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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 세계의 한의사-182화 (182/250)

< 첫 번째 대전 -2- >

김미애의 말을 곱씹더니, 두툼한 눈썹을 한곳으로 모았다.

“생명과 재산, 권리를 보장한다고?”

“그렇다. 백색 현왕께서 공언하신 내용이다. 야만 진영의 반신들은 자기 백성들을 노예 취급한다지? 괴수의 먹이가 되어도 하소연하지 못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백색 현왕께서는 너희를 온전한 백성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했

다. 백색 현왕의 법을 지키는 한, 너희는 다른 종족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것이다.”

다분히 고압적인 태도다.

그런 태도가 오히려 오크들의 마음을 잡아끌었다. 힘을 숭상하는 오크들이라, 조곤조곤 얘기했으면 자기들이 우세라고 생각하고 오판을 했을 것이다.

오크 전사가 도끼를 내렸다.

“정말 백색 현왕께서 말씀하신 게 맞나? 우릴 속일 생각은 아니겠지?”

“너희를 속여서 뭘 하려고? 그냥 밀어버리면 되지. 나는 그렇게 하자고 간언했으나, 백색 현왕께서는 마지막 자비를 베푸셨다.”

계속된 압박 앞에서, 오크들은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

무기를 내던지고 투항했다.

조건은 없었다.

그저 시혁이 공언한 사항을 잘 지켜주기만 바랄 뿐이었다.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김미애의 부대가 입성하는 것을 맞이했다.

지휘관 노릇을 하던 대가 창병이 김미애에게 슬쩍 물었다.

“영웅님, 지금이라도 후환을 없애는 게 좋지 않을까요? 영 미덥지가 않습니다.”

“백색 현왕께서 결정하신 사항이다. 고블린이라면 모를까, 오크들은 한번 맹세하면 배신하는 일이 없으니 염려하지 마라.”

“음…… 알겠습니다.”

창병은 여전히 마뜩찮은 표정이었다.

전장밖에 경험해보지 못했을 테니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르거스의 원주민들이 갖는 특성에 대해선 이해하지 못하니까.

오크 전원이 충성 맹세를 했다. 복속하기로 결정한 이상, 스스로의 목숨을 시혁에게 바치겠다는 것이다.

산밑 마을과 같은 방법을 썼다.

그들의 머리 위에 말했다.

[멧돼지 혓바닥과 멧돼지 눈에 사자를 보내라. 너희가 내게 복속했음을 알리고 그들에게도 복속하길 권유하라.]

인근의 오크들은 대부분 같은 일족이었다. 그런 만큼 복속시키는 건 어렵지 않을 터였다.

다만 전면전에 내몰기는 좀 꺼려졌다.

상명하복의 문화가 강한 오크 종족이니 명령을 하면 듣긴 들을 것이다. 상대가 자기 사촌 동생이든, 장인어른이든 무시하고 도끼를 휘두르겠지.

대신 그들의 마음에 피멍울이 들 것이다. 전장 이후 그들을 통치할 것을 감안하면, 가능한 한 피하는 게 좋았다.

부대를 셋으로 나누었다.

절반은 김미애와 함께 산으로 보내 레벨을 올리게 했다. 약 스물다섯 명은 오크 사자에게 딸려 보냈다. 멧돼지 엄니 마을의 복속을 상징하는 동시에,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한 행동이었다.

금세 오크들의 복속이 완료되었다.

인구 5백이 늘었다.

오크는 나이만 차면 충분히 전사의 역할을 수행한다. 족히 2백 명 이상의 전력이 늘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을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

도끼 장군이 조용히 있는 게 수상쩍었다. 시혁이 오크 마을을 회유하며 쓴 시간이면, 충분히 중앙 평원을 압박할 수 있었을 텐데.

시혁은 금방 도끼 장군의 의도를 간파했다.

지금 한창 영웅들이 레벨을 올리고 있겠지. 그러다 50레벨을 찍으면 모습을 드러내어 파죽지세로 공격해 올 것이다.

모아놓은 마나를 이용하여 뮤틀론을 소환했다. 횟수를 거듭할수록 몇 배의 마나가 필요한 까닭에 이것으로 마나가 완전히 바닥났다. 당분간은 자중하며 마나를 모아야겠다.

[뇌운 학자와 협력하여, 레벨 향상에 주력하라.]

“예, 현왕님.”

뮤틀론이 수십 명의 병력을 이끌고 산으로 떠났다.

잠시 소강상태가 이어졌다.

시혁은 강찬과 신아영에게 지시해 평원 중앙 지점까지 진출했다. 인부들을 대거 파견하여 나무 요새도 여럿 지었다.

맞은편에는 오크들의 주둔지가 몇 개 보였다. 목책 하나 없이 허술했지만, 오크들이 눈을 번뜩이며 경계하고 있어 기습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시혁은 계속해서 인구를 늘렸다.

