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 세계의 한의사-137화 (137/250)

< 공허 침식 -2- >

G급 이능력자와 S급 이능력자의 차이는 크다.

아무리 S급이라 해도 총 앞에선 무력하다. 국산 제식소총만 되어도 갈기갈기 찢어놓을 수 있었다. 에테르 변이에 대한 면역력이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이능력자들이 대우를 받진 못했을 것이다.

G급이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재해 수준의 존재가 된다. 만화에서나 볼 법한 강자가 되어 국가 권력 앞에서도 초연해진다.

욕심을 낼 법도 했다.

“용케 설득 되셨네요. 아르거스의 일을 납득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그들은 제 많은 것을 알고 있었거든요. 믿을 수밖에 없었지요.”

굳이 설명을 듣진 않았다.

“정보를 어떻게 지구로 보내는지는 모르십니까?”

“예. 철저하게 비밀을 지켜서요. 미국도 없는 기술이라고, 유출되면 구족을 멸하겠답니다.”

“구족은 무슨…… 아르거스 내에서는 서로 어떻게 연락을 합니까?”

“반신들의 사자를 이용합니다. 8대 신역마다 반신들의 사자가 가 있는 건 아시죠? 거길 거점으로 삼고, 획득한 정보를 반신들에게 보내는 식입니다. 반신들이 그걸 취합해서 지구로 보내는 것 같고요.”

중국의 G급 이능력자는 다섯.

그 중 두 명이 조직에 소속되어 있다고 했다. 그러니 이런 수를 쓸 수 있겠지.

하긴 대한민국도 가능한 방법이다. 다만 G급 이능력자가 1명뿐이니, 시간 공백이 꽤 발생하긴 할 것이다.

시혁은 입맛을 다셨다.

“그들에게 지원을 받는다고 반신이 되겠습니까? 관건은 방문주기이고, 본인이 전장에서 얼마나 활약을 하느냐에 달려 있어요.”

“제 방문주기는 닷새입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좋은 의뢰를 몰아서 받으니까요. 전장에서 쓸 진귀한 보물도 지원을 받고요. 또 반신이 된다고 끝이 아닙니다. 이후에도 지원을 받기로 했습니다.”

“반신도 지원할 거리가 있나요?”

“당연하지요. 고급 병종 출신 상위 계급 영웅 다섯 명을 거느리고 전장에 나간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성역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수백 명의 영웅들이 도와주면, 성역이 확장되는 건 시간문제에요.”

“아, 그렇겠습니다.”

그렇게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 받았으니 혹할 만도 했다.

시혁은 장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장현이 멀거니 하늘만 보았다. 그래도 부끄러운 줄은 아는 모양이다.

“그래서 앞으로 어쩌실 겁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앞으로도 조직의 하수인 노릇을 할 거냐, 이 말입니다. 아니 조직이 과연 장현 씨를 계속 지원하겠습니까? 천왕봉 수정은 결국 못 가져갔는데?”

장현이 갑자기 딴청을 피웠다.

자기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태도.

시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천왕봉 수정만이 아니었습니까?”

대답이 없다.

칠색 저항체를 거뒀다.

손목에서 막혀 있던 공허의 침식이 재개되었다. 팔 전체가 말라붙으며, 까만 뼈만 남았다.

장혁이 비명을 질렀다.

“아악! 잠깐만! 잠깐만요! 말 하겠습니다! 말하겠다고요!”

칠색 저항체를 어깨 부위에 집결시켰다.

장현이 몸을 떨며 자기 팔을 쳐다보았다.

지독히 아플 것이다.

공허는 침식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영혼을 자극하니까. 심대한 공포심을 느끼고 있겠지.

시혁은 말없이 장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장현이 입을 우물거리다 진실을 털어놓았다.

“그 동안 연구소에서 파악한 아르거스의 지식을 넘겼습니다.”

“뭐요?”

“조직에서 그걸 원했습니다. 반신들이 정보를 지구로 보내고는 있어도 턱없이 부족했으니까요.”

