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차 확장 -2- >
아마 그것을 피해온 것 같았다.
시혁에게는 잘 된 일이다.
짐짓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 머무르고 싶은 대로 머무르다 가고 싶은 때에 가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천사분들이 머무를 곳이 없는데, 어떻게 하지요?]
[저희 처소가 마련될 때까지 하늘마루에서 지내면 안 되겠습니까? 척박하긴 마찬가지지만, 저희 손으로 만든 요새라 정이 갑니다.]
순간 좋은 생각이 들었다.
하늘마루는 대개 시혁의 신전 상공에 정박하고 있다. 기껏 힘들여 만들어 놓고, 제대로 써먹지 못하는 것이다.
아달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이렇게 하면 어떻습니까? 아달 님을 하늘마루의 성주로 임명하겠습니다. 하늘마루를 뜻대로 운용하시고, 그 대신 제 성역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아달이 움찔 놀랐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나 보다.
[진심이십니까?]
[진심이지요. 아달 님이 적임자 아닙니까? 제 주민들은 난민 수준에 불과합니다. 영웅들은 아르거스에 항상 있는 게 아니고요.]
[으음……]
아달이 잠시 고민에 잠겼다.
성주라고 해도 하늘마루를 온전히 소유할 수는 없다. 하늘마루는 어디까지나 시혁의 것이니까.
하지만 공허 요새의 성주가 되는 것은 아주 매력적인 일이었다. 아르거스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매우 희귀한 요새일뿐더러 계속 강해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
일개 식객으로 머무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곧 아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백색 현왕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시혁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아달이 누구냐.
곧 삼품 천사에 오를 것 같다는 전도유망한 천사였다. 삼품 천사면 50레벨 영웅과 맞먹었다. 천사이니 주민들의 일까지 맡기긴 힘들어도, 성역을 보호할 강력한 장군을 얻은 셈이다.
영웅들도 아달의 합류를 기뻐했다.
[아달 님이 지켜주시면 성역이 공격당할 염려는 없겠습니다!]
[든든하네요!]
아달에게 공식적으로 성주 직함을 준 후, 영웅들과 면담을 했다.
네 명이 아니라 다섯 명.
미리 의논했던 바와 같이, 다섯 번째 영웅과 함께 온 것이다.
철갑 방패 뮤틀론.
중장보병 출신의 상위 계급 인간 영웅이었다. 중급 병종 출신이긴 해도, 경험이 많고 장비가 충실했다. 어설픈 상급 병종이나 고급 병종 출신보다는 나았다.
뮤틀론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신기합니다. 이제 갓 반신이 되셨다는 분이 저런 천공성도 가지고 있고…… 전장에서 벌일 일이 기대가 되네요.”
[기대해도 좋습니다. 흠, 뮤틀론 님은 아마 네 번째로 소환하게 될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네 번째라…… 어쩔 수 없지요. 저보다 출신 병종도 상위이고, 계급도 높으신 분이 세 분이나 계시니까.”
강찬과 신아영, 김미애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셋 다 상급 병종 출신.
근두운으로 계속 아르거스에 온 까닭에 계급도 높아졌다. 강찬과 신아영, 김미애 모두 초월 계급이었다. 한세훈도 군주 계급에 이르렀다.
아마 몇 달 후면 준신 계급이 될 듯했다. 그럼 올해가 가기 전에 반신이 되는 것도 가능하겠지.
한세훈이 입맛을 다셨다.
“아, 난 또 마지막이네.”
“어쩔 수 없지. 의뢰나 열심히 해.”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번 더 전직해서 의학자든 주교든 찍을 걸 그랬어.”
시혁은 다섯 영웅에게 정식으로 의뢰를 했다.
신아영에게는 병영 건설, 강찬에게는 사격장 건설, 한세훈에게는 치료소 건설, 김미애에게는 촌장 선출, 뮤틀론에게는 치안 유지를 각각 맡겼다.
뒷짐만 지고 있진 않았다. 그들이 쓸 수 있게 풍성한 마나와 금을 안겨 주었다. 덕분에 영웅들 모두 빠르게 일을 완료했다.
김미애만 시혁의 조언을 구했다.
“이사님. 투표를 할 생각인데, 주민들이 투표에 대해 이해를 못해요. 어떻게 하죠?
[투표라…… 가능하겠습니까? 여기 주민들 의식 수준은 중세 암흑기보다 떨어집니다. 민주주의에 대해 이해할 리가 없어요. 차라리 귀족 출신을 찾아보시죠?]
“귀족 출신이요?”
