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수와 하늘마루 -2- >
한동안 생각을 하더니, 시혁을 보며 말했다.
“그게 가능합니까? 대수림이 성립되고 지금까지, 저희는 세계수의 복원을 위해 전력을 기울였습니다만 별 성과가 없었습니다.”
[세계수의 가호를 활용하면 가능합니다.]
“그 방법은 저희도 써봤습니다. 그나마 싹을 틔우는 것은 성공했습니다만, 그 이상은 갈 수가 없었지요. 세계수를 성장시킬 힘이 부족해서, 고작해야 대모 세계수의 절반 정도 크기까지 자라다가 스스로 말라죽고 말았습니다.”
그럴 것이다.
세계수가 성장하려면 막대한 힘이 필요하니까.
조각난 아르거스 행성으로는 그 힘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처음부터 성장을 제한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으나, 그래서야 세계수가 아니라 그저 덩치만 큰 나무로 끝날 가능성이 크고.
시혁은 담담한 기색으로 말했다.
[해결 방법이 있다면요?]
“어떻게 말입니까?”
[세계수에 불멸을 부여할 겁니다.]
하늘마루가 무한의 힘으로 유지되는 것과 같다.
세계수는 생물이니 무한보다는 불멸이 더 맞겠지. 옛 세계수만큼은 아니어도, 충분히 제 기능을 할 거라는 계산이 있었다.
엘프 사령관이 고개를 갸웃했다.
“불멸이라 하심은? 설마 불사를 말씀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제가 죽음 진영 반신도 아니고 그럴 리가요. 직접 보여드리지요.]
시혁은 즉석에서 마나를 조합했다.
조심스러웠다.
생명과 죽음, 두 대척되는 속성의 마나를 조합하는 것은 매우 섬세하고도 정교한 마나 제어가 필요했으니까. 아무리 정교한 인형이어도, 간접적으로 만드는 것이니 한계가 있고.
그나마 믿을 건 지금 시혁이 분신으로 쓰는 인형의 심장이었다. 다름 아닌 불멸의 힘이 심장에 깃들어 있으니까.
다행스럽게도 단번에 성공했다.
맑은 빛이 허공에 떠돌자, 엘프 사령관이 그걸 보며 홀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꿀꺽.
심지어 마른침까지 삼킨다.
시혁은 곧 손을 저어 불멸을 흩어 버렸다. 매우 불안정하던 참이라, 우물쭈물 대더니 금방 소멸했다.
엘프 사령관이 시혁을 채근하듯 물었다.
“그게 대체 뭡니까?”
[제가 말씀드린 불멸입니다. 생과 사를 초월하는 힘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게 정의했지요.]
“음…… 이상하네요. 그걸 본 순간, 굉장히 그리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운 느낌?
시혁은 그 의미를 한동안 깨닫지 못했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엘프의 역사에 대해서.
현재 아르거스에 남아 있는 엘프는 크게 두 종류다. 대수림의 숲 엘프와 암흑지의 다크 엘프들, 이렇게.
태초에는 단 하나의 엘프만 있었다.
고(高) 엘프.
그들은 불멸이었고, 종족 전체가 마법과 정령술의 달인이었다. 어째서 쇠락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 흔적이 세계수라고 했다. 그래서 세계수가 존재하는 한 숲 엘프들은 불로장생한다고.
소 뒷걸음치다 개구리 잡은 격으로, 세계수 재현이 가능하겠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시혁은 담담하게 말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보다는 제가 세계수 재현 가능성이 더 높지 않겠습니까? 세계수가 재현되면, 저한테도 좋지만 여러분들에게도 좋을 겁니다.]
“음……”
엘프 사령관이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제가 결정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섭정님께 건의를 드려서, 최고 평의회 안건으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며칠 기다려 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지요. 잠시 주변 성역에 들러볼 테니, 일정이 정해지면 제 사자에게 연락을 넣어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밖으로 나와 짝니에 올라탔다.
인구를 늘릴 획기적인 방법이 또 뭐가 있을까?
대모 세계수에 와서 엘프 사령관과 얘기를 하다가 보니 생각나는 게 있었다.
수인족.
시혁과 인연을 맺은 수인족 도시가 바로 이 근처 성역에 있었다. 반신 생명 영령과 협의만 잘 하면, 그들을 대거 데려가는 것도 가능하겠지.
산왕이 살아 있을지 모르겠다.
아르거스의 시간으로 벌써 16년이 지난 시점.
수인족은 기껏해야 20년을 사니 수명이 다 했을 것이다. 잘해야 죽기 직전인 상태이겠지.
