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 세계의 한의사-174화 (174/250)

< 반신의 시련 -2- >

할 일이 많다.

시혁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성채를 만들려면 돌아다녀야 할 곳이 많습니다.”

“그렇겠지. 나와 너, 둘만으로는 네 시련을 극복할 수 없으니까. 최대한 도움을 청해라. 나는 마법진을 응축시켜서, 공허의 침식을 막을 방법을 강구해보마.”

“예.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가장 먼저 광명지를 향해 날아갔다.

지리상으로는 대모 세계수가 더 가깝지만, 제일 중요한 일부터 처리할 요량이었다. 천사들이 시혁의 부탁을 거부하기라도 하면 계획이 뿌리부터 흔들린다.

광명지에 도착하자, 천사 경비병들이 시혁을 알아보았다.

“오색 현자님 아닙니까?”

“하늘 관문을 이용하러 오신 거지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특별 대우였다.

시혁은 겸연쩍어 하면서도 하늘 관문으로 들어갔다.

아달의 집으로 갔는데, 뜻밖에도 아달은 더 이상 이곳에 살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얼마 전 사품 천사가 되어 분가했다는 것이다.

벌써?

솔직히 오품까지는 금방 오를 거라고 봤다. 하지만 사품이 될지는 몰랐다.

아달의 아버지가 전투단의 대장, 즉 삼품 천사였다.

그 아래 사품이라면 조장을 넘어서 위장(衛將)이다. 본격적으로 고위 천사의 품계로 올라가는 것이다.

놀라 기꺼워하며, 아달이 옮겨갔다는 집으로 향했다.

소식을 들은 아달이 마중을 나왔다.

“현자님! 오랜만입니다!”

지구에서는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으나, 아르거스에서는 벌써 4년이 훌쩍 지났다.

시혁은 아달이 자랑스럽게 펼친 빛의 날개를 확인했다.

부챗살처럼 꼿꼿하게 서 있었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매혹적인 빛에, 주위의 천사들이 동경하는 시선을 보냈다.

“전투단 대장이 되셨다면서요? 축하드립니다.”

“다 현자님 덕분이지요. 저번에 달아주신 빛의 날개가 아주 좋았습니다. 마나 방출과 상성이 아주 그만이던데요?”

아달이 날개를 펄럭였다.

오색 날개가 빛의 화살을 하늘로 쏘았다. 다섯 속성이 하늘을 찢더니 폭죽처럼 펑펑 터졌다.

좋은 일이다.

빛의 날개를 자기 몸처럼 다룬다는 뜻이니까.

시혁은 빙긋 웃었다.

“훌륭하십니다. 사실 부탁드릴 게 있어 찾아왔는데,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이런, 내 정신 좀 봐. 귀하신 분을 밖에 세워뒀네요. 얼른 들어오세요. 마침 전투단장님께서 진귀한 포도주를 승급 선물로 보내셨습니다.”

아달의 집은 꽤 컸다. 원래 살던 곳만큼은 아니어도, 지구에서는 부자들이나 살 정도였다.

하인들이 음식을 내온다, 수정을 깎아 만든 잔을 내온다, 부산을 떨었다. 비록 양은 적지만, 맛깔스러운 음식들이 탁자 위에 가득 차려졌다.

의례적인 말을 나누다가, 아달이 먼저 시혁에게 물었다.

“부탁이 있다고 하셨지요? 어떤 겁니까?”

“좀 어려운 부탁입니다.”

“어렵기는요. 현자님 덕에 저는 생명을 얻었습니다. 현자님이 아니었으면 지금도 바보 아달 소리를 들으며 절벽에서 떨어지고 있었을 겁니다. 목숨을 내달라고 해도 내드릴 테니 시원하게 말씀해보세요.”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아달이 결연한 태도로 말했다.

두 눈동자에 강렬한 진심이 묻어나왔다.

시혁은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제가 이번에 반신이 됩니다. 그러려면 시련을 통과해야 하는데, 좀 어려운 걸 받았습니다.”

“뭡니까?”

“공허 속에서 성채를 건설하라는 겁니다. 기초 공사부터 전부요.”

“아······”

아달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설마 이 정도일 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나 보다.

시혁은 차분히 자신의 구상을 밝혔다.

드워프들이 성채 조각을 만들고, 엘프들에게 나무의 씨앗을 받고, 빛의 날개를 가진 천사들이 조립을 한다는 것.

적색 고룡 낫슈바켈까지 참가하기로 했다고 하자, 아달이 혀를 내둘렀다.

“현자님은 대단하시네요. 저희만 아니라 고룡과 엘프, 드워프까지 선이 닿아 있으세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그리하면 가능성이 있겠네요. 좋습니다. 현자님을 돕겠습니다. 그런데 저 혼자서는 부족할 것 같습니다.”

“예. 최소한 천사 수백 명에겐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현자님께 도움을 받은 천사가 오죽 많습니까? 그들과는 꾸준히 연락을 하고 있는데, 대부분 현자님을 돕겠다고 나설 거예요.”

그렇다면 다행이다.

아달은 바로 천사들을 불러 모았다.

