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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 세계의 한의사-145화 (145/250)

< 광명지 -1- >

시혁은 대모 세계수에서 눈을 떴다.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손문철의 성역. 그곳에서 누리 공격대의 이능력자들과 합류하기로 했으니까.

넷에게는 진실을 다 밝히진 않았다. 필요한 것만 알려주었다. 손문철이 아르거스에서는 산사태 군주라고 불리니, 무슨 일이 있어도 빨리 달려오라고 한 것이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다.

그래도 영웅이 된지 꽤 됐을 테니 오늘 안으로 합류할 수 있겠지.

세계수 관문을 탄 후, 공허의 파도를 건넜다.

성역에 들어서자마자, 손문철이 귀신처럼 시혁이 도착한 것을 알아차렸다.

[이사님, 이제 오셨습니까?]

[네. 다른 분들은요?]

[천리 사수와 진홍 투사만 도착했습니다. 아, 천리 사수가 강찬 씨고 진홍 투사가 신아영 씨입니다.]

김미애와 한세훈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 보다.

시혁은 짝니를 타고 산을 넘었다.

본성에 도착하자, 강찬과 신아영이 나와 시혁을 맞이했다.

“이야, 원장님 신수가 훤하시네요.”

“지팡이 완전 멋있어요. 그런 건 어디서 구하셨어요?”

강찬은 날개가 달린 백색의 갑옷을 입고, 거대한 쇠뇌를 하나 들고 있었다. 신아영은 가죽 갑옷에 두 자루의 검을 찼는데, 꼭 이미라의 아르거스 모습과 비슷했다.

이력이 둘 다 특이했다.

강찬은 권세 진영의 저격수를 거쳐 천상 진영 상급 감시 천사를 경험했다. 신아영은 권세 진영 중장보병과 야만 진영 혈투사를 겪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미애와 한세훈도 도착했다.

김미애는 권세 진영 조수에서 진리 진영 학자로 전직했다. 마도 공학이 주 분야라, 여러 기계를 다루는데 능숙하다던가.

“으아, 기 죽어.”

한세훈이 투덜거렸다.

다른 사람은 다 상급 병종 출신인데, 본인만 치료사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채집꾼으로 시작했는데 거기서 멈추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신아영이 시혁을 보고 물었다.

“이제 저희가 뭘 해야 되는 거죠?”

아르거스로 온 첫 번째 목적은 달성했다.

이제 발신기를 만들어야 할 차례다.

많은 정보를 담으려면 16진수나 8진수를 응용하는 게 좋다. 그러나 이 경우 차원을 넘으면서 변형되는 게 문제였다. 괜히 중국이 2진수를 사용한 게 아니었다.

그 점을 이야기하자, 김미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쉽겠네요. 수정구든 뭐든 2종류의 마나를 담으면 된다 이거죠?”

“예. 중국인들이 하는 걸 보니까, 마나의 속성으로 0과 1을 표현하고 마나의 크기로 순서를 표시했습니다.”

“재료만 있으면 충분히 만들 수 있겠어요. 마나 공급기랑 마나 회로 장치가 있으면 더 좋고요.”

“그건 제가 만들 수 있습니다. 제 분야는 아니지만, 진리 진영 있을 때 많이 써봤거든요.”

“좋네요. 그 두 물건이 있으면 저 혼자서도 수정구를 찍어낼 수 있어요.”

재료야 별 것 없다.

몇 가지 희귀한 금속이 필요한데, 마침 손문철의 보물 창고에 다 있었다.

다만 무슨 속성의 마나를 활용할지 정해야 했다.

중국인들은 불과 물의 마나를 쓰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걸 피해야 혼선 없이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대치되는 마나를 쓰는 게 좋겠죠?”

“그렇겠지요.”

“그럼 빛이랑 어둠이나, 바람과 땅, 이런 식으로 하는 게 좋겠어요.”

“아니면 여기 성역에서 구하기 쉬운 마나를 써도 좋죠.”

논의 끝에 바람과 땅의 마나를 쓰기로 했다.

철과 땅의 마나를 쓰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기각. 상반되는 마나를 써야 변형이 일어나도 알아보기가 쉽기 때문이었다.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시혁이 두 개의 장치를 만들자 김미애가 수정구를 찍어냈다. 처음 보내는 정보이니만큼 최소한의 것만 담았다.

여섯 이능력자의 신상에 대한 정보.

암호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괜히 다른 곳에 퍼지기라도 하면 골치 아프니까.

일은 금방 끝났다.

지구로 귀환하려면 사흘이나 남아 있었다.

한세훈이 따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뭘 하죠? 전장이라도 가야 하나?”

“전장 가기에는 시간이 아까운데요.”

