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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 세계의 한의사-159화 (159/250)

< 대적자 -2- >

이런저런 단서 조항을 달아도 마찬가지다. 아주 약한 정도의 충성이나 봉사 맹세를 해도 상관없었다. 기존의 세뇌와 결합하여, 아주 막강하게 변할 테니까.

거부해야 한다.

절대로 동의해서는 안 된다.

거부 의사를 밝히기 전, 엉뚱해 보이는 질문을 던졌다.

“반신 죽음 지혜도 누군가의 대적자였습니까?”

조디악은 순순히 대답했다.

[그랬지. 그 자도 내 제안을 거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적자가 되었다고 한들, 꼭 현신님들의 도움을 받아야 되는 건 아니라는 뜻이네요.”

[대신 그만큼 시련을 겪었다. 아르거스 행성에 있을 때든, 전장에 있을 때든 상대 반신의 공격이 죽음 지혜의 몸을 불살랐으니까. 반신이 된 다음에야 벗어났지.]

어쨌든 중요한 것은 하나.

굳이 맹세를 하지 않더라도 반신의 공격을 견딜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목줄을 할 필요가 없다.

견디면 된다.

중첩 저주도, 폭탄 좀비도 시혁이 대처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으니까.

고개를 들었다.

조디악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것일까.

조디악이 을러대듯 시혁을 설득했다.

[간단하게 맹세만 한 번 하면 된다. 요식적인 행위다. 우리도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이미 시혁의 마음은 정해져 있었다.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거절하겠습니다.”

[진심이냐? 괜한 객기 부리지 마라. 죽음 지혜는 쉬운 인물이 아니다. 너는 비단 아르거스에서만이 아니라, 네 고향 세계에서도 하찮은 언데드 괴물이 되고 말 것이다.]

조디악의 말을 듣자 결심이 더 굳어졌다.

이 말로, 아쉬운 것은 현신들이라는 점이 드러났으니까.

계속된 설득에도 시혁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조디악이 한숨을 쉬며 설득하길 포기했다.

[이후 발생하는 일은 모두 네 책임이다. 난 경고했다.]

“당연한 말씀을. 제 결정은 제가 책임집니다.”

조디악이 신경질적으로 꼬리를 흔들었다.

그러더니 해저로 잠수했다. 해저 표면에 몸을 묻더니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또 검은 구멍이 열렸다.

좀비들이 튀어나왔다.

시혁은 멀찍이서 물의 화살을 쏘았다. 자극을 받은 좀비들이 뻥뻥 터지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조디악은 가만히 눈만 감고 있었다.

절대로 관여하지 않겠다는 태도.

수중이라 대처하기는 쉬웠다.

아예 수면 밖으로 나가지 않고 좀비들과 싸웠다. 검은 구멍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으니, 아무리 강화된 폭발 좀비라 해도 시혁을 어쩔 수는 없었다.

얼마 후 검은 구멍이 닫혔다.

침묵이 이어졌다.

두 번째 공격을 무위로 돌린 것이다. 중첩 저주와 폭발 좀비를 해결했으니, 세 번째는 무엇이 될지 벌써부터 궁금했다.

“짝니야, 저쪽으로 가자.”

시혁은 한쪽을 가리켰다.

짝니가 시혁을 돌아보았다.

[저기 맞소?]

“맞아. 화산대로 갈 거야.”

화산대.

지옥 진영의 신역이다.

그 이름처럼 활화산이 많았다. 용암이 강처럼 대지 위를 흐르고, 땅은 다 타 버려 생명이 살질 못했다. 오로지 악마들만 거닐곤 했다.

굳이 그곳에 가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죽음 지혜의 성역이 화산대 근처에 있으니까.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으니, 직접 가서 담판을 지어볼 생각이었다.

위험하다고?

확실히 그렇다.

하지만 현신의 제안도 뿌리친 지금, 계속 얻어맞는 것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모험을 해보는 게 나았다.

성역 안으로 들어가지만 않으면 될 것 아닌가.

천상도 지역을 벗어났다.

공허의 바다를 건너, 화산대에 접어들었다.

