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 세계의 한의사-157화 (157/250)

< 중첩 저주 -2- >

어쩔 수 없다.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것이기를 바래야지.

까뮈의 권속들을 찾아갔다.

까마귀를 크게 키운 것처럼 생긴 이들이었다.

눈동자를 보더니, 까뮈의 권속은 아무 말 없이 시혁을 한쪽으로 안내했다.

구역에서 가장 높은 건물.

까뮈의 대장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눈동자는 내가 네일룬의 신녀에게 준 것인데 이계인 영웅이 가지고 왔군. 그래, 이 궁벽한 구역까지 온 이유가 뭐요?”

시혁은 자신의 상황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대장로가 시혁을 자세히 살피더니 부리를 딱딱거렸다.

“이야, 반신들도 상당하군. 저주가 꽤나 정교해. 지상에서는 중첩 마법의 개념은 이미 잊혔을 텐데 제법이야.”

중첩 마법?

시혁의 귀가 쫑긋 섰다.

그 단어에서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은 탓이었다.

대장로는 설명해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부리를 몇 번 마주치더니 시혁에게 까만 두 눈을 들이밀었다.

“그래, 대적자로 지목이 됐다고 했지? 하지만 내 도움을 기대하지는 마. 대적자로 인정받은 게 아닌 이상, 나는 너를 도울 의무가 없어.”

대적자에 뭔가 다른 의미가 있는 모양이다.

“많은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제가 신전에 갈 때까지 버틸 수 있도록 조언만 해주셔도 충분합니다.”

“조언? 흥, 지식이야말로 가장 가치가 있다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리냐? 좋다. 한 가지를 알려주지. 귀를 활짝 열고 잘 들어라.”

시혁은 귀를 쫑긋 세웠다.

과연 어떤 마법의 비밀을 알려줄지 기대가 되었다.

대장로가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더니 사뭇 거창한 태도로 부리를 딱딱거렸다.

“중첩 마법은 오직 중첩 마법으로만 치료할 수 있다.”

딱 그 말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설마 이게 끝?

시혁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대장로를 쳐다보았다.

“그게 답니까?”

“그럼 뭘 더 바래? 재주 있으면 즉석에서 중첩 마법을 만들어서 대응하면 그만 아니냐? 정 마법 강의를 듣고 싶거든 값을 치러라.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법이야.”

“예전에 제가 칠색 저항체를 만든 적이 있습니다. 그걸로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하! 그건 네 영웅의 시련이었잖아? 그걸 만들어서 영웅이 됐으면 됐지, 뭘 또 우려먹으려고 해? 강의를 받든, 치료를 받든 값을 치르라고!”

그러면서 시혁의 지팡이에 눈독을 들였다.

안 될 말이다.

비록 시혁이 반신이 되면 효용이 떨어진다고 하지만, 이런 보물을 넘겨주는 건 있을 수 없었다.

단칼에 거절하자, 대장로가 목구멍이 보이도록 크게 웃었다.

“지팡이가 아까운가 보지? 뭐 마음대로 해라. 그깟 용들이 만든 지팡이보다, 중첩 마법이 훨씬 더 강력하다. 네가 대적자가 된다고 해도 지식은 알려주지 않을 테니 그리 알고.”

“신녀님은 당신을 찾아가면 최소한 신전에 갈 때까지 버틸 방법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죽을 때가 되니 네일룬의 신녀도 치매가 들었군. 네겐 죽음을 한 차례 회피할 보물이 있잖아? 그걸 쓰면 될 것을 왜 굳이 날 찾아오고 그래? 신전으로 가 봐. 대적자가 되고, 중첩 마법에 대해 잘 알아보라고. 언제든 환영할 테니, 마음이 바뀌면 찾아오도록 해.”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시혁은 차갑게 말했다.

어느새 저주가 30 중첩을 넘어가고 있었다.

오행 순환체만으로는 대응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일일이 대응 마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 때문에 머리가 핑핑 돌았다.

시혁은 밖으로 나왔다.

신전을 향해 걸었다.

대장로의 말 중, 그래도 한 가지 위안되는 점이 있었다.

세계수의 가호로 저주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혁은 한 차례 죽음을 회피할 거라고만 생각했지, 저주 자체가 사라질 거라고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장로를 찾아갔던 건데, 이 사실을 확인했으니 거칠 것이 없었다.

신전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들어가려다가 멈칫했다.

한 번 저주가 걸리는 것은 세계수의 가호로 무시할 수 있다.

그럼 다음에는 어떻게 하지?

항상 천상도의 주민들에게 치료를 받아야 하나?

별로 신뢰가 가는 족속들은 아닌데…… 당장 까뮈의 대장로부터 그랬지 않나.

안 되겠다.

시혁 스스로가 치료를 해야겠다.

분명히 중첩 저주라고 했다.

그렇다면 치료 방법도 뻔했다. 저주가 중첩되는 것을 방해하거나, 그에 대응되는 방어 마법을 차곡차곡 쌓아야겠지.

신전 대신, 그 뒤편의 바위틈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만히 앉아 자신에게 걸린 저주를 분석했다.

