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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 세계의 한의사-131화 (131/250)

< 깨어나다 -1- >

그건 뭐였을까?

잠에서 깬 뒤, 마지막으로 본 광경을 상기했다.

검은 파도가 소환자들의 영혼을 뒤쫓던 광경.

거리가 있어 영혼을 직접적으로 침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대신 검은 천체에 도달했을 확률이 높았다. 시혁이 만든 등극 이적은 꽤 오래 지속되니까.

그렇다면 한 가지 결론이 나온다.

검은 천체를 통해, 검은 파도가 소환자들의 고향 세계로 이동할 거라는 점.

검은 파도가 무엇이겠나.

바로 구덩이 아래 숨어 있던 심연의 마왕이다.

어쩌면 지구에 마왕이 나타날 수도 있다. 그 경우 지구 역사상 최악의 사태가 벌어진다.

시혁이 만든 등극 이적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거냐고?

엄밀히 말하자면 아니다.

등극 이적은 어디까지나 영혼들을 검은 천체로 배달하는 역할만 한다. 자기 육체로 돌아가려는 성질이 있어서 그 머나먼 우주를 건너는 거였다.

그런데 검은 파도가 우주를 넘어간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건 검은 천체가 그 역할을 했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단순히 소환자들의 이동만 아니라, 아르거스에 불필요한 마나도 방출하는 것이다.

창문을 통해 쓰레기를 마구 투기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이 이해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상귀네우스 웨사니아.

그게 왜 지구에 나타났겠나. 전투가 끝나고 전장에 남은 혼탁한 마나를 지구에 뿌려댔으니 그랬겠지.

다만 심연의 마왕이 온전한 상태로 나타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차원을 넘으면서 약화되고, 또 조각조각 나뉘어 지구만 아닌 다른 세계에도 출현하지 싶었다.

지금 추측이 잘못된 것이면 좋을 텐데……

대비를 해야겠다.

조기에 발견하여 처리를 한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테니까.

그 전에 처리할 일이 하나 있다.

시혁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적당히 씻고, 평소보다 빠르게 한의원에 출근했다.

이제 겨우 아침 7시.

야간 간호사들과 주간 간호사들이 인계를 하다 말고 시혁을 쳐다보았다.

“원장님! 오늘은 빨리 오셨네요?”

“별일 없었죠?”

“네. 조용해요.”

시혁은 혼자 회진을 돌았다.

인계 중이던 민수진이 따라오려고 했지만 극구 거부했다. 오늘은 확인해 봐야 할 게 있으니까.

손문철의 병실을 마지막으로 들어갔다.

미동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이상하다.

분명히 영혼이 검은 천체를 넘어가는 것을 목격했는데.

습관처럼 맥을 짚었다.

깊은 수면 상태.

혹시나 해서 현자의 오색 마나를 주입해 보았다.

효과가 있었다.

손문철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으으음……”

딱 보름만이다.

시혁은 활짝 웃었다.

그 동안의 설움과 걱정이, 봄날 햇볕에 닿은 눈처럼 모두 녹아 사라졌다.

손문철이 시혁을 보더니 눈을 깜빡였다.

“원장님? 여기는 어딥니까?”

아, 이런.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

손문철도 아르거스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지금 손문철은, 보름 전 외뿔 지저뱀과 싸울 때에서 기억이 멈춰 있을 것이다.

“외뿔 지저뱀과 싸웠던 것은 기억나시지요?”

“예. 병태 씨랑 진희 씨가 위험해져서 몸으로 막았던 것까진 생각이 납니다.”

“그 때문에 치명상을 입으셨습니다. 그게 벌써 보름 전이에요. 보름 동안 의식이 없었어요.”

“예? 그게 정말입니까?”

시혁은 모든 것을 설명했다.

울산에서 섭외한 이능력자와 영혼 추방의 흔적에 대한 내용이 나오자, 손문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럼 누군가 저를 암습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건 제 추측입니다만, 천왕봉 수정도 동원된 것 같고요.”

“맙소사…… 설마 장현 이 사람이?”

손문철은 아르거스에서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여기에 그 동안 있었던 일까지 더해지자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손문철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협회장 하고 싶어 하는 건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본때를 보여줘야겠습니다.”

그러면서 주먹을 꾹 쥐자, 은색의 파동이 물결처럼 흘렀다.

손을 들어 진정시켰다.

