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 세계의 한의사-151화 (151/250)

< 첸팡리 -1- >

죽음 지혜를 끝내기 직전, 시혁과 누리 공격대의 영웅들은 준비해온 수정구를 꺼냈다.

바람과 땅의 마나를 담고 있는 수정구.

거기 담긴 마나를 해방했다. 그러자 특정한 정보를 담은 2종류의 마나가 세계 가득 퍼졌다.

다음날, 시혁은 그것부터 확인했다.

과연 수신기가 정보를 잘 읽어 들였는지 본 것이다.

[산사태 군주 손문철, 오색 현자 최시혁, 천리 사수……]

성공이다.

물론 약간의 변조는 있었다. 오색 현자 최시혁이 오생 헌자 최시형, 색오 현자 최혁시, 이런 식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거야 컴퓨터를 돌리면 금방 해결된다. 정보는 다섯 개나 있고, 공통분모를 뽑아내면 그만이니까.

결과를 받아 본 손문철이 고무적인 표정을 지었다.

“성공이네요.”

“예. 집단 방문도 성공했습니다. 믿을 만한 이능력자들을 모아서 아르거스에 보내는 게 좋겠습니다. 아르거스에서 계급을 올려도 지구에서 많이 강해지지는 않습니다만, 반신이 되면 차이가 확연하니까요.”

“이사님이 지금 군주 계급이라고 하셨지요?”

“예. 이제 3단계 남았습니다.”

“군주 다음이 초월, 준신이니까 그러네요. 잘 하면 올해 안으로 반신이 되겠습니다.”

“모르지요. 위로 올라갈수록 승급하기가 어려워지니까요. 그래도 내년 초에는 가능하지 싶습니다.”

시혁은 준신 계급이 되면 의도적으로 승급을 늦출 생각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머릿속의 세뇌를 해결하고, 신들에게 대항할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반신이 되면 행동에 제약이 생긴다. 손문철의 경우에서 봤듯이, 성지에 몸이 묶이는 것이다. 그 전에 일을 다 처리해놓는 게 좋았다.

“참, 이사님.”

“예?”

“중국 쪽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조심하는 게 좋겠습니다.”

시혁이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나선 조용해졌었는데, 활동을 재개하는 모양이다.

하긴 다섯 개 중 두 개의 신전은 온전하니까. 어쩌면 신전에 숨겨둔 마법진을 발견했을 수도 있고.

“중국이 어떻게 하고 있는데요?”

“산동 연구소에 있던 이능력자들이 은밀하게 사라졌답니다. 중국 내에서 이동한 거면 괜찮은데, 우리나라로 밀입국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능력자라…… 배 타고 들어오는 거면 금방 잡을 겁니다. 천리안이 곧 완성되니까요. 비행기 타고 오면 공항에서 잡아버리면 그만이고요.”

“하긴 그렇지요.”

천리안은 이미 시제품을 만들었다. 시험 비행도 끝냈고, 정식 취역만 앞두고 있었다. 괴수는 물론, 이능력자 테러리스트도 감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도 손문철은 마음에 놓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경호원을 더 붙여주겠다는 것을 겨우 말렸다. 대신 부모님을 경호하기로 했다. 납치당할 위험성이 있었으니까.

“아르거스에 보낼 이능력자들은 어떻게 선정하실 겁니까?”

“믿을 수 있는 이능력자들로만 선정해야지요. 누리 공격대 사람들한테 한 것처럼, 언약의 열매로 맹세시킬 생각입니다. 우리가 이런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새어나가선 안 됩니다.”

“맞습니다.”

아르거스 얘기를 하다가, 문득 한반도의 에테르 분포에 대한 내용이 나왔다.

손문철이 화면에 비친 지도를 짚으며 말했다.

“요즘도 여전히 남해안 쪽의 에테르 분포가 높습니다. 변이 직전의 동물들을 정화해주고는 있는데, 조만간 바다 괴수가 출현할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하긴 벌써 10월이 넘지 않았나.

시혁이 소록도에서 오색 사슴뿔을 얻은 게 4월 22일이다. 그 6개월 동안, 육지는 몰라도 바다에서 변이가 완료된 괴물들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과연 어떤 놈이 나타날까.

별 일이 없어야 할 텐데……

천리안을 예정보다 빠르게 취역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천리안의 탐지 능력은 매질을 가리지 않아서, 땅 속이건 바다 속이건 탐지가 가능하니까.

시혁은 연구실로 돌아왔다.

