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준신 -1- >
이제 딱 한 계단 남았다.
세뇌도 풀었으니 이젠 거칠 게 없다.
있다면 딱 하나.
신들에게 먹여줄 비장의 무기를 만드는 거였다. 공허를 주제로 연구는 하고 있는데, 세뇌에 집중하느라 진행이 지지부진 했던 것이다.
그냥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어서는 안 된다. 공허, 그 자체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했다.
어디로 갈까?
천상도? 죽음 지혜의 성역? 광명지나 대수림?
전부 마땅치 않았다.
신녀처럼 공허를 온 몸으로 겪어본 사람이 있으면 좋을 텐데……
잠깐만.
하나 있지 않은가.
비록 사람은 아니지만, 수백 년 동안 홀로 힘으로 공허의 공격을 막아낸 존재가 있었다.
낫슈바켈.
어쩌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짝니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출발하자. 대수림으로 가는 거다.”
일단 광명지로 돌아간 후 하늘 관문을 탔다. 반신의 성역을 몇 개 지나, 대수림으로 접어들었다. 여기서도 세계수 관문을 타니, 금방 낫슈바켈의 영역에 도착했다.
예전에 왔을 때와는 분위기가 또 달랐다.
대수림 끝, 황량한 곳에 커다란 요새가 지어져 있었다. 원주민 오크와 고블린, 오우거와 트롤들이 활보를 했다. 엘프들도 요새를 지어 놓았는데, 긴장감은 없고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새끼용 중독 사태 이후, 낫슈바켈도 느낀 게 있었나 보다.
시혁은 요새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순찰을 돌던 오크 늑대기병들이 시혁을 둘러쌌다.
“누구냐! 이곳은 위대한 고룡, 낫슈바켈 님의 영역이다!”
시혁은 말없이 지팡이를 내밀었다.
그러자 오크들이 놀라 시혁에게 창을 겨눴다. 눈을 희번뜩거리는 게, 위협하려는 의도라고 생각한 듯했다.
하여간 오크들이란.
칠대 위상의 용왕은 낫슈바켈이 시혁에게 선물했던 것으로 유명한데 이것도 못 알아 봐?
할 수 없이 직접 말을 했다.
“저는 오색 현자 최시혁입니다. 낫슈바켈 님을 뵈러 왔습니다.”
“오색 현자!”
“낫슈바켈 님께서 오색 현자가 찾아오면 정중히 모셔 오라고 그랬다.”
“오색 현자 맞나?”
“맞다! 본 적 있다!”
오크들이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마치 호위하듯 둘러싸자, 주위를 지나던 원주민들이 시혁을 힐끔거렸다.
아니, 원주민만이 아니었다.
영웅도 꽤 있었다. 이제 보니 낫슈바켈도 반신들처럼 의뢰를 줘서 영웅들을 규합한 모양이었다.
요새 중앙에 낫슈바켈의 둥지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오크들은 거기까지만 시혁을 호위해 주었다.
“저 아래로 내려가면 낫슈바켈 님 계신다.”
“그래, 고맙다. 출출할 텐데 이거라도 나눠 먹어라.”
사슴 육포를 몇 뭉치 건네자, 오크들이 어금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오색 현자 너, 마음에 든다!”
“힘쓰는 일 필요하면 불러라. 망치 부족이 너 도와준다!”
손을 흔들고 내려갔다.
둥지로 접어들자마자, 머릿속으로 웅혼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이다.]
[예,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지요?]
[그랬지. 호오, 많이 강해졌군.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애송이였는데…… 머리에 그건 뭐냐?]
[광명지에서 천사들을 치료해주고 얻었습니다. 쓸 만합니다.]
[쓸 만한 정도가 아닌데? 거의 칠대 위상의 용왕 수준이야. 어쨌든 미적거리지 말고 얼른 와라. 실라가 기다리고 있다.]
실라, 새끼용의 이름이었다.
둥지에 도착하자, 작은 꼬마 하나가 달려와 안겼다.
“오색 현자! 자주 좀 와!”
시혁은 웃으며 실라를 껴안았다.
변신 마법이 미숙했다. 언뜻 보면 여섯 살 정도의 어린아이로 보이는데, 용의 꼬리와 뿔, 귀를 가지고 있었다.
오우거가 아닌, 인간 형태의 낫슈바켈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다친다, 천천히 걸어 다녀야지.”
“응응!”
인간 형태의 낫슈바켈은 고혹적인 분위기의 미녀였다.
육체적인 힘이 약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더니, 실라가 자꾸 인간 형태로 변하자 거기에 맞춰준 모양이었다.
시혁은 무한의 주머니에서 군것질거리를 꺼냈다.
