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입 -1- >
반신을 탈락시키는 방법은 없다.
최악의 경우라도 성지는 남기 때문이다. 반신은 성지를 발판 삼아, 다시 성역을 확장시켜 나가는 게 가능하다.
그래서 낫슈바켈도 파멸 왕자를 죽이지 못했다. 그저 성역을 망가뜨리고, 지금도 가끔 날아가 용암 숨결을 뿜어 괴롭히는 게 전부였다.
시혁은 우선순위를 정했다.
성역 자체를 건드릴 수는 없다. 가장 급선무는, 지구로 정보를 보내는 방법을 차단하는 거였다.
그러려면 무슨 방법을 쓰는지 알아내야 한다.
시혁은 장현에게 들은 반신들의 이름을 떠올렸다.
순백 성주 장링지와 꿈의 주인 왕호우위.
그 둘이 조직에 소속되어 있다고 했다.
생명 지킴이 판유유와 비룡 군주 리칭창, 악마 대군 자오진은 조직과 관계가 없다고.
지금 시간이면 장링지가 막 지구로 귀환했을 것이다. 며칠이 지나야 왕호우위가 아르거스에 방문할 테고.
시간이 좀 있었다.
우선 장링지의 성역으로 가보는 게 좋겠다.
다른 반신들의 성역에는 없던 게 보인다면, 그게 지구로의 송신 기기일 가능성이 높으니까.
다만 변장을 하는 게 필요했다.
평상시 모습 그대로 들어갔다간 아주 횡액을 치를 테니까.
손문철의 보물 창고에서 얻은 겨울 여왕의 반지를 썼다.
반신의 이적이나 영웅의 궁극기가 아니면 정체를 간파하기가 어려웠다. 과연 환상 진영에서도 유명한 반신인 겨울 여왕이 만든 물건다웠다.
청색의 차가운 기운이 시혁의 몸을 감쌌다.
시혁은 스스로의 상태를 제한했다.
오직 치료사로.
모든 마법 물품을 무한의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낫슈바켈이 준 반지와 겨울 여왕의 반지만 찼다. 그러자 누가 봐도 영락없는 입문 계급 치료사처럼 변했다.
얼굴과 체형도 조절했다. 키는 10 센티미터를 훌쩍 키워서 195 센티미터로 올렸고, 얼굴은 전형적인 백인 남성으로 변화시켰다.
스스로 이름도 지었다.
마크 스미스라고.
누가 물어보면 미국인이라고 대답할 생각이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크르릉.”
청색 기운은 짝니까지 변화시켰다.
위풍당당하던 검치호에서, 한 마리 말이 되었다. 가지고 있던 대부분의 능력도 봉인되었다. 그저 물리 저항과 마법 저항만 가지게 되었다.
짝니가 어색하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이상해졌소.]
“괜찮아. 금방 풀려. 자, 슬슬 가보자.”
짝니가 달리기 시작했다.
많이 느렸다.
육체적인 능력은 물론, 맹수 특유의 감각까지 제한한 탓이었다. 승차감은 더 좋아졌으나, 숲을 질주하다가 나무를 들이받을 뻔해서 겨우 멈췄다.
순백 성주의 성역은 이곳에서 멀지 않았다.
달리고 또 달렸다.
세계의 끝을 통과했다.
짝니의 힘이 줄어든 까닭에 공허의 바다를 헤엄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침식이 시작되기 직전 순백 성주의 성역에 도착했다.
[힘들고 배고프오.]
또 불평을 한다.
시혁은 근처에 나 있는 풀을 가리켰다.
“배고프면 저거라도 먹어.”
[맛없소.]
“너 이제 호랑이 아냐. 말은 풀을 먹어야지.”
[싫소. 고기 주오.]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다시 달렸다.
권세 진영 반신의 성역답게, 너른 벌판이 펼쳐져 있었다. 벌판마다 밀이 자라서, 바람이 불 때마다 황금빛 파도가 물결 쳤다.
신전은 그 중앙에 있었다.
거대한 성.
들어오면서 보니, 대충 3차 확장을 마친 듯했다. 기병을 거느린 기사들이 순찰을 돌았다. 한쪽에 세워진 마법의 탑에선 가끔 섬광이 터졌다.
영웅들이 꽤 많다.
성에 들어가자마자 영웅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중국인들.
대부분 북방계였다.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또렷했다.
“이봐!”
그들 중 하나가 시혁을 불렀다.
시혁은 짝니를 정지시켰다.
“왜?”
“어디서 온 누구야? 보아하니 치료사 같은데, 지금 여기엔 반신이 없어서 임관도 못 해.”
다소 경계하는 투.
시혁은 어깨를 으쓱였다.
