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두운 >
지구로 돌아왔다.
벌써 11월 중순이다.
죽음 지혜와 합동 연구를 하느라 시간이 꽤 흘렀다.
그 동안 지구에서 볼 일은 다 봤지만, 미처 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
서울로 출근하여 손문철을 만났다.
“이사님, 하던 일은 어떻게 되어 갑니까?”
세뇌 연구는 손문철에게도 초미의 관심사였다.
보안상 누구에게도 말을 못했지만, 시혁을 볼 때마다 슬쩍 물어보곤 했다.
시혁은 가볍게 웃었다.
“성공했습니다.”
“역시!”
손문철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이사님은 꼭 성공할 거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럼 이제 슬슬 시작해야겠습니다.”
“그래야지요. 사람은 확보하셨습니까? 가장 중요한 게 사람이에요.”
“당연한 말씀을. 한 번 보시죠.”
손문철이 자기 컴퓨터를 보여주었다.
망막과 지문 등 생체 정보가 필요한 컴퓨터였다. 여기에 대략 300명 남짓한 사람의 명단이 들어 있었다.
무슨 명단이냐고?
바로 근두운에 탑승할 이능력자들의 명단이었다.
아르거스에서 계급이 높고, 지구에서는 사람이 진중하여 믿을 수 있는 이들.
시혁은 쭉 그 명단을 살펴보았다.
아는 이름이 몇 있었다.
이미라, 채현애, 강찬, 신아영, 한세훈, 김미애.
“미라 씨랑 현애 씨도 선정이 됐네요?”
“예. 그 둘은 믿을 수 있습니다.”
“아사달 공격대 다른 이능력자들은요?”
“일단 보류했습니다. 대표적인 게 종태 씨랑 석경 씨인데, 그 둘은 벌써부터 외부에 선을 대고 있어요. 그들을 끌어들였다간 외부에 정보가 새어나간다는 데 제 두 손을 두 발을 다 겁니다.”
“협회장님께서 알아서 하셨겠지요. 언제 시작할까요?”
“준비는 끝났으니 오늘부터 하지요.”
“좋습니다. 오후에 바로 이동해야겠네요.”
“좀 일찍 출발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보안 문제 때문에 헬기를 타고 갈 수가 없어요.”
“참, 그렇지요.”
근두운은 보안을 위해 지리산 비밀기지에 설치했다. 서울에서 거기까지 가려면 시간 꽤나 걸릴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근두운을 다룰지 협의했다.
비밀을 어떤 식으로 유지할지, 이능력자들을 어떤 순서로 근두운에 태울지 등등.
그러다 흑룡회 얘기가 나왔다.
손문철이 머리를 흔들었다.
“중국은 완전히 혼돈의 도가니에 빠졌습니다. 주석이랑 총리가 맞붙었는데 아주 가관이에요. 명분은 총리에게 있으니 결국 주석이 불리하긴 할 겁니다.”
처음 연맹 조사단이 중국에 입국할 때는 진통이 일었다. 중국 협회는 물론, 중국 주석이 내정 간섭이라고 격렬히 반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영하는 목소리가 훨씬 더 컸다. 결국 조사단이 흑룡회 조사를 시작했고, 실제로 이능력자들이 세뇌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어마어마한 반향이 일어났다.
반 흑룡회의 기치가 높이 섰다. 지금도 주석이 버티고 있지만, 총리의 지휘 하에 곳곳에서 흑룡회원들을 잡아들이고 있었다.
“중국 협회장이 언제 한번 이사님을 뵙고 싶답니다.”
“저를요?”
“예. 이사님께서 전해주신 백호 문신이 도움이 많이 됐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좀 있답니다.”
“어떤 문젭니까?”
“그 중 상당수가, 이미 중국을 떴다고 합니다.”
손문철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혁은 멀거니 손문철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당연한 소리를 하나 했는데, 곧 행간의 뜻을 읽어내는데 성공했다.
“우리나라로 들어온 자도 있는 모양입니다.”
“맞습니다. 어제 밤에는 인천항에서 흑룡회 이능력자들이 밀입국하는 걸 잡기도 했습니다. 장현 씨 사건 이후 인천항 경계가 강화되지 않았으면 꼼짝없이 놓쳤을 겁니다.”
“저런, 인명 피해는 없었답니까?”
“없었답니다. 이능력자 특수부대가 출동해서 금방 제압했다고 하네요.”
“정말 다행입니다.”
“그렇지요. 어쨌든 중요한 건, 앞으로 이사님의 경호 문제입니다.”
시혁은 잠시 말을 아꼈다.
“그 이능력자들이 절 공격할 거라고 보십니까?”
“가능성이 높습니다. 흑룡회 이능력자들은 광신도와 비슷해요. 정신이 뒤틀려 있다는 점에서 그렇지요. 흑룡회의 존재를 밝힌 것도, 흑룡 문신을 제거할 백호 문신을 만든 것도 이사님 아닙니까? 저만 아니라, 협회의 다른 사람들도 이사님의 경호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걱정 마세요. 저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최소한 제 차에 타고 있거나, 집이나 한의원에 있을 때 저를 어쩔 수는 없어요.”