뜨거웠다.

공기 자체가 달군 쇠처럼 후끈했다. 감당 못할 열기에, 얼른 화염 저항 마법을 걸었다.

시혁을 보고 악마들이 몰려들었다.

[인간 영웅이다!]

[죽여라!]

[먹어치우자!]

대부분이 하급 악마들.

시혁은 혀를 찼다.

“귀찮은 것들. 짝니야, 더 빨리 가자. 죽음 지혜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알았소.]

짝니가 속도를 올렸다.

빛의 발톱까지 꺼내고 불타는 땅 위를 달렸다. 악마들이 그 뒤를 쫓았지만, 속도 차이가 너무 심하여 결국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몇 시간 만에, 죽음 지혜의 성역 근처에 도착했다.

그 사이 또 한 차례 공격이 있었다.

이번에는 영웅들을 동원했다.

무려 수십 명이 쫓아오자, 시혁은 영웅 하나를 붙잡고 공허의 바다로 들어갔다. 한계까지 버틴 후, 또 쫓아오면 공허에 침식시키겠다고 협박한 다음 영웅을 놓아주었다.

그러자 영웅들이 놀라 뿔뿔이 흩어졌다.

언뜻 보기에도 자기들 보다 몇 배는 길게 공허 속에서 버틸 수 있었으니까. 독하게 마음을 먹으면, 치고 빠지기로 자기들 모두를 공허에 침식시킬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이후에는 추가 공격이 없었다.

감시의 눈길을 받는 가운데, 죽음 지혜의 성역을 시야에 두었다.

얇은 공허의 틈만 하나 사이에 놓여 있었다.

시혁은 불타는 바위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짝니야, 네가 저기 가는 게 좋겠다.”

[주인어른은 안 가오?]

“응. 성역에 들어가면 이적 때문에 죽음 지혜를 당할 수가 없어. 여기 있어야 위험하면 반지를 써서 도망치지.”

시혁의 생각은 간단했다.

소환체 연결을 이용하여 짝니를 통해 죽음 지혜와 대화하겠다는 것이다.

짝니가 위험할 것 같으면 역소환하면 그만이니까.

[알았소.]

큰 머리를 끄덕이더니, 짝니가 가볍게 몸을 날렸다.

시혁은 앉아 있는 곳에 치료소 구축을 사용했다. 온갖 마법으로 자신의 존재를 가리고, 방어 마법도 떡칠을 해 놓았다. 최소한 하급 악마들은 시혁을 어쩌기 힘들 것이다.

짝니가 공허의 틈을 건넜다.

둘의 시야가 공유되었다.

죽음의 대지가 보였다. 땅은 완전히 시커멓게 죽었고, 기괴한 버섯과 이끼만 그 위를 뒤덮고 있었다. 시체들이 비척대며 걸어다니고, 해골 괴조가 끼룩끼룩 괴상한 소리를 냈다.

시혁은 소환체 연결을 더욱 강화시켰다.

짝니의 의식이 가라앉고, 대신 시혁의 의식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죽음 지혜! 죽음 지혜!]

입을 크게 벌려 소리쳤다.

호랑이 울음소리와 함께, 광량한 정신파가 퍼져나갔다.

[네 대적자가 왔다! 할 말이 있으니 나와라!]

방금 전까지 공격을 한 것을 보면 죽음 지혜가 성역에 있을 게 뻔했다.

계속 소리를 지르자, 과연 죽음 지혜가 나타났다.

짝니의 앞쪽이 검게 일렁이더니, 음산한 흑색의 그림자 하나가 출현한 것이다.

그림자가 짝니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렇군. 대적자의 탈것이로군. 소환체 연결 특기인가?]

[맞다. 너와 대화를 하고 싶다.]

[대화? 좋다. 나도 네게 궁금한 게 있었다. 잠깐 얘기를 하는 것쯤이야 괜찮겠지.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죽음 지혜는 짐짓 여유를 부렸다. 흡사 다 잡은 물고기를 보는 듯한 기색이 묻어나왔다.

시혁은 잠시 숨을 골랐다.

