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 세계의 한의사-170화 (170/250)

< 박제된 신 >

황궁 깊은 곳에 비밀 통로가 있었다.

동행한 것은 단 셋.

황후와 호위 기사 둘 뿐이었다.

통로는 길고 어두웠다. 칠흑과도 같은 암흑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인간 상태였다면 빛 마법을 썼어야 했을 정도.

언데드의 육신이니 무시했다. 앞장 선 황후를 따라 허공을 둥실둥실 떠서 나아갔다.

내려갈수록 심연의 기운이 강해졌다. 굳이 시혁이 아니라 어떤 영웅이 와도 그 기운을 느낄 정도가 되었다.

가볍게 입을 열었다.

“괴상한 힘이 느껴지는군.”

그 말에, 다크 엘프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황후가 깔보는 얼굴로 말했다.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도 좋다. 단, 무저갱의 핵은 바라지 않는 게 좋을 것이야. 무저갱의 핵이 있는 곳까지 내려갈 용기도 없는 자에게 우리 종족의 보물을 내줄 수는 없지.”

“흥!”

시혁은 콧방귀만 뀌었다.

신위 경쟁의 승리자를 대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아무리 위험하다 한들 그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단, 대비는 철저히 했다.

스스로의 영혼과 정신에 온갖 방어 마법을 걸었다. 여차하면 환생과 낫슈바켈의 반지를 쓸 요량이었고.

통로의 끝이 다가왔다.

시꺼먼 어둠이 넘실대는 것이 보였다.

다크 엘프들이 옷매무새를 고쳤다. 조심스럽게 어둠을 향해 다가갔다.

지이잉.

이명이 울렸다.

심연의 기운이 본격적으로 시혁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보호 마법을 사용한 까닭에 무난히 막아냈지만, 직감적으로 오래 버티지는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벌써 다크 엘프들은 온통 달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오, 암흑 황제시어……”

황후가 희열에 찬 얼굴로 어둠을 향해 다가갔다.

암흑 황제.

어둠 진영 신위 경쟁의 승리자였다. 이 자가 있는 한 어둠 진영의 반신들은 신위를 차지하지 못한다. 암흑지를 공격하여 박살낸다면 가능하겠지만,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시혁은 가만히 어둠 저 편을 주시했다.

회오리치는 어둠, 그 속에 거대한 그림자가 너울거렸다.

사람 형상이다.

가슴 중앙에는 작은 눈동자가 하나 깜빡거렸다. 흑요석처럼 검게 반짝거려서, 어둠에 휩싸인 와중에도 눈에 확 뜨였다.

시혁은 눈동자를 보았다.

눈동자가 시혁을 보았다.

순간, 시혁이 걸었던 보호 마법이 모조리 박살이 났다.

“크윽!”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다크 엘프들은 그런 줄 어쩐 줄도 몰랐다. 어둠에 홀려 정신을 놓고 있었다. 자해를 한다, 수음을 한다,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시혁은 다시 보호 마법을 걸었다.

소용없었다.

눈동자가 빛을 뿜자 모든 것이 취소되었다. 심지어 손가락에 낀 겨울 여왕의 반지가 박살나며 변신이 풀리고 말았다.

황후가 시혁을 보고 헥헥 댔다.

“잘 생긴 노예로구나. 이리 오렴. 이 몸을 기쁘게 하도록 해라. 크게 상급을 내려주마.”

아주 정신이 나갔다.

두 호위 기사가 자기들끼리 흘레붙고 있었다. 참 역겨운 모습이라, 그만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런 광경을 보고 있자니 시혁의 정신도 나갈 것 같았다.

즉시 무한의 주머니에서 원래 장비를 꺼냈다. 순식간에 갈아입는 한편, 스스로에게 오행 순환체를 몽땅 주입했다. 보호 장벽도 새롭게 쌓았다.

오색의 빛 무리가 시혁의 머리에 어렸다.

그러자 좀 견딜 수가 있었다. 각 속성 마나 별로 보호 마법을 걸었더니 더 그러했다.

여차하면 천공 개방도 써야겠지.

세 다크 엘프를 외면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천천히 지금 있는 공간을 살폈다.

넓다.

완전히 뻥 뚫려 있었다.

앞쪽, 어둠이 일렁이는 곳 아래는 바닥이 아예 없었다. 뚫려 있는 구조로, 공허와 어둠이 직접 맞닿았다.

그걸 본 시혁의 눈이 깊어졌다.

공허가 해체되고 있다.

어둠의 힘을 암흑 황제가 빨아들였다. 그 덕에 외부에서는 공허 속에 어둠의 힘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생기는 족족 암흑 황제가 흡수하는 까닭이었다.

