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수와 하늘마루 -1- >
이번 조건은 간단했다.
인구 10만.
모든 중급 병종 확보.
군대 육성.
그리고 진귀한 보물들을 수집하면 끝난다.
다른 반신 같았으면 좀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 당장 군대 육성부터 그렇다. 규모도 커야 하고, 자체적으로 강력한 무력을 갖춰야 하니까.
시혁은 아무래도 좋았다. 당장 하늘마루에 머무르는 천사들의 전력만 해도 요구 사항을 훌쩍 뛰어넘었다.
보물도 그렇다. 절반 이상 시혁의 보물 창고에 존재했다. 다만 악 성향 반신의 성역에서 나는 게 부족한데, 이건 마법도에 가든 해서 구해와야겠다.
남은 것은 인구.
그 동안 꾸준히 이주를 받아서 5만 정도가 되었다. 이 부분만 어떻게 해결을 하면 금방 끝내겠다.
시혁은 환영 주문을 써서 성역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많이 발전했다.
처음에는 거적 데기 움막촌이었으나, 이젠 완연한 중세 마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신전을 주변으로 석재 건물들이 꽤 들어섰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아성이 서 있고, 거기서 시작된 성벽이 정착촌을 거의 감쌌다. 군데군데 뾰족하게 솟은 탑이 보이고, 무장한 병사들이 둘씩 짝지어 순찰을 돌았다.
시장에선 활발히 상거래가 이루어졌다. 젊은 아낙과 중년 상인이 흥정을 했다. 수레들이 쉬지 않고 길 위를 오가고, 성벽 바깥 드넓은 밭에선 농부들이 구슬땀을 흘렸다.
서쪽 오크 마을과 동쪽 돌산 마을은 어떨까.
그곳도 비슷했다.
오크들은 여전히 사냥에 열중했다. 요즘은 늑대를 타고 멀리 원정도 나가는 모양이었다. 그런가 하면 밤마다 사냥한 동물을 불에 구우며 한데 모여 춤을 추곤 했다.
돌산 마을도 쉬지 않고 광석을 캐냈다. 대장간은 밤이 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 근처를 지날 때면 땅땅 하고 뭔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잘 돌아가고 있다.
시혁은 사자들에게 새로운 이주민을 들여올 것을 독려했다.
그런데 사자들이 어렵다는 뜻을 전했다.
[백색 현왕이시어, 최근에는 이주를 희망하는 자가 적습니다.]
[어째서? 광명지와 대수림, 대밀림 모두 인간 마을이 많이 있을 텐데?]
[적극적으로 이주를 희망하는 자들은 기존 반신들이 대부분 데려가서 그렇습니다. 나머지는 이주한다 해도 좋아지는 게 있겠냐는 반응이고요.]
하긴 신역에서 이주민을 데려오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인간 종족은 특히 더 그렇다. 어느 진영에서든 유용하게 써먹는 종족이니까. 인구수를 늘리기에도 좋고, 정주 종족이니 관리하기도 쉽지 않나.
시혁은 한 가지 사실을 주지시켰다.
[인간이 아니라 다른 종족도 좋습니다. 제 성역에는 이미 4개 종족이 살고 있어요. 오크나 고블린은 받아들일 만 합니다.]
[사실 몇 개 부족이 의사를 타진하긴 했습니다. 그들과 접촉해 볼까요?]
[그렇게 해주세요.]
언데드, 뱀파이어, 다크 엘프, 악마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들은 시혁의 성역을 가득 매운 마나와 상극이기 때문이다.
반면 오크, 고블린, 오우거, 트롤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오우거와 트롤은 지성 종족보다는 괴물에 가까우니 피하는 게 좋겠지만.
아울러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새로운 종족을 성역으로 들이자는 것.
어떤 종족을?
뻔하지 않나.
엘프.
마침 시혁의 성역에 얼마 전 편입된 지역은 드넓은 숲으로 이뤄져 있었다. 그곳을 잘 꾸미면 엘프들도 호기심을 느끼고 이주해 올 것이다.
뭐가 좋을까?
금방 해답을 찾았다.
엘프들에겐 세계수가 최고다. 세계수를 재현해서 심으면 이주할 엘프들을 찾을 수 있었다.
물론 생명 진영 반신들의 신전도 세계수를 닮아있긴 하다. 하지만 대재앙 이전에 존재했다는 세계수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 대수림의 대모 세계수가 그나마 흡사하긴 하나 비교하기 힘든 건 마찬가지이고.
시혁은 하늘마루로 이동했다.
빛의 날개를 이용, 비행 연습을 하던 아달이 시혁의 방문을 감지했다.
[현왕님? 무슨 일이신지요?]
[아, 심장을 확인하러 왔습니다.]
[심장은 안정적입니다만……]
[다른 건 아니고 볼 게 있어서 왔습니다. 전 신경 쓰지 마시고 계속 연습하세요. 하시는 걸 보니 곧 삼품으로 승급하실 것 같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시혁의 시선이 하늘마루의 심장을 주시했다.
