며칠은 걸리겠지.
성지의 본신을 이용해 생명 영령의 성역으로 사자를 하나 파견했다. 이후 이 사자가 시혁을 대변할 것이다. 물론 생명 영령에게는 먼저 양해를 구했다.
대모 세계수에 도착하는 대로 최고 평의회에 참석했다.
엘프들이 한 가지를 요구했다.
불멸을 보여 달라는 것.
어려울 것 없지.
시혁은 조심스럽게 생명의 마나와 죽음의 마나를 조합했다. 운이 따라줬는지, 이번에도 한데 합쳐 투명한 빛이 되었다.
엘프들이 숨을 죽였다.
나이가 많은 엘프들의 눈이 몽롱하게 변했다.
“영원의 힘 아닌가?”
“맞아. 분명해. 세계수를 지탱하던 그 힘이야.”
죽음 지혜는 이걸 불멸이라고 부르더니, 엘프들은 영원이라고 부른다.
시혁은 불멸을 꺼뜨렸다.
늙은 엘프 하나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이내 그것을 자각하더니, 흠칫 놀라며 손을 갈무리했다.
시혁은 엘프들을 보며 말했다.
[보여줄 건 다 보여줬다. 자, 어떻게 할 거지? 내가 생각하기에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것 같다만.]
엘프들이 서로 눈빛을 나눴다.
사령관이 별안간 왼손을 들었다.
그것을 따라 섭정이 왼손을 들고, 다른 엘프들도 모두 왼손을 가볍게 치켜 올렸다.
엘프 사회에서 왼손 거수는 찬성을 나타낸다.
섭정이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백색 현왕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옛 세계수의 씨앗을 내어드리지요. 꼭 복원에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걱정 마라.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거다.]
사령관이 직접 움직이기로 했다.
당연히 엘프들도 따라온다. 실력 좋은 마법사와 정령사들을 동반할 텐데, 일이 잘 되면 이들이 시혁의 성역에 눌러앉을 것이다.
마침 생명 영령의 성역에서도 연락이 왔다.
대회의 결과, 원하는 수인족에 한해 시혁의 성역으로 이주하기로 했다.
수가 많지는 않았다.
약 3천.
시혁골 인구의 1/10 수준이었다.
그만하면 충분하다.
시작이 중요하지 않겠나. 나중에 더 이주할 수도 있고, 워낙 다산을 하는 종족이니 금방 인구가 불어날 터였다.
시혁은 짝니를 복귀시켰다.
엘프들이 그 뒤를 따라왔다.
특히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하나, 아니 둘 있었다.
낫슈바켈과 낫슈실라.
용 모녀가 시혁의 존재를 느끼고 쫓아온 것이다.
“호오, 세계수를 재현한다고? 그게 가능하겠느냐?”
[해봐야 알겠습니다만 가능성은 아주 큽니다.]
“그러니 엘프들이 옛 세계수의 씨앗을 내줬겠지. 그나저나 네 성역이 꽤 커졌구나. 슬슬 내가 이주해 와도 될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떠냐?”
원래는 4차 확장 때에 옮겨오려고 했으나, 시혁의 성역에 빈 곳이 많으니 괜찮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시혁에게도 좋은 일.
낫슈바켈은 시혁의 수호룡이다. 당연히 대수림에 있는 것보다야 성역 안에 머무르는 게 좋았다.
또 장점이 있다.
낫슈바켈은 수많은 권속들을 거느렸다. 낫슈바켈이 이주하면, 그들까지 딸려오는 것이다.
[좋습니다. 언제든 오시지요.]
“네 성역에 괜찮은 화산이 있느냐? 나는 적색 고룡이니 화산에 둥지를 틀고 싶다만.”
[마침 남서쪽 끝에 화산이 하나 있습니다. 작긴 합니다만, 낫슈바켈 님께서 거하기에 부족하지는 않을 겁니다.]
“알겠다. 조만간 내 둥지를 옮겨오도록 하지. 시간이 좀 걸릴 테니 실라를 네 성역에 맡겨두고 싶다.”
[그렇게 하시지요. 짝니도 좋아할 겁니다.]
손님들을 북쪽으로 인도했다.
반신이 되고 알게 된 사실인데, 반신은 성역으로 흡수되는 지역이 어디에 붙을지 결정할 수 있었다. 심지어 제한적인 범위 안에서 재배치하는 것도 가능했다.
시혁은 성역의 중앙에는 평야를, 서쪽에는 황야를, 동쪽에는 산맥을, 북쪽에는 숲을 배치했다. 남쪽에는 바다를 놓고, 바다 너머 남서쪽 끝에 화산과 지하 동굴을 놔두었다.
