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 세계의 한의사-130화 (130/250)

< 심연의 마왕 >

내려갈수록 어둠이 짙어졌다.

마법의 빛을 생성해도, 고작 1미터 앞을 보기가 어려웠다.

어둠이 빛을 잡아먹고 있다.

질척한 냄새가 났다.

코가 아니라 영혼으로 직접 와 닿는 냄새였다. 그게 시혁의 영혼을 갉아먹었다.

오행 순환체를 스스로의 뇌에 집어넣었다. 예전에 영혼 구덩이의 세뇌를 연구할 때와 같았다.

순찰자와 마법사에게도 그러했다. 가만히 놔뒀다가는 둘이 미쳐 자살할 지도 몰랐으니까. 짝니는 돌려보냈다. 얼마 내려가지도 않아서 끙끙대며 벽을 긁는 게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묵직한 침묵이, 안 그래도 무겁던 공기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얼마나 내려왔는지, 얼마나 더 가야하는지도 모르겠다.

질식할 것 같은 갑갑함 속에서, 어둠을 향해 내려가고 또 내려갔다.

그러다 문득, 세계수의 가호가 청명한 빛을 발했다.

그 빛이 시혁의 정신을 일깨웠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구덩이에 들어온 순간부터, 아니 그 전부터 이미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멍한 상태로 내려오기만 했다.

순찰자와 마법사를 보니 마찬가지였다.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아래로 기어 내려가고 있었다.

소름이 끼쳤다.

도대체 뭐가 아래 있는지는 몰라도, 내려가는 건 자살 행위라는 것을 깨달았다.

시혁은 두 영웅에게 다가갔다.

“정신 차려요!”

어깨를 흔들어 보지만 소용이 없다.

오행 순환체를 통해 온갖 마법을 다 쓰고, 따귀를 몇 번이나 때린 다음에야 정신을 차렸다. 저 깊은 어둠을 쳐다보더니,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시혁은 둘을 향해 말했다.

“여긴 뭔가 이상합니다. 벗어나야 합니다.”

“다크 엘프들은 어쩌고요?”

“그건 나중 문젭니다. 일단 살고 봐야 해요. 우리가 여기서 다 죽으면, 승리 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내려온 길을 되짚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마음 속 갈등과 싸웠다. 누군가 유혹하는 것처럼, 자꾸 멍해지면서 내려가려고 했던 것이다.

외투의 도움이 컸다.

모든 속성 저항 강화 덕에, 간신히 유혹을 뿌리쳤다.

벽의 구멍까지 막자, 비로소 전신의 긴장이 풀렸다.

“후우!”

순찰자와 마법사도 짧게 한숨을 뱉었다.

대포병이 셋의 얼굴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이봐, 다들 얼굴이 왜 그래? 꼭 귀신이라도 본 표정인데?”

“귀신만 봤으면 좋겠습니다.”

시혁은 쓰게 웃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미궁 전체가 거세게 흔들렸다.

천장에서 돌가루가 우스스 떨어졌다. 마법사가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벽에 세워놓은 등잔이 떨어져서, 쨍그랑 하고 깨지는 소리가 났다.

진동은 곧 멈췄다.

“으아아아아!”

대신 고통에 찬 비명소리 같은 게 구덩이에서 들려왔다.

시혁은 영웅들과 시선을 교환했다.

순찰자가 확인하듯 말했다.

“다크 엘프 목소리죠?”

“맞습니다.”

“안 내려가길 잘 했네요. 내려갔으면 우리도……”

순찰자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방어 준비를 서둘러야 합니다.”

“무슨 방어요?”

“괴물이 우리를 공격할지도 몰라요.”

“아!”

전장에서 왕왕 벌어지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괴물은 자기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공격을 받았다가 격퇴해도 계속 거기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가끔 분노하여 뛰쳐나오는 괴물이 존재했다. 그런 괴물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모든 것을 때려 부수었다. 자연히 영웅들도 자신이 없으면 공격하지 않았다.

시혁의 예감이 맞았다.

또 격렬한 진동이 느껴지더니, 거대한 어둠이 구덩이에서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순찰자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거대한 악의…… 이건 그냥 괴물이라고 할 정도가 아니에요. 마왕이에요, 마왕!”

암담했다.

어처구니없게도, 손문철의 존재감보다 지금 느껴지는 존재의 존재감이 훨씬 더 컸다.

반신보다 강한 괴물?

도대체 이게 뭐냔 말이다.

시혁을 목을 높여 소리쳤다.

“곧 적이 옵니다! 전투에 대비하세요!”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소환자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시혁도 준비를 했다.

일곱 위상의 용왕에 필요한 마법을 부여하고, 오행 순환체를 요새 곳곳에 깔았다.

하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구덩이에서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했으니까.

그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를 상대로, 다섯 영웅과 드워프 군대가 제대로 대처를 할 수가 있을까?

손문철에게 한 가지 질문을 했다.