연구원들이 모여들었다.

“이사님, 어떻게 됐습니까?”

“근두운 프로젝트는 성공했습니다. 협회장님께도 보고를 했고요. 이제 한 번에 가는 이능력자의 수를 늘리는 게 관건입니다. 참, 천리안은 조기 취역시키기로 했으니 담당 분들이 힘 좀 써주세요.”

“으아아! 또 야근이다!”

“천리안 세 대 배치하면 휴가 보내주시는 거 맞죠?”

“당연하죠. 단, 비밀 서약은 지키셔야 합니다.”

근두운이 바로 아르거스 강제 방문 장치를 뜻했다. 계속 고민하다가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이다.

현재 근두운의 수용 한계는 딱 여섯 명.

효율이 너무 낮았다. 최소 그 다섯 배는 되어야 뭘 해도 하지 않겠나. 외부에 들키지 않게 규모를 최소화하는 것까지 생각하면 더 그렇고.

저녁 6시가 되자 퇴근했다.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고 쉬고 있는데, 갑자기 몸에 오한이 들었다.

어디선가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시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예전에 설치해둔 마법진이 경고를 발하고 있었다.

침입자가 있다는 것.

딱 한 명이었다. 당장 적대할 생각은 없는지 소파에 앉은 상태였다.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손을 슬쩍 욕조 밖으로 늘어뜨렸다. 손바닥을 욕조에 붙인 채, 불과 물의 힘을 천천히 끌어올렸다.

자욱한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시혁은 느릿하게 일어났다. 욕조를 벗어나 거실로 나오자, 까만 옷을 입고 복면을 쓴 여자가 소파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빤히 쳐다보자, 여자가 머리를 돌렸다.

“옷부터 입으세요.”

어색한 한국어.

여자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시혁은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옷장에서 가운을 꺼내 입은 뒤, 커피를 한 잔 꺼내들고 여자 앞으로 다가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태평해 보이지만 적잖이 긴장하고 있었다. 당장 커피 잔에 스며든 물의 에테르가 한 가지 마법을 구성했다. 언제든 이걸 끼얹기만 하면 빙결 마법이 여자를 속박할 것이다.

시혁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누굴 초대한 적이 없는데, 이 밤에 무슨 일입니까?”

“저는 첸팡리라고 해요. 잠깐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이미 멋대로 들어와 놓고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시혁은 콧방귀를 뀌었다.

“참 일방적인 분이시네요. 예의는 어디에 뒀습니까? 이능까지 써가며 침입한 사람과 무슨 이야기를 하라는 거죠?”

“허락 없이 들어온 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경호원들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요. 최 이사님께 은밀히 할 얘기가 있는데, 그 사람들이 24시간 붙어 있어서요.”

그럼 당연하지.

지금 눈앞에 있는 여자도 은신 계열 이능력자 같은데 어느 경호원이 접근시키겠나. 언제 돌변해서 공격할지 모르는데.

시혁은 턱짓을 했다.

“뭐, 좋습니다. 그 말 한 번 들어봅시다. 아, 복면은 벗으세요.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비밀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첸팡리가 주저하더니 복면을 벗었다.

하얀 피부와 오목조목한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미인계라도 쓰려는지, 이능력자 중에서도 외모가 빼어난 이를 보낸 것이다. 마법진이 감지한 에테르 파동으로 볼 때 S급 이능력자가 분명했고.

그러나 시혁의 얼굴은 담담하기만 했다.

첸팡리가 미미하게 아미를 찌푸릴 정도. 기대했던 반응이 나오지 않았나 보다.

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최 이사님. 이사님께서 학술 이사에 취임하신지 벌써 두 달이 넘었죠?”

“그랬지요. 8월에 학술 이사가 됐으니까.”

“정말 많은 것을 하셨더라고요. 협회장을 구하고, 대한민국 내의 저희 조직을 다 부수고, 광범위 측정 장치에다 이제는 천리안? 근두운? 그런 것도 만들고 계시던데요.”

시혁은 말을 아꼈다.

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천리안은 그렇다 쳐도, 근두운까지 알 줄이야.

설마 근두운의 기능까지 알아내진 못했겠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저희가 분석한 바에 의하면, 이사님께서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 같아요. 급여는 없다시피 하고, 권한이 크냐면 그런 것도 아니고요. 이사님께서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이능력자가 있기는 하나요? 전부 싫다고 하면 그만인 사람들이잖아요.”

그런가?