병력을 확충하고 인부를 소환했다. 그걸 몽땅 다 최전선으로 보내 요새화 작업을 서둘렀다.

아직 석재를 본격적으로 쓸 수 없어 실질적인 방어력은 낮았다. 그래도 얇은 목책과 감시탑이나마 있는 것이 방어에 훨씬 도움이 된다.

그렇게 방어를 굳히고 있는데, 후방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산밑 마을의 피난민들이 창칼을 들고 멧돼지 엄니로 몰려간 것이다.

멧돼지 엄니에 머물던 창병이 엄중한 경고를 했다.

“물러가라! 이곳은 백색 현왕께 복속한 오크들의 마을이다!”

피난민 하나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쳤다.

“내 아내가 오크들에게 죽었소. 내 눈앞에서! 나는 복수를 해야겠으니 비켜서시오!”

“어처구니가 없군. 복수를 하려면 당사자한테 해야지 왜 아무 상관도 없는 이들에게 하느냐?”

“같은 오크 아니오!”

“같은 오크는 무슨. 헛소리 하지 마라. 너희들의 마을을 부순 오크들은 소환자 아니냐? 소환자는 너희 원주민들과는 엄연히 다르다.”

창병은 싸늘한 비웃음을 날렸다.

원주민들이 소환자에 대해 잘 모르기는 모르는 모양이다. 예전에 수인들도 곧잘 속더니,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창병의 말에도 불구하고, 피난민들이 비키라고 악다구니를 썼다. 오크의 심장과 머리로 제사를 지내 희생자들을 위로하겠다고 했다.

더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시혁이 개입했다.

[무슨 일이냐?]

하늘에서 목소리가 울리자, 피난민들이 얼른 땅에 엎드렸다. 오크들도 넙죽 달라붙었다.

창병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현왕님. 피난민들이 이 오크들을 죽이겠다고 찾아왔는데 어떻게 하지요?”

[왜 죽이겠다는 거냐? 모르는 사이도 아닐 텐데.]

“그게, 도끼 장군의 오크 군대에게 죽은 친지의 복수를 하겠답니다.”

[말이 안 되는데? 이 오크들을 죽여 봤자 뭘 한다고? 복수를 하려면 도끼 장군에게 해야지. 흠, 그게 좋겠다.]

시혁은 쫓아온 피난민들을 훑어보았다.

자세히 보니 내막을 알 수 있었다.

이곳 중앙 평원의 인간과 오크는 오래 전부터 서로 경쟁하는 사이였다. 인간은 정주 종족이고, 오크는 수렵 종족이니 갈등이 없을 리가 없었다.

유혈 사태로 번진 적은 없어도 분쟁의 씨앗은 언제나 있었다. 그게 이번 일을 계기로 촉발된 모양이다.

확실히 매듭을 짓고 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시혁의 성역에 화약통이 들어오는 셈이니까.

시혁은 짐짓 근엄하게 말했다.

[너희에게 오크에게 복수할 기회를 주마. 칼과 방패를 들어라. 너희를 최전선에 앞세워, 오크를 죽일 수 있게 배려하겠다.]

피난민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머릿속에서 소환자란 곧 영웅이었다. 당연히 전장에서 보는 소환자와 그들이 생각하는 소환자의 무력에 차이가 컸다. 그래서 도끼 장군의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제대로 대처를 못한 점도 있었다.

피난민들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건 좀……”

“어째서 신들의 싸움에 우리가 희생되어야 합니까? 왜 잘 살고 있는 우리를 이렇게 못 살게 구십니까?”

누군가 울분을 토했다.

시혁은 짧게 답했다.

[그럼 다시 공허 속으로 돌아갈 테냐?]

아무도 말이 없었다.

아르거스 행성은 아직 절반 정도만 복구되었다. 나머지는 조각조각이 나서 공허 속에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당연히 신역이나 성역보다 살기가 힘들었다. 24 고신이 자신들의 존재로 유지시키고 있어서 간신히 생존이 가능한 정도였다. 전장에 온 것만으로 벌써 공기가 바뀌었는데,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

다.

시혁은 좋은 말로 위로했다.

[너희의 심정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 책임을 애꿎은 오크들에게 묻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좋으나 싫으나 수백 년 동안 함께 살았고, 앞으로도 수백 년은 같이 살 이웃이 아니냐? 정말로 복수를 하겠다면 칼과 방패를 주겠

다. 단, 정확한 상대에게 해라.]

피난민들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몇몇은 무장을 달라고 했다. 그들의 의사를 받아들여 다른 마을의 병사들 틈에 섞었다. 대장간에서 생산한 무기를 쥐어주자, 그럴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그것을 보고 오크들이 시혁에게 청원했다.

“백색 현왕이시어! 저희도 싸우게 해주십시오!”

[너희도?]

