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합동 연구 -1- >
죽음 지혜의 성역에 발을 내딛었다.
짝니의 눈을 통해 볼 때와는 그 느낌이 달랐다.
죽음 속성의 마나 때문이었다. 그 차가우면서도 질척한 마나가 시혁의 감각을 어지럽혔다.
눈살을 찌푸리자, 죽음 지혜가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상극 속성의 세계에 온 감상이 어떠냐?]
“별로 좋진 않은데. 차라리 화산대가 더 나은 것 같아.”
짝니를 타고 움직였다.
중간에 좀비며 해골 병사 같은 언데드와 몇 번 마주쳤다. 죽음 지혜의 표식을 가진 탓에 공격당하진 않았으나, 위협적으로 이를 드러내 보였다.
최종 확장을 마친 곳답게, 죽음 지혜의 성역은 꽤 넓었다.
한동안 달린 다음에야 성역 중앙의 신전에 도착했다.
악 성향 영웅들이 시혁을 경계하는 눈으로 보았다.
“뭐야, 현자 영웅이잖아?”
“그냥 현자는 아닌 것 같은데.”
“누군지 알겠다. 오색 현자야!”
“오색 현자? 그놈이 여기엔 왜 와?”
“죽음 지혜의 표식이 붙어 있어. 언데드 영웅으로 타락시키려는 건가?”
“이야, 그렇게 되면 재밌겠는데?”
시혁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그대로 걸음을 옮겨 신전으로 들어갔다.
손문철의 신전과 구조가 비슷했다. 드워프와 언데드의 차이로, 약간 다르긴 했지만 그 뿐이었다.
신상이 있는 곳에 다다르자, 기다렸다는 듯 검은 차원문이 뚫렸다.
주저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새카만 공간이 나왔다.
흰 뼈를 쌓아 만든 의자 위에 해골 형상의 존재 하나가 앉아 있었다. 괴이하게도 뼈는 모두 흑색 금속으로 이뤄져 있고, 눈구멍에서 시퍼런 안광이 일렁였다.
“죽음 지혜?
시혁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해골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여 긍정했다.
“그래, 나다. 직접 대면하는 것은 처음이지?”
시혁은 죽음 지혜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아르거스에서는 일찍이 본 적이 없는 형태였다. 뼈가 금속이라는 점도 그렇고, 두개골이 왕관처럼 변형된 것도 그랬다.
죽음 지혜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뼈로 된 의자 하나가 생겼다.
“거기 앉지.”
뼈에 찔리지 않게 조심해서 앉았다.
슬쩍 질문을 했다.
“당신은 당신 고향에서도 언데드인가 보지?”
“당연한 말 아니냐. 영웅이 될 때부터 종족과 외형이 고향 세계와 동일하게 고정이 된다. 반신이 된 다음에도 마찬가지이지.”
그렇다면 죽음 지혜는 자기 고향 세계에서도 저 상태라는 소리.
언데드 종족에 대해 더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지금은 할 일이 많았으니까.
죽음 지혜가 시혁을 쳐다보았다.
“슬슬 시작해 볼까?”
“좋아. 누구부터 할까?”
“나부터 하지. 넌 이미 중첩 저주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으니까.”
죽음 지혜가 강의를 시작했다.
원래 세계에서 마법사 출신이라고 했다. 죽음을 거부하고 수백 년을 살았다고.
그 덕에 설명이 좀 난해했지만, 시혁은 지금까지 배운 걸 총동원해가며 배웠다. 다만 이계의 마법을 접하는 것이니만큼 시간이 걸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한 가지 사실을 간파했다.
“당신의 중첩 저주는 까뮈의 중첩 마법과 좀 다른 것 같은데?”
사실 제대로는 몰랐다.
그저 그럴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죽음 지혜가 순순히 동의를 표했다.
“맞아. 아르거스의 중첩 마법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이야. 점점 힘을 키워 나가지. 이론상 힘이 무한히 커질 수 있지만, 중간에 끊기면 약해진다는 단점이 있어. 반면 내 마법은 건물을 짓는 것과 비슷해. 모든 구성 마법이 갖춰져야 진짜 힘을 발휘하지. 대신 방해를 받아도 그 힘이 크게 약해지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어.”
“거의 비슷하네.”
“물론이다. 까뮈의 중첩 마법을 참고해서 만든 거니까.”
“까뮈가 마법을 순순히 가르쳐 줬어?”
“그럴 리가. 대장로에게 직접 배우지는 못했다. 다른 경로를 통해서 배웠지. 불완전한 지식이었고, 대가도 크게 치렀지만 만족하고 있다.”
차원 전이의 저주에 대해서도 배웠다.
보아하니 꼭 100개의 중첩 저주로만 발현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대형 마법진이나 진귀한 보물, 혹은 주문을 통해서도 발현이 가능했다.