광명지에서 산 구름 사탕과 번개 과자 등등.
실라가 눈을 반짝였다.
“우와!”
낫슈바켈의 눈치를 살피더니, 얼른 그것들을 잡아챘다. 한쪽에서 한 입씩 깨물더니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맛있어!”
“천천히 먹어라. 원, 달기만 한 게 뭐가 좋다고…… 저 나이 때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생고기를 좋아하는 게 정상인데.”
낫슈바켈이 혀를 끌끌 찼다.
“그건 그렇고, 여기 온 건 할 얘기가 있어서겠지? 실라는 호위 영웅들이 돌볼 테니, 안쪽으로 들어가도록 하자.”
실라는 이미 먹을 것에 정신을 빼앗겼다.
시혁과 낫슈바켈이 자리를 옮기든 말든, 과자를 깨문다 사탕을 녹여 먹는다 정신이 없었다.
움직이면서, 시혁은 둥지 내부를 구경했다.
“둥지가 좀 바뀌었네요?”
“예전에는 나와 실라만 지내면 됐는데 이젠 그게 아니니까. 아예 요새화시켰다. 실라가 그 꼴을 당하는 것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
낫슈바켈이 몸을 떨었다.
대충 보니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커다란 동굴이 하나, 그리고 그 윗부분의 수십 개로 나눠진 공간이 하나.
시혁은 응접실에서 낫슈바켈과 마주했다.
하녀복을 입은 여성 다크 엘프들이 찻잔을 내왔다.
살갗이 많이 드러나는 옷차림에 저절로 시선이 갔다. 낫슈바켈이 그걸 보고 음흉하게 웃었다.
“이계인 영웅들은 저런 옷을 좋아하더구나. 마음에 드는 계집이 있느냐? 원한다면 한두 마리 내어주도록 하마.”
“어휴, 됐습니다. 요 녀석 건사하기도 힘듭니다.”
짝니를 가리키자, 항의하듯 긴 울음소리를 냈다.
낫슈바켈이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다리를 꼬았다.
“잡담은 여기까지 하지. 용건을 듣고 싶다. 원래 지금 시간은 용암 목욕을 하던 때라서.”
“다른 건 아니고, 공허에 대해 조언을 구하고 싶습니다.”
“공허라니?”
“제가 요즘 연구하고 있는 게 있어서요. 공허가 주제입니다. 낫슈바켈 님께서 대재앙 당시 어떻게 생존하셨는지 알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대재앙 때? 끔찍한 소리를 하는군. 그게 정말 도움이 되는 거냐?”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별로 하고 싶은 얘기는 아닌데…… 뭐, 좋다. 실라를 생각해서 얘기해 주도록 하지.”
낫슈바켈이 소파에 길게 누웠다.
“어디부터 시작해야할까? 그렇지. 너는 대재앙이 어째서 발생한 줄 알고 있느냐?”
“열다섯 대종사가 신들에게 패하고, 최후의 저항으로 내지른 저주가 폭주해서 발생했다고 들었습니다.”
“마법적으로 불가능한 얘기다. 열다섯이나 되는 힘이 섞이면 잡탕이 될 뿐이야. 아르거스를 박살내고, 아직도 복구를 방해할 정도로 강력한 힘이 되지는 못한다.”
조디악도 비슷한 말을 했다.
대종사들의 음모가 숨어 있다던가.
시혁은 신중한 얼굴을 했다.
“대종사들이 음모를 꾸몄다고 보시는 겁니까?”
“모른다. 여러 가능성이 있어. 대종사들이 패배를 예견하고 함정을 판 것일 수도 있고, 반대로 신들이 수작을 부렸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신들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는데요.”
“알 수 없지. 그들 내부에서도 파벌이 있으니까. 공허로 인해 그들의 존재가 하나로 결속되지 않았느냐? 24 고신의 힘이 합쳐지면, 말 그대로 절대신이 탄생한다.”
“아……”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사항이다.
낫슈바켈이 희고 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모든 가능성을 생각해 봐야 한다.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만, 이계의 신이 개입했을 가능성도 있어.”
“이계의 신이라뇨?”
“어둠 대종사는 이계의 신을 소환하여 지배하려고 했다. 대상이 워낙 거물이라, 그 일부만을 잘라내어 지배하는 것에서 그쳤지. 그 존재가 마음에 걸린다.”
심연의 마왕에 대한 얘기다.
그 본신은 무시무시하다고 했다.
아르거스와는 비교도 안 되는 거대한 세계의 파괴신이라나. 존재하는 것 자체가 재앙이며, 결국 그 세계를 멸절시킬 거라고 했다. 아르거스의 신들이 모두 모여도 상대가 안 된다고.