[흠, 마침 손길이 필요한 일이 있는데 절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손문철이 잘 됐다는 듯 말했다.

[제가 이제 4차 확장을 해야 하는데, 필요한 물건이 좀 있습니다. 그걸 구해다 주시면 좋겠습니다.]

“오, 4차 확장이요?”

“축하드립니다.”

“이제 선두권으로 올라서시네요. 나중에는 신좌에 오르시는 거 아니에요?”

[아직 멀었지요. 최종 확장도 남아 있는데요. 원래는 저와 계약한 영웅들에게 맡기려고 했는데, 기왕 조직을 만들기로 한 이상 여러분이 해주셨으면 합니다.]

일종의 의뢰 밀어주기라고 할까.

들어보니 구해 와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더구나 하나같이 진귀한 물건들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을 꼽자면 천사의 눈물이니 오크 군주의 두개골, 심연의 보석 같은 것들.

[심연의 보석은 저한테 있습니다.]

저번에 심연의 마왕을 만났던 전장에서 우연찮게 입수했다는 것이다.

잘 됐다.

이제 남은 것은 두 가지였다.

시혁은 머리를 끄덕였다.

“천사의 눈물이랑 오크 군주의 두개골을 가져오면 된다, 이거죠?”

[그것들이 가장 중요합니다. 얻기도 어렵고요. 나머지는 제가 틈틈이 모아두었고, 다른 영웅들에게 의뢰를 내면 금방 해결됩니다.]

“우리가 둘로 나뉘어야겠네요.”

시혁은 네 영웅들을 보며 말했다.

마침 끈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둘 있다.

강찬과 신아영.

각자 천상 진영과 야만 진영에서 활약한 적이 있지 않나. 대수림의 엘프들이 시혁에게 보였던 반응을 상기하건대, 둘이 있고 없고에 따라 성패가 갈릴 지도 몰랐다.

신아영이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비쳤다.

“전 오빠랑 같이 있고 싶은데……”

“어쩔 수 없지. 이 중에 자기 말고는 야만 진영을 겪은 사람이 없잖아. 악 성향 반신들 성역에 자유롭게 갈 수 있는 것도 자기뿐이고.”

“나 혼자 보내려고?”

“아니. 그럼 안 되지. 원장님. 원장님께서 같이 가시는 게 어떨까요? 그러면 저도 안심할 것 같습니다.”

강찬과 김미애, 한세훈이 천사들에게 가고 시혁과 신아영은 오크들에게 가라는 것.

그러면 얼추 힘의 균형이 맞을 듯했다.

시혁이 그러자고 하려는데, 김미애가 고개를 저었다.

“원장님이 가시면 오크랑 고블린들이 엄청 경계할 걸요? 척 보기에도 강해 보이잖아요. 더구나 군주 계급이고요. 차라리 저랑 세훈이가 아영이 따라가는 게 나아요. 저희 둘도 경계하긴 하겠지만, 원장님이 갔을 때랑은 비교도 안 될 테니까.”

논의 끝에 김미애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천사들에게 가는 것은 시혁과 강찬.

한세훈이 한 가지를 지적했다.

“천사의 눈물은 구하기 어려워요. 원장님이 거기 가시는 게 좋을 거예요. 오크 군주의 두개골이야, 정 뭐하면 한 마리 잡아서 머리만 뽑아 와도 돼요.”

섬뜩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다른 이들도 천사의 눈물이 더 구하기 어려울 거라고 했다.

아르거스의 천사는 자신의 생명을 일부 희생하여 한 방울의 금빛 눈물을 흘리곤 했다. 당연히 여간해서는 구하기가 어려웠다.

뭐 어쩌겠나.

한 번 부딪쳐봐야지.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네. 사흘 뒤에 봐요.”

“오빠, 안녕! 보고 싶을 거야!”

“며칠만 지나면 볼 거잖아. 몸 조심해!”

“어휴, 이 닭살들.”

천상 진영의 신역, 광명지는 꽤 먼 곳에 있다.

부리나케 달려가야 했다. 그 사이에 다른 반신의 성역을 세 개쯤 지나쳐야 되니까.

강찬이 탈것을 소환했다.

매끈하게 빠진 천마(天馬)였다. 쭉 뻗은 날개가 그리는 곡선이 참 미려했다.

강찬이 짝니를 보더니 질문했다.

“원장님은 비행 탈것 마련 안 하세요? 이 녀석은 강해 보이긴 한데 좀 느릴 것 같은데요.”

“그렇게 느리진 않아요. 보시면 깜짝 놀랄 걸요?”

그 말을 들은 짝니가 이를 드러냈다.