[예. 영웅일 때 돌아다니면서 보니 이런 작은 마을들은 선조가 무슨 성의 성주였거나, 영웅적인 무용담을 뽐낸 전사의 후예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뭐, 날조되었을 가능성도 있고요. 차라리 그쪽에서 뽑아보는 게 좋겠습니다.]
대재앙으로부터 이미 천년이 넘게 지났다.
따라서 과거의 질서는 모두 파괴되었다. 다만 구전되는 대재앙 이전에 대한 향수는 무척 강해서, 당시의 지배 계급에 대한 호감으로 변형되어 나타났다.
김미애는 시혁의 말을 어느 정도는 납득했다. 1천이 넘는 주민들을 일일이 뒤지더니, 마침내 옛 인간 왕국 기사의 후예라는 청년을 찾아냈다.
광명지에서 살다 새롭게 이주해 왔다.
신체는 건장하고 눈빛은 맑았다. 사람들에게 신망도 있는 것 같았다. 다만 정말 후예가 맞는지는 알 수가 없고, 나이가 어린 편이라 신뢰를 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김미애가 탐탁찮은 얼굴을 했다.
“차라리 귀족 출신 말고 기존 주민 중에 한 명을 쓰는 건 어때요? 제가 알아보니 원장님 성역에 원래 있던 주민들 중에 목수가 발언권이 좀 있어 보이던데요.”
막 마을을 건설하는 단계이니 그럴 수밖에.
하지만 결국 밀리게 된다. 다른 특출 난 게 있다면 모를까, 단순히 목수 기술로 주목을 받았을 뿐이니까.
시혁은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마침 목수에게 혼기가 찬 딸이 있었다. 그 딸과 청년을 결혼시키는 게 어떠냐고 제안을 했다.
그저 은근히 뜻을 전했지만, 목수는 까무러치게 놀랐다. 얼른 딸과 청년을 결혼시키겠다고 서약했다. 둘도 어렵지 않게 동의했다. 서로의 외모가 훌륭했을 뿐더러, 둘 다 성역 내에서 1등 신붓감과 신랑감으로 유명했으니까.
결혼식이 끝나고, 김미애가 청년을 마을 회관 안으로 데려갔다.
청년의 이름은 마그누스.
김미애가 시혁을 대신하여 선언했다.
“마그누스. 백색 현왕께서 너를 이 마을의 촌장으로 지목하셨다.”
마그누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제가 잘 할 수 있을까요?”
“난 모른다. 아무도 모르지. 백색 현왕께서도 마찬가지다. 너는 너 스스로를 입증해야 해. 아무리 성역의 첫 촌장이라 해도, 모든 이가 왕이 되고 귀족이 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명심해라.”
“예, 조언 감사드립니다.”
마그누스가 딱딱한 얼굴로 허리를 굽혔다.
첫 촌장이 정해졌다는 사실은 금방 성역 전체에 퍼졌다.
주민들이 술렁였다.
“마그누스? 그게 누구야?”
“몰라. 처음 들어.”
“어제 목수네 딸이랑 결혼한 놈이잖아? 광명지 출신이라던데.”
“아, 나도 들었어. 선조가 유명한 기사였다며?”
“하긴 백색 현왕께서 어련히 알아서 점지해 주셨겠지.”
소란은 금방 진정되었다.
시혁이 주민들의 신뢰를 받는 까닭이었다.
당장 고개만 들어도 하늘마루가 둥둥 떠다닌다. 거기서 생산되는 풍부한 마나 덕에, 시혁은 다른 반신들에 비해 이적을 몇 배는 더 많이 사용했다. 방문 주기도 빈번하니, 주민들이 지지를 보내는 것도 당연했다.
영웅들이 하나둘 신전으로 들어왔다. 시혁이 맡겼던 일에 대해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끝났어요. 마그누스가 지금부터 촌장이에요.]
[사격장을 완료했습니다. 언제든 궁병 양성이 가능합니다.]
[병영 다 만들었어요. 바로 모병할까요?]
[치안은 잘 유지되고 있습니다. 주민들 간에 다툼이 발생해서 중재 중입니다.]
[치료소는 만들었습니다만 약초밭이 없어요. 약초밭을 건설할까요? 아니면 숲에서 약초를 캐오게 할까요?]
이것으로 최소한의 구색은 갖췄다.
강찬과 신아영, 뮤틀론에게는 모병을 맡겼다. 한세훈에게는 약초꾼 육성을 의뢰하고, 김미애에게 치안 유지를 해달라고 했다.
목표 인원은 50명.
그 정도면 충분하지 싶었다. 당장 성역이 공격 받을 일도 없고, 치안 유지만 해도 충분하니까.
