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환자 전직 -1- >
이번 전투는 좀 어려울 것으로 추측했다.
시혁은 갓 2차 확장을 마쳤기 때문이다.
1차 확장 때와는 다르게, 2차 확장을 해도 바로 중급 병종을 소환할 수는 없다.
소환자를 전직시켜야 한다.
예전에 시혁도 그랬지 않았나. 거장 치료사일 때 반신 생명의 지팡이에게 소환되었고, 의학자로 전직하여 전세를 뒤집는 데에 일조를 했지.
상대 반신은 어떤 반신이 나올까?
이미 중급 병종을 전직시킨 반신이라면 시혁이 불리해진다. 기본 병종과 중급 병종은 전투력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있으니까.
시혁은 전장을 확인했다.
거대한 도시였다.
아니, 도시가 아니라 폐허.
이번 전투는 시가전인가 보다.
시혁은 생경한 얼굴로 전장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대재앙 이전에 어떤 도시였을까?
천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건만 많은 건물들이 보존되어 있었다. 문명이 번성했다는 것을 웅변하듯, 높이와 규모가 상당했다.
다른 전장보다는 좁았다. 대신 마나 집중점이 총 다섯 개나 존재했다. 중앙의 궁전과 동쪽 성당, 남쪽 제작소, 서쪽 마법의 탑, 북쪽 병영에 보란 듯이 박혀 있는 것이다.
시혁의 시작점은 남쪽.
약간 서쪽에 치우쳐져 있었다. 다만 길이 구불구불해서, 마법의 탑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했다.
상대는 장미 부인.
피 진영의 반신이었다.
‘어렵겠구나.’
시혁은 그 사실을 직감했다.
피 진영의 주 종족은 뱀파이어다.
아르거스의 뱀파이어는 중급 병종만 되어도 늑대와 박쥐로 변신할 수가 있다. 태양에 노출되면 전력이 약화되지만, 이 전장에서는 폐허 속으로 숨으면 그만이었다.
전장이 작은 만큼 치열한 격전이 예상되었다. 시혁은 초반부터 병영을 건설했다. 아울러 잘 쓰지 않던 봉헌소도 만들었다. 뱀파이어와 싸우려면 성수가 필수이니까.
“전장이 작네요?”
첫 번째로 소환한 신아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장미 부인은 2차 확장을 하고 시간이 꽤 지난 반신으로 알고 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중급 병종 두셋 정도는 운용이 가능할 겁니다.]
“난감하네요. 우린 성당 출신 영웅도 없잖아요?”
[최선을 다해 봐야지요. 그냥 져줄 수는 없으니까.]
신아영을 보내 제작소를 점령했다.
중립 괴물들이 지키고 있었다. 상당히 강해서 애를 좀 먹었지만, 신아영이 기지를 발휘해 베어 넘겼다.
제작소를 점령한 순간, 시혁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곳에는 고대의 마법이 깃들어 있다. 이 제작소를 점령한 동안, 시혁이 만드는 공성병기는 훨씬 더 강한 위력을 뽐낸다.
속이 쓰렸다.
시가전에서 공성병기보다는 일반 병사의 효용성이 훨씬 더 크다. 북쪽에서 시작한 장미 부인이 더 이익이라는 뜻이다.
신아영도 그 점을 알아차렸다.
[성당부터 점령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뱀파이어 상대로는 사제가 최고잖아요.]
[거리가 너무 멉니다. 기동성도 떨어지고요.]
[지금 승부수를 던져야 하지 않겠어요? 군대 다 갖춰진 다음에 싸우면 결국 우리가 불리해요.]
시혁은 잠깐 침묵했다.
맞는 말이다.
중급 병종을 소환하지 못하는 지금 한 발짝 앞서 나가야 했다. 성당을 차지한다면 약간은 격차를 벌릴 수 있을 것이다.
[좋습니다. 신아영 님께 맡기겠습니다.]
신아영이 창병들을 이끌고 출발했다.
마나는 아껴두었다.
곧 벌어질 접전에서 쓰기 위해서였다. 2차 확장을 마치면서 사용이 가능해진 특수 이적 중 오색 돌풍을 쓰면 소규모 접전에서는 높은 승률을 장담할 수 있었다.
신아영이 이동하는 사이, 본성에 꾸준히 신경을 썼다.
기본적인 건물은 다 건설했다. 각종 생산품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제작소의 마나 집중점 덕분에, 평소보다 발전 속도가 빨랐다.
이윽고 신아영이 성당 부근에 도착했다.
조용했다.
마땅히 들려야 할 소음이 들리지 않았다
시혁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괴물이 이미 잡혔나 봅니다. 조심하세요. 뱀파이어들이 근처에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네. 걱정 마세요.]