“너무 앞서 가진 마세요.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거지 확실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증거를 찾은 다음 화를 내셔도 늦지 않습니다. 장현 씨가 영혼 추방을 사주하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치료를 방해한 건 괘씸하지만, 직접 암습한 것과 치료를 방해하기만 한 것은 차이가 있지요.”

“그야 그렇습니다만……”

손문철은 금방 냉정을 되찾았다.

가장 시급한 일은 천왕봉 수정을 확보하는 것과 영혼 추방을 실행한 범인을 찾는 것이었다.

손문철은 바로 자신의 건재함을 밝히겠다고 했다.

시혁이 당분간 누워 있으면서 암중으로 알아보는 게 어떠냐고 하자, 손문철은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렇게 돌아갈 필요 없습니다. 범인이 숨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결국은 뒷덜미가 잡힙니다. 솔직히 말해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한 집단은 재벌가도 여당도 아닌 우리 대한이능협회에요. 또, 제가 좀 허술해 보여도 나름대로 절 따르는 사람이 많은 편입니다. 장현 씨가 비대위원장을 맡았든 이사회를 장악했든, 이능력자 사회에서 등급과 업적이 갖는 의미를 뛰어넘을 수는 없습니다.”

하긴 협회장에 취임한 뒤 손문철은 많은 것을 했다.

무능력한 정부를 대신해 지금의 체계를 만든 사람 아닌가. 손문철이 없었다면 괴수로 인한 피해가 지금보다 몇 배는 늘었을 거라는 연구도 있었다.

시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손문철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원장님. 협회에 들어오실 생각 없습니까?”

“협회요? 지금도 가입되어 있는 걸요?”

“그런 말이 아니라, 협회 간부를 맡을 생각이 없으시냐는 말입니다. 원장님을 협회 학술 이사로 초빙하고 싶습니다.”

갑자기 학술 이사는 왜?

시혁은 손문철을 빤히 쳐다보았다.

“글쎄요. 갑작스런 말씀이라 좀 당황스럽네요. 제가 협회에 들어가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많이 있지만, 아르거스 때문에 그렇습니다. 원장님 덕분에 아르거스에 대해 많은 정보가 쌓였습니다. 그걸 정리하는 게 필요해요. 그 지식을 접목해서 새로운 기술을 만드는 것도 원장님이 제격이고요.”

“으음……”

잠깐 생각에 잠겼다.

손문철이 시혁을 보며 말했다.

“최근에 원장님께서 우리 협회 일에 많이 관여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때마다 좀 겉도는 것을 느끼셨을 겁니다. 제가 편의를 봐드리긴 했지만, 솔직히 협회 간부진들은 원장님을 외부 인사라고 생각하고 배척하는 경향이 있었거든요. 차라리 공식적인 직함을 하나 얻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사로 들어오신다고 한의원을 그만 두셔야 할 필요도 없어요. 1주일에 1번 정도만 출근하시면 됩니다. 그때마다 헬기 보내드리겠습니다.”

헬기 타고 출퇴근?

확 끌렸다.

아닌 게 아니라 손문철이 깨어나지 못하자 협회 전체가 비협조적으로 변했다. 시혁이 이사 중 한 명이었다면 그렇게는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장현이 비대위원장을 하는 것을 막았을 지도 모르고.

1주일에 1번이라……

그 정도면 부담되지 않았다. 주 5일 근무만 해도, 환자를 충분히 볼 테니까.

고민 끝에 손문철의 제안을 수락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손문철의 얼굴이 밝아졌다.

시혁의 손을 잡더니 세게 흔들었다.

“하하, 감사합니다. 힘이 납니다. 우리가 힘을 합쳐, 한번 잘 해 봅시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손문철은 오랜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름간 누워 있던 후유증인지, 손문철이 잠깐 휘청했다.

시혁은 빠르게 부축해 주었다.

손문철은 잠시 균형을 잡다가 이내 발을 내딛었다. 흔들리던 몸이 금방 정상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나서자, 간호사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어머, 손문철 님!”

“일어나셨네요!”

“몸은 괜찮으세요?”

간호사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손문철이 씨익 웃었다.

“아주 좋습니다. 치료를 잘 받아서 몸이 가볍습니다. 저 때문에 고생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치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에구, 저희가 뭐 한 게 있다고요. 원장님께서 다 하셨죠.”

“이렇게 일어나셔서 다행이에요.”

간호사들이 밝은 표정을 지었다.