마음이 급해졌다.
짝니를 채근해 생명 영령의 성역으로 이동했다.
성역으로 진입하자 세계 전체가 술렁였다.
지금까지 들어갔던 성역은 그렇지 않았는데, 이곳에는 마침 반신이 머무르고 있었나 보다.
웅장한 목소리가 들렸다.
[넌 누구냐? 누구기에 내 성역에 들어온 거냐?]
익숙한 존재감이다.
시혁은 당당한 태도로 말했다.
[나는 반신 백색 현왕이다. 그대가 막 3차 확장을 했을 때 그대의 진영에 소환된 적이 있지.]
[백색 현왕? 음, 이름은 들어봤다만 내가 그대를 소환했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다.]
[그대의 성역에 수인족 도시, 시혁골이 있지 않은가? 내 이름이 최시혁이다. 그대가 원시 제왕, 그리고 천상 주시자와 경쟁할 때 의학자로 소환되어 수인족 도시로 파견 됐었지.]
[아, 이제 기억이 난다. 그때 그 의학자로군? 놀랍구나. 시간이 많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벌써 반신이 된 거지? 그래, 내 성역에는 무슨 일이냐?]
[나는 3차 확장을 앞두고 있다. 최근에 반신들이 많이 늘어나서 이주민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지. 그래서 그대의 성역에 있는 수인족들을 이주시킬 수 있을까 싶어서 찾아왔다.]
[수인족들을?]
생명 영령의 의념이 잠깐 끊어졌다.
혼자 생각을 하는 듯했다.
생명 영령은 더 이상의 인구는 필요 없었다. 4차 확장까지만 인구 조건이 있고, 최종 확장에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합당한 대가를 제시한다면 수락하겠다.]
시혁은 입맛을 다셨다.
역시 공짜로 데려올 수는 없는 모양이다.
천사의 눈물을 대가로 제시했다.
최종 확장에서는 쓰지 못하겠지만, 강력한 힘을 가진 보석이니만큼 여러모로 쓸모가 있으니까.
생명 영령이 흔쾌히 수락했다.
[좋다. 지금 수인족 인구가 3만 정도 되니, 얼마든지 데려가도록 해라. 감당할 수 있으면 다 데려가도 좋고.]
3만?
겨우 2년 만에 많이도 늘었다. 아르거스에서는 24년이니, 거의 3세대 이상이 지나간 셈이지만.
역시 다산을 하는 수인족이었다.
더구나 시혁에 의해 불임의 저주까지 해소되었으니……
생명 영령과 협의를 마치고 수인족 도시로 향했다.
훨씬 커졌다.
밖에서 보이는 규모도 상당했다. 엘프식 건축 양식을 받아들여 건물 역할을 하는 나무들이 곳곳에 보였다. 목책 대신 나무를 엮어 만든 벽이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짝니를 타고 천천히 다가갔다.
문을 지키던 수인족 병사들이 쇠뇌를 겨눴다.
“멈춰라! 누구냐?”
시혁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예전에도 이랬던 것 같은데……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백색 현왕 최시혁이다. 예전에는 오색 현자라고 불렸지. 너희 종족과는 각별한 인연이 있다. 16년 전에 경비대장을 하던 산왕을 찾아왔다. 산왕은 건강히 잘 있느냐?]
경비병들이 눈을 끔뻑였다.
문 뒤로 언뜻 보이는 석상을 쳐다보더니, 어느 순간 깜짝 놀랐다.
“설마 최시혁님?”
“우리 종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분?”
시혁은 쓰게 웃었다.
별 희한한 별명을 다 갖다 붙이고 있었다.
[나 맞다. 통과해도 되겠나?]
“아, 예! 당연하지요!”
“어서 들어가세요!”
문을 통과하며 산왕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경비병들이 입을 우물거렸다.
“전대 장로님 말씀이시죠? 많이 편찮으십니다.”
“연세가 워낙 많으셔서……”
아직 살아있기는 한 모양이다.
경비병의 안내를 받아 산왕의 집으로 갔다.
꽤 큰 저택이었다.
아기곰들이 마당에서 놀다가 시혁을 빤히 쳐다보았다. 짝니가 크앙, 하고 포효하자 엄마를 외치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시혁은 짝니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얌마. 애기들이 놀라잖아.]
[재밌소. 주인어른도 해보시오.]
[됐다. 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괜히 애기들 놀래지 말고.]
산왕의 집으로 들어갔다.