시혁은 가만히 암흑 황제를 불렀다.

“암흑 황제?”

화르륵!

한 차례 어둠이 불길처럼 타올랐다.

그러나 그 뿐.

눈동자로 시혁을 주시하는 것 말고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무래도 시혁의 생각이 맞는 모양이다.

신위 경쟁의 승리자라 한들 좋은 처지는 아니다. 이렇게 한곳에 박혀서 공허를 해체하는 작업만 하고 있다면, 뭐 하러 신이 되느냔 말이다.

시혁은 가볍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죽음 지혜와 함께 신들의 세뇌를 해결하길 잘 했다. 안 그랬으면 시혁도 결국 저 신세가 되었을 테니까.

천천히 암흑 황제에게 다가갔다.

그 앞에는 제단이 하나 있다.

제단 위에 작은 보석 하나가 보였다. 새까만 보석으로, 주변의 빛을 흡수하여 마치 빛의 고리를 두른 듯했다.

무저갱의 핵.

암흑 황제가 빨아들이는 어둠 중 일부가 보석 안으로 스며들었다. 핵이 그때마다 검게 번들거렸다. 정신력이 약한 자라면, 무저갱의 핵을 보는 것만으로도 미쳐 날뛸 것이다.

무저갱의 핵을 갈무리했다.

방어 마법이 걸려 있었지만 가볍게 무력화시켰다. 제법 고차원의 마법이었으나, 지금의 시혁이 비할 바는 못 되었다.

떠나기 전, 시혁은 암흑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신이 아니라 죄수를 보는 것 같았다.

발목에 사슬이 매인 채, 광산에서 노역을 하는 죄수.

암흑 황제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시혁처럼 대종사의 환생일까? 아니면 그저 영혼 파장이 비슷한, 재기 넘치는 소환자였을까?

신이 되면 고향 세계에서는 어떻게 되는 걸까?

숱한 의문이 시혁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해결할 길은 없다.

짧은 대화라도 한 마디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마법 전언을 날려도, 육성으로 질문을 던져도 묵묵부답.

박제된 신이 된 소환자의 운명에 애도를 표하며, 낫슈바켈의 반지를 작동시켰다.

암흑지 1층에 시혁의 모습이 나타났다.

다크 엘프들이 시혁을 보고 눈을 끔뻑였다.

“침입자다!”

곧 정신을 차리고 경보를 울렸다.

다크 엘프 병사들이 사방에서 새까맣게 몰려왔다.

더구나 영웅들도 있었다. 시혁을 보더니, 이게 웬 떡이냐며 달려들었다.

“어흥!”

시기적절하게 짝니가 나타났다.

변신이 풀리고 당황해 있다가, 시혁의 존재감을 느끼고 무슨 일인지 깨달은 모양이다.

얼른 올라탔다.

짝니가 빛의 발톱을 꺼내 질주했다. 뭐가 앞을 가로막으면 썽둥썽둥 베어내고, 힘들다 싶으면 공중을 달렸다. 천장이 높은 곳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순식간에 요새를 향해 달려갔다.

경비병들이 소리를 질렀다.

“닫아, 닫아!”

그러나 짝니가 더 빨랐다.

간발의 차이로 문을 통과했다.

좁은 계단을 거침없이 질주했다. 마법 통신을 받았는지 문이 닫히기 시작했으나, 짝니와 시혁이 이미 푸른 하늘을 마주한 다음이었다.

“놓치지 마라!”

다크 엘프들이 시혁을 추적했다.

지상으로 나온 이상 잡혀줄 생각은 없었다.

공허의 바다로 몸을 던졌다.

칠색 저항체와 함께 깊이 잠수하자, 다크 엘프들은 그만 닭 쫓던 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시혁은 씨익 웃었다.

가슴에 품은 무저갱의 핵이 든든했다.

이게 있다면 공허에 내재된 악의에 대해 집중적으로 탐구할 수 있었다. 아까 암흑 황제 앞에서도 가능했겠지만 너무 위험해서 관뒀고.

마법도의 연구실로 돌아왔다.

무저갱의 핵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암흑 황제를 봤을 때 느꼈듯, 무저갱의 핵은 심연의 힘을 품고 있다.

어둠이 현상이라면 심연이 본질이라는 느낌.

더구나 이계의 문을 여는 것도 가능했다.

그 이계가 어디인지 추적하자, 순간적으로 거대한 존재감이 시혁을 짓눌렀다.

“헉!”

시혁은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워낙 초월적인 존재라, 잠깐 그 존재를 느낀 것만으로도 기절하고 만 것이다.

대신 얻은 것도 있었다.

