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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 세계의 한의사-129화 (129/250)

< 등극 이적 -3- >

똑, 똑.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최하층은 물이 곳곳에 고여 있었다. 습기가 차 눅눅했다. 암녹색 곰팡이가 사방에 피었고 까만 벌레들이 그 사이를 기어 다녔다.

미궁에서도 최하층만 좀 이질적이다.

“으후으으으으.”

드워프 부대의 접근을 알아차렸나 보다.

괴물들이 괴상한 소리를 냈다.

몸을 틀어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하자 첨벙첨벙 소리가 났다.

진형을 갖췄다.

나무 거인이 가장 앞에 나섰다. 방패 계열 병종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도끼 계열 병종들이 그 뒤에 섰다. 원거리 공격 병종들은 가장 뒤에 서고, 주문 시전자들은 보조 마법을 거느라 정신이 없었다.

시혁도 준비를 했다. 우선 오행 순환체를 나무 거인과 순찰자에게 각각 주입하고, 다섯 가지 강화 마법을 부여했다.

귀속 오행 순환체는 드워프 군대 전체에 주입했다. 그만큼 섬세한 운용은 힘들어지지만, 전투력 상승에는 가장 도움이 될 것이다.

이윽고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으흐흐흐흐.”

괴상하게 웃더니, 황소처럼 돌진해 왔다.

기세가 흉험했다.

시혁은 가만히 지팡이를 들었다.

마법을 발현했다.

바닥 전체의 마찰 계수가 0에 가깝게 조정되었다.

괴물들이 나뒹굴었다. 미끄러짐 마법이 정확하게 작렬한 까닭이었다.

드워프들의 눈이 번뜩였다.

“공격!”

“죽여 버려!”

“뜨거운 맛을 보여주자고!”

막강한 화력이 쏟아졌다.

쇠뇌가 짧은 화살을 날리고, 손대포와 견인포가 불을 뿜었다. 근접 병종들만 자리를 지키고, 온갖 마법이 날아갔다.

괴물들이 확실히 강하긴 했다.

음울한 울음을 흘리자 날아가던 공격의 궤적이 제멋대로 휘어졌다. 엉뚱하게 벽과 천장만 때리자, 돌가루가 푸스스 일어났다.

그걸 보면서도 드워프들은 전의를 불태웠다.

“그래, 이 정도로 끝나면 재미없지!”

“덤벼라, 괴물들아!”

한 차례 쓴맛을 봐서일까.

괴물들은 신중하게 접근했다.

자연히 미끄러짐 마법이나 기타 방해 마법은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괴물들의 마법 저항이 상당한 까닭이었다.

마침내 괴물들이 지근거리까지 다가왔다.

“우흐히흐히!”

괴성과 함께 나무 거인에게 팔을 휘둘렀다.

나무 거인은 두 팔을 뻗어 공격을 받아냈다. 다만 우지끈, 하는 소리가 난 게 심상치 않았다.

“이 자들, 힘이 보통이 아니오.”

나무 거인이 앓는 소리를 냈다.

어쩔 수 없었다. 버텨야 했다. 약화 마법이 걸리면 좋겠으나, 마법 저항이 어찌나 좋은지 다 튕겨냈으니까.

격전 끝에 승리할 수 있었다.

네 명의 영웅이 모두 모였으니까. 힘을 보태주는 드워프들도 10레벨을 찍은 다음이었고.

마법사가 이마에 난 땀을 닦았다.

“젠장, 실력 발휘 좀 할 줄 알았더니 하필 저런 놈들이 나오네.”

“고생 하셨습니다.”

잠시 쉰 후 전리품을 수거했다.

지금까지 사냥했던 괴물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강력한 보물들이 나왔다. 시혁이 장비한 보물보다 좋은 게 많아서, 몇 가지를 교체했다.

나중에 손문철과 얘기해서 이것들을 귀속 받아야겠다. 겉모양이 음침하게 생겨서 좀 그렇긴 한데, 성능 하나만은 쓸 만 했다.

다시 전진하기 시작했다.

동일한 괴물들이 계속해서 나왔다. 다만 종류가 다양해졌다. 처음에는 근접 공격을 하는 괴물만 나왔는데, 나중에는 정신 마법을 쓰거나 산성 액체를 뿌리는 괴물도 출현했다.