“너무 방심하시면 안 됩니다. 이능력자끼리 싸울 때 이능만으로 싸우지는 않아요. 총이나 폭탄이 동원될 가능성이 큽니다.”
총과 폭탄이라……
시혁의 얼굴이 곤란해졌다.
아무리 이능력자여도 총은 무섭다. 시혁도 무방비한 상태에서 맞으면 즉사할 판이었다. 따라서 자동 발동 방어 마법을 걸고 다녔는데, 이것만 믿고 있기엔 현대 화기의 화력이 너무나 막강했다.
“해서 당분간 이사님 경호를 늘리기로 했습니다. 차도 저희가 방탄 리무진을 제공할 테니까, 그걸 타고 다니시는 게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시혁을 경호하던 이능력자는 네 명.
여기에 여섯 명이 더 붙어 열 명이 되었다. 시혁이 타고 다닐 방탄 리무진에 더해, 방탄 SUV도 2대가 배정이 되어 꽤나 전력이 강해졌다.
자동차에 오르기 전, 리무진에 간단히 마법진을 새겼다.
대부분 방어 마법.
화염 저항, 충격 저항, 탐지 방해, 폭발 저항, 관통 저항, 이능 보호, 에테르 보호 등등.
시혁 본인의 차만큼은 아니어도 상당한 방어력을 갖췄다. 차체가 가지는 방어력을 생각하면 그 잠재력은 훨씬 컸고.
“이사님,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예. 출발하지요.”
새로 배정된 경호 팀장이 묻자, 시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문철은 참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질렀다.
경호 팀장으로 S급 강화 계열 이능력자를 배치한 것이다. 이능력자의 수준으로만 따지면, 거의 각국 원수들이나 받을 법한 경호였다.
자동차 세 대가 줄을 지어 고속도로를 달렸다.
몇 시간 만에 지리산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오려고 하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벌써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다음부터는 광주에서 그냥 가면 되니까 이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익숙한 얼굴들이 비밀 기지에 모여 있었다.
“원장님도 오셨네요?”
“서울에서 오셨죠? 얼마나 걸렸어요?”
강찬과 신아영이 가장 먼저 시혁을 맞이했다.
“두 분도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세훈 씨랑 미애 씨는요?”
“기지 구경하고 있습니다. 저희도 도착한지 얼마 안 됐거든요.”
어깨를 나란히 하고 들어갔다.
비밀기지는 겉에서 보기에는 그저 사유지에 세워진 별장으로 위장되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비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다음에야 그 진면목이 나왔다.
지하에 널찍한 공간이 조성되었다. 그곳에 갖가지 설비들이 차 있고, 중앙 부분에는 투명한 원통 같은 게 늘어섰다.
정확히 120개.
시혁은 감회어린 눈으로 원통들을 쳐다보았다.
신아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꼭 SF 영화에 나오는 튜브처럼 생겼네요?”
“그렇지요? 사실 원통이 중요한 건 아닙니다. 처음에는 침대를 놔둘 생각도 했어요. 혹시 외부 충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있어서 저걸 쓴 거죠.”
“정말 여기에 들어가면 아르거스에 가는 거예요?”
“예. 어차피 기억은 못 하실 거고, 거기서 다시 정보를 보내야 합니다.”
“아르거스라,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어요.”
어느새 근두운을 발동시키기로 한 때가 되었다.
120명 모두가 모였다.
손문철도 당연히 포함되었다. 대신 시혁은 여기서 빠졌다.
당연한 일이다. 시혁은 근두운에 탑승하지 않고도 매일 아르거스 방문이 가능하니까.
시운전에 들어갔다.
이능력자들이 통에 들어갔다. 그들이 눈을 감자, 시혁은 근두운을 가동시켰다.
빛이 뿜어졌다.
지하 시설 안을 오색의 빛이 가득 채웠다.
그 빛이 사그라진 뒤, 시혁도 근두운에 딸린 당직실에서 잠을 청했다. 자의로 아르거스에 간 뒤, 손문철의 성역에서 영웅들이 도착하길 기다렸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120명 전원이 집결하는데 성공했다. 앞으로 이들은 매일 아르거스를 방문하며, 새로운 반신을 탄생시키기 위한 작업에 골몰할 것이다.
마침 손문철도 4차 확장을 끝마쳤으니, 함께 전장에 참여하는 영웅들은 많은 경험을 쌓게 될 테고.
전장이 끝나기 직전, 시혁은 손문철에게 한 가지 질문을 했다.
[협회장님, 혹시 대적자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대적자요? 아뇨. 처음 듣습니다만.]
시혁은 자신이 알게 된 사실에 대해 밝혔다.
그것을 듣고, 손문철이 탄성을 질렀다.
[신위 경쟁의 마지막에 관문이 하나 있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 영웅의 시련이나 반신의 시련보다 훨씬 더 어렵다고도 했고요. 그게 대적자인가 봅니다.]