[협회장님. 등극 이적은 멀었습니까?]

[이제 2/3 정도 채웠습니다.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많이 남았네요. 요새를 방어하긴 힘들 것 같습니다.]

[저도 느끼고 있습니다. 어떤 놈인지 무시무시하네요.]

[그래서 말인데, 요새를 그냥 버리느니 함정이라도 설치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야지요.]

손문철도 찬성을 했다.

마나 추출로를 변형시켰다. 규모는 작아도 치명적인 함정을 만들었다. 어둠 속성에 상극인 빛 속성 공격을 퍼부으면서, 오행 순환체를 변형시킨 마법 독을 주입하는 함정이었다.

그러나 구덩이 아래의 존재는 시혁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막강했다.

그 깊은 구덩이를 기어올라 모습을 드러낸 순간 재앙이 벌어졌다.

시꺼먼 마수, 혹은 마왕.

정해진 형태가 없다.

들개 같기도, 도마뱀 같기도, 엎드린 사람 같기도 하다.

까만 몸에는 탁한 회색 눈동자가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그것들이 끔뻑이며, 어두운 지저 미궁을 빈틈없이 살폈다.

마왕이 나타난 곳은 다크 엘프들의 요새 방향.

미처 준비도 못한 상황이었다. 마왕이 뿜어내는 초월적인 공포에 질려, 다크 엘프들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마왕은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사냥을 했다.

요새 안을 누비며 다크 엘프들을 한 마리 한 마리 천천히 씹어 먹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항전하지만, 모든 공격을 다 무시했다.

“이 괴물 놈!”

어둠 자객 영웅이 궁극기를 터뜨렸지만 소용없었다.

마왕은 몸으로 공격을 받아냈다. 오히려 어둠이 마왕의 육체에 흡수되며 더욱 부풀게 만들었다. 마왕은 두 앞발로 영웅을 붙잡은 뒤, 손과 발부터 천천히 깨물어 먹었다.

영웅이 질러대는 비명이 드워프 요새까지 들려왔다.

“겁나 시끄럽네.”

“다크 엘프들이 그렇지 뭐.”

“어휴, 죽어도 별 것도 없는데 왜들 저래?”

드워프들이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들의 손도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성적으로는 별 것 아니라는 점을 안다. 저 마왕에게 죽어도 집에 돌아갈 뿐이니까.

문제는 마왕이 뿜어내는 강렬한 기운이었다.

그게 본능을 자극했다. 육체 속에 숨은 영혼을 건드렸다.

그러니 이렇게 주눅이 든 것이다. 당장 무시무시한 존재가 눈앞에서 날뛰고 있으니까.

마왕이 다크 엘프들을 다 잡아먹는 것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마나 봉화를 부순 후 그 자리에 올라타 한숨 자기까지 했다.

시간은 벌었지만 암담해졌다.

마나 추출로에 설치한 함정을 가동해 봤자, 터럭만큼도 영향을 주지 못할 테니까.

안 되겠다 생각했는지, 손문철이 시혁의 의견을 구했다.

[이거 퇴각해야겠습니다. 도저히 상대할 수가 없어요.]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쩌면 마왕이 도망치는 걸 감지하고 쫓아올지도 모릅니다. 주의하세요.]

시혁은 영웅들과 드워프를 불러 모았다.

천천히 몸을 뺐다.

오행 순환체는 여전히 요새에 깔아놓은 상태였다. 드워프들을 대신하여 방어 시설을 돌렸다. 마왕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해서였다.

눈치 채지 못한 걸까?

꽤 멀리 벗어났는데도 움직이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너 나 할 것 없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심하긴 일렀다.

드워프 군대의 진행 방향 앞, 바닥이 흔들리더니 길쭉한 검은 물체가 튀어나왔다.

회색 눈동자들이 드워프 군대를 한 차례 훑었다.

모두 얼어붙었다.

독사 앞에 선 쥐처럼, 옴짝달싹 못 했다.

검은 물체가 이를 드러냈다.

새하얀 치아가 열을 지어 나타났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이라 유독 더 눈에 띄었다. 그것들이 좌우로 벌어져 미소를 짓자, 저절로 소름이 끼쳤다.

더 뭘 할 생각은 없나 보다.

검은 물체는 곧 바닥으로 사라졌다. 작은 구멍만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가슴이 서늘해진 채, 축축해진 목덜미만 매만졌다.

다시 움직였다.

더 빠르게 달렸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마왕이 달려와 목을 깨물 것 같은 공포심이 이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으아아!”

“아악!”

미궁의 벽을 타고, 비명이 들렸다.

굵고 카랑카랑한 목소리.

오크와 고블린들이다. 마왕이 그들부터 덮친 모양이다.

잘 하면 위층으로 올라갈 수 있겠다. 처음 내려왔던 그 문을 다시 닫는다면 시간을 벌지 싶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가능했다.

계단으로 올라가기 직전.

검은 물체가 솟구쳤다.