어둠 대종사 녹스가 소환했다는 이계신의 힘을 더 선명하게 느꼈다.

그 정체는 낫슈바켈이 말한 것과 같다.

파괴신.

혹은 포식자.

언젠가 세계 전체를 집어삼키고 새로운 세상을 건설할 존재였다. 아르거스의 신들과는 그 수준이 달랐다.

그렇다면 폭주하는 힘을 하나로 묶은 악의의 정체가 명확해진다.

종말이다.

이건 피할 수 없다.

녹스가 파괴신의 일부를 소환했을 때부터 정해진 거였다.

공허가 걷히면 종말에 오염된 고신들이 나타난다. 그들에 의해 아르거스는 파멸을 맞이하고, 고신들은 다른 사냥감을 찾아 나선다.

한 가지 추측을 했다.

아르거스의 신들도 그걸 안 게 아닐까?

그래서 녹스를 공격했고, 녹스가 열다섯 대종사를 끌어들여 대재앙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시혁은 짧게 푸념을 했다.

“젠장. 이제 어쩌지?”

공허를 해석해서 무기를 만든다? 그것도 반대되는 속성의 무기를?

그건 불가능했다.

무저갱의 핵이 있으니 흉내는 낼 수 있다.

하지만 흉내 내는 정도로 뭘 어쩐단 말이냐. 상대의 기세만 더 올려줄 뿐이다.

‘지구는 괜찮을까?’

슬며시 걱정이 되었다.

최근에 무슨 일이 있었나.

심연의 마왕 중 일부가 지구를 거쳐 갔다. 그렇다면 지금의 아르거스가 지구의 미래 모습이 되지 말란 법이 없었다.

“후우.”

짧게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지구와 아르거스의 연결을 끊는 게 좋을지도 몰랐다.

새로운 이능력자는 나타나지 않겠지만 괴수 출현도 중단된다. 기존의 지식은 유효하니, 인류 전체의 삶이 보다 윤택하고 평화롭게 변할 것이다.

진지하게 고민을 해봐야겠다.

녹스에게 새삼 이가 갈렸다.

감당도 못할 파괴신을 부른 까닭에 아르거스가 이리 된 것 아닌가.

본인은 대종사 중 카로스, 베리타스와 함께 수위를 차지하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아르거스 파멸의 일등공신 역할을 한 셈이다.

이미 지난 일.

녹스를 성토해 봐야 무엇 하겠나. 앞으로의 일이 중요하지.

심연에 대한 연구를 멈추었다.

연구하는 것 자체가 종말을 앞당기는 행위였다. 그나마 이곳은 아르거스이니 지구에는 영향이 없겠지만, 본인이 심연에 매몰되어 버리면 큰일이 난다.

무저갱의 핵을 품속에 넣으려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빛과 어둠이 둘 다 있네.’

무저갱의 핵이 어마어마한 보물이지만, 천신의 보관도 그 정도는 된다.

이 둘을 융합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생명과 죽음을 합치자 불멸이 튀어나왔다. 빛과 어둠은 불멸보다 더 대단하면 대단했지, 약한 것을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요령은 똑같았다.

빛과 어둠의 힘을 먼저 체화하는데 힘썼다. 천신의 보관을 쓰고 그 힘을 받아들이고, 무저갱의 핵을 쥔 채 기운을 느꼈다.

상당히 시간이 걸렸다.

지구에 몇 번이나 갔다 와야 했다. 몇 번은 힘이 폭주해서, 목숨을 잃은 적도 있었다. 시기적절하게 환생을 쓰지 않았으면 1레벨로 떨어졌을 것이다.

결국은 성공.

그 결과물이 시혁의 눈앞에 나타났다.

완전히 순수한 힘.

빛도, 어둠도, 세상도, 파멸도 될 수 있었다.

형체는 없었다. 존재감을 뿜지도 않았다. 그저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존재할 따름이었다.

그걸 보며, 시혁은 타는 목마름을 느꼈다.

이건 필멸자에게 허락된 힘이 아니다.

빛과 어둠을 빚어 간신히 만들어내도, 찰나의 순간 존재했다가 사라지고 말았다.

이걸 어떻게 쓰면 놀라운 일을 벌일 수 있을 것 같은데……

무한.

시혁은 이 힘에 이런 이름을 붙여 주었다.

암흑지에 다녀오고, 연구를 하는 사이 시간은 잘도 흘렀다.

벌써 2월이 되었다.

시혁은 한방병원 개원을 서둘렀다. 그러는 한편 별주부를 완성시키는 것에 전력을 다했다.

별주부가 완성되던 날.

시혁은 영암에 위치한 해군 3함대 사령부로 움직였다.

< 박제된 신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