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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 세계의 한의사-139화 (139/250)

< 잠입 -2- >

“왜?”

“저놈들은 영웅님들이 저흴 봐주는 걸 싫어해요! 저번에도 한 영웅님이 저흴 도와주셨다가 칼을 맞은 적이 있어요!”

“뭐?”

그런 것을 알고도 도와달라고 했냐고 타박하려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꼬맹이의 얼굴을 보고 관두었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나쁜 것은 중국인들이다.

아르거스의 주민들을 실험용 쥐 취급한 거니까. 다른 주민들 대하는 것처럼만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겠지.

가만히 다짐을 받았다.

“너 나한테 빚진 거다. 알았지?”

“알았어요! 얼른 가세요!”

“다음에 또 보자.”

얼른 몸을 뺐다.

빈민촌은 자연적으로 생성된 거대한 미로였다. 눈에 띄지 않고 숨어 다니기 좋았다. 시혁에게 치료를 받은 빈민들이 돕자, 성 반대쪽으로 나올 수 있었다.

안내해준 빈민이 숨을 헐떡였다.

“영웅님, 감사했습니다. 당분간 저희 마을엔 오시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저놈들 한 번 오면 한참을 들쑤시다 가서요.”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성 안으로 몰래 잠입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하수도나 뭐 그런 걸로요.”

“있지요. 영웅님을 모셔온 꼬맹이도 하수도로 들어간 겁니다. 그런데 왜 그러십니까? 영웅님은 그냥 들어가시면 될 텐데요.”

“이번 일이 마음에 걸려서 그렇습니다. 그놈들한테 쫓길지도 모르잖습니까? 은신처라도 마련을 해놓으려고요.”

“끄응…… 하긴 그놈들이라면 그럴 수 있지요.”

빈민은 망설이다가 하수도로 통하는 통로를 가르쳐주었다.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예전에는 빈민촌 사람들이 쓰던 우물인데, 하수도가 근처에 지나는 바람에 물이 더러워져 쓰지 않는다고 했다. 물이 오염된 원인을 찾다가 땅을 파보니, 하수도로 연결되어 있었다나.

슬쩍 유도심문을 했다.

“하수도는 성 아래라면 다 깔려 있겠지요?”

“당연한 말씀을. 사람 있는 곳이면 꼭 물이 필요한 법인데, 하수도 없는 곳이 있을 수가 없지요.”

“흠, 그러다 도둑이라도 들면 큰일 아닙니까?”

“설마요. 어차피 하수도에서 성 안으로 들어가는 곳은 또 몇 곳 없습니다. 전부 외곽이죠. 신전이나 보물 창고처럼 중요한 곳은 바닥이 두꺼운 석재와 주춧돌로 보호 받고 있어서 뚫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하기야 순백 성주도 그런 건 고려를 했겠지요.”

시혁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기대했던 대답이 나왔다.

일단 하수도를 통해 신전 아래로 들어갈 수가 있다는 말 아닌가.

바닥이 두껍다고?

그럼 더 좋다.

적당히 바닥을 들어낸 뒤, 그 안에 마법진을 새기고 다시 덮어버리면 그만이니까.

이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냥 은신처로만 쓰겠다고 한 뒤, 하수도에서 성 안으로 나오는 구멍 하나를 알아냈다.

다음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넌 여기서 놀고 있어.”

[배고프오.]

“그래, 그러니까 사냥도 하고 먹을 것도 찾아 먹으면서 놀고 있어. 알았지?”

[변신 풀어주오.]

“그건 안 돼.”

짝니는 시혁의 상징처럼 되어 있었다. 짝니가 발견된다면, 중국인들도 시혁의 존재를 알아차릴 것이다.

꿍얼대는 짝니를 뒤로 하고 우물로 향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우물로 뛰어들었다.

역한 냄새가 났다.

물이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었다. 정체모를 부유물까지 둥둥 떠다녀서, 시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심각하네.”

하수도로 들어가면 저 썩은 물을 묻혀야 할 텐데,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났다.

어쩔 수 없지.

이것 말고는 신전의 수정구를 오염시킬 방법이 없으니까.

우물 한쪽 벽에 난 구멍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공간이 넓어지며, 칠흑처럼 어두운 공간이 나타났다.

빛 마법을 사용했다.

작은 광원이 생성되고, 하수도 안을 환하게 비추었다.

시혁의 얼굴이 찌그러졌다.

너무 더러웠다. 차라리 빛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전진하는 게 더 나을 뻔 했다.

“젠장.”

