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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 세계의 한의사-179화 (179/250)

< 1차 확장 -1- >

시혁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익숙한 공간이다.

희뿌연 빛으로 가득한 작은 세상.

성지.

기껏해야 시혁이 사는 오피스텔과 비슷한 크기였다. 확장을 거듭해야 더 넓어질 것이다.

중앙에는 지도가 새겨진 흰 대리석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높은 의자가 있어, 거기 앉으면 지도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게 가능했다.

시혁은 바로 그 의자에 앉은 채 눈을 떴다.

지도부터 확인했다.

아주 단출했다.

중앙에 작은 신전이 하나 있고, 주변에 마을이 조성된 게 전부였다. 대부분 농부들이고, 기술자라고는 목수와 대장장이, 무두장이가 고작이었다.

1차 확장의 조건은 간단하다.

인구, 군대, 영웅.

최우선적으로 인구를 1천 이상으로 늘려야 한다. 그 다음 병영과 사격장, 성당 등 건물을 지어 일정 수준의 군대를 확보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영웅 다섯을 등용하면, 1차 확장이 이뤄진다.

현재 성역의 인구는 기껏해야 2백 명.

인구를 늘리는 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1천 이상의 인구가 함께 살려면, 여러 편의 시설이 필요하니까.

뭐, 방법은 있다.

시혁은 허공에 손을 저었다.

성역을 돌아다니던 강찬과 신아영이 움찔했다. 한세훈과 김미애도 마찬가지였다. 시혁의 신전으로 들어오더니, 흰 구멍을 통해 성지로 진입했다.

강찬이 시혁을 보고 씩 웃었다.

“원장님, 신수가 훤하십니다.”

“훤하기는요. 자, 다들 앉으세요.”

“여긴 좀 좁네요? 협회장님 성지는 넓었는데.”

“아무래도 그렇지요. 협회장님은 벌써 4차 확장을 했잖아요. 저번에 죽음 지혜의 성지에 가보니까, 최종 확장을 하면 거의 운동장 수준으로 커집니다.”

“얼른 확장을 하셔야겠어요.”

“그런데 저흴 부르신 이유가 뭐죠? 의뢰 때문인가요?”

김미애가 관심을 보였다.

“맞습니다. 1차 확장 때문에 해결해야 할 게 있어서요.”

“저희가 뭘 하면 되죠?”

“일단은 인구를 늘려야 합니다. 지금 성역의 인구가 2백 명인데, 이걸 1천 명으로 늘려야 해요. 군대는 제가 만들면 되고…… 영웅도 1명 더 등용해야 되는데 여기까지 도와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인구를 어떻게 늘리죠? 다산 마법이라도 걸어야 하나요?”

“하하, 그래서 언제 인구를 늘리겠습니까. 신역에서 데려와야지요. 다른 반신의 성역에서 데리고 와도 좋지만, 그랬다간 사이가 틀어질 가능성이 높으니 좀 그렇고요.”

“광명지에서 데려오면 되겠네요. 천사들한테 불만을 가진 종족이 많잖아요.”

한세훈의 말에 강찬이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순순히 따라올지 모르겠습니다. 성역은 아무래도 신역에 비해 불안한 곳 아닙니까? 공허를 건너는 것도 문제고……”

“걱정 마세요. 하늘마루를 내어드리겠습니다. 그걸 보면 불안할 게 없다는 걸 깨달을 거예요.”

하늘마루.

바로 시혁이 반신의 시련을 겪으며 만든 공허 요새의 이름이었다.

강찬이 무릎을 쳤다.

“묘책입니다! 마음도 잡고, 공허도 안전하게 건너고, 아주 도랑 치고 가재 잡기네요!”

“하늘마루를 보면 영웅을 등용하기도 쉬울 겁니다. 여러분도 있으니까요.”

처음에는 이 네 명 말고도 한 명을 더 끌어오려고 했다.

하지만 기껏 시혁의 성역에 와도 뭘 시킬 게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규모가 너무 작기 때문이다. 이번 방문 내로 1차 확장을 끝내어 전장에 들어간다는 보장도 없고.

따라서 네 명만 데리고 왔다. 이들과는 인연도 오래 되었고 사이가 돈독해서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아도 미안하지 않았으니까.

하늘마루의 제어권을 임시로 강찬에게 넘겼다.

거대한 성이 둥실둥실 떠서 광명지를 향해 날아갔다. 며칠 뒤에는 성 가득 원주민들을 실어 올 것이다.

영웅들을 내보낸 후 잠시 숨을 돌렸다.

이제 마을을 살피려고 할 때였다.

시혁의 성역 외곽이 출렁이더니, 작은 해골새 한 마리가 성역 안으로 들어왔다.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죽음 지혜?]

[그래, 나다.]

[여기엔 무슨 일이지? 벌써 새로운 대적자가 생겼나?]

[아니. 네가 1차 확장을 성공했다고 해서 구경하러 온 거다.]

해골새가 시혁의 성역을 한 바퀴 돌았다.