[날 얕보나 보오.]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짝니는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전용 갑옷과 진은 송곳니, 각종 장신구로 치장한 다음에는 그 전력이 크게 상승되었다. 희귀한 비행 탈것이라면 모를까, 일반적인 비행 탈것은 충분히 쫓아갔다.

시혁은 씩 웃었다.

“우리 경주할까요?”

“경주요?”

“광명지까지 누가 먼저 가나 내기하죠. 관문은 타지 말고, 각자의 능력이랑 탈것만 써서요.”

“좋습니다. 제가 이기겠네요.”

바로 출발했다.

짝니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렸다.

안 그래도 승차감이 좋지 않은데, 몸이 엄청나게 흔들렸다. 푹신한 안장을 깔아두었는데도 엉덩이가 아프고, 조금씩 어지러워졌다.

오행 순환체를 스스로에게 부여하자 좀 나아졌다. 그 힘이 짝니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짝니는 지칠 줄 모르고 힘차게 나아갔다.

강찬이 그걸 보고 속도를 올렸다. 지상 탈것이라고 방심했는데, 자칫 잡힐 것 같아서였다.

아슬아슬했다.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질주했다.

마지막 공허의 파도를 넘을 때 승부가 갈렸다.

“이겼다!”

강찬이 그렇게 주먹을 쥘 무렵, 짝니의 몸이 흐려졌다.

공간을 뛰어넘어 천마의 뒤에 나타났다. 그러더니 최후의 도약을 하여 천마를 앞질렀다.

“반칙입니다!”

강찬이 소리를 질렀다.

이미 배가 떠나간 뒤였다. 짝니는 빛과 하늘의 마나가 가득한 광명지 안에 진입했다.

시혁은 어깨를 으쓱였다.

“짝니가 가진 그림자 이동 능력을 쓴 겁니다. 원래는 천마의 머리를 밟고 도약하려는 걸 겨우 말렸어요.”

“끄응, 그림자 이동이요? 그건 어둠 자객들이나 쓰는 건데…… 왜 비행 탈것이 아니라 이 녀석을 데리고 다니시는지 알겠습니다.”

내기에서 졌으니 광명지의 한 식당에서 거하게 대접을 하겠다고 했다. 천사들 중 식도락가가 많아서, 괜찮은 식당이 좀 있다는 것이다.

천상 관문을 타고 하늘 도시로 향했다.

근사한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일단 오기는 했는데, 감이 안 잡히네요.”

“아무 천사나 찾아가서 눈물을 흘려달라고 하면 당장 추방될 겁니다. 예전에 그런 범죄가 많이 일어났었거든요. 일단 의뢰를 찾아보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아하, 의뢰 중에 천사의 눈물을 주는 게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가능성은 희박하죠. 다른 영웅들이 이미 채갔을 테니까.”

시혁의 예측대로였다.

구호의 사원에 가서 살펴보았는데, 천사의 눈물을 보상으로 주는 의뢰는 없었다.

담당 천사에게 찾아갔지만 성과를 기대하긴 힘들었다. 눈물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천사가 둘을 경계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쩐다?

강찬이 궁여지책으로 병자를 찾아 치료해보자는 의견을 냈다. 그럼 눈물 한 방울을 얻을 수 있지 않겠냐는 거였다.

“힘들 겁니다. 천사들은 신성 마법의 대가니까요. 이단이라면 모를까, 종족 전체가 같은 신을 믿는데 치료해주지 않을 리가 없어요.”

“어려울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난감하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둘은 도시 전체를 샅샅이 훑었다.

힘들고 소외된 이들이 있나 확인했는데, 도시 전체가 경건함과 행복으로 물들어 있었다.

말로만 듣던 천국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부조리 없는 천국이 과연 존재할까.

거기서부터 길을 찾아야지 싶었다.

시혁의 의견에, 강찬이 고민에 잠겼다.

“하늘 도시의 부조리라……”

많았다.

가장 대표적인 게 계급 제도.

천사 종족만이 시민이 될 수 있다. 그 외 종족은 그 아래, 신민 취급을 받았다. 천사들은 노래 부르고 그림을 그리며 신을 찬양하는 게 하는 일의 전부지만, 다른 종족들은 뼛골 빠지게 노동을 해야 했다.

그래도 많은 종족들이 이주해 오곤 했다. 지금까지 구축된 여덟 개의 신역 중, 생명체가 살기 가장 좋은 환경이기 때문이었다.

광명지, 대수림, 대밀림, 마법도, 빙설원, 대황야, 암흑지, 화산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중에 권세 진영의 신역이 들어선다면 모를까, 다른 곳에 가서 고생하느니 불평등해도 여기가 낫다는 것이다.

< 광명지 -1- > 끝

ⓒ 산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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