다만 훈련은 제대로 해야 했다. 전장에서 승리하면, 해당 전장이 시혁의 성역으로 합쳐지기 때문이다. 미처 잡지 못한 중립 괴물들이 마을을 습격할 수 있었다.
모병은 순조로웠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남자들이 대거 지원한 까닭이었다.
그 안에는 마그누스도 있었다.
남자들 틈에 섞여 같이 땀을 흘렸다. 섬광의 검은 잠깐 벗어놓은 뒤였다. 하긴 체격이 건장하다곤 하나 무술을 익힌 것도 아니니, 이게 최선이었다.
뮤틀론이 시혁에게 말을 걸었다.
“마그누스가 제법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선조라는 기사가 보통 인물은 아니었나 봅니다.”
시혁은 속으로 실소를 했다.
뮤틀론은 전형적인 판타지 세계의 사람이었다. 그 자신부터 대대로 기사 가문이고, 영주에게 충성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종종 이런 말을 할 때가 있었다. 종종 혈통에 얽매이는 것이다.
시혁은 적당히 대꾸했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과는 좀 다르겠지요. 하지만 지금 수준으로는 부족합니다. 더 강하게 굴리세요.]
뮤틀론이 씩 웃었다.
“맡겨 주십시오. 전 제 고향 세계에서도 보병대 교관입니다. 병사의 마음가짐을 뼛속 깊이 새겨주겠습니다.”
시혁은 영웅들을 보며 가끔씩 참견을 했다.
마나를 붓고, 이적을 사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야 훈련이든 뭐든 속도가 빨라지기 때문이다.
그 덕분이었을까.
금세 목표를 채웠다. 병영과 사격장에서 기합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제 곧 1차 확장이 완료될 것이다.
김미애가 시혁을 찾아와 건의했다.
“이사님. 봉헌소랑 시장은 안 지으세요?”
[벌써 지을 필요가 있을까요? 너무 이른 것 같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봉헌소, 시장, 마법 학교는 빨리 짓는 게 좋대요. 그래야 성역에 사제와 마법사들이 빨리 육성되고, 시민도 출현한다고 하네요.”
어차피 마법 학교는 지금 못 짓는다. 2차 확장을 할 때쯤에나 건설이 가능했다.
고민하다가 김미애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봉헌소는 후에 성당이 된다. 권세 진영의 가장 강력한 조합인 성기사와 주교 조합이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다.
시장은 지금 만들어 봐야 뭐가 좋을까 싶었다. 시혁의 성역은 기껏해야 자급자족이 겨우 가능한 곳이니까. 그래도 장기적으로 보면 나쁘지 않고, 무엇보다 마나가 넘쳐나니 좀 쓰기로 했다.
두 건물까지 짓자, 슬슬 지구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조금 조바심이 들었다.
이번에는 전장에 가지 못하는 걸까?
다행스럽게도, 귀환을 불과 1시간 앞두고 모든 절차가 완료되었다.
대충 무장을 하고 제식만 배웠다. 그 다음 50명이 모여 시혁의 신전에서 마을회관에 이르는 길을 행군했다. 주민들이 모여 그걸 구경하자, 시혁의 신전이 하얗게 달아올랐다.
이어 백색의 마나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
성역이 확장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보호하는 구역이 넓어졌다. 씨앗 상태에 비하면 최소한 스무 배는 되는 듯했다.
땅덩이는 여전히 작다. 이것은 전장에서 승리하여 채워 넣어야 했다.
시혁만 아니라 다섯 영웅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십년감수했네요.”
“누가 아니래.”
“이제 전장으로 가야죠?”
“쉽겠네요. 상대도 1차 확장만 했을 거잖아요? 무난하게 이길 수 있겠어요.”
1차 확장을 끝냈으니, 전장에서 모든 기초 병종을 소환할 수 있다.
이후에는 소환자의 전직이라는 단계를 더 거쳐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병종 소환이 가능해진다.
시혁은 영웅들을 신전으로 불러 모았다.
다들 긴장되는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리할 거라고 예측은 하지만 확신은 할 수 없는 법이니까.
근두운의 시범 운행 때 죽음 지혜가 적으로 나타났듯, 어떤 반신이 나올지 누가 알겠나.
두근대는 마음을 안고, 전투 참가를 선언했다.
빛이 번뜩였다.
막대한 힘이 휘몰아쳤다.
그 힘에 의해 시혁의 의식이 둥실 떠올랐다. 하얗게 빛나는 시혁의 의식을 따라, 적, 청, 황, 백, 녹색의 작은 빛 덩이가 쏜 살 같이 날아올랐다.
우주를 질주했다.
전장들이 모여 있는, 점점이 빛나는 천체를 향해서.
< 1차 확장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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