백색 마나가 본인을 침습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혁의 신전 지붕에 내려앉더니, 짧게 한숨을 쉬었다.

[대체 언제 4차 확장까지 갈 거냐?]

[오래 걸리진 않아. 조금만 기다려라. 그 말 하려고 온 거냐?]

[겸사겸사. 내 연구가 드디어 완성되어서 알려주려고 왔다.]

[네 연구?]

죽음 지혜는 아주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런 식으로만 말하면 알아들을 수가 없다.

하지만 시혁은 금방 눈치를 챘다.

죽음 지혜가 가장 중점을 두어 연구한 게 뭐냐.

차원 전이다.

불사의 역병이 그랬고 중첩 저주가 그랬다. 아르거스에서 얻은 상태 이상을 고향 세계로 옮기는 것에 능숙했다.

[설마, 차원 전이냐?]

[오호. 역시 너는 말이 통하는군. 그렇다. 차원 전이를 완성했다. 최종 실험도 성공했지.]

[도대체 그 차원 전이가 뭐야? 설마 네 영혼을 전이시키는 건 아니겠지?]

[흐흐, 비슷하다. 말로 해서는 못 알아듣겠지? 조만간 직접 보여주마. 보고 놀라지나 마라.]

죽음 지혜는 한동안 차원 전이를 자랑하다가 돌아갔다.

오랜 세월 혼자 지내서일까. 죽음 지혜는 이런 식으로 시혁을 찾아와 대화를 나누다 가곤 했다.

조금은 외로웠던 모양.

그나저나 차원 전이라……

조만간 죽음 지혜를 지구에서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까지나 나중 일.

신전 주위 마을로 시선을 돌렸다.

작다.

허름하다.

움막과도 같은 집만 늘어서 있었다. 좀 좋다고 해봐야 단칸 통나무집이었다. 마을 회관 같은 것은 보이지도 않고, 돼지나 닭을 키우는 집도 없었다.

농장도 몇 개가 전부였다. 밀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은 제대로 된 농기구 없이, 나무를 깎아 만든 걸 썼다.

그 너머는 여전히 척박한 상태.

농장을 만들든, 건물을 짓든 개간부터 해야 했다.

뭐부터 해야 할까.

의식주부터 해결해야겠지. 그 다음에라야 주민들을 뜻대로 부려 군대를 만들 수 있었다.

손을 뻗었다.

지도 위의 공간을 움켜쥐었다.

마나를 다스리자, 시혁의 손이 찬란한 백색의 보광을 뿜기 시작했다.

주민들이 웅성거렸다.

“저걸 봐!”

“백색 현왕께서 뭘 하시나 봐!”

시혁의 새로운 칭호다.

지도 위에서 빛을 뿌리는 만큼, 성역의 하늘에서도 빛이 일렁였다. 정확히 시혁이 손을 뻗은 지도상의 그 지점이었다.

빛이 곧 형체를 갖췄다.

황색의 구처럼 변하더니, 농장 너머로 천천히 낙하했다.

땅으로 파고들었다.

누런빛이 사방으로 질주했다. 땅이 옅게 진동하더니, 바위가 꿈틀대며 지면 위로 올라오고 작은 돌들이 저절로 한쪽으로 모였다. 네모 반득하게 구획이 정해지면서, 고랑과 이랑이 생겼다.

밭이 생긴 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또 이적을 발현했다.

이번에는 녹색 물결이 새롭게 생긴 밭을 뒤덮었다. 종자를 뿌리지도 않았건만, 밀이 싹을 틔우고 삽시간에 자라나 밭을 황금색으로 만들었다.

주민들이 입을 벌렸다.

이내 기뻐하며 만세를 불렀다.

“백색 현왕 만세!”

“만세! 만세!”

“신들의 축복이 있기를!”

시혁은 잠깐 숨을 골랐다.

마나는 많았다.

하늘마루 덕분이었다. 하늘마루를 지탱하는 무한의 힘을 아주 조금 끌어오는 것만으로도, 시혁은 막대한 양의 마나를 휘두를 수가 있었다.

지금은 광명지로 보내놓았지만, 그 전에 미리 받아놓은 마나로도 이 정도는 간단했다.

더구나 시혁은 이적을 그냥 쓰지 않았다. 오행의 속성과 결부시켜 더 효율적으로 만든 뒤 사용했다. 당연히 다른 권세 진영 반신들보다 훨씬 더 우위에 있었다.

남은 마나를 가늠해 보았다.

지금의 성역 전체를 다 갈아엎는 것도 가능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뿐이다. 밭만 펼쳐 놓느니, 숲도 있고 냇물도 있는 게 좋으니까.

다음으로는 숲을 정리했다.

지금 시혁의 성역은 반 이상이 숲에 덮여 있었다. 그 중 절반을 들어냈다. 모조리 목재로 변환시킨 뒤, 마을 옆에 쌓아두었다.

마지막으로 쇠 속성의 마나를 이용, 각종 도구를 소환했다. 톱과 망치, 도끼부터 쇠막대, 곡괭이, 정과 끌, 괭이와 낫에 이르기까지 주민들이 쓸 도구들이었다.