시혁의 얼굴이 푸들거렸다.

지금까지 기껏 정리해서 손문철에게 보낸 게 전부 외부로 흘러들었다는 말 아닌가.

설마 시혁의 신상까지 털린 걸까?

시혁이 아르거스의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유출됐다면 큰일이다. 손문철은 입을 다물겠다고 했지만, 그야 모르는 일이니까.

슬쩍 떠보았다.

“아르거스의 지식이라면 뭘 말하는 겁니까? 속일 생각은 하지 마세요. 저도 거기 일조했으니까.”

시혁은 단순히 연구원의 일원인 것처럼 얘기했다.

본인 스스로가 정보 계열 발현자였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니까.

장현은 순순히 대답했다.

“최근에 대한이능협회가 확보한 정보 계열 발현자들의 능력은 엄청납니다. 아르거스의 전모를 밝힐 정도지요. 수는 약 1백 명 정도인 것 같은데, 그들이 알아낸 지식을 모두 제공했습니다.”

다행이다.

시혁이 그 모든 지식의 출처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

하긴 손문철이 대책 없이 정보를 기록해 놓진 않았을 것이다.

애써 표정 관리를 했다.

“좋습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제게 지구에서 당한 게 그리도 고까웠습니까? 이렇게 집요하게 쫓아다니게? 왜 그런 건지 이유나 들어봅시다.”

장현 혼자라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집단적으로 움직이려면 그 이유로는 부족하다. 조직이 자신의 가치를 얼마로 보고 있나 알아내려고 이런 질문을 한 것이다.

장현은 어렵잖게 대답했다.

“원장님의 방문주기 때문입니다.”

“방문주기라니, 그게 무슨…… 아!”

바로 이해가 갔다.

시혁의 방문주기는 하루.

지구상의 그 누구보다도 짧았다. 반신이 될 확률이 누구보다도 높다는 뜻이다.

조직이 왜 기를 쓰고 쫓아다녔는지 알 만 했다.

설득할 수 있으면 최고 아니겠나. 확실한 반신 하나를 확보하는 셈이니까.

잠깐.

설득이라고?

도저히 설득하려고 드는 모습이 아니었는데?

수차례에 걸친 추궁 끝에, 장현이 사실을 실토했다.

“조직은 대한민국에 더 이상 G급 이능력자가 늘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절 어쩌려고 한 겁니까?”

장현은 입을 다물었다.

공허의 침식을 다시 시작하려고 하자, 그때야 기겁하며 말했다.

“공허의 바다에 빠뜨리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시혁의 눈이 차가워졌다.

아까 공허 속으로 들어간 건 사실 궁여지책이었다. 그런데 장현은 아예 시혁을 괴수로 변이시키려고 했다고 하는 것 아닌가.

시혁의 눈이 번들거렸다.

“조직이 왜 아직까지 장현 씨를 지원하나 했더니 그 때문이었나 봅니다.”

장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만은 시혁도 대답을 요구할 생각이 없었고.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시혁의 방문주기가 알려졌다는 점이다.

조직이 과연 선의의 경쟁을 하자고 나올까?

그럴 리가 없다. 최선의 경우라도 시혁을 이용하려고 할 테고, 자기들 이익에 저해된다 생각하면 현실에서라도 암살하려고 할 것이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떻게 할까?

방법은 둘 뿐이다.

타협하거나, 맞서 싸우거나.

시혁의 눈에 형형한 광채가 깃들었다.

장현이 헛기침을 했다.

“약속은 지키시겠지요?”

“아직 부족합니다. 조직에 속한 이능력자들에 대해 아는 걸 모두 알려주시죠. 그걸 듣고 결정하겠습니다.”

극비 정보들.

어떤 이능력자가 아르거스에서는 어떤 영웅이고, 어떤 특기와 궁극기를 가졌는지 등등.

특히 반신들에 대해 알아낸 게 컸다.

최소한의 반격 가능성을 만든 셈이니까.

