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합동 연구 -2- >
시혁은 그걸 듣고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해골 등잔이 초의식을 이용한 건가 보지?”
정곡을 찔렀다.
죽음 지혜는 대놓고 긍정을 표했다.
“맞아. 그랬지. 왜, 그걸 알았다고 흉내 낼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럴 것 같으면 해보든가.”
자신감을 보이지만, 그거야 두고 봐야 알 터.
일단 기억만 해두고, 신들의 세뇌에 집중했다.
세뇌는 초의식까지는 내려가지 않았다. 대신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지구에서 흔히 말하는 의식과 전의식, 무의식 중 전의식의 아랫부분에서 무의식의 깊은 부분에 걸쳐 있다고 할까.
현재 무의식까지 내려 보내려면 백호 문신과 각혼분이 둘 다 어우러져야 했다. 그 외의 방법은 모조리 전의식 수준에서 끝이 났다.
단순히 마나를 많이 퍼붓는다고 무의식까지 보낼 수가 없으니, 여기서 막히고 말았다.
한참 고민하던 죽음 지혜가 방법을 제시했다.
“가사 상태로 만들면 어떠냐?”
“그게 무슨 말이지?”
“너는 모르겠지만, 죽음에 가까워지면 생명체의 의식은 깊숙이 침잠한다. 지성 종족일수록 더 그렇지. 가사 상태에 빠뜨리면, 작업을 하기 더 좋을 거다.”
일리가 있었다.
실험에 들어갔다.
죽음 지혜가 인간 영웅 하나를 의뢰를 주어 꼬였다. 영웅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실험체가 되어 성지 안으로 들어왔다.
영웅의 정신에 충격을 주어 가사 상태로 만들었다. 성지 중앙에 눕힌 뒤, 시혁이 먼저 영웅의 대뇌를 살폈다.
똑같은 세뇌가 걸려 있었다.
영웅에게 백호 문신과 각혼분을 동시에 썼다.
“으으음……”
제대로 들어맞았다.
세뇌가 흔들리는 정도가 20%까지 올라갔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는데, 죽음 지혜가 영웅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이제 내 차례로군. 네 방법이 밖에서 두드리고, 내 방법이 안에서 싹을 틔우면 가능할 것도 같다.”
죽음 지혜가 세심하게 손짓을 했다.
그 손끝에서 수십 가지 속성의 마나가 춤을 추었다. 마치 소용돌이치듯 영웅의 머릿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시혁은 감탄하며 죽음 지혜의 시전 모습을 지켜보았다.
작은 씨앗이 맺혔다.
세뇌가 있는 곳과 거의 비슷한 깊이.
씨앗이 발아했다.
그 힘을 사방으로 뻗쳤다.
세뇌가 거기에 대항했다. 그물처럼 퍼져 죽음 지혜가 심은 씨앗을 공격하자, 기껏 손을 휘저은 보람 없이 씨앗이 곧 소멸하고 말았다.
죽음 지혜가 혀를 찼다.
“쯧! 또 실패로군.”
백호 문신이나 각혼분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죽음 지혜의 말에 따르면, 씨앗이 소멸되는 게 아주 약간 늦어진 게 고작이라고 했다.
그걸 보니 한 가지 착상이 떠올랐다.
“둘을 순환시키는 게 좋겠다.”
“순환? 그게 무슨 소리냐?”
“말 그대로야. 두 마법이 서로 힘을 순환시키면서 더 강하게 만드는 거지.”
“하긴 그래야 가능성이 있겠지. 찬성이다.”
반면, 세부적인 방법에 있어서는 이견을 보였다.
죽음 지혜는 무난하게 가자고 주장했다. 각자 서로의 방법을 체득하고 재해석하여, 완전히 새로운 마법을 만들자는 것이다.
시혁은 기존의 마법을 활용하자고 했다. 상반된 속성의 힘을 안과 밖에 배치하자는 투였다. 그러자 죽음 지혜가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속성이 너무 다르다. 너는 생명이고, 나는 죽음이야. 빛과 어둠, 물과 불처럼 상극 중의 상극이다. 둘을 가지고 순환을 시키면 힘을 키우기는커녕 약화시킬 뿐이다.”
“네 말처럼 상극 중의 상극이니까 가능해. 빛과 얼음, 어둠과 열 같은 적당한 대치 속성이었으면 오히려 불가능했을 거야.”
시혁은 음양과 태극의 개념에 대해 설명했다.
음과 양은 일견하기에 서로 대치되는 개념이다. 그러면서 상호 의존적인 관계로, 서로가 있어야 결국 균형을 이루어 태극이 되었다.
시혁이 주장하는 바는 간단했다.
생명의 마나를 양으로 삼고, 죽음의 마나를 음으로 삼아 태극을 이루자는 것이다.