아까처럼 하나만 나타나지 않았다.

하나, 둘, 셋, 수를 불리더니 수십 개의 물체가 계단을 완전히 가로막았다.

심약한 소환자 하나가 울부짖었다.

“다 끝났어! 이제 다 죽을 거야!”

그러더니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나갔다.

물체와 부딪쳤다.

통째로 갈렸다.

창살처럼 막은 검은 물체에서 이빨이 나타났다. 그것들이 드워프를 뜯어먹었다.

누군가 도끼를 던졌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도끼까지 집어삼켰다.

쿠웅, 쿠웅.

어느새 오크와 고블린의 비명소리도 그쳤다.

대신 땅을 진동시키는 소리가 들렸다.

마왕이 오고 있었다.

모두 공포에 질렸다. 그 어떤 전장에서도 대면하지 못했던 존재에 짓눌려, 뭘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시혁은 겨우 제 정신을 유지했다.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왜 이 전장에는 이토록 강력한 존재가 잠들어 있었던 걸까?

그것도 꼭 깨우라는 것처럼, 세 개의 마나 집중점을 배치해 놓은 상태로.

어쨌든 좋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시혁은 소리를 높여 외쳤다.

“모두 본성에서 봅시다!”

낫슈바켈의 반지에 깃든 마법을 사용했다.

장거리 공간 이동.

빛이 시혁을 감싸 안았다. 그 빛이 시혁의 몸을 지우고, 저 멀리 미궁 밖의 분지로 공간 이동시켰다.

소환자들도 빠르게 움직였다.

중립 괴물을 잡으면서 얻은 보물을 썼다. 영웅들 중 나무 거인을 빼고는 모두 몸을 빼는데 성공했다. 미궁에는 유독 공간 이동 관련 보물이 많아서, 1/3 정도는 도망칠 수 있었다.

“휴!”

본성에 도착한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청량한 공기가 그렇게 기꺼울 수가 없었다. 목이 졸리다 풀린 사람처럼, 가슴을 한껏 열고 숨을 들이켰다.

다른 이들이 속속 도착했다.

수가 적다.

전력을 보존하기는 했지만, 그들을 보니 마음이 쓰렸다. 고향 세계로 가면 기억을 잃고, 죽음 당시의 감정도 사라지기는 하지만 그들을 죽음 앞에 버려두고 온 것도 사실이니까.

손문철이 위로하듯 말했다.

[이제 거의 끝났습니다. 딱 10% 남았어요.]

10%라고?

더구나 마왕은 배가 부른지 최저층 계단 부분에 머무르고 있다고 했다. 아까 다크 엘프들을 잡아먹고 그랬던 것처럼, 낮잠을 좀 잘 생각인 듯했다.

덕분에 황금 같은 시간을 벌었다.

얼마 후, 마왕이 시혁이 개척한 통로를 따라 올라오기 시작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등극 이적을 사용한 마나를 모으는데 성공했으니까.

손문철이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시작하겠습니다.]

무쇠 용광로가 펄펄 끓었다.

끓는 것은 쇳물인데, 나오는 것은 은색 마나였다. 은색 마나가 하늘로 올라가더니 한데 뭉쳐 구름처럼 변했다.

구름이 세상을 뒤덮었다.

본성이 위치한 분지만 아니라 돌산을, 심지어 지하 미궁까지 모두 감싸 안았다.

바람이 불었다.

구름이 소용돌이치듯 회전을 했다.

전장에 존재하던 모든 소환자의 영혼이 거기 이끌렸다.

육체를 벗어났다.

구름이 흘러가는 대로, 바람이 인도하는 대로 격자무늬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색색의 빛이 하늘을 향해 그어졌다.

빛은 저마다 색도 다르고 크기와 밝기도 달랐다. 다만 그 중에서 눈에 띄는 세 개의 빛이 있었다.

은색, 묵색, 적회색.

반신들도 영향을 받는 것이다.

은색 구름은 가볍게 하늘을 쪼갰다.

아르거스 행성 방향이 아니다.

별처럼 빛나는 작은 세계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육안으로 볼 수 없었던 한 천체가 나타났다.

검은 천체.

지구의 것과 똑같았다.

그곳으로 은색 구름이 질주했다. 시혁이 의도했던 것처럼, 긴 다리를 만들었다.

세 개의 빛이 검은 천체로 날아갔다.

거칠 것이 없었다.

묵색과 적회색이 빛이 먼저 검은 천체를 통과했다. 은색 빛만 그 앞에서 뭐에 걸린 듯 움찔거렸다.

설마 실패인가?

그런 생각을 할 때, 은색 구름이 은색 빛이 세차게 밀어냈다.

결과는 성공.

은색 빛이 쏘옥 하고 검은 천체 안으로 들어갔다.

좋았어.

시혁은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이때, 한 가지 불길한 광경을 목도했다.

은색의 구름을 타고, 까만 어둠이 파도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 심연의 마왕 > 끝

ⓒ 산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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