[나는 방금 전 조디악을 만나고 오는 길이다.]

[그 흰 고래 말인가? 예상대로군. 그래서?]

[조디악에게 물어봤더니 너 또한 어떤 반신의 대적자였다고 했다. 그런데 대적자가 되는 것은 거절했다지? 왜 그런 거냐?]

[하! 당연한 걸 묻는군!]

죽음 지혜가 코웃음을 쳤다.

[나는 바보가 아니다. 누구 좋으라고 충성 맹세를 한단 말이냐? 나는 줄에 묶인 개가 될 생각이 없다.]

죽음 지혜도 신들의 세뇌에 대해 알고 있었나 보다.

[하지만 영웅은 반신을 당하기 힘들다. 결국은 영웅이 패배하게 돼.]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군. 날 찾아온 걸 보니 너도 현신의 제안을 거부한 것 같은데? 어차피 반신이 영웅을 공격하는 방법에는 한계가 있다. 뭐, 설마하니 중첩 저주를 막아낼 줄은 예측하지 못했다만……]

세 번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죽음 지혜도 신중해진 모양이다.

잠깐 말이 끊겼다.

시혁이 다음 말을 꺼내려고 할 때, 죽음 지혜가 먼저 질문을 했다.

[나도 궁금한 것이 있다.]

[뭐냐?]

[아까 네가 공허 속에서 오랫동안 견뎠다는 보고를 받았다. 다른 영웅들과 비교하여 거의 10배 이상을 견뎠다고 하더군. 대체 어떻게 한 거냐? 나도 공허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다만, 최대 3배를 견디는 게 한계였다.]

궁금한 것이 있다더니 이거였나 보다.

어렵지 않게 대답했다.

[칠색 저항체에 대해 지식 열람을 해 봐라.]

[칠색 저항체라고?]

[그래. 내가 영웅의 시련을 받을 때 만든 거다. 너랑은 속성이 좀 안 맞지만 연구하면 재현할 수 있겠지.]

[네가 칠색 저항체를 만든 자였나? 이상하군. 칠색 저항체를 만들려고 하면 천상도 주민들의 힘이 필요해서 제대로 재현할 수가 없었는데……]

[그건 기본 단계여서 그렇고, 응용을 하면 충분히 가능해. 나도 잘 쓰고 있잖아?]

[그렇군. 알았다. 연구해 봐야겠다.]

죽음 지혜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시혁의 차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죽음 지혜. 나와 동맹을 맺을 생각은 없나?]

[뭐? 그게 무슨 헛소리냐?]

죽음 지혜가 격렬하게 반응했다.

그럴 만도 했다.

신위 경쟁을 포기하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니까.

시혁은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까놓고 얘기해 보자. 너, 날 정말로 죽여서 언데드 영웅으로 만들 자신이 있냐? 내가 네 성역에 들어가거나, 전장에서 마주치지 않으면 불가능할 것 같은데.]

[반신과 대적자는 운명이 얽혀 있다. 네가 반신이 되기 전, 결국 한 번은 전장에서 보게 될 것이다.]

[탈주하면 그만이지.]

[널 등용한 반신이 그걸 용납할 성 싶으냐? 너는 공공의 적이 되고, 누구에게도 임관할 수 없게 된다.]

[상관없어. 난 원주민들과 친분이 많으니까, 그들에게 의뢰만 받아서 활동해도 그만이야.]

죽음 지혜가 입을 다물었다.

방금 시혁이 말하는 방법이, 예전에 자신이 대적자가 되어 고생할 때 썼던 방법과 똑같았으니까.

시간만 오래 걸릴 뿐이다.

결국 차곡차곡 경험이 쌓이고, 영웅은 반신으로 거듭난다.

성역을 공격한다?

의미 없다.

성역의 외연을 깎아낼 수는 있을망정, 성지 내에 있을 반신에게는 어떠한 영향도 미칠 수가 없으니까.

지루한 시간을 보내며, 새로운 대적자가 나타나길 기다려야 했다.

죽음 지혜의 어조가 누그러졌다.