“내 이름은 마크 스미스야. 보다시피 치료사 영웅인데, 아직 입문 계급이라 할 일을 찾아서 떠도는 신세지. 어차피 등용해 줄 반신도 없을 텐데 반신이 있으나 없으나 차이는 없지 않아? 며칠 머무르면서 의뢰 있으면 찾아서 하고, 별 거 없으면 떠날 테니 신경 쓰지 마.”
“마크 스미스? 이름이 어째 익숙한데…… 혹시 지구 출신이냐?”
“맞아, 지구 출신이지. 잠깐, 혹시 너도?”
중국인 영웅의 얼굴에 얼핏 반가움이 스쳤다.
“맞아. 난 중국인이야. 탕샤오레이라고 하지. 이름을 들으니 미국이나 캐나다 사람인가 본데?”
“정확해. 난 미국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어. 영웅이 되고 아르거스에 온 게 두 번째라 모르는 게 많은데, 좀 가르쳐 주지 않겠어?”
“안 돼. 아무리 지구인이어도, 외국인한테 정보를 줄 순 없어.”
“그래?”
“당연하지. 다른 행성 출신이야 뭘 가르쳐줘도 상관없지만 넌 미국인이라며. 유력한 경쟁자한테 이득을 줄 순 없어. 임관도 여기서는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의뢰도 좋은 건 받기 힘들 걸? 그래도 좋으면 더 돌아다녀 보던가.”
“야박하네. 미국인들은 대체 어디 있는 거지?”
시혁은 짐짓 툴툴거리며 자리를 벗어났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다를 게 없다.
고민하다가 신전으로 들어갔다.
뭔가 좀 달랐다.
대부분의 반신은 신전에 아무 것도 없다. 신상 하나가 덩그러니 있고, 장식품을 좀 가져다 놓은 게 전부였다.
그런데 순백 성주의 신전에는 영웅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파랗게 빛나는 수정구가 들렸고, 그걸 신전 중앙에 앉은 이들이 한데 모아 조작하는 중이었다.
시혁은 감시하는 이들의 눈을 피해 슬쩍 들어갔다. 원주민 경비병 몇이 전부여서 어렵지 않았다.
“당신 뭐야! 누가 들여보냈어?”
영웅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시혁은 당황한 것처럼 눈을 끔뻑였다.
“어, 의뢰 있나 찾아왔는데……”
“썩 나가지 못해!”
영웅들이 고함을 쳤다.
시혁은 미안하다고 손 사례를 치며 급히 달아났다.
그저 가벼운 사건으로 생각했나 보다. 시혁을 쫓아오는 영웅은 보이지 않았다.
잘 된 일이다.
찰나의 순간, 시혁은 수정구의 정체를 파악했다.
‘저런 수가 있었구나……’
원리는 간단했다.
모르스 부호다.
두 개의 속성 마나를 활용한다. 하나는 긴 신호에, 다른 하나는 짧은 신호에 대응시킨다. 그걸 암호화한 후, 전장에서 수정구를 소환한다.
아니, 그러지 않고 영웅에게 귀속시켜도 되겠다. 소모품 취급을 받을 테니 영웅들이 전장에서 쓸 수 있으니까.
언제?
전장이 끝날 때에.
비록 변형이 좀 되겠지만 특수한 수신기를 쓴다면 파편 정도는 건질 수가 있다. 수정구들이 모두 동일한 정보를 담고 있다면 정확도가 높아지고.
머리를 잘 썼다.
하긴 전 세계에서 이능력자가 제일 많은 곳이 중국이다. 이 정도 능력은 있을 터였다.
이걸 어떻게 훼방을 놓지?
수정구를 부순다고 끝이 아니다. 정보를 다시 수집해서 수정구를 복구하면 그만이니까.
고민하면서, 발길이 닿는 대로 걸어 다녔다.
“영웅님, 영웅님.”
웬 꼬맹이가 시혁을 불렀다.
거지같다.
옷은 완전히 누더기에, 몸에서는 썩은 냄새가 났다. 그나마 얼굴은 밝게 웃고 있어 봐줄 만 했다.
“무슨 일이니?”
“우리 엄마가 아파요.”
“그래? 치료해줄까?”
“진짜요? 우린 가난해서 영웅님한테 드릴 게 없어요.”
“괜찮아. 집이 어딘데?”
꼬맹이가 화색을 지으며 안내했다.
성 밖의 빈민촌이었다.
거리는 더럽고, 건물은 판자로 지어 너덜거렸다. 그나마 안온한 기후를 보장하는 권세 진영의 성역이라 그렇지, 겨울이라도 왔으면 다 얼어 죽게 생겼다.
꼬맹이의 어머니는 폐렴을 앓고 있었다. 고열이 40도를 넘나들고 가래가 들끓어서, 며칠 내로 죽을 듯했다.
간단히 치료했다.