현재 40 중첩.

모두 다른 종류의 저주였다. 똑같은 게 하나도 없어서, 시혁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자세히 살펴보니, 한 가지 특징이 보였다.

모든 저주가 연관되어 있다.

마법의 실로 짜인 그물을 보는 듯했다. 하나하나의 저주가 씨줄과 날줄이 되어 서로를 얽맸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거대한 하나의 저주로 변하는 것이다.

실로 정교하고, 알고도 못 막게 만들어져 있었다.

이 저주를 만드는데 들였을 시간이 얼마일까.

즉석으로 대응 마법을 만들어서는 당해내기가 힘들었다. 그저 중첩을 몇 번 더 늘리는 게 고작이었다.

시간이 필요했다.

단 몇 시간이라도 좋다. 이 연쇄 저주를 한 번 자세히 살필 수만 있다면, 시혁은 그 대응 마법을 만들 자신이 있었다.

시혁은 외투를 덮고 몸을 웅크렸다.

이죽대던 대장로의 얼굴이 떠올랐다.

중첩 마법이 그렇게나 대단하다고?

어디 한 번 해보자.

아예 맨땅에서 시작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훌륭한 교보재가 있지 않나.

각각의 저주를 살피는데 주력했다.

어떻게 결합시키고, 그 힘을 키우는지 몸으로 알아냈다.

한편, 대응하는 마법을 하나씩 변형시켰다.

부패에는 생명 보존으로, 고통에는 통각 둔화로, 실명에는 시력 강화로.

안타깝게도 이것들을 중첩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즉석에서 이런 장대한 마법을 구상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1대 1로 대응하는 것은 가능했다.

그물 사이에 벽돌을 끼워 넣어, 그물의 형성을 막는다.

그렇다면 100 중첩이든 뭐든 이겨낼 수 있다. 단지 100개의 저주가 시혁을 괴롭히는 것에 불과하니까.

“으으으.”

시혁은 스스로에게 오행 순환체를 주입하고 버텼다.

중첩이 끝없이 올라갔다.

어느새 50 중첩을 넘었다. 그에 따라 기존 저주들이 몇 배는 강화되었다. 시력 강화 마법을 써도 앞이 보이지 않고, 불에 타는 듯한 통증이 시혁을 괴롭혔다.

[힘내오.]

짝니가 옆에서 시혁의 얼굴을 핥았다.

시혁은 힘든 와중에도 씩 웃었다.

“걱정 마라.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거야.”

70 중첩이 넘어갔다.

모든 감각이 차단되었다. 뭔가 자신을 흔들어 대는 느낌은 드는데, 짝니일 거라고 짐작하는 게 고작이었다.

80 중첩이 되자 홀로 어둠 속에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광활한 공간에서 오직 고통만이 느껴졌다. 이제는 스스로에게 가해지는 저주가 어떤 것인지 알기도 힘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시혁의 의식이 끊겼다.

심연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더니, 곧 의식이 부상하며 눈앞에 빛이 돌아왔다.

“헉, 헉, 허억, 헉헉.”

시혁은 숨을 몰아쉬었다.

몸에 두른 세계수의 가호가 옅은 빛을 뿜고 있었다.

[괜찮소?]

짝니가 시혁을 들여다보았다.

샛노란 눈동자에 걱정 어린 빛이 역력했다.

부드럽게 짝니의 목덜미를 긁어주었다.

“걱정 마.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세계수의 가호가 작동하면서 모든 저주가 무효화되었다.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다.

죽음 지혜도 곧 상황을 파악할 터. 죽음 지혜가 재차 저주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대비를 해야 했다.

시혁이 죽은 것은 정확히 88 중첩 때.

88개의 대응 마법을 빨리 만들어야 했다. 88개의 저주는 모두 기억 마법까지 써서 기억해 두었으니, 이제 역으로 해석만 하면 된다. 이 저주들도 결국은 기존 저주의 변형이니까.

이때, 저주 하나가 날아왔다.

꼭두각시의 저주.

시혁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으려고 했는데, 어째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간단한 저주 해제 마법으로 날려버렸다.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죽음 지혜의 중첩 저주는 워낙 정교하게 만들어진 작품이라 약점이 있었다.

반드시 순서대로 저주를 걸어야 한다는 것.

시혁은 즉각 변형된 생명 보존의 마법을 사용했다. 처음으로 걸릴 저주는 바로 부패의 저주였으니까.

역시나 그랬다.

손끝이 따가워지더니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간단히 몰아냈다. 다만 외부에서 힘이 계속 유입되는 까닭에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어서 차례차례 저주들이 쏟아졌다.

정확히 30분에 하나씩.

초반에는 어렵지 않게 막아냈다.

다만 조금씩 어려워졌다.

수십 개의 마법을 유지하려니 죽을 지경이었다. 오행 순환체를 다 동원해도 그랬다. 그나마 지팡이의 마나 제어와 왕관의 능력 강화에 힘입어 어찌어찌 버틸 수 있었다.

