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신의 시련 -1- >
드디어 반신이다.
어떤 시련이 나올까?
소환자마다 다르니 알 수는 없다.
손문철은 단신으로 드워프 마을 10개의 충성을 받아내는 게 목적이었다. 마침 야만 괴수가 드워프 마을을 주기적으로 습격하는 곳이 있어서 쉽게 해냈다던가.
죽음 지혜는 훨씬 어려웠다. 해골용을 포함하는 10개 이상의 병종이 포함된 언데드 군대를 만들어야 했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시련을 받았다고 하자, 죽음 지혜가 한 마디를 했다.
“왜? 시련이 어려워?”
[당연하지. 난 해골용을 만들기 위해 야생의 용을 잡아야 했다. 무척 어려웠지. 공허에 꽤 침식된 상태라 성한 부위만 도려내어 해골용을 만드는 것도 쉽진 않았고.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 다음?”
[그래. 내가 알아낸 바에 의하면 반신이 탄생하면, 고향 세계의 차원문이 한 차례 크게 확장된다. 곧 축소되는 것 같다만, 그 과정에서 막대한 마나가 차원문을 통과하지.]
죽음 지혜는 미리 알았더라면 막대한 이득을 챙겼을 거라고 아쉬워했다. 자기의 경쟁자 격인 교단이 그 마나를 가져가서 한동안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나.
순간, 시혁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생각나는 게 있었다.
손문철과 삼두룡.
존스 아츠와 캘리포니아 사태.
다른 G급 이능력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은 어떤 사건을 해결하며 유명해졌다.
그게 실은 선후가 바뀐 거라면?
조심해야겠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시혁은 천상도로 향했다.
달리는 짝니 위에서 고민에 잠겼다.
시련을 받기 전, 열다섯 개의 진영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래야 그에 해당되는 시련이 시작된다.
전혀 생뚱맞은 진영을 선택할 수는 없다. 시혁이 체험했던 세 개의 진영 중 하나만 선택이 가능했다.
권세, 생명, 진리.
“뭐가 좋을까?”
시혁은 괜히 짝니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짝니가 불평을 했다.
[배고프오.]
“어휴, 먹보 녀석.”
냉정하게 생각했다.
세뇌가 유효했다면 무조건 권세 진영을 택했을 것이다. 나중에 신이 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니까.
지금은 상황이 좀 달랐다. 신위 경쟁의 끝까지 갈 생각이 없으니, 셋 중 어떤 것을 선택해도 좋았다.
그렇다면 가장 강력하고, 제일 잘 맞는 것을 택해야겠지.
권세 진영은 무난하게 강력하다. 모든 면에서 평균적이고, 특별한 약점이 없다. 조합이 갖춰졌을 때는 열다섯 진영 중 가장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적도 준수한 편이었고.
생명 진영은 기동성이 좋았다. 엘프들이 본격적으로 치고 빠지기를 하면 어둠 진영 정도만 제대로 대응을 했다. 요정으로 몰래 정찰을 하는 점도 장점이었다.
진리 진영은 전통의 강호였다. 등극 이적 때문에 빛이 바랬지만, 승천 이적을 쓰는 방법은 지금도 유효했다. 연구를 하며 마나를 생산하는 건, 다른 진영이 따라올 수가 없으니까.
결정을 내렸다.
권세 진영을 선택하기로 했다.
인간 종족의 진영이라는 게 가장 컸다. 아무래도 엘프를 다루는 것보다는 인간을 다루기가 쉬웠으니까. 진리 진영에는 책상물림 소환자가 너무 많아서 꺼려졌고.
아무리 시혁이 베리타스의 환생이라고는 하나, 전생에 기댈 생각은 없었다.
베리타스는 베리타스, 시혁은 시혁이니까.
어느새 천상도에 도착했다.
신전에 들어가자 라크라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야! 대적자가 되는 걸 거부했다면서? 왜 그랬어?]
힐난의 기색이 섞여 있었다.
시혁은 어깨를 으쓱였다.
“반신과는 얘기 잘 끝냈어. 내가 해결할 수 있는데 굳이 다른 손을 빌릴 필요는 없지.”
[대적자가 되면 얼마나 좋은지 알아? 현신님들 축복도 받고, 천상도의 기술도 배우고, 전용 무구까지 얻을 수 있어.]
“관심 없어. 내가 아르거스에서 배운 지식을 소화하려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데. 전용 무구? 이것들보다 더 좋은 게 있다고?”
짐짓 지팡이를 흔들어 보였다.
라크라의 눈이 지팡이를 따라 흔들렸다.
까뮈의 대장로가 탐을 내던 용왕 지팡이다. 대적자 전용 무구가 아무리 좋아도 양산품일 터, 시혁이 갖춘 네 개의 장비보다 좋기는 힘들었다.
라크라가 미련을 못 버렸는지 또 설득을 했다.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때? 대적자 거부하면 반신의 시련도 훨씬 힘든 걸로 나와. 반신이 못 되고 영원히 영웅에서 끝날 수도 있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볼게. 시련이나 알려줘.”
시혁은 완강한 태도로 말했다.
