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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 세계의 한의사-154화 (154/250)

< 제소 >

시혁은 흑룡 문신을 철저히 분석했다.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새로운 개념이 될 빈 부분이 하나. 개념을 주입하는 부분이 하나. 그리고 대뇌 피질에 작용하게 하는 부분이 하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세 번째.

시혁은 분석 끝에 그 부분만 통째로 드러냈다. 독립된 마법진으로 만든 후, 이걸 어떻게 활용할까 고민에 잠겼다.

궁리 끝에 결론을 내렸다.

‘에테르를 소멸시켜 보자.’

흑룡 문신도, 신들의 세뇌도 결국 에테르로 이루어져 있다. 이 에테르를 지워버린다면, 자연히 그 기능을 상실할 것이다.

신들의 세뇌는 단순한 에테르 덩이가 아니니 이것만으로 세뇌를 풀 수는 없다. 하지만 거기까지 가기 전 교두보가 되기에는 충분했다.

우선 흑룡 문신의 치료법부터 만들었다.

백호 문신.

마법진이나, 마법으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긴 했다. 하지만 문신을 새기는 게 가장 좋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래야 계속해서 대뇌 피질에 작용할 테니까.

그런데 이걸 쓴다고 사람이 원래대로 돌아갈지 어떨지는 모르겠다.

문신은 무의식에 작용한다. 그 힘이 이미 뿌리를 깊이 내렸을 가능성이 있었다. 문신의 힘이 제거되더라도, 사람 자체의 무의식이 바뀌어 버렸다면 똑같은 행태를 보이지 않겠나.

손문철의 협조를 얻어, 첸팡리를 면회했다.

그 사이 꽤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시혁을 보더니 양 눈썹을 날카롭게 들어올렸다.

“또 무슨 일이세요? 사람 구경하러 오셨나요?”

꽤 초조한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 내의 정세가 첸팡리에게 그다지 이롭지 못했으니까.

시혁은 담담한 얼굴로 첸팡리를 보았다.

“그런 악취미는 없습니다. 제가 방문한 까닭은, 팡리 씨에게 한 가지를 제안하기 위해서입니다.”

“뭔데요? 왜, 자백이라도 하라는 건가요? 흥! 차라리 그 잘난 이능으로 제 뇌를 읽어보시지 그래요?”

“팡리 씨가 극악한 범죄자도 아니고 그럴 수는 없지요. 중국과 관계도 있고…… 제 제안은 간단합니다. 팡리 씨 문신, 지울 생각 없습니까?”

첸팡리의 눈이 꿈틀거렸다.

“그게 가능해요? 불가능할 텐데요.”

“다른 사람은 불가능해도 저는 가능합니다.”

첸팡리가 얼굴을 찌푸리고 고심했다.

시혁은 직격탄을 날렸다.

“팡리 씨도 문신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는 아시지요? 흑룡회에 충성을 하는 건 좋은데, 본인 의지로 충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뇌에 당해 본인 의지와 관련 없이 움직이는 건, 팡리 씨에게도 그리 좋지 않습니다.”

“어차피 문신을 제거해도 상황이 바뀌지는 않아요. 문신의 영향도 있지만, 전 제 의지로 흑룡회에 소속된 거니까요.”

“그럼 상관없지 않습니까? 문신을 지우고 계속 흑룡회를 위해 일하면 되니까요.”

“거절하겠어요. 괜한 모험을 할 생각은 없어요.”

그럴 줄 알았다.

결국은 첸팡리와 다른 이능력자들은 중국에 송환될 것이다. 그러면 흑룡 문신이 사라졌다는 게 밝혀질 텐데, 첸팡리 입장에선 위험을 감수할 리가 없었다.

첸팡리가 길게 하품을 했다.

책상 아래에서 시혁의 손이 반짝이고 있었다.

CCTV의 사각 지대.

첸팡리의 정신을 혼몽하게 만드는 한편, 공간을 격하고 백호 문신을 찍었다.