낫슈바켈과 엘프들, 수인족들이 들어오면 대충 구색이 맞는 셈이다.
엘프 사령관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숲의 생기가 강하게 느껴집니다.”
이곳은 시혁의 성역 거의 북쪽 끝이다.
고개를 들면 저 멀리 공허가 너울거리는 게 보였다. 다만 엘프 사령관의 말처럼 마나가 풍부하여, 어떤 생물이든 크게 자라나고 있었다.
낫슈바켈이 고개를 갸웃했다.
“제법 생명의 마나가 풍부하긴 하다만, 세계수가 자랄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그렇지요. 크기는 아마 꽤 작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본질이지요.]
엘프들도 공감한 표정을 지었다.
작은 세계수는 적은 엘프들만 감당할 수 있지만, 아르거스에 남은 엘프는 대재앙 이전 기준으로 1%도 되지 않으니까.
엘프 사령관이 상자를 개봉했다.
고작해야 호두 크기의 갈색 씨앗이 들어 있었다.
시혁은 반신의 능력으로 그걸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빛나는 손이 씨앗을 집자, 물색 모르는 주민들이 멀리서 만세를 불렀다.
다른 손으로는 세계수의 가호를 쥐었다.
씨앗부터 심었다.
저절로 생명의 마나를 빨아들였다.
그러나 부족했다. 얕은 싹 하나가 움트는 게 전부였다. 이대로 성장시켜 봐야 그저 좀 큰 나무 한 그루가 자라는 게 전부일 것이다.
이때 써야 하는 게 세계수의 가호.
시혁은 두 손으로 녹색 외투를 움켜쥐었다.
잠깐 감상에 잠겼다.
영웅 시절, 세계수의 가호가 있어 몇 번이나 목숨을 건졌었지.
이젠 떠나보내야 할 때다.
힘을 주었다.
두 빛나는 손에서, 이질적인 힘이 풀려나오기 시작했다.
하나는 생명.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걸 역으로 뒤집은 죽음.
생명과 죽음이 세계수의 가호 안에서 서로 얽혔다.
녹색과 흑색의 마나가 소용돌이쳤다. 처음에는 서로 으르렁거리며 대립했으나, 시혁의 인도에 따라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세계수의 가호 안에서 투명한 빛이 새어나왔다.
불멸과 비슷하다.
세계수의 본질이라고 할까.
오랫동안 세계수의 가호에 숨어 있던 힘이, 생명과 죽음이 조합되어 발하는 불멸에 자극 받아 그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오오오……”
“저것이……”
엘프들이 숨을 죽이고 세계수의 가호를 쳐다보았다.
녹색 외투가 점차 그 형체를 잃었다.
나뭇잎 같은 외피가 허공에 녹아 없어지고, 갈색 내피도 천천히 흐트러졌다.
오직 하나만이 남았다.
무섭도록 투명하고, 눈부시도록 선명한 하나의 광채.
불멸, 혹은 영원.
시혁은 살짝 손을 뗐다.
완전히 안정되었다. 더욱이 어마어마한 힘을 품고 있었다.
오랫동안 손을 봐야 할 줄 알았으나, 세계수의 가호가 품고 있던 힘이 풀려나온 까닭에 목표치를 아득히 초월한 것이다.
조심스럽게 손짓을 했다.
투명한 광채가 세계수의 씨앗으로 스며들었다.
그 순간 변화가 일어났다.
콰드드드득.
땅이 뒤틀렸다.
거대한 뿌리가 세상으로 질주했다.
저 땅 깊숙이 뻗고, 주변의 숲을 향해 달려 나갔다.
나무가 자라났다.
순식간에 하늘을 꿰뚫을 듯 커졌다. 두께도 무시무시하게 두꺼워지고, 가지가 사방으로 뻗었다. 가지 끝마다 나뭇잎들이 송골송골 맺히더니, 거의 태양을 가릴 정도가 되었다.
채 몇 분 걸리지도 않았다.
약 10분 만에 거대한 나무가 생겼다.
높이는 약 100 미터. 두께는 직경 20 미터.
시혁의 성역에 있는 어떤 건물들보다 컸다. 잎사귀가 우거진 탓에, 하늘마루 보다 더 커 보일 정도였다.
거대한 나무가 가볍게 몸을 떨었다.
청량한 마나가 바람을 타고 날아들었다.
생명의 마나와 비슷하다.
하지만 조금은 달랐다. 생명의 마나는 직접적으로 육체를 회복시키고 재생시키는 작용을 하는데, 이 마나는 회복과 재생보다는 보존과 유지에 더 특화되어 있었다.