이미 전갈을 받았는지, 젊고 늙은 곰 인간들이 시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곰 인간이 시혁에게 인사를 했다.
“장로 수왕입니다. 아버님을 뵈러 오셨다고요?”
산왕의 장로직을 계승한 모양.
[그렇다. 산왕은 요즘 어떻지? 거의 16년 동안 못 본 것 같다만.]
“요즘엔 계속 누워 계십니다.”
방으로 들어갔다.
왜소한 곰 인간이 침대에 누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비쩍 말랐다.
풍성했을 털은 몽땅 빠진 뒤였다. 잿빛으로 바랜 털 가닥만 애처롭게 몇 군데에 달려 있었다.
산왕이 힘겹게 시혁을 쳐다보았다.
“의학자님?”
나이가 많은 탓에, 기억도 어린 시절로 고정된 듯했다.
손을 잡아주었다.
산왕이 백태가 낀 눈을 끔뻑였다.
생명의 마나를 주입했다. 그러자 정신이 맑아지기는커녕 편안한 기색으로 잠이 들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수왕이 머리를 흔들었다.
“연세가 워낙 많으셔서, 깨어 있는 시간이 매우 적습니다. 건강하시던 시절에는 곧잘 의학자님 이야기를 하곤 하셨는데……”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한 번 찾아올 것을 그랬다.]
“아닙니다. 반신님들께서 바쁘시다는 것 정도는 저희도 압니다. 이렇게 찾아오신 것만으로도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산왕의 병세는 노환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아무리 시혁이라도 고칠 수 없다.
불멸을 부여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아직 시혁은 불멸과 무한을 완벽하게 다루지는 못하니까.
응접실에서 수왕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주 의사를 타전하자, 수왕이 떨떠름한 기색을 보였다.
“시혁골은 저희가 피땀을 흘려 건설한 도시입니다. 여길 버리고 어디로 가라는 말씀이십니까?”
[강제로 데려가겠다는 것이 아니다. 원하는 자만 이주를 받겠다. 이곳에는 엘프 밖에 없으니, 너희가 살기에 썩 좋은 환경은 아니지 않느냐? 나는 권세 진영의 반신이다. 여러 종족들이 어울려 살고 있으니, 너희도 적응하기 쉬울 것이다.]
현재 수인족의 문제점을 간파한 한 마디였다.
수인족 3만?
너무 많다.
수인족 중 절반은 초식을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육식을 한다는 게 문제였다.
가축을 키우는 종족도 아니니 사냥을 하거나 다른 종족에게 구입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걸 엘프들이 그냥 보고만 있을까?
인구가 적을 때는 아무래도 좋았겠지.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면 그만이니까.
지금은 그러기가 힘들었다. 보나마나 크고 작은 분쟁이 벌어질 것이다.
생명 영령이야 당연히 엘프들의 편을 들 테고.
수왕이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권세 진영이라…… 솔직히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생명 영령과는 이야기를 끝냈다. 주민들의 의견을 모아보아라. 어떤 결과든 받아들이도록 하마.]
“좋습니다.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그러지.]
시혁은 산왕이 누워있는 위층을 일별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천천히 시혁골을 구경했다.
꽤 많은 수인족들이 시혁을 알아보았다. 특히 아이들이 좋아했다. 전설처럼 들었던 시혁을 신기해하며, 시혁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아이는 종족을 막론하고 귀여운 법이다.
시혁은 새끼용 실라에게 주려고 샀던 간식들을 수인족 아이들에게 던져주었다.
수인족 아이들이 엉겁결에 간식을 받았다.
경계하는 눈으로 시혁을 쳐다보더니, 아까 산왕의 집에서 봤던 곰 아이가 먼저 껍질을 깠다. 살짝 맛을 보더니 눈이 커지고, 시혁에게 더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너무 많이 먹으면 이 썩는다.]
그러면서도 간식을 추가로 더 주었다.
다른 아이들도 몰려들었다. 곰 아이가 먹는 것을 보니, 위험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나 보다.
시혁은 웃으며 녀석들을 바라보았다.
짝니가 시샘을 했다.
[배고프오.]
[얌마. 넌 많이 먹고 왔잖아.]
[부족하오.]
[어휴, 네 뱃속에 거지를 어떻게 좀 해야지 안 되겠다. 확 갈라버릴까?]
[안 되오.]
짝니가 걷다 말고 엉거주춤 배를 오므렸다.
시혁은 웃으며 짝니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짝니가 기분이 좋은지 고롱고롱 소리를 냈다.
< 세계수와 하늘마루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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