귓바퀴 뒤, 잘 보이지 않는 곳이다. 크기도 작고 반쯤 투명해서, 여간해서는 관찰하기 힘들었다.

당장 흑룡 문신의 힘을 소멸시키기 시작했다. 몇 주 정도면 흑룡 문신은 본연의 기능을 상실하고 평범한 문신으로 돌아간다. 백호 문신은 저절로 사라져서, 세뇌가 풀린 사실도 알지 못하게 할 테고.

시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백호 문신을 찍는 과정에서, 첸팡리의 상념 하나가 흘러들었기 때문이다.

두려움.

어떤 한 장면이 흐릿하게 눈앞에서 일렁였다.

작은 아이들이다.

그 아이들이 피에 잠겨 있었다. 참혹한 시체가 되어 널브러진 것이다.

흑룡회의 수법을 알 것 같았다.

이 아이들은 다름 아닌 첸팡리의 동생들이다.

흑룡회에 충성하지 않으면 동생들이 죽을 거라고 무의식에 새겨놓았다. 그러니 첸팡리는 가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흑룡회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였다.

실현 가능성이 없다면 무시해 버릴 텐데, 흑룡회는 중국 주석까지 포함된 강력한 조직이었다.

과연 첸팡리는 어떻게 변할까.

말하는 것으로 봐선 흑룡 문신에 대해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다. 지금까진 방법이 없고, 어차피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 그냥 당하기만 했는데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르겠다.

시혁은 의뭉스럽게 말을 이었다.

“안타깝네요. 팡리 씨에겐 좋은 일인데……”

“흥, 그 시커먼 속을 누가 모를 줄 알아요? 문신을 없애주는 척 절 세뇌시키려고 그러는 거죠?”

“그런 의도는 없습니다. 하긴 절 믿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죠. 다른 분들에게 제안하도록 하겠습니다.”

“흥, 우리 충성스러운 중화인 중 누가 그 바보 같은 제안을 받아들일지 참 궁금하네요.”

첸팡리가 악담을 퍼부었다.

상관없었다. 곧 대상이 바뀌어서 다른 중국인 이능력자가 들어왔으니까.

똑같은 제안을 했고, 역시 거절당했다.

대신 백호 문신을 새겨놓는 것은 잊지 않았다. 이들도 조만간 자신을 둘러싼 부조리를 알게 될 터였다.

그러면서 알게 된 사실 하나.

흑룡회는 별의 별 감정을 이용해 이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첸팡리처럼 공포를 이용하기도 하고, 흑룡회를 잘 따르면 공산당 중앙위원이 될 거라는 환상을 심기도 했다. 어떤 이는 흑룡회 고위 간부 여성과 비밀리에 사귀는 사이고, 그 사람을 위해 일한다고 착각을 하고 있었다.

시혁은 몸서리를 쳤다.

이토록 심하게 인간을 능욕하다니……

한편으로는 경계심을 가졌다.

자신이 만든 백호 문신도 흑룡 문신과 같은 능력을 얼마든지 수행할 수 있으니까.

유출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흑룡 문신이 그랬던 것처럼, 암호화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협회 건물로 돌아왔다.

굉장히 피곤했다. 몰래 마법을 쓰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는데, 이능력자들의 사정을 엿본 게 심력을 꽤나 소모했다.

“일은 잘 됐습니까?”

손문철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혁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예. 네 명 다 흑룡 문신을 제거했습니다. 조만간 영향력이 사라질 텐데,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하긴 인간처럼 복잡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들이 흑룡회를 흔들어 주면 좋겠습니다만 오히려 더 열성 지지자가 될 수도 있지요. 참, 이번 일에 대해 세계 이능 협회 연맹에 제소할 예정입니다.”

“그게 효과가 있을까요?”

시혁은 의구심을 드러냈다.

세계 연맹이라고 해봐야 미국과 중국이 거의 장악하고 있었다. 그 외에 이능 강국인 영국과 프랑스, 독일, 일본, 인도 등이 제 목소리를 내는 게 고작이었다.

