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문자 -1- >
해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곧 아니라고 머리를 흔들었다.
의문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자, 해골이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언제 해골 얼굴을 하고 있었냐 싶게, 평범한 한국인 남자의 얼굴이 드러난 것이다.
시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변신 이능?
아니다.
그런 거라면 에테르 파동이나 빛이 수반되어야 한다. 방금 전 이 남자는 어떤 기미도 없이 얼굴이 변했다.
마치 원래 이런 얼굴이라는 것처럼.
남자가 어색하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당신, 누굽니까?”
“헤헤, 전 한지호입니다. 얼마 전에 전역했고요.”
그걸 물어보는 게 아니지 않나.
시혁은 빤히 한지호를 쳐다보았다.
한지호가 아직 짧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델로크가 오려면 시간이 지나야 되는데, 나중에 다시 올까요?”
델로크?
죽음 지혜의 본명이다.
본인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칭호로 불리기를 즐겼지만, 한지호에게는 자기 이름을 가르쳐준 모양이다.
시혁은 손을 내저었다.
“그럴 필요 있겠습니까? 몇 시간이나 걸리는 데요?”
“대충 서너 시간은 걸려요. 하루나 이틀이 꼬박 지난 다음 올 때도 있고요.”
“그럼 저랑 술이나 한 잔 하시지요. 굳이 다음을 기약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야 좋죠!”
한지호가 반색을 했다.
시혁은 그대로 진료를 중단했다. 한지호의 접수를 취소시키고, 병원을 한 바퀴 돈 뒤 밖으로 나왔다.
경호원들이 따라붙었다.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자, 한지호가 괜히 위축되었다.
시혁은 그들을 보며 말했다.
“제 손님입니다. 오늘 밤에 제 집으로 초대했어요.”
“그러셨습니까?”
그제야 경호원들이 긴장을 풀었다.
방탄 리무진에 탑승하자, 한지호가 아이처럼 탄성을 질렀다.
“우와! 엄청나네요! 이런 건 영화에서나 봤습니다!”
시혁은 멋쩍게 웃었다.
한지호는 소파에 눕는다, 냉장고에서 위스키를 꺼내 마신다, TV를 틀어 채널을 본다, 게임 기능을 작동시킨다, 아주 법석을 떨었다.
그걸 구경하자, 한지호가 또 머리를 긁었다.
“아고, 죄송합니다. 제가 뭐에 몰두하면 주위를 돌아보지 않는 버릇이 있어서······ 이거 진짜 좋네요. 원장님께서 사신 거예요?”
“아뇨. 협회에서 제공한 겁니다.”
“맞다. 저번에 테러도 당하시고 했으니 이런 게 필요하겠네요. 부럽습니다.”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시혁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그렇다, 아파트다.
오피스텔은 팔아 치웠다. 대신 보안 기능이 엄격한 곳으로 이사했다. 윗집과 아랫집, 옆집은 경호원들이 들어가 시혁을 경호하기로 했다.
시혁은 한지호만 데리고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저녁 식사대용으로 초밥과 회를 넉넉히 시켰다. 냉장고에서 전통 소주를 몇 병 꺼내오자, 한지호가 군침을 삼켰다.
“자, 많이 드세요.”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한지호는 꽤나 먹성이 좋았다.
앉은 자리에서 넉넉히 3인분을 해치웠다.
하긴 막 전역했다고 했으니 한참 잘 먹을 때 아닌가. 차림새를 보니 그저 평범한 20대 초반 청년 같으니, 비싼 초밥을 허리띠 풀고 먹을 형편도 아닐 테고.
시혁도 회와 초밥을 먹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죽음 지혜가 어떻게 지구에 나타난 걸까?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넘어야 할 산이 한두 개가 아니니까.
일단 죽음 지혜는 아르거스의 기억을 보존하지 못한다. 고향 세계로 가면 기억을 잃는 것이다. 더구나 검은 천체처럼 죽음 지혜의 세계와 지구 사이를 잇는 차원문도 없었다.
낫슈바켈도 자력으로 차원 이동을 못해 쩔쩔매는 판에, 대체 무슨 방법을 썼는지 모르겠다.
한지호가 배를 두드렸다.
“우와, 맛있네요. 초밥이랑 회로 배를 채운 건 머리에 털 나고 처음입니다.”
“입맛에 맞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저도 가끔 생각날 때는 시켜 먹고는 합니다.”
“직접 가시지는 않고요?”
“좀 힘들죠.”
“그럼 여자친구랑 데이트할 때는 어떻게 해요?”