마나 집중점부터 확인했다.
성당 바로 앞에 있었다. 투명한 마나가 샘솟듯 출렁였다.
여기에 각 진영의 마나 추출 건물을 건설해야 마나가 공급된다. 권세 진영은 마나 저장소, 피 진영은 피의 우물이었다.
신아영은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숨어 있던 뱀파이어들이 튀어나왔다.
“죽어라!”
“내 먹이가 되어라!”
뱀파이어 영웅 하나와 기본 병종 뱀파이어들.
눈이 빨갛고 저마다 단검을 한 자루씩 들고 있었다. 작은 쇠뇌를 든 뱀파이어도 꽤 보였다.
신아영이 배에 힘을 주고 고함을 질렀다.
“크아아아!”
오크 혈투사가 흔히 얻는 전투 함성 특기.
기세 좋게 달려들던 뱀파이어들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반면 뱀파이어 영웅은 코웃음만 쳤다.
“어디서 잔재주를 피우느냐?”
입은 갑옷에서 불길한 검은 광채를 뿌리며, 신아영에게 날카로운 공격을 날렸다.
신아영은 왼손에 든 검으로 공격을 튕겨냈다.
이어 몸을 비스듬하게 움직이며 오른손의 검을 날렸다.
쌔액!
매서운 소리가 났다.
뱀파이어 영웅은 감히 경시하지 못했다. 가볍게 몸을 뒤틀어 신아영의 공격을 피했다.
폭풍과도 같은 공격이 이어졌다.
“크아아아!”
신아영이 괴성을 지르며 뱀파이어 영웅을 공격했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 같지만, 신아영이 몸으로 익힌 실전 경험이 녹아들어 있었다. 뱀파이어 영웅은 혀를 차며 간신히 공격을 피했다.
그냥 두고만 보지는 않았다.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더니, 붉은 번개가 성당을 내리쳤다.
경직되었던 뱀파이어들의 몸이 한순간에 풀렸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몸의 혈액이 부글부글 끓었다. 모공을 통해 핏빛 기운이 흘러나오더니, 성당 안에 적색 안개가 자욱이 깔렸다.
피의 영역.
뱀파이어에게는 힘을 주고, 생명체의 기력을 감소시키는 이적이었다.
동시에 시혁도 이적을 발현했다.
바람이 불었다.
빛나는 가루를 흠뻑 머금고 있었다.
다섯 가지 색채의 빛이 건물 벽을 통과했다. 성당 안에서 전투 중이던 소환자들의 몸에 스며들자, 당장 인간 소환자들이 기세를 올렸다.
오색 돌풍은 광역 강화 이적이다. 동시에 강화 마법이 다섯 개나 걸리니, 피의 영역과 비교도 안 되었다.
신아영의 무력과 시혁의 지원에 힘입어, 점차 전세가 기울어졌다.
빠르게 오길 잘 했다.
뱀파이어 병력이 더 충원되었거나, 요새화가 완료되었으면 이리 쉽게 끝내지는 못했을 테니까.
“치잇, 나중에 보자!”
뱀파이어 영웅이 도망쳤다.
나머지는 희생양으로 내던졌다. 그들이 악다구니를 부리며 엉겨 붙는 통에, 시혁도 소환자 몇을 잃고 말았다.
창병만 대동하고 온 참이라 잡을 수가 없었다. 신아영이 혀를 차고는 시혁에게 요청했다.
[이사님. 인부들을 보내주세요. 요새화를 시작해야겠어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곧 강찬 씨를 소환합니다. 강찬 씨에게 딸려 보내겠습니다.]
[서둘러주세요. 언제 뱀파이어들이 공격할지 몰라요.]
[알겠습니다.]
빠르게 강찬을 소환했다.
모아놓은 병사들과 복사, 치료사를 더해 인부와 함께 성당을 향해 보냈다. 빨리 한다고는 했으나, 상당한 시간이 지난 시점이라 잘 됐을지 모르겠다.
고민하다가 원거리 탐색 이적을 활용했다.
목표는 서쪽 마법의 탑.
뱀파이어들이 여길 점령했을까 싶어서였는데, 예상 밖으로 그렇지가 않았다. 뱀파이어는커녕, 괴상하게 생긴 괴물들만 배회하고 있었다.
시혁은 냉정하게 현재 상황을 판단했다.
장미 부인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터.
뱀파이어들을 어디로 보냈을까?
셋 중 하나다.
중앙 궁전을 점령하러 보냈거나, 성당을 공격하거나, 아니면 시혁의 본성을 기습하는 것.
‘설마?’