장현이 간절한 눈으로 시혁을 보았다.

“제가 알고 있는 건 다 알려드렸습니다. 이제 약속을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고민을 했다.

머지않아,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현은 실로 심각한 범죄자다.

손문철을 암습한 것은 물론, 대한민국의 재산을 외국으로 빼돌렸다.

그뿐이냐?

시혁을 죽이려고 계획했고, 실제로 행동에 옮겼다.

아무리 시혁이 생명을 우선시해야 할 의료인이라 해도, 이런 사람에게까지 자비를 베풀어야 하나?

한 가지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면……

“옷 벗으세요.”

“예?”

“옷 벗어보시라고요. 팬티까지 전부 다.”

장현이 항의하려다 침을 꿀꺽 삼켰다.

시혁의 눈이 위험하게 번뜩이고 있어서였다.

옷을 벗었다.

알몸을 드러내자, 시혁의 차가운 눈이 장현의 몸 전체를 훑었다.

역시나 문신이 있었다.

꼬리뼈 부위.

지구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 다만 훨씬 정교하고 강력했다. 고도로 암호화되어 있어, 잠깐 살펴 본 것으로는 무슨 역할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걸 해석하려면 장비가 갖춰진 곳에서 족히 한 달은 시간을 보내야겠다.

지금 당장 치료할 수는 없다는 뜻.

그것을 확인한 후, 다시 옷을 입게 했다.

어찌 해야 하나?

시혁은 장현을 노려보았다.

정황상 한 가지 가능성이 존재했다.

문신에 의해 세뇌되었을 가능성.

자세히 검사해보지 못해 확신을 할 수 없지만, 그 경우라면 장현도 피해자 아니겠나.

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다.

나직이 말했다.

“안 되겠습니다.”

“뭐라고요?”

“장현 씨를 살려두면 저에 대한 정보가 또 조직으로 갈 것 아닙니까? 제가 공허 침식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게 알려져서는 안 됩니다.”

이게 가장 컸다.

다분히 현실적인 이유.

말을 하면서도, 시혁은 씁쓸함을 느꼈다.

본인의 목숨이 걸린 문제였다.

완전히 무고한 사람이면 또 모르겠다. 정말 세뇌 당했는지 어쨌는지도 확실하지 않고, 설사 세뇌 되어서 저지른 일이라 해도 장현이 벌인 일은 너무나 심각했다.

천왕봉 수정을 빼돌리려고 한 것으로도 모자라, 시혁이 알아낸 지식을 조직으로 넘겨?

알량한 자비심으로 후환을 남기느니, 여기서 끝장을 봐야 한다.

장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절대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중국 조직에서 아예 탈퇴하겠습니다! 원장님의 개인 호위, 아니 노예가 되어 일하겠습니다. 제발 살려만 주세요!”

시혁은 말없이 손을 뻗었다.

오행 순환체와 칠색 저항체가 동시에 작용했다.

팔과 손이 빠르게 원래대로 돌아갔다.

장현의 얼굴이 환해졌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공허의 세력이 축소되었다.

겉은 완전히 정상으로 복구되었다.

칠색 저항체가 왕성히 움직였다. 체내에 잠복한 공허를, 혈관을 타고 한쪽으로 밀어냈다.

잠시 환희에 찼던 장현의 얼굴이 조금씩 찌그러졌다.

“원장님? 장난치시는 거지요?”

진득한 악의가 혈관을 타고 달음질쳤다.

경동맥을 통해 뇌로 들어갔다.

칠색 저항체가 뇌를 꽁꽁 싸맸다. 그 안에서, 공허가 장현의 뇌를 제멋대로 변형시켰다.

“커헉!”

장현이 거품을 물었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있었다.

인격도, 기억도, 이성도, 본능도 모두.

장현이 문득 눈을 떴다.

눈에서 핏빛의 광채가 폭발하듯 튀어나왔다.

이제 장현은 없다.

그저 괴물 한 마리가 있을 뿐.

퍼억.