투덜대면서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이 거의 허벅지까지 차 있었다. 이걸 헤치고 움직이려면 서둘러야 했다. 마법진 설치까지 감안하면, 자칫 일을 끝마치기 전에 지구로 귀환하게 생겼다.

그나마 하수도 정리가 잘 되어 있어 다행이었다. 나침반 마법을 써가며 성의 중심, 신전 아래를 향해 나아갔다. 충분한 시간을 확보한 채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제 무슨 마법을 건다?

은밀하고도 치명적인 마법이 필요했다. 단순히 정보를 변형시켜 골탕을 먹이는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컴퓨터 바이러스 같은 것을 만들면 좋겠다. 아르거스의 정보를 수신하는 곳에 있는 자료를 싹 날려 버리게.

불가능한 일이다.

시혁은 프로그래밍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전혀 없으니까. 한의학이나 아르거스의 마법으로 컴퓨터 바이러스를 만드는 것도 불가능하고.

아니지.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현자 병종으로 진리 진영에서 복무할 때를 생각해 보라.

컴퓨터를 똑같이 복제한 마법 등불이 있지 않았나. 지식의 전당 관리자 같은 경우는 지구의 SF 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정교한 인공지능이었고.

새로운 걸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기존에 있는 걸 변형시키는 것 정도는, 시혁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즉각 지식 열람에 들어갔다.

과연 몇 가지가 존재했다.

주로 진리 진영 상대로 개발된 이적이나 마법들이었다. 마법 생명체의 기능을 교란하거나, 지식의 전당이나 마법의 전당 등 주요 건물에 축적된 정보를 날려버리곤 했다.

특히 후자가 마음에 들었다.

시혁이 딱 바라던 마법이니까.

문명의 종말.

이름도 마음에 들었다.

작업을 시작했다.

우선 봉인을 풀고 무한의 주머니에서 보물들을 꺼냈다. 치료사 상태로는 작업을 하기가 힘들기 때문이었다.

쇠의 마나를 이용하여 돌을 도려냈다. 워낙 두터워서 힘들었지만, 알고 있는 마법을 총동원한 끝에 조금씩 해낼 수가 있었다.

석판의 두께는 족히 10미터.

정확히 절반을 들어냈다. 마법진을 그릴 공간을 확보한 뒤, 마지막으로 고민에 잠겼다.

생각해 보니 지구에서 수신하는 건 모르스 부호다. 딱 두 가지의 마나를 길고 짧은 신호에 대응하여 재구성하는 것이다.

시혁은 모르스 부호가 있다는 것만 안다. 어떻게 해석하는지, 어떻게 쓰는지는 잘 몰랐다. 당연히 문명의 종말을 수정구에 삽입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꼭 모르스 부호로 바이러스를 보내란 법은 없지.’

발상을 달리했다.

마나, 그 자체에 주목했다.

수정구에 담긴 마나는 두 종류다. 그러나 그 둘의 크기가 균일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작았다가 조금씩 커졌다. 일단 지구에 풀리면 앞과 뒤를 구분할 수 없으니, 크기로 구분하기 위함이었다.

문명의 종말을 잘게 부순 뒤, 그 마나의 조각에 삽입한다면 어떨까.

그리하여 수신기에서 마나를 수집할 때, 문명의 종말 또한 재조립하게 만든다면?

“좋았어.”

어려운 일이다.

전장에서 지구로 가면서 변이되는 것도 염두에 둬야 했다.

고민 끝에 수정구 하나마다 문명의 종말 1백 개씩을 뿌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처음에는 모든 전산 정보를 삭제하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자칫하면 세계적인 대재앙이 초래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한 가지 제한을 두었다.

오직 아르거스라는 단어에 반응하도록 한 것이다.

다른 세계에 영향을 줄까 봐 0과 1로 이루어져 있어야 발동하도록 했다. 컴퓨터가 아닌 종이나 양피지에는 써져 있어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그 동안 경험했던 바, 다른 세계의 문명에는 컴퓨터가 없다고 하니 이것으로 충분하겠지.

시혁은 이 새로운 마법에 굳이 이름을 짓지 않았다.

당연하다.

이름을 지으면 세계 지식에 등재될 테고, 그러면 중국인 영웅들이 지식 열람으로 알아낼 수도 있으니까.

시혁의 손이 바빠졌다.

은신 마법진을 먼저 촘촘히 그렸다. 반신이 대놓고 바닥을 향해 이적을 쓰지 않는 한에는 발각되지 않게끔 했다. 그 다음 문명의 종말 마법진을 만들었다.