죽음 지혜는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빛에서 어둠이 태어나고, 어둠에서 빛이 태어난다고? 이상한 논리군. 세계 창조 전의 혼돈도 아니고,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별이 수명을 다하면 폭발하여 성운을 구성하는 물질이 된다. 그리고 이 물질에서 다시 별이 태어나지. 빛과 어둠도 결국은 거대한 순환을 이룬다.”
“별이 죽으면 성운을 구성하는 물질이 된다? 그게 무슨 말이지?”
죽음 지혜는 엉뚱한 데 호기심을 드러냈다.
시혁은 짧은 천문학 지식으로 별의 일생에 대해 얘기했다.
그걸 다 듣고 난 후, 죽음 지혜가 한동안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한 번 시도 해보도록 하지. 이계의 지식을 얻는 거니까, 실패해도 얻는 게 아주 없지는 않겠어.”
세심하게 마법을 변형시켰다.
두 개의 마법이 서로를 인식하게 만드는 게 중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각자 세뇌를 찔러대다가 흩어지고 말 테니까.
이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실험을 해봤더니, 서로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가서 물어뜯는데 여념이 없었다. 시혁이 기대했던 조화나 상호 전화(轉化)는 보이지 않았다.
죽음 지혜가 머리를 흔들었다.
“글렀다. 이건 극복할 수 없어.”
“아니, 가능해.”
시혁은 힘을 주어 말했다.
두 속성의 마나가 싸우는 것을 보니, 한동안 잊고 지냈던 기억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바로 현자가 되려고 오행 순환체를 만들 때의 기억이.
그때 어떻게 했었나.
생명, 불, 물의 마나는 스스로 사용했지만 땅과 쇠의 마나는 슈발츠에게 도움을 받았다. 제대로 된 순환이 이뤄지지 않았고, 시혁이 직접 땅과 쇠의 마나를 다룬 다음에야 오행 순환체를 완성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때처럼 해야 하지 않을까.
문제는 시혁이 죽음의 마나를 체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용을 써도 그나마 흡사한 쇠의 마나만 나오지, 죽음의 마나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하는 거냐?”
죽음 지혜가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시혁이 본인의 구상을 자세히 설명하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럼 역(逆) 마법을 쓰면 되지 않느냐?”
“역 마법?”
“불사의 역병에 있던 것 말이다.”
듣고 보니 그렇다.
시혁도 불사의 역병에 대해서는 전문가.
금방 역 마법을 재현하는데 성공했다.
시혁의 양 손 사이에 복잡한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시험 삼아 마나를 흘려보내자, 정반대의 속성이 되어 튀어나왔다.
생명은 죽음으로, 불은 한파로, 땅은 돌풍으로, 쇠는 늪으로, 물은 유황불로.
각각 사멸, 동결, 해체, 부패, 고통의 힘을 갖고 있었다.
아쉬운 점이라면 시혁의 힘에서 파생된 것들이라 자기들끼리 순환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게 가능했다면 어둠의 오행 순환체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했다.
마법을 만들기 전, 간단히 실험을 했다.
왼손으로는 생명의 마나를, 오른손으로는 죽음의 마나를 뿌렸다.
녹색과 흑색의 마나가 천천히 얽혔다.
신중하게 조종했다.
그냥 서로를 향해 뿜는 게 아니라 태극 문양을 그렸다. 두 개의 힘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서로를 향해 덤벼들었다.
처음에는 효과가 없었다. 서로의 힘을 갉아먹기만 했다.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변화가 생겼다.
서로를 계속 먹어치우던 두 마나의 한 가운데에 뭔가 이질적인 기운이 생겼다.
생명 속에 죽음, 죽음 속에 생명이.
시혁이 기다리던 변화였다.
힘을 더욱 불어넣었다.
막 탄생한 기운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자신을 탄생시킨 상극의 기운을 먹이로 삼았다. 순식간에 생명과 죽음이 자리를 바꿨다.
“오호!”
보고 있던 죽음 지혜가 탄성을 질렀다.
시혁은 더욱 집중했다.
이제 거의 다 됐다.
회전 속도를 올렸다. 새로운 기운이 탄생하고, 생명과 죽음이 자리를 맞바꾸는 속도가 빨라졌다. 그러면서 마나가 더 순수해지고, 그 힘 또한 계속 커져갔다.
마침내, 죽음과 생명의 순환이 극에 달했다.
번쩍!
빛이 터졌다.
색깔을 특정하기 힘든 눈부신 빛이었다. 시혁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말았다.
빛은 금방 그쳤다.
시혁은 살며시 눈을 떴다.
양 손바닥 사이, 영롱한 광채가 하나 어려 있었다.
투명한 빛이 그윽하게 새어나왔다. 워낙에 아름다운 빛이라, 시혁은 잠시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죽음 지혜가 놀라 부르짖었다.
“불멸이 아니냐!”
불멸?
죽음 지혜가 허겁지겁 달려들었다.
시혁을 밀치고 빛에 손을 뻗었다.
빛이 죽음 지혜에게 반응했다.
콰직!