“아직 여자친구가 없어서요. 특별히 불편하다고 느낀 적은 없습니다.”
“저런······ 소개팅이라도 해드릴까요? 이래 뵈도 여초 학과 다녀서 아는 여자애들 많아요.”
“하하, 괜찮습니다.”
시혁은 그저 웃어 넘겼다.
한지호가 더 이상한 소리를 하기 전, 궁금하게 여긴 것을 질문했다.
“델로크와는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둘이 접점이 없는 것 같습니다만.”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자고 일어나니까 제 몸이 뼈다귀로 변해 있더라고요. 깜짝 놀라서 꿈인 줄 알았는데, 델로크가 저한테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한지호가 떠벌떠벌 설명을 했다.
자신이 해골로 변해 있을 때는 죽음 지혜가 육체를 제어한다. 하지만 그것을 한지호 역시 뚜렷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해골로 변하는 것도 한 번에 2시간 정도가 고작이라고 했다. 그 다음에는 원래대로 돌아간다. 그리고 적어도 이틀이 지나야 다시 변화가 된다.
이때 한지호가 스스로의 변화를 미리 감지하는 게 가능했다. 상황이 좋지 않으면 죽음 지혜에게 거부의 뜻을 전할 수도 있었다. 죽음 지혜가 변화를 강행할 수도 있으나, 대개는 한지호의 뜻에 따른다고 했다.
시혁은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겠습니까? 델로크가 지호 씨의 육체를 차지하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어? 그렇게 사악한 존재 같지는 않던데요?”
“맞습니다. 델로크는 사악한 존재는 아니지요. 다만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뿐입니다.”
델로크, 죽음 지혜는 흔히 말하는 리치다.
마법 연구를 위해 역천을 했다. 스스로를 되살려 허락된 수명의 10배 이상을 살았다. 그런 존재이니만큼, 죽음 지혜를 상대할 때는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된다.
한지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전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델로크는 저한테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어요. 변신하면 집 안을 좀 돌아다니다가 컴퓨터로 인터넷을 하고 있던데요?”
“인터넷이요?”
“네. 논문 같은 거 보더라고요.”
죽음 지혜가 육체를 움직일 때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다고 했다.
몽롱한 가운데, 그 행동을 같이 체험하게 된다나.
보는 논문이나 나누는 대화를 세세히 기억은 못했다. 그런 행동을 했다는 사실만 기억하곤 했다.
그건 그렇고, 죽음 지혜는 시혁과 함께 연구를 하면서 지구 문명에 호기심을 느꼈나 보다.
논문 탐독이라······
지구 문명의 지식을 모두 빨아들인다면, 죽음 지혜 또한 엄청난 일을 저지를 것이다.
기대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이틀이 지나야 다시 변신이 가능하다면, 지금 더 얘기를 나눌 수는 없겠다.
모레 다시 얘기를 나누기로 했다.
그렇게 다시 마주했을 때였다.
시혁의 집 안.
한지호가 몸을 움찔했다.
“아, 델로크가 오네요.”
“오래 걸립니까?”
“아뇨. 이제 곧······ 으윽!”
한지호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한지호의 몸이 바뀌었다.
죽음 지혜의 몸으로 대치되었다. 죽음 지혜가 흉험한 안광을 빛내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흠, 여긴 그나마 사람 사는 곳 같군. 백색 현왕, 그대의 저택인가?”
“저택은 아니고 아파트야.”
“아파트? 아, 탑 모양 주택 말이지? 그런 곳에 사람이 살다니 괴상하다. 아일리케의 닭장을 보는 것 같았어.”
아일리케는 죽음 지혜의 고향 세계 이름이다.
전형적인 판타지 세상.
죽음 지혜가 보기엔 그렇게 느낄 수 있겠다. 사실 지구에서도 그런 비판이 많으니까.
시혁은 팔짱을 끼고 죽음 지혜를 주시했다.
“저번에 깜짝 놀랄 일이 있다더니 이거였어? 솔직히 많이 놀라긴 했다.”
“네 도움이 컸다. 상반되는 속성의 힘을 융합하면 상위의 힘이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지. 덕분에 차원 전이의 마법을 완성했다.”
“차원 전이? 이게 차원 전이야?”
“그렇다. 다만 차원문이 연결되어 있어야 해서 아르거스와 아일리케, 혹은 아르거스와 지구를 연결하는 게 고작이다. 아일리케와 지구를 연결할 수는 없었다. 중계 기지를 설정하려고 해도 중간에 마나가 변형되어서 실패했
지.”
“아하, 그럼 넌 지금 아르거스에 있겠구나.”