하늘마루의 심장은 총 네 가지로 만들어졌다.
칠대 위상의 용왕, 세계수의 가호, 천신의 보관, 무저갱의 핵.
이중 세계수의 가호는 그 자체에 생명의 힘을 흠뻑 담고 있었다. 단순히 덮는 것만으로도 불안정한 무한의 힘을 안정시켰을 정도이니 오죽하겠나.
‘이걸 분리할 수는 없을까?’
당연히 가능하다.
세계수의 가호를 대체할 새로운 마법진만 만들면 된다. 크기는 훨씬 커지겠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하늘마루의 내부를 약간만 개조하면 되니까.
생각을 하다가, 기왕 손을 대는 김에 아예 하늘마루 전체를 개조하기로 했다. 크기도 더 키우고, 편의시설도 더 늘리기로 한 것이다.
성주인 아달에게 먼저 의사를 타진했다.
[아달님. 하늘마루를 좀 개조하려고 합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늘마루를요? 왜요?]
[세계수의 가호를 빼서 북쪽 숲에 세계수를 재현하려고 합니다. 보관이나 핵, 지팡이는 핵심인데 세계수의 가호는 보조적인 역할만 해서 빼는 게 가능해서요. 다만 그렇게 하면 지금 심장이 있는 공간을 확장해야 하니까 하늘마루를 개조하는 게 필요합니다. 기왕 개조
하는 김에, 더 확장하고 불편한 사항은 개선할 생각이고요.]
[음…… 저는 찬성입니다. 사실 하늘마루는 졸속으로 만든 감이 없잖아 있었거든요. 아예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돌산 마을의 브라이트에게도 그 말을 전했다.
브라이트가 당장 흥분했다.
[하늘마루 개조라! 그런 건 당연히 저한테 맡기셔야지요! 어느 정도 수준으로 개조하실 겁니까?]
[크기는 두 배 정도로 키우고, 내부 공간을 효율적으로 다 뜯어고칠 생각입니다.]
[허어…… 대공사가 되겠습니다. 제 친구들을 좀 오라고 해야겠습니다.]
시혁이 노린 것도 그거였다.
드워프들을 더 끌어들이는 것.
예전처럼 공허 속에서 시간이 쫓기며 건설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돌산 마을에 정박시켜 놓고 건설해도 됐다. 하늘마루의 심장이 허용하는 한, 규모를 얼마든지 늘려도 좋다는 뜻이다.
하늘마루를 돌산 마을 앞 공터에 정박시켰다. 그 다음 심장실 개조에 들어갔다.
예전 같았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아일리케의 마법 지식을 새롭게 얻고, 그 동안 꾸준히 무한과 불멸에 대해 연구를 해서 가능해졌다.
세계수의 가호를 분리했다.
덕택에 심장실은 기존에 비교하여 다섯 배 이상 커졌다. 상당한 면적을 차지하게 되었지만, 하늘마루의 규모를 늘릴 테니 아무래도 좋았다.
아달이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세계수의 가호가 세계수의 씨앗이 될 수 있을까요?]
[이것만으로는 부족하지요. 세계수의 가호는 씨앗이 아니라, 세계수의 껍질과 잎으로 만들어진 거니까요. 실도 줄기에서 뽑았다고 하고……]
세계수의 가호를 샅샅이 연구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이걸 활용한다고 새로운 세계수를 만들 수는 없었다. 세계수의 가호에는 보호의 힘이 담겨있지, 소생이나 재생의 힘은 없기 때문이다.
이걸 복제해서 세계수와 비슷한 나무를 만드는 것은 가능했다. 하지만 그뿐, 엄밀히 말해서 세계수라고 할 수는 없다. 당장 생명 진영 반신들의 신전보다 못한 물건이 나올 것이다.
세계수의 씨앗이 필요했다.
그것도 대재앙 이전의 물건이.
대수림을 한 번 방문해야겠다. 엘프들이라면 깊숙이 보관하고 있는 게 있지 않겠나. 수인족을 끌어들이는 것도 그렇고.
일단 세계수의 가호만 떼어 보물 창고에 넣었다. 세계수에 관한 일은 시혁이 알아서 하고, 아달과 브라이트는 하늘마루를 담당하기로 했다.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반신은 기본적으로 성역을 벗어날 수 없다. 성역 안에서는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지만, 성역 밖에 연락을 하려면 사자를 활용하는 게 필수였다.
어쩌지?
단순히 사자를 보내기는 꺼려졌다.
엘프들의 세계수에 대한 집착을 알기 때문이었다. 시혁은 이제 겨우 중상위권에 올라선 반신인데, 세계수의 씨앗을 달라고 하면 누가 주려고 하겠나. 최소한 직접 가서 설득을 해야 이빨이 먹히겠지.
‘분신을 써볼까?’
지구에서 만들었던 분신.
그걸 그대로 재현하면 되지 싶었다.
아르거스에는 브라이트가 있으니 더 쉬웠다. 브라이트 등 장로 급의 드워프는 지구의 첨단 기계 장비보다 훨씬 더 정교한 손길을 자랑하니까.