강렬한 빛이 죽음 지혜의 전신을 훑었다. 죽음 지혜가 반사적으로 방어 마법을 발현했지만, 완전히 방어하지는 못하고 손을 직격당하고 말았다.
“크으윽.”
죽음 지혜가 자기 손을 쥐고 신음을 흘렸다.
오른손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투명한 빛에 뻗었던 바로 그 손이었다.
시혁은 머리를 흔들었다.
“이봐, 천천히 연구하면 알아낼 것을 뭐 그리 조급하게 굴어? 너 때문에 나도 다시 만들어야 되잖아.”
“끄응, 미안하다. 내 필생의 목표를 봤더니 그만 이성을 잃고 말았다.”
“앞으로 조심해.”
“알았다. 연구는 계속 할 거지?”
죽음 지혜가 시혁의 눈치를 보았다.
고향 세계에서 역천의 마법으로 수명을 연장한 터라, 꽤 관심이 가는 모양이다.
시혁은 다시 두 손에서 이종의 마나를 뿜었다.
죽음 지혜가 눈을 크게 뜨고 그것을 지켜보았다.
두 마나가 회전을 했다.
아까보다 훨씬 더 수월했다.
죽음 지혜는 아예 마법으로 이 모든 장면을 기록했다. 그 기색을 느끼고, 시혁은 슬쩍 죽음 지혜를 불렀다.
“이봐, 죽음 지혜.”
“왜?”
“초의식을 다루려면 어떤 마법을 써야 하지?”
“흥, 내가 그렇게 간단히 가르쳐 줄……”
죽음 지혜가 말끝을 흐렸다.
시혁이 일부러 두 마나의 회전을 늦춘 까닭이었다.
마법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불멸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다시 보여주지 않겠다는 태도.
죽음 지혜가 순식간에 계산을 끝냈다.
“좋다. 너도 얻는 게 있어야겠지. 초의식은 영혼과 관련이 깊다. 그걸 파악하려면 무엇보다도 죽어 보는 게 가장 좋지. 그게 힘들다면……”
때 아닌 마법 강의가 시작되었다.
시혁은 귀를 쫑긋 세웠다.
아르거스의 마법 이론과는 색다른 맛이 있었다. 죽음 지혜의 지식은 사령 마법만이 아니라 다방면에 걸쳐 있어서 외울 것도 많았다.
그걸 암기하는 사이 불멸의 힘을 만드는 것도 익숙해졌다. 이젠 약간의 시간만 주어지면 완성을 할 수 있었다. 다만 불멸의 힘이 매우 불안정한 까닭에, 그걸로 뭘 어떻게 해보기는 힘들었다.
죽음 지혜와 머리를 맞댔다.
하루 만으로는 부족했다. 아르거스에 방문할 때마다 죽음 지혜의 성역을 찾았다.
힘의 분배와 조절을 연습하고, 두 가지 속성 마나로 마법을 구현하고……
특히 불멸의 힘이 완성되는 순간 마법을 발현하는 게 중요했다. 그 정도 힘은 되어야 신들의 세뇌를 해제할 수 있을 테니까.
시혁은 앞에 누운 영웅을 향해 신중하게 손을 뻗었다.
벌써 몇 번째 시도인지 몰랐다. 그 전까지 의뢰를 받아 실험 대상이 된 영웅들은 모두 머리가 터져 죽었다.
영웅의 뇌 안으로 생명과 죽음의 마나가 들어갔다.
천천히 회전을 했다.
세심하게 그 강약을 조절했다. 그래야 마나가 품은 마법의 씨앗이 제대로 결합하기 때문이다.
회전 속도가 조금씩 빨라졌다.
새로운 힘이 탄생했다.
여기까지는 순조롭다. 시혁은 더욱 집중했다.
그리하여 생명과 죽음이 하나 되던 순간, 강력한 마법이 발현되었다.
시혁과 죽음 지혜가 힘을 합쳐 만든 마법.
이름 없는 해제 마법이, 영웅의 두뇌에 작열했다.
세뇌가 스르륵 소멸되었다.
언제 뿌리 깊게 박혀 있었냐 싶게,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성공.
시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죽음 지혜가 눈을 빛냈다.
“드디어 끝났군. 이제야 뭘 해 볼 수 있겠어.”
“그 동안 수고했어.”
“너도 고생했다. 덕분에 많은 걸 배웠다.
“나야말로. 그럼 나중에 또 보자.”
시혁은 오랜만에 죽음 지혜의 성역을 벗어났다.
전신이 다 쑤셨다. 물 먹은 솜처럼 몸이 무겁기 그지없었다.
광명지로 돌아왔다.
가장 먼저 뇌 안의 세뇌부터 해결했다.
세 가지 명령이 눈 녹듯 사라졌다.
본인이 느끼기에는 특별히 변한 것이 없다. 하지만 지금부터의 시혁은 어제까지의 시혁과 많은 면에서 달라질 터였다.
이제, 시혁의 인생은 오롯이 시혁 스스로가 결정한다.
< 합동 연구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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