중첩이 순식간에 60개를 넘어섰다.

저주가 슬슬 힘을 발하기 시작했다.

시혁을 압박했다.

간신히 대응 마법을 펼치고 있었다. 80개까지는 대응 마법을 쓸 것 같은데, 그 이상 넘어가면 따라잡힐 듯했다. 89번째부터는 무슨 저주가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짝니만 시혁의 외로운 투쟁을 지켜보았다.

시혁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흘렀다가 밝은 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반복했다.

88 중첩을 넘었다.

시혁에게도 미지의 영역.

각종 치명적인 저주가 시혁의 몸을 관통했다.

견딜 수 있었다.

초반의 저주가 거의 저지된 지금, 죽음 지혜의 중첩 저주는 크게 힘을 쓰지 못했으니까.

100 중첩에 이르렀다.

시혁은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죽음 지혜, 똑똑한 새끼.”

거대한 저주가 완성되었다.

차원 전이의 저주.

지금까지 걸린 저주를 몽땅 대상의 고향 행성으로 보내 버리는 것이다.

현자 때는 불사의 역병, 반신 때는 차원 전이의 저주?

대단하긴 대단하다.

시혁의 주변에서 검은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가만 놔둬서는 안 되지.

정신을 집중했다.

마음속으로 특정한 주문을 외자, 머리에 쓴 왕관이 반응하여 찬란한 보광을 뿌렸다.

그 빛이 하늘로 올라갔다. 하늘과 땅을 하나로 이었다.

무지개가 걸린 듯한 광경.

빛의 다리를 통해 막대한 마나가 주입되었다. 시혁은 그 강대한 힘에 전율을 일으켰다.

엄청났다.

50레벨의 영웅이 갖는 힘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치 신이 된 것처럼, 무엇이든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무한한 마나를 무기로 차원 전이에 맞섰다.

이미 대응 마법을 벽돌처럼 끼워놓은 탓에 차원 전이가 완벽하지 않았다. 그 모든 대응 마법을 폭발하듯 부풀렸다. 그러면서 오행 순환체의 힘 중에서도 불의 정화 능력을 수십 배로 증폭시켰다.

화악!

화염 폭풍이 불어 닥쳤다.

천상도 귀퉁이에서 일어난 불꽃이 주변을 다 휩쓸었다. 신전과 마을까지 휩쓸 뻔해서 잠깐 소란이 일어났다.

무한한 마나에서 비롯된 정화의 불꽃은 무시무시했다.

모든 저주를 소멸시켰다.

세계수의 가호 때처럼 백지 상태로 돌아간 것이다.

“후우!”

그것으로 천공 개방도 끝이 났다.

조금 더 유지시간이 길면 좋을 텐데 아쉬웠다.

[뜨겁소.]

짝니가 불평을 했다.

화염 폭풍에 휘말린 까닭에 털이 그을려 있었다. 시혁의 옆에 계속 앉아 있던 참이라 피하질 못한 것이다.

시혁은 짝니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고생했어.”

[배고프오.]

“어휴, 진짜 넌 할 말이 그것밖에 없냐?”

그래도 계속 옆에 있어줘서 고마웠다.

무한의 주머니에서 사슴 한 마리를 꺼내 던져주었다.

짝니가 맛있게 사슴 시체를 뜯어먹었다. 그걸 구경하며, 시혁은 심신을 가다듬었다.

더 이상 세계수의 가호도 천공 개방도 없다. 칠대 위상의 용왕으로는 중첩 저주에 대처하기 힘들고.

본신의 실력으로 이겨내야겠지.

시혁은 100개 모든 저주에 대한 대응 마법을 완성했다.

생명 보존 마법을 걸어놓고, 차원 전이의 저주 대응책을 마련하는데 고심했다.

불의 정화를 지팡이에 담아볼까? 오행 순환체를 희생시키고, 그렇게 얻는 마나를 쓰며 7연타로 때리면 효과가 있지 않겠나.

그런데 이상했다.

부패의 저주가 걸리길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럴 기미가 없었다.

포기한 걸까?

그럴 가능성은 적었다. 죽음 지혜는 집요하기로 소문난 반신이었으니까.

아마도 방법을 달리할 듯했다.

하긴 2차례에 걸친 시도가 실패했다. 그 경우 시혁 같아도 원인을 먼저 파악하려고 할 터였다. 이렇게 강력한 저주를 걸려면, 상당히 많은 마나를 소모하기 때문이다.

기약도 없이 마나만 들이부울 수는 없지.

중첩 저주 다음은 무슨 수를 쓸까?

모른다.

그래도 한 가지 사실은 분명했다.

중첩 저주만큼 치명적인 공격을 걸어올 거라는 점.

시혁의 눈이 번들거렸다.

이런 식으로 당하고만 있어서는 승산이 없다. 결국 죽음 지혜에게 굴복하고 말 것이다.

수를 써야 한다.

어떻게?

시혁은 고개를 들어 한쪽을 쳐다보았다.

웅장한 신전이 시혁의 눈동자에 선명하게 맺혔다.

< 중첩 저주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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