“예! 백색 현왕께서 베푼 은혜에 보답하고 싶습니다!”

[도끼 장군의 휘하에는 너희 일족이 다수 포함되었다고 들었다. 그들을 향해 도끼를 들 수 있겠느냐?]

열띠게 소리치던 오크들이 일제히 침묵했다.

그들에게도 쉬운 결정은 아니니까.

고민 끝에 뭐라고 입을 열려고 하자, 시혁이 선수를 쳤다.

[너희를 최전선에 내돌릴 생각은 없다. 대신 내 군대는 기동력이 부족하니 너희를 정찰병과 연락병으로 쓰고 싶다. 추천하고 싶은 인재가 있느냐?]

오크들이 반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심 바라던 바였다. 일족에게 칼질을 하는 것보다 훨씬 나으니까. 이 근처는 제 집처럼 드나들던 곳이었고.

수십 명의 오크가 합류했다.

다들 강건하고, 매나 늑대 같은 동물을 데리고 있었다. 지금 시혁이 소수 운용 중인 도둑 병종보다 훨씬 효율적이라는 뜻이다.

오크들이 중앙 평원을 누볐다.

그러다 수상쩍은 움직임을 감지했다.

고블린들이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했지만, 멀리서 보기에도 뭔지 알 수 있었다.

공성추였다.

저걸로 시혁이 요새화한 지역을 공략할 모양이다.

한두 개면 무시하겠으나 그 수가 열 개를 훌쩍 넘었다. 여기에 비장의 패가 가세하면 시혁이 요새화한 부분은 가볍게 돌파할 것이다.

시혁은 김미애에게 물었다.

[아직 멀었습니까?]

[이제 30레벨이에요. 여기 전장은 중립 괴물이 좀 약하네요. 50레벨을 찍으려면 시간이 더 필요해요. 한 일주일 정도?]

[그렇게 오래요?]

[네. 그나마 수는 많아서 저랑 뮤틀론 님은 50레벨이 가능하겠는데, 더는 힘들 것 같고요.]

일주일이면 위험하다.

모든 괴물을 한 영웅에게 몰아줬다면 슬슬 50레벨 영웅이 나올 때가 되었다. 시혁보다 몇 발짝 빠르게 영웅 육성을 시작했으니까.

영웅 대 영웅 구도로 가면 불리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이적뿐이다.

다가올 회전을 대비하여 최대한 마나를 비축했다. 마나 저장고 역할을 하는 백색 조각상도 여러 개 세웠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 강찬이 시혁에게 보고를 했다.

[100명으로 이뤄진 부대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선두에 고블린 주술사 영웅이 보입니다. 50레벨입니다!]

급히 시선을 옮겼다.

위풍당당하게 걸어오는 부대가 보였다.

모두 보물 하나씩을 들고 있었다. 일반 소환자도 그냥 무시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산 하나의 중립 괴물들을 몽땅 털어먹은 상태.

아무리 요새화를 진행시켰어도 저 부대의 진군을 막을 수는 없다.

[미애 씨, 뮤틀론 님, 중앙 평원으로 오세요.]

[네. 바로 가겠습니다.]

지금까지 소환했던 모든 병력을 최전선에 집결시켰다.

병력의 수만 따지면 둘이 비슷했다. 시혁이 더 많은 소환자를 불렀으나, 도끼 장군은 원주민들을 더 많이 징용했으니까.

질이 문제.

전반적인 레벨은 도끼 장군 측이 높았다. 영웅 부대도 영웅 부대이거니와, 초반에 인간 마을을 학살하면서 레벨이 오른 소환자도 있었기 때문이다.

도끼 장군의 병력이 먼저 집결을 마쳤다. 공성추들의 제작이 늦어져서 공격을 시작하지 않고 있었다.

덕분에 공격 시작 전 김미애와 뮤틀론도 도착했다.

각각 31, 27레벨.

강찬과 신아영은 모두 15레벨이었다.

도끼 장군의 영웅도 현재 네 명.

고블린 주술사, 오크 투사, 오크 사냥꾼과 트롤 추적자였다. 주술사만 50레벨이고, 나머지는 10레벨에서 20레벨 대에 머무르고 있었다.

주술사가 문제다.

특히 아군을 강화하고 적군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유명한 병종 아닌가. 당연히 이런 대규모 접전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뿌우우!

도끼 장군 진영에서 긴 나팔 소리가 울렸다.

그와 함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맞은편 하늘에서 울렸다.

[백색 현왕! 영웅일 때는 아주 유명했었다지? 하하, 반신으로서는 아직 한참 모자라는구나. 이미 승패는 결정이 되었으니 괜히 심력을 쏟지 말고 항복하는 것이 어떠냐? 내 너를 불쌍히 여겨, 성역으로 금화를 좀 보내주도록

하마.]

< 첫 번째 대전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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