냉정하게 따지면 그렇기는 하다. 학술 이사는 거의 명예직이나 다름없고, 봉급도 시혁이 버는 돈에 비하면 별 것 아니니까.

하지만 애초에 시혁은 돈과 권력에는 관심이 없는데 뭐 어떤가. 지금 누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거늘.

첸팡리가 몸을 시혁 쪽으로 기울였다.

팔을 모으자 가슴이 도드라졌다. 가냘픈 몸매와 대비되어, 풍만한 가슴이 시혁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래서 저희가 제안하는 게 있어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장현 씨처럼 매국노 짓을 하라고 할 거면 말도 꺼내지 마십시오.”

“그럴 턱이 있나요? 저희 제안은 간단해요. 딱 3년만 저희 연구소 수석을 맡아주세요. 그러면 연봉으로 한화 1조원을 드리겠어요.”

연봉 1조?

시혁은 순간 자기 귀를 의심했다.

지금 시혁의 주된 수입원은 제약 회사에서 받는 로열티였다. 협회에게 받는 돈도 상당했고.

그렇다 해도 조 단위까지는 안 된다. 언젠가 직원들에게 얘기했던 것처럼, 십여 년은 모아야 1조를 벌 테니까.

엄청난 액수였지만, 시혁은 곧 냉정을 되찾았다.

어차피 시혁은 돈 쓰는 재주가 없다.

수백억이나 1조나, 가져봐야 별 차이가 없다는 뜻.

시큰둥한 얼굴로 반문했다.

“그리고요?”

첸팡리의 눈에 살짝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그걸 숨기려는 듯 고혹적인 미소를 짓고 말했다.

“이사님만 지원할 비서실을 만들고, 중국 각지에 최소 10개 이상의 저택을 증여할 거예요. 저택마다 엄선된 이능력자 현지처가 배치되어, 이사님께서 편히 쉬실 수 있게 도와드려요.”

현지처? 가지가지 한다.

그 외에도 여러 혜택을 제시했다. 전제주의 국가에서나 가능한, 수락만 하면 왕처럼 살 수 있게끔 하는 혜택들이었다.

시혁이 흔들리지 않자,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마지막으로, 이사님이 G급 이능력자가 되도록 아르거스에서 지원하도록 하겠어요.”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다.

장현이 했던 말과 똑같았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묻자, 첸팡리는 비밀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제안을 수락해야 알려줄 수 있다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시혁이 아르거스의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중국측에서는 모른다는 게 입증된 셈이니까.

첸팡리가 시혁에게 눈웃음을 쳤다.

“제안을 받아들이시면, 산동 지역 현지처는 제가 될 거에요. 어때요? 거절하셔도 좋으니,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지 않겠어요?”

미인계가 맞다.

시혁은 커피잔을 든 채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중국과 한국은 역사적으로도 깊은 관계를 유지했잖아요? 굳이 대립각을 세울 필요는 없죠. 생각 있으면 찾아오세요. 호호, 잠깐 얘기만 하고 가도 좋고요.”

첸팡리가 카드키 하나를 소파에 올려놓았다.

시혁에게 촉촉한 눈빛을 보내더니, 소파에 몸을 깊이 묻었다.

몸 전체가 검은색으로 변했다.

마치 액체처럼 바닥으로 스며들더니,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존재감도 어슴푸레하게 소멸되었다. 콘크리트 바닥을 헤엄쳐 오피스텔을 벗어나는 것이다.

“깜찍한 짓을……”

시혁은 자신의 몸에 배인 냄새를 맡았다.

아주 옅은 냄새.

사람은 못 맡고, 특수하게 훈련시킨 동물만 맡을 수 있었다. 시혁도 집에 설치한 마법진이 경고를 해서 알았지, 안 그랬으면 놓쳤을 것이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지울 수 없지만, 마법을 쓰면 쉽다.

미리 지울 필요는 없겠지. 시혁이 역으로 써먹을 수도 있는 거니까.

시혁은 옷을 챙겨 입었다.

수작은 첸팡리만 부리지 않았다.

시혁은 마법진을 써서 첸팡리의 몸에 아주 작은 마법 생명체를 집어넣었다. 위치 추적은 물론, 집중하면 첸팡리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을 도청하는 것도 가능했다.

애초에 시혁의 집에 잠입했던 게 실수.

진즉 요새화를 끝내놓지 않았나. 설령 G급 이능력자라도 집 안에서라면 시혁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 첸팡리 -1- > 끝

ⓒ 산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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