손문철이 누워 있는 동안 한의원이 협회에 박대를 받고, 언론에게 비난을 듣는 걸 보고만 있어야 했던 간호사들이다. 이제 예전처럼 돌아갈 거라는 생각에, 저절로 신이 났다.

소식을 들은 손문철의 보호자들이 얼른 달려왔다.

많이 걱정을 했나 보다.

등짝을 때리면서 울고, 안겨서도 울었다. 시혁은 그들이 감정을 추스를 수 있도록 슬쩍 자리를 비껴주었다.

곧 기자들도 찾아왔다.

어디서 정보를 들었는지 몰랐다. 아직 한적한 한의원 로비에 손문철을 앉혀놓고 질문을 퍼부었다.

“언제 깨어나신 겁니까?”

“건강은 괜찮습니까?”

“언제 협회로 복귀하십니까?”

손문철은 환자복을 입은 상태로 여유롭게 답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났고, 건강은 아주 좋습니다. 오후에는 협회에 돌아갈 겁니다.”

민감한 질문도 몇 번 나왔다.

주로 비상대책위원회에 대한 얘기였다. 특히 협회가 시혁에게 협조하지 않은 것에 대해 질문도 해서, 잠깐 분위기가 차가워지기도 했다.

손문철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이제 막 일어나서 상황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기자들도 그럭저럭 납득하고 지나갔다.

인터뷰 마지막에, 손문철은 시혁을 자기 옆에 세웠다.

“아울러 한 가지 발표할 게 있습니다.”

뭐지?

기자들이 눈을 번뜩였다.

시혁과 연관된 것이라면 무조건 특종이다. 최근에 좀 비세이긴 했어도 그랬다. 손문철이 회복된 이상, 시혁의 위상도 회복될 테고.

손문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기 최시혁 원장님을, 우리 대한이능협회의 학술 이사로 초빙하기로 했습니다.”

기자들이 술렁였다.

누군가 질문을 했다.

“그럼 최시혁 원장님께서는 무슨 일을 맡는 겁니까?”

“우리 협회는 지금까지 괴수와 이능력자, 발현자가 생기는 원인에 대해 다각도로 조사를 했습니다. 원장님도 거기에 도움을 주고 계셨지요. 바로 이 부분을 담당하실 예정입니다. 조만간 성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사 임명에는 이사회의 동의가 필요한 것으로 압니다만, 거기서 결정된 겁니까?”

“예전부터 논의가 있었습니다. 설령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협회 정관에 규정된 이사 15명 중 5명에 대한 지명권을 가지고 있고, 지금까지 딱 3명만 지명했으니까요.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기자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손문철의 말이 맞지만, 한 가지 맹점도 있었다.

대한이능협회 이사진은 이미 그 정원을 채웠다는 것. 손문철이 지명하지 않은 두 명은, 유력 이사들이 자기 사람을 추천했으니까.

시혁이 이사가 되려면 정관을 개정하거나, 단서조항을 붙이거나, 이사 한 명이 나가야 한다.

한바탕 피바람이 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기자들의 머릿속을 스쳤다.

손문철은 퇴원 준비를 서둘렀다.

챙길 것도 없었다. 의식을 잃고 누워 있기만 했으니, 짐도 다른 환자들보다 적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문병객이 계속 찾아왔다.

최근 며칠 찾아왔던 문병객 보다 오늘 찾아오는 문병객이 더 많은 것 같았다.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이 없어도, 정승댁 개가 죽으면 문상하러 오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딱 맞았다.

강찬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 인심 참…… 좀 그러네요.”

“별 수 없지요. 언제는 안 그랬습니까.”

“그건 그렇지만요.”

손문철은 강찬과 울산 이능력자에게 따로 사의를 표했다. 시혁을 통해, 둘이 자신에게 도움을 줬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시혁은 일찍 퇴근했다. 손문철을 데리러 온 헬기에 타고, 함께 서울로 향했다.

헬기가 하늘을 질주했다.

손문철이 시혁에게 넌지시 귀띔을 했다.

“저는 외부에서 이사 한 분을 더 초빙할 겁니다. 그러면 기존 이사 두 명이 물러나야 돼요. 그 과정에서 반발이 좀 일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완전히 칼을 빼셨네요?”

“예전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협회 내의 계파가 대충 셋 정도 됩니다. 그리고 그 중 두 개가 외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 경고는 해줘야 할 것 같았거든요.”

< 깨어나다 -1- > 끝

ⓒ 산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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