낫슈바켈이 경험한 공허의 힘이, 그 본신이 휘두르는 심연의 힘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어둠 대종사가 심연의 마왕을 지배한 게 아니라, 그 반대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 경우 아르거스가 이 모양이 된 것은 어둠 대종사를 지배한 이계신의 음모라는 뜻.
덩달아 시혁의 얼굴도 심각해졌다.
24 고신과 15 대종사로 끝이 아니었나?
아주 산 넘어 산이었다.
“대재앙의 원인이 뭐라고 특정 지을 수는 없다. 어쩌면 아르거스가 복구되는 순간이 세계가 끝나는 때일 수도 있어.”
“현신들은 아르거스 복구를 최대한 늦추려고 하던데, 그 때문인가 봅니다.”
“당연하지. 그들도 느끼고 있을 테니까. 하다못해 최선의 경우라고 해도 공허에 의해 침식된 파괴신이 나타나는 건데, 그 경우에도 아르거스는 그들을 당할 방법이 없어.”
“진퇴양난이네요.”
“그렇지. 그런데 공허에 대해 연구하겠다는 건 무슨 뜻이냐? 너는 어차피 이계인이라 아르거스가 어찌되든 상관없지 않느냐?”
고민을 하다가,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신들에게 일격을 먹일 무기를 만들겠다는 것.
그 재료로 공허를 쓰겠다고 하자, 낫슈바켈이 머리를 흔들었다.
“차라리 공허의 반대되는 힘을 쓰는 게 낫겠다. 예전의 신들이라면 공허가 통했겠지만, 네가 마주하게 될 신들은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존재가 아니니까.”
“저도 그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먼저, 공허에 대해 잘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긴 그렇지. 따라 와라. 내가 공허에 대항해서 썼던 마법을 보여주마.”
둥지의 가장 아랫부분, 거대한 동굴로 내려갔다.
한쪽에서 용암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낫슈바켈은 그걸 아쉬운 눈으로 한 차례 쳐다보았다. 머리를 흔들어 미련을 쫓고, 용암을 향해 손짓을 했다.
용암이 양 옆으로 갈라졌다.
그 아래, 거대한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저거다. 천 년 동안 저 마법진의 도움을 받아서 공허를 이겨낼 수 있었지.”
“천 년? 그렇게 오래요?”
“그래. 대재앙은 정확히 1217년 전에 일어났다. 신위 경쟁은 약 700년 전에 시작됐고. 내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백 년 전이다. 그때 실라를 얻어서, 더 이상 수면기에 빠져 있을 수는 없었거든.”
마법진을 살펴보았다.
낫슈바켈의 둥지를 완전히 뒤덮는 마법진이었다. 따라서 엄청나게 컸다. 적용된 마법 이론도 고차원이어서, 짧은 시간에 시혁이 해석하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한 가지는 간파했다.
새롭게 개량한 칠색 저항체와 비슷했다. 크게 두 개의 흐름이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데, 밖에서는 공허를 밀어내고 안에서는 시전자를 보호했다.
다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었다.
“이거, 뫼비우스의 띠네요?”
“그게 뭐냐?”
“무한의 고리 말입니다.”
“맞다. 네 고향에선 뫼비우스의 띠라고 부르나 보지? 그게 아니면 천 년이나 버틸 수는 없었지. 내가 고룡이라서 가능하기도 했고.”
고룡의 심장은 무한한 마나를 생산하니, 그걸로 마나를 공급했다는 얘기다.
더구나 한두 가지 마나의 집합으로 된 것도 아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속성의 마나가 모인 것 같았다. 거의 작은 세상을 구현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까.
일단 마법적으로 기억을 해두려고 했다.
그런데 기억이 되지 않았다.
마법적인 잠금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시혁이 난처한 얼굴을 하자, 낫슈바켈이 깔깔 웃었다.
“그냥 거저먹을 줄 알았느냐? 꿈 깨거라.”
“끙, 절 놀리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나한테 바라는 게 있으면 너도 나한테 뭔가를 해줘야지. 그게 사리에 맞지 않느냐?”
뭔가 부탁할 일이 있나 보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낫슈바켈 님 말씀이 맞습니다. 혹시 제가 필요한 일이 있습니까?”
“그렇다. 내가 천 년 동안 뭘 연구했는지 아느냐?”
“수면기라고 들었습니다만……”
“용들의 수면은 너희와 성질이 좀 다르다. 본신은 잠들어도 분신은 활동할 때가 많지. 나 또한 그랬다. 천 년의 연구 끝에, 한 가지 마법을 완성할 수 있었다.”
적색 고룡이 천 년이나 연구해서 완성할 마법이 뭐가 있을까?
< 준신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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