“우리나라에 이능력자를 잠입시킨 걸 항의하려는 게 아닙니다. 이능력자의 인권 유린에 대해 제소하려고 합니다.”

“아, 그건 효과가 있겠네요!”

“중국 대 대한민국의 구도로 가면 상대가 안 됩니다. 중국 대 이능력자, 아니 흑룡회 대 전 세계 이능력자의 구도로 가야 합니다. 그래야 이길 수 있습니다.”

과연 강대국에 맞서 대한민국의 이권을 지키던 사람답다.

시혁이 신들의 흑룡 문신에 골몰하는 동안, 유효한 전략을 구상해 놓은 것이다.

이능력자들을 세뇌해서 멋대로 부렸다?

전 세계가 공분할 일이다. 이능력자들은 특히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을 참지 못하니, 어쩌면 대 흑룡회 연합이 결성될지도 몰랐다.

손문철이 시혁을 보며 말했다.

“연맹 본부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습니다. 오늘 밤에 출국하면 현지 시간으로 새벽에 도착할 겁니다. 준비가 끝나는 대로 갈 생각인데, 이사님도 같이 가시지 않겠습니까?”

“저도요?”

“이사님께서 흑룡 문신에 대해 밝혔으니까요. 그 동안 수집한 증거도 제시할 거지만, 이사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도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하긴 그렇다.

시혁도 승낙했다. 견문도 넓히고, 외국의 이능력자들과 관계를 맺을 좋을 기회였으니까.

저녁을 먹고, 공항을 향해 떠났다.

극비리에 이뤄진 방문이었다. 당사자들을 제외하고는 몇 명 알지 못했다. 흡사 007 작전을 방불케 하는 은밀한 이동 끝에, 공항에 도착하여 협회 소유의 전용기에 올랐다.

다음 날 오전 9시, 정확히 제네바의 세계 이능 협회 연맹 본부를 방문했다.

출근해 있던 연맹 의장이 깜짝 놀랐다.

“아니, 미스터 손 아닙니까?”

제네바에도 미리 알리지 않았나 보다.

손문철은 준비해 온 서류철을 들이밀었다.

“대한민국 이능 협회장의 권한으로, 중화 인민 공화국 이능 협회의 인권 유린에 대한 사항을 제소하려고 합니다.”

의장이 말을 아꼈다.

“중국이라…… 음, 대한민국에 이능력자를 들여보낸 것은 잘못한 일이긴 합니다만 저희가 나서기에는 좀 그렇습니다.”

“그 문제가 아닙니다. 제대로 못 들으신 것 같네요. 저희는 이능력자의 인권 유린에 대해 제소하는 겁니다.”

“인권 유린이라니요?”

그제야 의장이 관심을 가졌다.

손문철은 말없이 서류철을 안겨주었다.

의장이 서류철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처음에는 다소 시큰둥한 기색이었는데, 서류를 넘길수록 의장이 눈이 커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손문철을 쳐다보았다.

“이게 사실입니까?”

“예. 증거도 있고, 증인도 있습니다. 연맹에서도 조금만 조사해 보면 진실을 알게 될 겁니다.”

시혁도 한 마디를 했다.

“참 지독한 수법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꼭두각시가 되는 거 아닙니까? 그것도 본인 스스로는 자기가 원해서 그렇게 됐다고 생각할 거고요.”

“으음, 대한민국의 미스터 최 맞지요?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 그렇겠습니다. 필요한 서류는 준비해 오셨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손문철이 가져온 서류를 모두 제출했다.

시간이 좀 걸린다고 했다.

법제 위원회에서 심의를 하고, 위원회에서 동의를 해야 총회에 올리기 때문이다.

당연히 다음 행동을 취했다.

연맹 본부에서 기자 회견을 했다.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에서 G급 이능력자가 찾아온 것만으로도 화젯거리가 된다. 기자들이 무슨 일일까 궁금해 하며 연맹 본부를 찾아왔는데, 거기서 폭탄이 떨어졌다.

손문철의 발표를 듣고, 기자들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말도 안 돼!”

“그게 정말입니까?”