주민들을 내려다보며 의념을 퍼뜨렸다.

[마을 회관을 짓고, 너희의 집을 보수해라.]

마을 회관 자리는 새롭게 개간한 밭 근처로 정했다.

조만간 하늘마루를 타고 새로운 주민들이 도착한다. 이들은 분명 마을회관 근처에 자리를 잡을 것이다. 일을 할 밭이 코앞에 있으니까.

마을회관은 성역이 확장함에 따라 아성, 성, 궁성, 왕궁으로 변화한다. 대수림의 엘프 섭정이나 암흑지의 황후가 그렇듯, 세속 권력의 중심지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선적으로 건설을 해야 했다. 본격적인 성역 발전은 그 다음부터였다.

“영차, 영차!”

“새참 드셔가며 하세요!”

주민들이 통나무를 마을 회관 건설지로 옮겼다.

성인 남자 둘이면 충분히 들 수 있었다. 필요한 통나무가 쌓이자, 목수를 필두로 건설을 시작했다.

지반은 이미 다져진 상태. 주춧돌을 놓고 나무 기둥을 박은 후 벽을 두르면 그만이었다. 수십 명의 주민들이 달라붙고, 시혁이 마나를 공급하자 건설 속도가 무척 빨랐다.

마나 공급의 영향이 굉장히 컸다. 채 하루도 안 되어 마을회관이 완성되었다.

주민들이 뿌듯한 얼굴로 마을회관을 쳐다보았다.

성역 내에서 유일한 2층 건물이다.

1층에는 커다란 홀이 있었다. 2층에는 침실과 회의실, 다용도실과 부엌 등이 존재했다.

주민들이 서로 쑥덕거렸다.

“마을회관도 지었으니, 이제 촌장을 뽑아야 되는 거 아냐?”

“맞아. 우린 아직 촌장님이 없잖아.”

“백색 현왕께서 어련히 내려주시려고. 우리끼리 정하는 건 좀 그럴 것 같아.”

“맞아, 맞아.”

마을회관을 지은 다음에는 주민들을 잠시 내버려두었다.

처음에는 뭘 할 줄 몰라 갈팡질팡 하더니 곧 자기 일을 찾아 갔다. 농부들은 밭을 돌보고, 손이 남는 이들은 힘을 합쳐 새로운 통나무집을 지었다.

벌써 이번 방문의 절반이 지나갔다.

슬슬 돌아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시혁은 자꾸 성역 한쪽을 살폈다. 다름 아닌 광명지 방향이었다.

기다림은 곧 보답을 받았다.

공허의 파도가 한 차례 일렁이더니, 그걸 뚫고 거대한 성이 나타났다.

주민들이 손을 흔들었다.

“하늘마루다!”

“어디 갔다가 온 걸까?”

하늘마루는 시혁의 신전을 향해 다가왔다.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아달.

그가 빛의 날개를 펼치더니 시혁의 신전으로 날아들었다. 그 뒤를 따라 족히 1백은 되는 천사들이 빛의 날개를 펄럭였다.

반가운 감정과 함께, 의아한 기분이 동시에 들었다.

[아니, 아달 님? 제 성역에는 어쩐 일입니까?]

[어쩐 일이기는요. 살려고 왔지요.]

광명지의 집은 어떻게 하고?

그에 대해 묻자, 아달이 어깨를 으쓱였다.

[현왕님께 붙어 있으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서 왔습니다. 저번에 공허 속에서 움직이면서 개인적으로 깨달은 게 있어서요. 겸사겸사 은혜도 갚고요.]

[그렇습니까?]

[예. 잘 하면 삼품 천사로 올라갈 것 같습니다. 한 몇 년 머무르다 가려고 합니다. 부디 내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많이 불편할 텐데요. 전 이제 막 반신이 되어서, 제 성역은 광명지에 비해 많은 것이 낙후되어 있어요.]

[뭐, 부족한 건 차차 채우면 되지요. 다른 분도 아니고 현왕님이니 금방 발전할 거라고 믿습니다.]

저번에 개조했던 빛의 날개에서 뭔가 영감을 얻었나 보다.

다른 천사들도 반응은 비슷했다. 어떤 이는 아예 시혁의 성역에 뼈를 묻겠노라고 떠벌리기도 했다.

단지 이게 시혁에게 온 이유는 아닌 것 같은데……

더 대화를 하다가, 시혁은 그들의 속내를 간파했다.

이 천사들은 시혁에게 빛의 날개를 시술 받은 후 비로소 그 진가를 드러냈다. 개중에는 아달처럼 사품, 오품의 고위 등급을 받은 이도 있었다.

그게 순조로웠을까.

아니다.

천사들이라고 마냥 선한 종족은 아니다. 선민의식과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 판국에 과거에는 빌빌대던 이들이 높은 품계에 오르자, 자연히 시기와 질투가 쏟아졌다.

< 1차 확장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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