라크라가 고개를 젓더니, 다리를 놀려 신전 중앙으로 갔다.
[이쪽으로 와. 선택의 탑으로 가야 돼.]
라크라의 옆에 섰다.
짝니는 변함없이 침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라크라가 질색하는 얼굴을 하더니, 힘껏 발을 굴렀다.
텅!
발구름 소리가 신전 전체를 울렸다.
24개의 기둥이 그 소리를 수십 배로 증폭시켰다. 빛이 터지고, 공간이 일그러지며 시혁과 짝니가 멀고 먼 어떤 공간으로 날아갔다.
원형의 공간이었다.
넓고, 중앙은 텅 비어 있었다. 어둠에 잠긴 채 고즈넉한 침묵에 휩싸였다.
바깥쪽에는 열다섯 빛의 기둥이 보였다. 중앙과 빛의 기둥은 좁은 길을 통해 연결되었다. 그리 멀지는 않아서, 천천히 걸어도 10분이면 도착할 것 같다.
[아, 새로운 후보자인가.]
지친 목소리가 들렸다.
새 한 마리가 하늘 높은 곳에서 내려왔다. 몸은 까만데 머리는 눈처럼 새하얀, 한 마리의 올빼미였다.
올빼미는 시혁의 앞에 내려앉았다. 시혁을 보더니 피곤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후보자여, 나는 올빼미신 자일이라 한다. 반신이 되고자 선택의 탑에 온 것이겠지?]
“예. 처음 뵙겠습니다. 오색 현자 최시혁이라고 합니다.”
[그래, 보고 있다. 이력이 화려하구나. 대적자로 지명됐었는데 포기했다고? 대적자가 되는 걸 거부한 이유가 있느냐?]
“현신님들의 도움 없이도 반신을 해결할 수 있어서요.”
[하긴 이 자리에 온 것을 보면 이미 역경은 끝났다는 얘기지. 아쉽구나. 후보자와 같은 이가 대적자에 합류해야 하는데…… 본인이 싫다니 어쩔 수가 없지.]
자일이 부리로 자기 깃털을 다듬었다.
원래는 새까맸을 깃털 곳곳이 잿빛으로 바랜 뒤였다. 선택의 탑을 지키면서 힘을 꽤 소모한 듯했다.
[여기서 후보자가 할 일은 단 하나다. 이끌 진영을 선택하는 거지. 그러면 시련이 내려지고, 시련을 통과하면 후보자의 성지가 생성된다. 그때부터 후보자는 더 이상 영웅이 아니라 반신의 위계에 오른다.]
알고 있었다.
자일이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후보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세 가지다. 권세, 생명, 진리 진영 중 하나이지. 신중하게 생각해서 선택해라. 생명 진영과 진리 진영은 이미 신좌의 주인이 탄생했다. 그들을 실각시키고 신좌를 차지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불가능에 가깝지. 내 생각에는 권세 진영이 가장 좋을 것 같다. 아직 신좌의 주인이 탄생하지 않았고, 진영 자체도 강력하니까.]
시혁이 처음 생각했던 것과 같았다.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권세 진영으로 하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다. 길을 따라 권세 진영 빛의 기둥으로 가거라. 빛의 기둥이 뿜는 힘을 받아들이면 후보자가 뭘 해야 할지 저절로 알게 될 거다.]
시혁은 한쪽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백색 기둥이 눈부신 빛을 뿜으며 서 있었다.
순백색이야말로 권세 진영의 상징.
좁은 길을 따라 걷자, 백색 기둥이 뿌리는 빛이 강해졌다. 종국에는 다른 열네 개의 기둥은 보이지도 않게 되었다.
기둥 앞에 섰다.
손을 뻗자, 강렬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팟!
빛이 터졌다.
백색 광채가 시혁을 향해 쏟아졌다. 전신을 한 차례 훑고 지나가자, 몸의 노폐물이 모두 정화된 듯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시혁의 머릿속에 어떤 낱말들이 마구 떠올랐다.
[성채 건설]
이게 시혁이 받은 반신의 시련인가 보다.
어렵진 않겠다.
대수림이든 광명지든 빈 땅은 얼마든지 있다. 엘프 섭정이나 천사장들이나 모두 안면이 있으니, 그 정도는 쉽겠지.
하지만 잠시 후, 시혁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구체적인 조건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신역이나 성역에 건설하면 안 된다. 공허 속에 성채를 건설해야 한다.
미리 만든 다음 띄우는 것도 안 된다. 부품을 가져와서 조립하는 정도만 용인되었다. 그나마 너무 크면 또 안 된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조건이다.
공허에 나가기만 하면 즉시 침식이 시작된다. 칠색 저항체를 주입해도 몇 시간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공허 속에서 성채를 지으라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일이 옆으로 날아왔다.
[허어, 이거 심각한데? 이봐, 대적자 거부한 것 말고 또 일을 저지른 게 있어? 도저히 불가능한 시련이잖아?]
시혁은 말을 아꼈다.
짚이는 게 있었다.
세뇌를 푼 사실을 알아냈나 보다. 자일은 모르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니면 이런 무지막지한 시련이 내려올 까닭이 없지 않나.