지금 시혁의 본성은 방어가 다소 약해진 상태다. 최소한의 방어 병력만 남기고 강찬에게 딸려 보냈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방어 시설이야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시혁은 계속 군대를 확충하던 것을 잠깐 중지했다.
정말 뱀파이어들이 공격해 오면, 믿을 것은 이적밖에 없으니까.
시간이 지났다.
강찬은 긴장한 채 폐허의 길을 따라갔다.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 성당에 도착하자, 시혁에게 전언을 보냈다.
[이사님, 도착했습니다. 요새화를 시작하겠습니다.]
[예. 저도 보고 있습니다. 진행해 주세요.]
기우였을까?
하지만 시혁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도둑들을 소환한 뒤 사방으로 보냈다.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말고 보고하도록 했다.
시혁이 예측한 대로 일이 돌아갔다.
근처 건물 잔해에서 박쥐 십여 마리가 튀어나왔다. 시혁의 본성으로 날아오더니, 뱀파이어로 변하여 건물들을 공격했다.
손에 든 주문서를 찢자 진득한 피가 사방으로 뿌려졌다.
강력한 독.
건물이 저절로 녹아내렸다.
선두에선 뱀파이어 마녀 영웅이 마구 저주를 날리고 있었다. 열심히 일을 하던 인부들이 저주에 맞고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동행한 뱀파이어 결투자 영웅이 킬킬대며 웃었다.
“완벽히 허를 찔렀군! 제대로 들어왔어!”
“이봐, 웃지만 말고 인부라도 잡아 죽여. 지금 피해를 못 입히면 우리가 져.”
“알았어, 알았다고.”
빈집을 털었다고 생각했나 보다.
시혁은 약간의 피해를 감수했다. 인부들을 본성 중앙, 거인 석상 앞 광장으로 모으자 뱀파이어들이 히죽대며 쫓아왔다.
이적을 쓰려고 마나를 모으자, 덩달아 하늘이 빨갛게 물들었다. 장미 부인이 대응 이적을 발현하겠다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지금 시혁이 쓸 이적에 대응 이적이 존재하기나 할까?
자신 있게 이적을 발현했다.
지목 소환이다.
오색의 문이 나타나고, 그 문을 통해 거대한 검치호가 출현했다.
“크르렁!”
짝니가 기세 좋게 울부짖었다.
뱀파이어 영웅들이 기절할 듯 놀랐다.
슬쩍 보는 것만으로도, 짝니의 강함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뭐야 저놈은?”
“미친! 무슨 소환수가 저리 세?”
“도망쳐!”
즉시 박쥐로 변해 도망쳤다.
일반 소환자들만 당했다.
꾸물거리는 사이 짝니가 덮친 까닭이다. 짝니는 빛의 발톱을 꺼내 가뿐히 뱀파이어들을 학살했다.
“크아앙!”
두 영웅을 쫓아가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두 마리 박쥐가 저 멀리 하늘 너머로 사라졌다.
짝니는 그 뒤에 대고 길게 울부짖었다.
시혁은 짝니를 치하했다.
[짝니야, 잘 했다. 좀 놀다 들어가라.]
[배고프오.]
[알았다. 간식도 좀 줄게.]
시혁은 마침 사냥꾼이 잡아온 멧돼지를 짝니에게 주었다.
짝니가 게걸스럽게 멧돼지를 먹어치웠다.
지목 소환이 마나 소모가 조금만 덜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지금 바로 몰아쳐서 끝장을 봤을 것이다.
시혁은 차근차근 풀어나갔다.
성당을 안정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거리가 머니, 방어 시설에 많은 것을 의존해야 했다. 또 기습당하지 않게 본성의 방어 준비를 갖추는 것도 신경을 썼다.
짝니를 돌려보내고, 세 번째 영웅으로 김미애를 소환했다.
김미애는 중앙 궁전으로 전진시켰다. 강찬과 신아영도 궁전으로 보냈다. 장미 부인이 마법의 탑을 차지하고 슬슬 궁전으로 진출하는 것을 정찰했기 때문이었다.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아까 본성을 기습했을 때부터 중급 병종이 보이더니, 지금은 중급 병종만 소환하는지 그 비율이 높아지는 것이다.
병사 대신 검사, 사수 대신 습격자, 시종 대신 집사.
핵심 병종은 대부분 중급 병종을 쓰는 셈이다. 피 진영은 정면 대결은 약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그것도 같은 단계에서나 통하는 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기습당했을 때 신아영와 강찬을 움직여 중앙 궁전을 점령하게 할 걸 그랬다.
전장에 마나 집중점이 많다는 것을 고려하지 못한 실책.
중앙 궁전에서 두 개의 군대가 마주했다.
< 소환자 전직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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