바로 제작에 들어갔다.
심장은 여러 마나 보석을 융합하여 만들었다. 지구의 오색 수정보다 훨씬 강력한 물건이라, 더 강력한 분신이 나왔다. 마나 제어와 마법 발현이 군주 계급 영웅 수준은 되는 것이다.
더구나 인형의 몸이 공허를 방어하는 역할도 했다. 공허의 틈도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었다.
딱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시험 삼아 공허 너머 다른 반신의 성역으로 보냈더니, 공허에 정보가 변형되면서 제대로 조종이 안 되는 것이다.
이걸 어떻게 해결하지?
다방면으로 방법을 찾다가 한 가지 방안을 떠올렸다.
공허에 침습되지 않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칠색 저항체가 그 중 하나지만, 시혁은 최근 더 나은 방법을 하나 발견했다.
불멸을 사용하는 것.
아직 제대로 써먹지는 못해도 흉내 정도는 낼 수 있다.
시혁은 시험 삼아 본인의 분신에 그걸 설치했다.
생명과 죽음, 그 두 가지 힘을 진귀한 마나 보석에 설치하고 순환시켰다.
아주 작은 불멸의 힘이 발생했다.
그걸로 충분했다.
공허를 뚫고, 분신을 조종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다만 약점이 있었다.
불멸은 겨우 1주일 남짓 지속된다는 점이다. 시혁이 아르거스에 방문할 때마다 새로 분신을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
분신이 완성되자 가만히 짝니를 불렀다.
[짝니야, 이리 오렴.]
늘어져 낮잠을 자던 짝니가 길게 하품을 했다.
요즘 짝니는 아주 팔자가 늘어졌다. 성역 곳곳을 돌아다니며 고기를 얻어먹곤 했다. 특히 오크들이 짝니를 반쯤 신성시하여 사냥한 멧돼지며 사슴을 바칠 때가 많았다.
[무슨 일이요?]
짝니가 꼬리를 살랑대며 물었다.
시혁은 인형을 작동시켰다.
인형의 눈에서 푸른 빛이 한 차례 빛났다. 금방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다가오자, 짝니가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주인 어른? 이건 뭐요?]
[뭐긴. 내 화신이지. 당분간 난 이걸로 움직일 거다.]
[갇혔소?]
짝니가 미심쩍다는 눈빛을 보냈다.
시혁의 존재감이 인형 안에서 느껴지니, 봉인이라도 당한 줄 알았나 보다.
가볍게 손짓을 했다.
[이리 와. 얼른 가자. 시간이 없어.]
[끄응. 알겠소.]
인형이 짝니에게 올라탔다.
참 오랜만이었다.
짝니가 길게 울부짖은 후 달리기 시작했다.
신전 마을에서 순식간에 멀어졌다. 드넓은 성역을 한 달음에 가로질렀다. 얼마간 뛰자 멀찍이 공허의 파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길 건너서 성역 두 개를 더 통과하면 바로 대수림이다.
짝니가 길게 뛰어올랐다. 빛의 발톱을 허공에 휘두르자, 속도가 몇 배는 빨라졌다. 채 몇 시간 지나지도 않아 대수림에 도착해서 세계수 관문을 통과했다.
엘프 섭정에게 면담을 청했다.
워낙 바쁜 몸이라 면담은 성사되지 않았다. 대신 몇 번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 엘프 사령관과 마주 앉았다.
엘프 사령관이 묘한 눈빛을 보냈다.
“직접 대면한 것은 오랜만입니다. 반신이 되면 성지를 벗어날 수 없다고 들었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닌 모양입니다.”
[제 본신이 성지에 있는 것은 맞습니다. 작은 잔재주를 부렸을 뿐이죠.]
“현왕님의 성역이 날로 번창하고 있다는 사실은 들었습니다. 과연 현왕님답습니다. 처음 뵀을 때부터 범상치 않았지요.”
잡담은 그만.
시혁은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비장(祕藏)하고 있을 옛 세계수의 씨앗을 달라고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그러자 당장 엘프 사령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옛 세계수의 씨앗을요? 죄송하지만 옛 세계수의 씨앗은 누구에게도 넘기지 않는 물건입니다. 멸망의 때, 우리 종족을 되살릴 마지막 희망이 될 테니까요. 어디 쓰시려고 그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차라리 대모 세계수의 씨앗은 어떻습니까? 현왕님과 우리 종족의
사이를 감안해, 몇 개 정도는 무상으로 드릴 수가 있습니다.”
[대모 세계수로는 모자랍니다.]
“뭘 하시려고요?”
[세계수를 재현하려고 합니다. 지금 아르거스에 있는 복제된 세계수가 아닌, 진짜 세계수를요.]
“으음……”
엘프 사령관이 침음성을 흘렸다.
세계수의 재현?
그거야말로 모든 엘프들의 숙원이었다. 아르거스 엘프 중 대부분은 숲 엘프이고, 숲 엘프는 세계수에서 힘을 얻으니까.
< 세계수와 하늘마루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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