시혁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모르겠습니다. 이걸 어떻게 하지요?”
[이해가 안 되는군. 이런 건 처음 보는데…… 흠, 지금이라도 대적자를 수락하면 어떠냐? 그럼 확실히 시련의 강도가 내려간다.]
“아닙니다. 도전해보겠습니다. 정 힘들면 그때 찾아뵙지요.”
[그래? 뜻대로 해라. 단, 늦게 찾아오는 만큼 넌 다른 대적자들에 비해 혜택을 받지 못할 것이다.]
상관없다.
자일과 대화를 하면서, 돌파구를 찾아냈으니까.
낫슈바켈의 둥지.
그곳에는 거대한 마법진이 새겨져 있다. 공허 속에서 무려 천 년을 버틴 마법진이었다. 그것을 응용한다면, 아무리 공허 속이라 해도 요새를 건설할 수가 있다.
선택의 탑을 벗어났다.
자일이 공간 이동을 시켜주었다.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뜨니, 신전 앞에 본인이 서 있는 것을 깨달았다.
“어휴.”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나마 낫슈바켈에게 전수 받은 지식이 있어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한참을 헤맸을 것이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시혁 혼자 모든 걸 할 수는 없다.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받아야 했다.
우선은 낫슈바켈부터.
짝니에 올라탔다. 광명지를 거쳐 반신의 성역을 몇 개 넘은 후, 낫슈바켈의 둥지에 방문했다.
실라가 아주 좋아했다.
약속한 대로, 마법도에서 군것질거리를 잔뜩 사다 안겨줬기 때문이다.
실라와 짝니는 둘이 놀게 놔두고 낫슈바켈과 마주 앉았다.
시련에 대해 듣더니, 낫슈바켈이 이마를 찌푸렸다.
“공허 속에 요새를 건설하라고? 그게 가능하나?”
“낫슈바켈 님께서 전수해 주신 지식을 활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법진을 설치하면 되겠지요.”
“마법진의 핵은 어떻게 하고? 나는 나 자신을 마법진의 핵으로 활용했다. 그래서 천 년 동안 유지하는 게 가능했지. 그나마 힘에 부칠 때가 많아서, 나는 천 년 동안 많은 힘을 잃었다. 최근에야 복구할 수 있었지.”
“생각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믿을 건 두 가지.
불멸, 혹은 무한.
이 중 하나를 이끌어 낸다면 필요한 힘을 공급할 수가 있다. 불멸은 생명체에게 작용하니, 아무래도 무한의 힘을 목표로 삼는 게 좋겠지.
완벽하게 무한의 힘을 만드는 건 불가능해도, 흉내를 내는 건 가능하니까.
마침 재료가 될 물건도 있지 않나.
천신의 보관과 무저갱의 핵.
둘을 조합하면 충분할 것이다.
낫슈바켈이 한 가지 사항을 지적했다.
“대수림에서 성채를 세운 다음 공허로 띄우면 되지 않느냐? 설마 처음부터 공허 속에서 작업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 설마가 진짭니다. 기초 공사부터 아예 공허 속에서 해야 된다는 조건이 붙어 있어요.”
“허, 신들이 너를 죽이려고 작정을 했구나. 그게 가능하겠느냐? 최소한의 공간이 있어야 마법진을 설치할 텐데, 그걸 만들 때까지 인부 수천은 죽게 생겼다.”
수천 명만 죽으면 다행이다.
낫슈바켈도 뾰족한 수를 내놓진 못했다. 다만 마법진을 소형화시켜 소지할 수 있게 만들어 보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났다.
요새를 조립식으로 만드는 거다.
핵심이 될 마법진부터 잘게 쪼개어 공허 속에서 조립하면 어떨까. 그렇게 조립하는 시간은 낫슈바켈이 만들 소형 마법진으로 버티고.
낫슈바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법이라면 가능하겠다. 처음 마법진을 조립하고 활성화시킬 때가 문제구나. 인부들을 구하는 것부터 그렇다. 아무리 마법진으로 보호한다 한들, 누가 공허 속으로 몸을 던지려고 하겠느냐?”
“그건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빛의 날개를 단 천사들.
그들이라면 시혁의 부탁을 들어줄 것이다.
또, 빛의 날개를 개조하면 칠색 저항체를 직접 생성하게 할 수 있었다. 마법진의 보호 없이도, 당분간 공허 속에서 생존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시혁의 머릿속에서 착착 계획이 진행되었다.
요새 부품은 손문철에게 맡기는 게 좋겠다. 손재주 하면 드워프니까.
조립은 어떻게 하지?
천사들이 제한된 시간 동안 조립을 끝낼 수 있을까?
엘프들의 도움을 받으면 되겠다.
생명 진영은 성장 이적을 써서 건물을 급속도로 완성시키곤 했다. 대수림의 엘프 종족에게도 그런 기술이 있었다.
씨앗을 대규모로 받아와서, 약속된 부위에 사용해야겠다. 이를테면 성장하는 나무를 접착제로 쓴다고 할까.
< 반신의 시련 -1-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