그에 대해서도 가르쳐달라고 했지만, 죽음 지혜는 냉정하게 거절했다.
“내 밑천을 다 털어갈 셈이냐? 차원 전이는 내 주요 연구 과제다. 칠색 저항체 하나만으로는 모자라니, 더 지식을 얻고 싶으면 너도 뭔가를 더 내놓아라.”
그러면서 말하는 게 오색 순환체를 노리는 듯했다.
그냥 거절했다.
중첩 저주와 차원 전이의 저주를 연구하는 것만으로, 결국은 그 원형을 파악할 수 있으니까.
다음은 시혁의 차례.
칠색 저항체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었다.
죽음 지혜는 한 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몸을 기울였다. 한참을 집중하여 시혁의 강의를 듣더니, 탁 하고 자기 무릎을 쳤다.
“그렇군. 천상도 권속들의 힘을 재현하는 게 아니었어. 칠색 저항체라고 해서 일곱 가지의 힘으로 이뤄졌을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군!”
“맞아. 난 개량한 칠색 저항체는 일부러 이름도 안 붙였어. 굳이 이런 걸 세계 지식에 등재시킬 필요는 없잖아?”
“당연하지. 이름을 붙여 세계 지식에 기록되는 순간 개나 소나 이걸 쓰게 될 테니까.”
언젠가 설명했듯, 개량된 칠색 저항체는 총 열네 가지의 힘으로 이루어진다.
공허의 일곱 구성 요소와 비슷한 힘, 그리고 대치되는 힘.
대치되는 힘이 인체를 보호하고, 비슷한 힘이 공허를 밀어낸다. 마치 자석이 같은 극을 밀어내는 성질과 비슷했다.
죽음 지혜가 손가락으로 뼈 의자를 긁었다.
“재미있는 방법이로군. 흠, 내가 이걸 그냥 쓸 수는 없겠는데?”
“나와는 속성이 180도 다르니까 그렇지. 처음부터 뜯어고쳐서 다시 구성해야 될 거다.”
“다음 대적자가 나타날 때까지 심심하진 않겠어. 네 저항 효율이 10배라고 했지? 그럼 나는 20배 정도를 만들어야겠군.”
“하하, 마음대로 해라.”
지식 교환을 마무리 지은 후, 슬슬 밑밥을 던졌다.
“죽음 지혜. 너도 아직 세뇌에 걸려 있지?”
“그렇다. 반신이 된 후 깨보려고 연구 중이다만 쉽지가 않았다.”
“나랑 같이 연구할 생각 없어?”
“흠, 네 실력은 인정한다만 과연 도움이 될까? 내가 반신이 되고 쭉 연구를 했어도 결국 세뇌를 풀진 못했는데?”
죽음 지혜는 시큰둥한 기색을 보였다.
시혁은 괜히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지 않았다.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지팡이를 들어 바닥에 마법진을 몇 개 그렸다.
죽음 지혜는 멀뚱멀뚱 그걸 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그 마법진이 뜻하는 것을 깨닫고 눈을 빛냈다.
“호오, 외부에서 뇌에 새겨진 세뇌에 간섭하는 방식인가? 재미있군. 나는 세뇌를 직접 소멸시키려고 했었는데…… 하지만 어설프다. 이 정도로는 세뇌를 없애기는커녕, 약간 변형시키는 게 고작이다.”
“그게 시작 아니겠어?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잖아. 뭐, 하기 싫으면 관두고.”
“흠, 한 번 연구해 볼 가치는 있겠군. 좋아. 수락하지.”
성지 내에 즉석으로 연구소가 꾸려졌다.
죽음 진영의 건물인 사자의 탑을 재현한 거였다.
처음 보는 마법 설비가 많았다. 뼈와 시체를 형상화한 것들이라 아무래도 외형이 좀 기괴했다.
음산한 빛이 담긴 두개골, 중지만 남기고 자른 시체의 손, 넓게 벌어진 채 차가운 기운을 흘리는 갈비뼈 등등.
보기만 해도 비위가 상했다.
죽음 지혜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원래는 죽음 진영에 없던 물건들이다. 내가 새롭게 발명했지. 세계 지식에도 등재하지 않아서, 다른 곳에서는 볼 수도 없지.”
“진리 진영의 물건이 꽤 보이는데?”
“맞다. 진리 진영에는 다양한 행성의 지식이 모이니, 그걸 써먹는 게 좋지. 하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내 방식대로 재해석했으니까.”
시혁은 두개골을 집어 들었다.
윗부분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거기서 빛이 새어 나왔다. 그게 시혁의 생각을 읽더니, 아르거스 신들의 세뇌에 대한 내용이 쭉쭉 출력되었다.
진리 진영의 마법 등불과 비슷했다.
차이점이라면 죽음 지혜가 밝혀낸 지식은 물론, 다른 죽음 진영의 반신들이 알아낸 사실까지 추가로 수록되어 있다는 것.