“맞다. 성지에 들어와 있지. 한지호는 내가 소환했던 해골 기사다. 죽음의 기사 영웅으로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끌어들였지.”
“일반 소환자인데, 다시 소환이 가능해?”
“가능하지. 차원 전이의 마법을 응용한 거다. 나도 상당한 보물을 소모해야 하니 달갑지는 않다만, 몇 명에게 표식을 찍는 것은 어렵지 않지.”
죽음 지혜는 지구 말고도 여러 세계에 차원 전이를 쓰고 있다고 했다.
주로 문명이 발전하여 배울 지식이 있는 곳들.
신기한 발상이다.
시혁도 한번 연구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식은 많을수록 좋다. 여러 세계의 지식을 융합하면 그만큼 더 좋은 결과가 나오곤 했다.
“요즘은 논문을 보고 있다고 했지?”
“그렇다. 한지호의 머리에 든 게 아무 것도 없어서 고생을 했지. 한국어로 된 논문은 거의 없고, 있어도 별로 볼 가치가 없었다.”
“끄응, 너무 혹평하는 거 아냐?”
어쩔 수 없다.
대부분의 SCI 논문은 영어로 작성되는 게 현실이니까.
“지구에 온 목적은 그게 다냐? 지식을 배우는 거?”
“그렇다. 어차피 내 본신은 아일리케에 있다. 지구에 와서 뭘 해 볼 수도 없어. 아까 들으니 내 의도를 걱정하는 것 같던데, 너희 종족에게 해를 끼칠 의도는 추호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라.”
“그렇다면 다행이고.”
죽음 지혜는 최소한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다.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기 때문이다.
또한 차원 전이가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당분간은 그냥 지켜봐도 좋을 듯했다.
단, 그만한 조치는 취해놓고.
넋놓고 믿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으면 어디 하소연도 못한다.
시혁은 편하게 고쳐 앉았다.
“그래, 내가 도와줄 건 없어?”
“있다. 논문을 봐야 하는데 등록된 아이디가 필요하다.”
“등록된 아이디? 아하, 유료 구독 말하는 거지?”
“그렇다. 앱스트랙트? 한국어로 초록이라고 하나? 그걸 보니 읽고 싶은 논문이 많은데, 대부분 제한이 걸려 볼 수가 없었다. 한지호에게 결제하라고 닦달을 했지만 돈이 없다고 안 된다더군.”
“나도 결제해 놓은 건 없어. 김진태 원장님한테 물어봐야겠네. 늦어도 내일이나 모레 안으로 처리해줄게.”
“좋다. 이제야 일이 제대로 돌아가겠어.”
“공짜 아냐. 내가 나중에 아일리케에 가면 그때는 날 도와줘야 해.”
“당연한 말은 하지도 마라.”
2시간은 짧고도 짧았다.
이제 겨우 이야기를 시작했을 뿐인데, 죽음 지혜의 안광이 일렁였다.
시혁을 보더니 작별 인사를 했다.
“시간이 다 됐군. 난 이만 가봐야겠다. 아르거스의 귀환 시간이 다가왔으니, 다음에 지구에 방문하는 것은 이틀 뒤가 될 것이다.”
“아일리케와 지구의 시간 흐름이 같다고 했지? 알았다. 이틀 뒤 밤에 한지호를 다시 내 집으로 초대하겠다.”
“좋다. 백색 현왕. 그때 보도록 하지.”
죽음 지혜가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다.
곧 한지호로 변신했다.
한지호는 눈을 깜빡였다.
“이야, 원장님 이제 보니 델로크와 친한 사이셨나 봐요. 어떻게 친해지신 거예요?”
“친한 건 아니고, 같이 연구를 한 동료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혹시 원장님 그럼 차원 이동자에요? 아일리케? 거기 다녀오신 겁니까?”
한지호는 영 헛다리를 짚었다.
아르거스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모양이다.
얘기를 들어보니 죽음 지혜가 설명을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고 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이미 계약을 했다고 해서, 계속 끌려 다녔다나.
한지호가 침을 삼키더니 질문했다.
“원장님, 전 혹시 이미 죽은 겁니까?”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렇잖습니까. 델로크는 리치고, 반신 죽음 지혜라고 불린다던데······ 제가 죽어서 델로크와 만나 계약을 한 게 아닐까요? 제가 되살아나는 대신 몸을 준다고······”
시혁은 헛웃음을 지었다.
상상력이 참 풍부한 사람이다.
하기야 한지호 입장에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아르거스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니까.
< 방문자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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