“연맹에 이미 증거를 제출했습니다. 곧 법제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총회에 제소할 예정입니다. 아울러 대한민국 이능 협회에서 자료를 배포하도록 할 테니, 그걸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기자들이 질문을 시작했다.

연맹 본부를 드나드는 기자들이라 질문의 수준이 높았다.

손문철은 스스로 답변하는 대신 시혁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누군가 시혁을 알아보고 탄성을 질렀다.

“아, 대한민국의 최시혁 씨네요! 몇 달 전에 이능력자로 각성했다던데!”

이름을 듣고, 다른 기자들도 묵혀 놓은 기억을 꺼냈다.

“바디소 카다웨르를 치료했던 그 발현자?”

“맞아! 방송에서 본 기억이 있어!”

시혁은 단상 위로 올라갔다.

수많은 시선이 집중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많이 떨리고 긴장했을 텐데, 그 동안 여러 일을 겪어서인지 담담하기만 했다.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치유 및 만능 구현 계열 S급 이능력자, 최시혁입니다. 흑룡회의 세뇌에 대한 질문을 받겠습니다.”

“질문 있습니다! 아까 미스터 손이 흑룡회의 세뇌가 인간의 무의식에 작용한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흑룡회의 세뇌는 인간의 무의식을 비틉니다.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주입해서, 자기들이 의도한 대로 행동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말해서는 얼른 이해가 가지 않지요? 질문하신 기자 분, 혹시 기자 분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음…… 제 아내와 딸이 가장 소중합니다. 그들이야말로 제 삶의 보람이지요.”

“흑룡회는 바로 그런 감정을 이용합니다. 기자 분이 가족들과 행복해지려면, 흑룡회에 충성해야 한다는 식이지요.”

“예? 말이 안 됩니다!”

“맞습니다. 말이 안 되지요. 그런데 흑룡회의 세뇌는 그걸 가능하게 만듭니다. 세뇌에 당한 사람의 머릿속에서는, 그 어이없는 명제가 진리가 되는 겁니다.”

다름 아닌 첸팡리가 그랬던 것처럼.

현실에 근거가 있다면 더 좋다. 아주 똑똑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의심도 못해볼 테니까.

기자들이 웅성거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 자연히 엄청난 양의 질문이 쏟아졌다.

시혁은 여유롭게 모든 질문에 답했다.

기자 회견 시간이 길어졌다. 원래는 1시간 정도로 잡았는데, 해가 지고 자정이 가까워지도록 연장했다.

그 결과, 단순히 스위스만 아닌 전 세계에 기자 회견 장면이 잡혔다.

대한민국에서도, 지구 반대편 우루과이에서도, 남극 기지에서도 시혁의 질문 답변 장면을 볼 수가 있었다.

어마어마한 반향이 일었다.

이능력자들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까지 일제히 공분했다. 각국 이능 협회는 물론, 인권 단체와 정부들도 중국을 비난하는 성명을 냈다.

중국 내부의 바람도 거세졌다.

예전에는 정치 공세라는 느낌이 강했는데, 이젠 죽자고 달려들고 있었다.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던 주석 측도 그에 대응했다. 시혁과 손문철이 밝힌 세뇌는 날조된 것이며, 어디까지나 단합을 위해 새긴 문신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흑룡회가 주석의 사조직이라는 의혹은 사실이라는 뜻.

법제 위원회는 단 며칠 만에 심의를 완료했다. 총회에 안건이 올라오자, 또 한바탕 격론이 벌어졌다.

중국 대표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세뇌라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건 모함입니다, 모함!”

대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거의 만장일치에 가깝게, 중국에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결정이 났다.

흑룡회에 사형 선고가 내려진 셈.

장현부터 시작된 악연이, 드디어 끝을 보려 하고 있었다.

지구에서는 일이 확실히 잘 풀렸다.

반면 아르거스에서는 좀 꼬이고 있었다.

죽음 지혜.

그 강력한 반신이 시혁에게 수작을 부리는 까닭이었다.

< 제소 > 끝

ⓒ 산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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