지금까지 시혁이 몰랐던 내용도 포함되었다.
가령 반신이 되면 세뇌가 더 강해져서, 대뇌 피질 일부만이 아닌 거의 전부를 뒤덮는다던가.
혹은 각 종족 별로 세뇌가 정확히 어느 부위에 숨는지, 어떤 형상을 하는지에 대한 것들.
시혁은 짧게 감탄을 했다.
“대단한데? 정말 많이 밝혀냈네. 내가 모르던 것도 많아.”
“당연한 거 아니냐? 나는 전장에서도 다양한 방면에 걸친 연구를 진행했다. 이 정도도 밝히지 못했다면 내 칭호가 부끄러울 노릇이지.”
“너는 그렇다 치고, 다른 반신들이 알아낸 정보는 어떻게 수집한 거야?”
“후후, 글쎄? 알고 싶으면 잘 연구해 봐라.”
죽음 지혜는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해골이 담은, 죽음 지혜와 다른 반신들이 시도했던 수많은 방법을 열람했다.
단순한 해제 마법부터 정신력 강화 마법, 마나를 통한 변형, 마법 생명체를 동원한 치료 등 다양한 방법을 썼다. 그중에는 흑룡 문신과 흡사하게 마법진에 들어가 치료하는 방법도 있었다.
다만 흑룡 문신처럼 계속 힘을 전달하는 건 아니었다. 세뇌 자체에 대한 반대 마법을 마법진으로 구현했다. 결국 티끌만한 영향도 못 미쳤다.
그걸 보고 있자, 죽음 지혜가 몸을 일으켰다.
“언제까지 구경만 할 거냐? 슬슬 시작하도록 하지.”
“좋아.”
우선 문신의 변형부터 시작했다.
죽음 지혜가 한 가지를 지적했다.
“지금 네가 보여준 문신으로는 세뇌를 어쩔 수 없다. 비록 무의식까지 작용하긴 하지만, 그 수준이 너무 얕아.”
“맞아. 더 깊은 곳까지 작용하게 만들어야 돼. 좋은 생각 있어?”
“있다. 영혼 진영의 세뇌를 참고하는 게 좋겠다. 영혼 구덩이가 소환자들을 세뇌하는 것과 이 문신이 비슷한 작용을 한다. 그걸 해석하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거 좋은 생각이야.”
시혁도 찬성했다.
영혼 구덩이의 세뇌에 대해선 시혁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오랜만에 각혼분을 꺼내들었다.
그걸 두 문신 중 백호 문신에 결합시켰다.
백호 문신은 뒤틀린 무의식을 교정하고, 각혼분은 마나를 변이시켜 자유 의지를 부여한다. 따라서 둘을 결합시키면 효과가 있지 싶었다.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대박이 났다.
지금껏 견고하게 달라붙어 있던 세뇌가, 진동하며 약간 흐려진 것이다.
원래 상태가 100점이라면 97점 정도로.
별 것 아니라고?
그렇지 않다. 지금껏 죽음 지혜가 전력을 다해 연구했어도 티끌만한 영향도 미치지 못했지 않았나.
죽음 지혜가 놀라 턱뼈를 크게 벌렸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너, 대체 정체가 뭐냐?”
시혁도 사실 어리벙벙했다.
연구를 시작하자마자 성과가 보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이런 기색을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담담하게 말했다.
“겨우 이 정도로 뭘. 이제 시작이야. 이 정도 가지고는 호수에 조약돌을 던질 것 밖에 안 돼. 기왕 시작했으니 세뇌를 깨뜨려야 하지 않겠어?”
“놀랍군. 네가 어떤 대종사의 환생이라도 되는 거냐? 나는 무슨 짓을 해도 안 되더니, 너는 왜 이토록 쉽게 해결이 되는 거지?”
“대종사의 환생? 푸하하, 얼척 없는 이야기 하지 말고, 세뇌를 풀 방법이나 생각해.”
꽤나 예리하다.
시혁은 농담처럼 웃어 넘겼다.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갔다.
가장 역점을 둔 것은 백호 문신과 각혼분이 상승효과를 일으킨 원인에 대해서였다.
간단했다.
무의식, 그 깊은 곳까지 들어갔기 때문이다.
토의 끝에, 시혁과 죽음 지혜는 한 가지 결론을 얻었다.
“깊이가 문제야.”
“최대한 무의식 쪽으로 떨어뜨려야 되겠어.”
“그 정도로는 부족하지. 무의식을 넘어야 해. 초의식이라고 할까? 아니면 신성이라고 할까? 거기 걸치는 수준까지는 넘어가야 되겠다.”
초의식? 신성?
어렴풋이, 학부 시절 정신과 시간에 얻어들은 기억이 났다.
개인의 무의식을 넘어서 집단 전체, 혹은 종족 전체가 공유하는 집단의식을 말한다고 했다.
< 합동 연구 -1-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