물의 힘으로 장부를 보호하며 불의 힘으로 병소를 정화했다. 생명의 힘으로 재생시키자,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꼬맹이의 어머니가 눈을 떴다.
꼬맹이가 경이롭다는 눈으로 시혁의 치료를 쳐다보았다.
어머니가 눈을 끔벅이더니, 시혁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아니, 영웅님. 이 누추한 곳에는 어쩐 일이세요?”
“어쩐 일이긴요. 요 녀석이 부탁을 하기에 들어주려고 왔지요.”
“저흰 가난해서 뭐 드릴 게 없는데……”
“그런 건 신경 쓰지 마세요. 뭐 안 주셔도 됩니다.”
이상한 일이다.
치료사나 사제 계통 영웅들은 이런 간단한 치료 행위로도 무형의 이득을 얻는다. 차곡차곡 쌓여서 계급이 올라가는 것이다. 이 정도 크기 빈민촌이면 중국인 영웅들이 와서 치료할 법도 한데, 왜 가만히 놔둔 건지 모르겠다.
슬쩍 그에 대해 묻자, 꼬맹이가 울분을 터뜨렸다.
“그놈들은 진짜 나쁜 놈들이에요! 밭도 뺏고 말도 뺏고, 우리한테 독을 풀……”
“마윌!”
어머니가 소리를 쳐서 제지했다.
꼬맹이가 움찔했다.
그러더니 시혁의 눈치를 살살 본다.
“영웅님. 제가 이런 말 했다는 거 그 누런 사람들한테는 말씀하시면 안 돼요. 아셨죠?”
“그래, 걱정마라. 그놈들이 좀 수상쩍던데, 이제 보니 아주 나쁜 놈들이었나 보구나.”
“맞아요, 진짜 나쁜 놈들……”
“마윌!”
꼬맹이가 목을 움츠렸다.
아예 입을 조개처럼 다물어서, 더 이상은 정보를 캐내기가 힘들어 보였다.
시혁은 꼬맹이를 보고 말했다.
“혹시 주변에 또 아픈 사람 있니? 내가 치료해줄게.”
“진짜요? 완전 많은데 괜찮으세요?”
“괜찮아. 안내나 해줘.”
빈민촌을 돌며 치료를 했다.
그 결과 한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중국인 영웅들은 아르거스 인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의뢰를 빌미삼아 아르거스 인들을 괴롭혔다.
전염병을 퍼뜨리고, 그걸 다시 치료하고, 괜히 집을 부셨다가 집을 지으라며 자재를 가져다주는 짓을 반복했다.
반항은 불가능했다.
반신은 성역 내 모든 생명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더구나 수법이 참 교묘했다. 빈민촌에 국한지어 의뢰를 내고 있었다. 다른 주민들은 혹시라도 자기 가족이 빈민촌으로 끌려갈까 싶어 찍 소리도 못 냈다.
이들이 불쌍했으나 도와줄 길은 없었다.
빈민촌 주민들을 도우면서, 수정구를 무력화할 방법을 구상했다.
일회성이면 쉬운데, 지속 가능해야 하니……
문득, 빈민촌 주민들이 중국인들에게 생체 실험을 당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시혁도 똑같이 하면 어떨까?
수정구에 독을 풀어 놓는 거다. 정보가 망가지거나, 정보를 재조합하면 치명적인 마법이 시전 될 수 있게.
이것도 기각.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시혁이 계속 상주하면서 수정구에 독을 뿌릴 수는 없지 않겠나.
잠깐만.
전장으로 가는 것은 딱 신전 안의 영웅들과 성지 안의 반신으로 국한되지?
신전에 마법진을 새기면 어떨까?
마법진이 소멸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수정구를 부수든 독을 숨기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는 문제는 어떻게 해야 마법진을 몰래 새길 것이며, 그게 중국인들에게 들키지 않느냐였다.
“영웅님! 이거 드세요!”
꼬맹이가 어디서 야생 딸기를 구해다가 내밀었다.
먹어보니 시큼털털했다.
시혁이 인상을 찌푸리자, 꼬맹이가 깔깔대며 웃었다.
“그렇게 드시면 어떻게 해요! 으깬 다음 물에 타서 먹는 거예요! 동네 아저씨들이 그랬어요. 이게 남자한테 그렇게 좋다고요!”
좋으면 뭐하나. 쓸 데가 없는데.
꼬맹이 말대로 물에 개어 먹자 먹을 만 했다. 약간 단맛도 느껴졌다.
대충 빈민촌 환자들을 다 본 모양이다.
꼬맹이와 노닥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중, 갑자기 빈민촌 한쪽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놈들이다!”
“숨어!”
중국인 영웅들이 빈민촌으로 들어온 듯했다.
꼬맹이가 다급한 얼굴을 했다.
“영웅님, 피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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