[예. 현신이 직접 공격해 온다고 하니까요. 알아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휴, 그건 또 어찌 대처해야할지…… 어쨌든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손문철은 대적자 출신이 아니었나 보다.
라크라가 한 말처럼, 시혁이나 죽음 지혜 등 극소수의 영웅만 대적자가 되는 듯했다.
여기까지 하고 지구로 돌아왔다.
바람과 땅의 마나를 해석했다.
120명, 아니 시혁까지 해서 121명의 영웅에 대한 간략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성채 파괴자 이미라, 천체 관찰자 채현애……]
완벽한 성공이었다.
이능력자들이 모여 해석된 정보를 들여다보았다.
이미라가 신기하다는 얼굴을 했다.
“성채 파괴자는 뭐에요?”
“일종의 칭호 같은 겁니다. 아르거스에서 활동하면서 명성을 얻으면 자연히 붙더라고요.”
“원장님은 오색 현자네요?”
“네. 그렇게 됐습니다.”
매일 밤마다 근두운을 발동시키기로 했다.
모든 이능력자들을 다 비밀기지에 합숙시킬 수는 없었다. 자기들 일정이 따로 있으니까. 대신 최대한 이동을 줄였다.
피치 못할 경우에만 비밀기지를 나가게 했고, 그 경우에도 대기하는 이능력자와 교대하는 형식을 취했다. 아무래도 사람이 계속 드나들면 비밀이 새어나갈 가능성이 높으니까.
반면 시혁은 광주와 서울을 오가는 생활을 유지할 생각이었다.
지금 여기 있는 이능력자 중 언론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이 바로 시혁이기 때문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자꾸 지리산을 가면 언론이 냄새를 맡지 않겠나.
“이사님, 조심해서 가십시오.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손문철이 시혁을 배웅하며 걱정을 했다.
시혁도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세요. 어제도 서울에서 여기까지 별일 없지 않았습니까? 금요일에 또 뵙겠습니다.”
오늘은 월요일.
목요일까지는 한의원 진료에 정신을 쏟아야 했다. 처음에는 주 5회 진료를 했는데, 협회 일을 하느라 더 줄여 4회 진료만 하는 것이다.
시혁은 뒷자리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았다.
2시간이면 도착하겠지?
평소 같았으면 잠깐 단잠을 잤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게 하기 어려웠다.
몇 번이나 경고를 들었는데 무시할 수는 없지 않나.
눈을 감은 채 마법을 사용했다.
위기 감지 마법과 주시 간파 마법.
가장 무서운 게 저격이었다.
두 가지 마법을 동시에 유지하려니 힘이 들었다. 조만간 자동으로 이런 마법을 사용하는 이능 물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원을 지나 순창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거리상으로 절반.
시혁은 뭔가가 자신의 감각을 건드리는 것을 느꼈다.
‘뭐지?’
정신을 집중했다.
한 마리 새가 날고 있었다.
대한민국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까치.
까치의 시선이 시혁이 탄 리무진에 맺혔다. 지금 리무진은 시속 100 킬로미터로 달리고 있으니 곧 멀어져야 하는데, 멀어지기는커녕 하늘 위에서 똑바로 쫓아오고 있었다.
과연 누굴까?
기자? 국내 이능력자? 흑룡회?
시혁은 바짝 긴장했다.
까치는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시혁이 리무진의 속도를 시속 120 킬로미터까지 올리게 해도 곧잘 쫓아왔다.
담양을 지나 광주광역시 외곽으로 접어들었다.
슬슬 출근 시간이다.
시혁의 한의원은 상무지구에 있다. 따라서 서창 IC를 통과해야 하는데, 거기서부터 한의원까지 차가 들어차 있을 게 뻔했다.
만약 공격을 한다면 그곳일 가능성이 높다. 주변에 높은 건물이 많아 몸을 숨기기도 용이하니까.
톨게이트를 지났다.
제 2 순환도로를 접어들었다.
서창 IC를 지나자, 예측한 대로 차들이 거북이걸음을 시작했다.
시혁의 신경이 곤두섰다.
목덜미에 칼날이 들어온 것 같았다. 자연히 입이 바싹바싹 마르고, 두 눈에 힘이 들어갔다.
“까악!”
까치가 한 차례 힘차게 울부짖었다.
시선이 쏟아졌다.
몇 개의 눈이 시혁을 일제히 노려보았다.
어디냐?
시혁의 의식이 한 지점에 홱 쏠렸다.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고층 건물의 꼭대기 사무실.
열린 창문 사이로, 검은 총구가 시혁을 조준하고 있었다.
탕!
섬광이 공간을 꿰뚫었다.
부질없었다.
이능과 마법으로 강화된 방탄유리에 덧없이 튕기고 말았다.
시혁이 차갑게 웃으며 추적 마법을 걸려던 때였다.
위기 감지 마법이 강렬한 경고를 토했다.
그 진원지를 돌아보았다.
이능력자 하나가 서 있었다.
어깨에 로켓 발사기 하나를 고정해 놓은 상태.
불길이 솟구쳤다.
시혁의 눈이 커졌다.
< 근두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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