[그래서 어쩌자는 것이냐? 동맹을 맺자고?]

[그래. 우리 둘이 싸우면 서로 피곤하고 손해만 볼 거다. 나도 너도 괴롭겠지. 차라리 힘을 비축하는 게 어떠냐? 어차피 대적자가 나 하나밖에 없는 건 아니잖나. 네가 소모한 힘을 복구하고 더 비축하면 당연히 새로운 대적

자가 나타나게 돼. 그때 내가 돕겠다.]

[나를 돕겠다고?]

[현실적으로 생각해 봐라. 조디악은 너도 봤을 거 아니냐. 그런 놈이 나타나서 난동을 부리면 대응할 수가 있겠어? 아무리 최종 병기가 출동해도 한방에 박살나게 생겼더라.]

[으으음.]

죽음 지혜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을 침묵하다가, 겨우 답변을 했다.

[그러나 네가 과연 내게 도움이 될까? 넌 이제 겨우 초월 계급이다. 반신이 되려면 한참이나 남았어. 반신이 된다고 끝이냐? 성역을 최종 확장시켜야 현신의 공격에 대응이라도 할 수 있다.]

[다른 방식으로 도와줄 생각이다.]

[다른 방식?]

[그래. 나는 공허를 응용한 무기를 구상하고 있다. 그걸 현신에게 꽂으면 어떻게 될까?]

[허허…… 이제 보니 미친놈이었군.]

죽음 지혜가 어처구니없다는 기색을 흘렸다.

시혁은 씩 웃었다. 짝니의 입술이 벌어지며, 송곳니 두 개가 움찔거렸다.

[그 정도는 되어야 아르거스의 신들에게 한 방 먹여줄 수 있지 않겠어?]

[그도 그렇지.]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솔직히 말해서, 나와 다투느니 다음을 기약하는 게 더 가능성이 높지 않겠냐? 내 자랑 같다만, 나 정도로 강한 영웅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동의한다. 나 또한 아르거스 역사 상 최강의 영웅 중 하나라는 찬사를 들었다만, 너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어때? 대적자가 나타나면 공동으로 대응하는 거다.]

[그렇게 해서 네가 얻는 게 뭐지? 영웅일 때의 안락함? 내가 신이 되고 나면 더 이상 아르거스에 관여할 수가 없게 된다. 네가 날 돕더라도, 나는 나중에 널 돕지 못해.]

시혁은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괜찮아. 대신 얘기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신으로서 네가 겪는 상황을 알려줬으면 좋겠어.]

[허어, 날 정찰병으로 쓰겠다는 뜻이냐?]

[그런 셈이지. 싫으면 네가 먼저 아르거스에 온 것을 탓하던가. 나도 그 정도 얻는 건 있어야 하지 않겠어?]

죽음 지혜가 장고에 들어갔다.

마침내 결정을 내리고, 홀가분한 어조로 말했다.

[좋다! 동맹을 맺자! 차라리 그게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군. 단, 네가 최대한 빨리 반신이 되어 성역을 최종 확장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걱정 마. 1년이면 충분할 테니까.]

아울러, 죽음 지혜는 시혁에게 한 가지 요구를 했다.

개량된 칠색 저항체에 대해 알려달라는 것.

공짜는 아니었다.

중첩 저주와 차원 전이의 저주를 대가로 주겠다고 했다.

시혁은 교환을 받아들였다.

중첩 저주도 중첩 저주지만, 차원 전이의 저주를 응용하면 아주 강력한 무기가 나올 것 같았으니까.

다름 아닌 신들에게 대항할 무기가.

까뮈 권속의 중첩 마법?

없으면 어때.

이제 시혁에겐 중첩 저주가 있는데.

교환을 위해, 죽음 지혜는 시혁을 자신의 성역으로 초대했다.

더 이상 시혁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뒤.

기꺼이 초대를 받아들였다.

목적은 두 가지.

첫 번째는 지식 교환이었고, 두 번째는 합동 연구였다.

뭘 연구하느냐고?

바로 신들의 세뇌를 깨뜨릴 방법이다.

< 대적자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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