단번에 1천이 넘는 천사들이 모였다. 나머지는 광명지 곳곳에 흩어져 있어 바로 오기는 힘들다고 했다. 대신 시혁을 지지하며, 무슨 일이든 돕겠다는 편지가 수천 장이 넘게 날아들었다.

아달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천사들이 돕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당장 일이 없어 한가한 천사 오백 명이 시혁을 따라나섰다.

아달도 포함되어 있었다. 막 위장이 된 까닭에, 보직을 받지 못해 자리를 비워도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

나중에 천사들이 더 합류하기로 했다. 그러면 족히 일천을 넘어 이천을 바라볼 것이다.

대수림으로 넘어왔다.

천사들은 잘 따라왔다. 대부분 마나 방출이나 신성 마법에 일가견이 있는 탓에, 빛의 날개를 쓰면 공허에게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

오백이나 되는 천사들이 대수림에 접어들자, 엘프들이 당장 군대를 내보냈다.

“멈춰라! 천사들이 이곳에는 무슨 일이냐? 대수림은 엘프의 영역이다. 용건이 있으면 사자를 보내라!”

시혁이 앞으로 나섰다.

마침 안면 있는 엘프가 있었다. 파멸 왕자와의 대전에서 엘프 순찰자들을 이끌었던 대장이었는데, 그 엘프를 향해 엘프식으로 인사를 했다.

“헤레이즈 님,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지요?”

엘프 대장, 헤레이즈가 시혁을 보았다.

외투를 보고 눈을 깜빡이더니, 놀라 허리를 굽혔다.

“오색 현자님 아니십니까? 최근에 광명지에서 주로 활동하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천사들은 어째서 데려오신 겁니까?”

“제가 이번에 반신의 시련을 받았는데 도와주시기로 한 분들입니다. 산사태 군주의 성역으로 먼저 가야 하는데, 거길 가려면 대수림의 세계수 관문을 통과하는 게 빨라서요.”

“그렇습니까? 죄송하지만 규정 상 한꺼번에 통과시킬 수는 없습니다. 최대 20명씩, 약간의 간격을 두고 통과해야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아달 님이 다른 분들을 인솔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대모 세계수를 거쳐서 가겠습니다.”

“좋습니다.”

합류 장소를 정한 후 먼저 세계수 관문을 탔다.

엘프 섭정에게 면담 요청을 넣었다.

일이 바빠서 당장은 힘들다고 했다. 머리를 굴리다가, 이번에는 섭정의 아들인 엘프 사령관에게 요청을 했다.

금방 통과되었다.

파멸 왕자와의 대전 당시 매일같이 붙어 다닌 사이였다. 세계수의 가호를 걸친 시혁을 보자, 사령관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번졌다.

“이게 몇 년 만입니까? 참으로 격조했습니다. 섭정님께 면담 요청을 하셨다고요?”

“예. 부탁할 일이 있어서요.”

“세계수의 가호를 받는 분이 하시는 부탁인데, 당연히 수락해야지요. 어떤 부탁입니까?”

낫슈바켈이나 천사들에게 했던 설명을 똑같이 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저 급속 성장할 나무의 씨앗만 만들어 주면 되니까.

사령관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단지 그게 전부입니까? 좀 아쉬운데······ 그렇지, 저희도 성채 건설에 참여하면 안 되겠습니까?”

“엘프님들이요?”

“예. 공허는 저희에게도 크나큰 위협입니다. 대모 세계수께서 저희를 보호해주고 계시지만, 대재앙은 언제든 벌어질 수 있으니까요.”

공짜로 일손을 보내주겠다니 거절할 이유는 없다.

어차피 공허 방어 마법진은 시혁이 아닌 낫슈바켈의 것이니까. 알음알음 지식이 퍼져나가긴 하겠으나, 어떤 종족이든 단기간에 재현하는 건 불가능했다.

엘프들은 3백의 인원을 약속했다.

마법사 1백, 정령사 1백, 정원사 1백.

공허 속에서 작업하긴 힘들더라도, 마법진을 만들고 성장 나무의 씨앗을 만드는 것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인원을 선발하려면 시간이 좀 걸립니다. 선발이 끝나는 대로 산사태 군주의 성역으로 보내겠습니다.”

“서둘러 주셨으면 합니다. 며칠 내로 작업을 시작할 생각이니까요.”

“제 휘하 부대 중 하나를 통째로 보내겠습니다. 재편성만 하면 되니까, 사흘이면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마음이 넉넉해졌다.

선발대로 각 병종 열 명씩이 동행했다. 공허의 바다를 건너기 위해, 거대한 괴조에 올라타고 있었다.

세계수 관문을 통과하여 약속 장소로 향했다.

천사들이 시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달이 엘프들을 보고 눈을 빛냈다.

“저 엘프들이 씨앗을 만들기로 한 겁니까? 정원사들만 올 줄 알았는데, 마법사와 정령사도 왔네요.”

“추가로 270명이 더 올 겁니다. 단지 씨앗을 만드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성채 건설 모든 과정에 참가하기로 했어요.”