들어냈던 바닥의 돌에도 은신 마법진을 새겼다. 공간이 좀 남아서, 도려낸 흔적을 없애도록 결합 마법진을 부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낑낑대며 바닥을 원상복구 했다. 마법진에 힘을 불어넣자, 바닥이 한 번 희미한 빛을 뿜었다.

“다 된 건가?”

시혁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무척 힘들었다.

과연 잘 작동할 지도 의문스러웠고.

스스로를 한 번 믿어봐야지. 어차피 지구로 돌아가면 협회를 통하든 어쩌든 확인할 길이 있을 테니까.

이제 귀환까지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서너 시간.

겨울 여왕의 반지는 아직 힘이 덜 충전되었다. 밖에 나갔다가 들키면 곤란하니, 오늘은 이대로 시간을 보내야 할 모양이었다.

하수도에서 이러는 게 짜증스러웠지만, 적당히 벽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런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첨벙첨벙 하는 물 소리.

그리고 누군가가 대화하는 소리.

“아, 진짜 더럽네.”

“누가 아니래.”

“간부들은 거저먹기 의뢰만 던져주더니 우린 이게 뭐야?”

“억울하면 너도 2차 전직까지 해서 고급 병종 달지 그랬어.”

“제길, 영웅만 되면 만사형통일 줄 알았지.”

중국인들이다.

저쪽 모서리에서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잠시 후면 시혁을 시야에 넣을 것이다.

시혁은 급히 지팡이를 휘저었다.

투명 마법과 은신 마법부터 썼다. 부유 마법을 써서, 물 위로 몸을 띄웠다.

그 바람에 물 튀는 소리가 났나 보다.

“무슨 소리 못 들었어?”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시혁은 서서히 이동했다.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통찰 마법으로 계속 주시했다.

언뜻,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물속으로 헤엄쳐 왔다.

암살자나 모험가, 그 비슷한 병종 출신인가 보다.

그림자는 방금 전만 해도 시혁이 서 있던 곳에서 정지했다. 물 밖으로 머리만 내놓더니, 이내 벌떡 일어섰다.

“이봐, 아무 것도 없어!”

“뭐 돌가루라도 떨어진 모양이지. 하긴 쥐새끼나 거지새끼들 아니고는 이런 더러운데 들어올 리가 없어.”

“모르는 소리 마. 이런 게 다 평가 항목에 들어간다고. 열과 성을 다해야 계급이 올라가는 거야.”

“흥, 그래봐야 방문주기 13일인데 뭘. 몇 년은 지나야 반신이 될 텐데, 그때까지 자리가 남아 있겠어?”

“두고 봐. 난 반드시 반신이 되고 말 테니까. 간부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겠어.”

둘이 조금씩 멀어졌다.

시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방치해둘 줄 알았으나 정기적으로 순찰을 도는 모양이다.

하긴 한 성역에 영웅들의 수가 너무 과중하니까. 그들에게 의뢰를 주려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몽땅 시켜야겠지.

조심스럽게 자리를 벗어났다.

처음 들어왔던 우물로 돌아갔다. 답답하기도 하고, 퇴로가 확보되는 곳에 있는 게 낫지 싶어서였다.

중간에 또 마주칠 뻔 했다.

우물에 뚫린 구멍 앞에서, 둘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이건 아직도 안 막았네.”

“내버려 둬. 빈민촌 의뢰할 때 좋아. 불 지르면 여기로 도망치는 걸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니까?”

“그래? 빈민촌 의뢰는 해본 적이 없어서 몰랐어.”

“쥐구멍을 남겨놔야 쥐새끼들 데려다가 둥지 만들어 주기가 편하지. 옛날에는 숲으로 도망쳤다고 하잖아. 거기서 한 마리씩 잡아오기도 귀찮아. 그래서 그냥 놔두는 거야.”

“흐흥, 장링지 님이 머리를 쓰셨군.”

두 영웅이 자리를 떴다.

시혁은 구멍을 보며 아래턱을 쓰다듬었다.

하수도. 구멍. 빈민촌.

이것들을 잘 엮으면 장링지에게 치명타를 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지금 일을 일으키면 빈민들이 몰살을 당할 테니까.

최소한 빈민들이 둥지를 틀 장소는 마련해두고 수를 써야 하지 않겠나.

나중에, 아주 나중에 써먹는 게 좋겠다.

시혁은 구멍 바로 옆에 몸을 기댔다.

어느새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장현 및 영웅들과 드잡이질한 시간까지 하면 거의 나흘.

지구로 돌아갈 시간이다.

시혁의 몸이 흐려지고, 이내 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 잠입 -2- > 끝

ⓒ 산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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