시혁은 단검을 찔러 넣었다.

심장에 제대로 박혔다. 쇠의 마나가 전신의 혈관을 일시에 찢었다.

장현이 눈을 부릅떴다.

뇌만 침식되고, 몸은 멀쩡한 상태. 아무리 군주 계급 영웅이라 해도 심장이 찢어졌으니 버티는 것은 불가능했다.

피가 터졌다.

입에서도 분수처럼 피를 쏟아냈다.

한참 동안 몸을 푸들푸들 떨다가, 검은색 그림자가 되어 흩날렸다.

사망.

시혁은 단검을 거뒀다.

두 손에 묻은 피가 너무나 역겨웠다.

“우욱!”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진짜로 사람을 죽인 것은 처음이다.

그 동안은 아르거스에서 죽인 게 다였다. 어차피 고향 세계에는 영향이 없고, 다음 방문 때 멀쩡히 되살아나곤 했다.

이번에는 다르다.

지금 당장, 장현은 미치광이가 된 채 깨어날 것이다.

원인도 모르고 시간을 보내겠지. 그러다 닷새가 지나고 아르거스에 방문하면 끝장이 난다. 뇌에서 증식한 공허가 장현의 전신을 뒤덮을 테니까.

“우엑, 우에엑.”

시혁은 누런 위액을 몇 번이나 토해냈다.

한참을 그러자 겨우 진정이 되었다.

아니, 여전히 몸이 떨리고 있었다. 두 손을 들여다봤더니, 경련이 수도 없이 이는 게 보였다.

잘못한 걸까?

차라리 살려주고, 죗값을 갚으라고 할 걸 그랬을까?

아니면 문신에 대해 알아낸 다음 단죄를 해야 했을까?

이성적으로는 자신의 행동이 합리적이라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감성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혁은 수십 년 넘게 살인과 폭행은 죄악이라고 배우지 않았나. 한의대에 들어간 다음에는 더 심해서, 환자를 치료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고.

아르거스에서의 경험도 그 점을 부채질했다. 아예 환자 치료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실질적인 살인을 저질렀으니,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시혁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러면 안 된다.

독해져야 한다.

이젠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다.

시혁만 아니라 시혁의 친지들도 목숨이 걸려 있었다. 최악의 경우, 인질로 잡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나.

짝니가 다가왔다.

위로하려는 듯 까끌까끌한 혀로 얼굴을 핥았다.

혀에 난 돌기 탓에 무척 따끔했지만 기분은 확실히 나아졌다. 짝니의 두툼한 목을 껴안고 머리를 몇 차례 쓰다듬어 주었다.

[배고프오.]

시혁은 그만 웃고 말았다.

한결 같은 녀석 같으니라고.

짝니의 등 위에 올랐다. 안장에 걸터앉자, 명령을 내리지 않았어도 짝니가 달리기 시작했다.

숲 안을 달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시혁 혼자 조직에게 대항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다. 제대로 대항해보기도 전, 산산조각이 나 비참한 신세가 될 것이다.

결국은 아르거스다.

아르거스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

지구에서의 힘은 너무나 큰 차이가 나니까. 대한민국 이능력자들이 모두 시혁을 지원해도 모자랄 판에, 장현 사건으로 사분오열되어 있지 않나.

그러나 어떻게 해야 유효한 타격을 입힐 수 있을까?

영웅들을 무차별적으로 사냥해서 공허에 담가버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다. 채 며칠 지나지도 않아 시혁의 소행임이 밝혀질 테고, 어떤 식으로든 보복을 당하겠지.

궁리 끝에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반신들.

아르거스에서, 조직은 그들을 통해 결속해 있었다.

지구로 정보를 보내는 것도, 아르거스 내에서 연락을 하는 것도 반신들이 지대한 역할을 했다.

이 고리를 끊는다면 어떻게 될까?

조직이 와해되는 것은 시간문제가 된다.

시혁의 눈이 깊어졌다.

< 공허 침식 -2- > 끝

ⓒ 산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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