“허, 천사와 인간, 용, 엘프, 드워프, 이렇게 다섯 종족이 참가하는 셈이네요. 정말 걸작이 탄생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지요. 그래야 공허를 극복할 수 있으니까요.”

공허의 바다를 건넜다.

시혁이 앞장서고, 천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엘프들은 그 사이사이에 섞여 있었다.

장관이었다.

짝니가 뽑아내는 빛의 발톱과, 천사들의 등에서 너울거리는 빛의 날개가 어우러졌다.

거대한 빛의 새가 나는 것 같다고 할까.

엘프들도 경탄하며 시혁과 천사들을 보고 있었다. 이들도 이 정도 빛의 향연을 보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으니까.

[대단합니다.]

성역에 진입하자, 손문철이 말을 걸었다.

낫슈바켈을 통해 마법 전언을 보내놓은 후였다. 손문철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오백 천사와 삼십 엘프를 이끌고 바로 손문철의 본성을 향해 날았다.

본성에 있던 대한민국 영웅들이 하늘을 가리켰다.

“저기 좀 봐!”

“우와, 저거 뭐야?”

“천사들이다!”

“짝니가 쓰던 발톱이랑 색깔이 비슷한데?”

영웅들의 관심은 온통 천사들에게 쏠렸다.

대수림 근처라 엘프들은 많이 봤다. 괴조 정도야 소유한 영웅도 많았다. 하지만 천사들이 가진 빛의 날개는 얘기로만 들었지, 처음 보는 영웅들이 많았다.

시혁은 본성 안에 내려앉았다.

허공에 빛이 뭉치더니, 은회색으로 빛나는 사람 하나가 나타났다.

손문철의 허상이었다.

천사와 엘프들을 쓱 훑어보더니, 허허거리며 웃었다.

[이사님, 아예 군대를 끌고 오셨네요? 그리고 엘프는 이게 다가 아니라면서요?]

“예. 엘프 섭정은 못 만나고 사령관이랑 얘기를 했는데, 공허 성채를 만들 때 동참하겠다고 했습니다.”

[하긴 그들 입장도 이해가 갑니다. 자, 어서 들어오시죠. 손님들이 묵으실 곳도 준비를 해뒀습니다.]

손문철의 성역을 방문한 손님은 또 있었다.

막 천사들과 엘프들이 숙소로 들어가려던 찰나, 저 멀리 하늘에서 붉은 빛이 번뜩였다.

낫슈바켈이 도착한 것이다.

거대한 붉은 용이 하늘을 맴돌다 손문철의 본성에 내려앉았다. 쑥쑥 줄어들어 인간으로 변하고, 그 뒤에서 작은 꼬마 숙녀가 얼굴을 내밀었다.

“오색 현자!”

시혁을 부르지만 평소처럼 달려오진 않았다. 겁먹은 얼굴로 주위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찰싹, 하고 짝니의 엉덩이를 때렸다.

짝니가 왜 그러냐는 듯 시혁을 쳐다보았다. 시혁이 실라를 향해 턱짓을 하자, 귀찮아 죽겠다는 듯 어슬렁어슬렁 실라에게 다가갔다.

낫슈바켈이 품에서 어린아이 머리통만한 보석을 꺼냈다.

“자, 완성됐다. 내가 얘기한 물건이다. 24시간만 지속되니까, 그 안에 작업을 마쳐야 한다.”

“더 만들 수는 없을까요?”

“어허, 시간이 짧게 걸렸다고 간단히 만든 줄 아느냐? 내 보물 창고의 마법 재료가 상당히 소진되었다. 더 이상은 만들기가 힘들다. 나중에 쓸 재료가 모자라게 돼.”

차원 이동 마법과 공허 방어 마법진의 재료가 겹치는 게 좀 있나 보다.

그건 그렇고, 24시간이라······

굉장히 촉박했다.

하긴 그 시간 안에 성채를 완성시킬 필요는 없지 않나. 마법진만 깔아놔도 거기서 작업을 시작하면 된다.

시혁은 보석을 받아들었다.

“알겠습니다. 마법진 그리는 것, 도와주실 거지요?”

“그러려고 온 거 아니겠느냐. 설계부터 시작하자. 조립형으로 바꾸려면 손을 많이 봐야 한다.”

일을 분담했다.

마법진 설계는 낫슈바켈이, 마법진의 핵 제작은 시혁이 맡았다.

시혁은 손문철의 성지로 들어갔다.

천신의 보관과 무저갱의 핵을 조합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컸다. 언제 폭주해서 주변을 초토화시킬 줄 몰랐다. 성지 안이라야 그걸 막을 수 있었다.

손문철이 호기심어린 눈빛을 보냈다.

“뭘 하시는 겁니까?”

“마법진의 핵을 만들려고요. 보통 보물 가지고는 공허 마법진을 감당할 수가 없어요.”

“근원의 나무나 오행 순환체로도 안 됩니까?”

“네. 그러기에는 둘 다 부피가 커요. 오행 순환체를 한 곳에 몰아넣는 방법도 생각해 봤는데, 그 정도로는 힘이 부족하고요.”

두 개의 물건을 꺼냈다.

가까이 놓자, 서로 반응하여 떨기 시작했다.

< 반신의 시련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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