엘프들이 기뻐했다.
“영생의 마나다!”
“진짜 세계수야!”
“내 생전에 세계수를 다시 보게 될 줄이야……”
몇몇 늙은 엘프는 엎드려 엉엉 울기까지 했다.
어린 세계수.
아직은 자기 능력을 제대로 발현하지 못한다.
하지만 꾸준히 보살핌을 받으면 영생의 힘을 주변에 흩뿌릴 것이다. 그러면 엘프들은 영생을 얻을 테고, 다른 종족들도 불로장생하겠지.
시혁은 엘프 사령관에게 말했다.
[세계수를 관리할 엘프들이 필요하다. 파견해 줄 수 있느냐?]
엘프 사령관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아니, 파견이 아니라 이주를 하면 안 됩니까? 세계수를 제대로 관리하려면 적어도 1만은 넘는 수가 필요합니다만.”
[그것도 좋지. 다만 한 번에 너무 많은 수가 들어오면 혼란이 생길 수도 있으니 천천히 보내도록 해라.]
“예. 감사합니다.”
이걸로 됐다.
인구 문제는 해결했다.
며칠 두고 보기만 하면 된다. 이주민들이 계속 들어올 테니, 금방 조건을 채울 것이다.
이때쯤 하늘마루 작업도 거의 끝이 났다.
거의 두 배는 커졌다. 내부도 많은 것이 바뀌었다. 특히 많은 부분을 자동화했고, 자급자족 능력을 강화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유사시 몇 만 명이 함께 들어가 몇 년 이상 농성을 하는 것도 가능했다.
[주포 같은 건 만들 수 없나?]
시혁은 브라이트에게 그런 질문을 했다.
브라이트가 자기 수염을 쓰다듬었다.
“주포라니요?”
[하늘마루의 심장은 무한한 힘을 생산한다. 그걸 놀리기는 아쉽지 않느냐. 일거에 뿜어낼 수 있으면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허허, 그야 그렇지요. 궁리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마법적인 지식이 필요해서, 저 혼자서는 힘듭니다.”
[좋다. 그 부분은 내가 처리하지. 공간만 만들어 두어라.]
고심 끝에 낫슈바켈을 찾아갔다.
낫슈바켈은 흔쾌히 협력해 주었다.
용의 숨결을 참고했다.
아르거스에서 가장 강력한 공격이니까.
주포를 만들다가 방어막 생성 장치도 만들었다. 단순히 방어 시설과 방어 마법진이 아닌, 보다 완벽한 방어를 하기 위해서였다.
시혁은 오행의 원리를 도입했다.
주포는 오행 상극을, 방어막은 오행 상생을.
그 결과 무시무시한 무기가 완성되었다.
낫슈바켈이 혀를 내둘렀다.
“이거 내가 1대 1로 싸워도 지겠는데?”
[설마 그렇기야 하겠습니까?]
“아니, 진담이다. 주포를 맞지 않으면 모를까, 만약 주포를 맞으면 내가 필패다. 내 무력은 용암 숨결과 커다란 덩치에서 나오지, 고위 마법에서 나오는 게 아니니까.”
하긴 주포와 방어막은 시혁이 보기에도 대단했다.
주포는 하늘마루의 심장에 담긴 무한의 힘을 고스란히 내뿜는다. 그냥 쏘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오행이 상극하며 반발하여 수십 배로 증폭되었다. 제대로 맞추면 작은 성역 하나는 그대로 날려버릴 듯했다.
방어막은 주포 정도로 인상 깊진 않았다. 그래도 낫슈바켈의 용암 숨결을 한두 번 막을 정도는 되었다. 고룡의 숨결을 막을 정도이니, 충분히 만족할 만 했다.
하늘마루 확장을 끝내고 문득, 한 가지 생각을 했다.
‘세계수와 하늘마루를 합칠 수는 없을까?’
하늘마루의 심장은 무한의 힘을 뿜는다.
세계수의 본질은 불멸에 있다.
둘을 합치면 어떻게 될까?
모르긴 몰라도 어마어마한 위력을 뽐낼 듯했다. 최소한 아르거스의 신들과 싸울 정도는 되겠지.
고민을 해봐야겠다.
슬슬 죽음 지혜나 손문철의 대적자가 나타날 시점이 되었으니까. 시혁이 그들을 도우려면 하늘마루를 강화하는 게 좋지 않겠나.
지구와 아르거스를 오가며, 며칠 시간을 보냈다.
드디어 모든 조건을 만족했다.
시혁의 신전이 빛을 뿜고 성역이 확장되었다.
< 세계수와 하늘마루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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