절반 정도나 나아갔을까.

“그우우우우.”

멀리서 괴이한 울부짖음이 들렸다.

최하층의 중심 방향이다.

거기 있다는 중립 괴물이 소리를 낸 듯했다.

순찰자가 시혁에게 속삭였다.

“도대체 어떤 놈이 있을까요? 잡몹이 이렇게 강한데 미궁 우두머리는 어느 정도일지 상상이 안 갑니다.”

“최소한 최종 병기 정도는 된다고 봐야지요. 어쩌면 더 강할지도 모릅니다.”

굳이 따지자면 시혁이 야만 군주 진영에서 폭주시켰던 야만 괴수 정도?

영웅들이 50 레벨을 찍은 다음에나 도전하는 게 좋겠다. 어설프게 건드렸다가 영웅이 죽기라도 하면 큰 손해니까.

전진할수록 괴물의 울음이 자주 들려왔다. 그때마다 시야가 울렁이고 가슴속 깊은 곳에서 공포심이 치밀어 올랐다. 시혁은 오행 순환체에 공포 저항 마법을 걸어 군대 전체에 퍼뜨렸다.

“후욱, 후욱.”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나 보다.

드워프 장갑병 하나가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습니까?”

시혁은 공포 제거 마법을 걸었다.

오행 순환체도 드워프 장갑병에게 집중적으로 스며들었다. 곧 드워프 장갑병의 얼굴이 편해졌다.

시혁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환경 자체가 어둡고 축축한 공간이다. 어둠의 마나가 짙게 퍼져 있었다. 울음소리에 마법적인 힘까지 깃들어 있으니, 소환자들의 정신이 흔들릴 법도 했다.

잠시 쉬어가는 게 좋지 싶었다.

이때, 손문철이 다급하게 속삭였다.

[다크 엘프들이 마나 집중점 하나를 차지했습니다. 더 서두를 수 없습니까?]

[이런, 정말입니까? 알겠습니다. 더 빨리 가겠습니다.]

이미 언급했듯, 최하층의 마나 집중점은 세 개가 인접해 있다. 조금만 늦게 가도 세 개 모두를 내주게 될 것이다.

속도를 올렸다.

영웅들의 레벨이 많이 오른 시점이었다. 시혁도 40 레벨을 달성했고, 나무 거인도 25 레벨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대포병도 합류해서, 괴물 처리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나 집중점 근처에 도착했다.

이때쯤에는 시혁도 50 레벨이 되었다. 순찰자도 그러했다. 다른 영웅들도 40 레벨이 넘어서, 곧 다섯 영웅 모두 50 레벨이 될 것 같았다.

다크 엘프들은 이미 마나 집중점 하나를 요새화했다. 50레벨 영웅과 10 레벨 소환자들이 지키고 있어 그걸 공략하기는 어려워보였다.

나머지 마나 집중점도 방어 시설을 건설하고 있었다. 기습당한 전력 때문인지, 은신 감지 시설이 몇 군데 보였다.

과연 어둠 속에서 가장 강한 다크 엘프들 답다.

마나 생산도 충분하지 않았을 텐데 벌써 여기까지 진출하다니……

[약탈왕은 뭘 하고 있습니까?]

[최하층에 내려와 있습니다. 다행히 좀 지지부진한 상태입니다. 공포 때문에 고블린들이 발작을 몇 번 일으킨 것 같아요. 약탈왕 진영에는 원장님처럼 강한 지원 영웅이 없어서 그런 모양입니다.]

[이런, 곤란하네요. 약탈왕이 칠흑 지팡이의 발목을 잡아주는 게 우리한테 유리한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일단 마나 집중점 중 하나는 확보해야 합니다. 그래야 칠흑 지팡이를 견제할 수 있어요.]

잠깐 휴식을 취한 뒤 진군했다.

다크 엘프들은 진작 드워프 군대의 움직임을 눈치 채고 있었다. 암살자들을 보내 인사하듯 찔러 보았으난,, 몽땅 함정에 걸려 폭사하고 말았다.

중심에 다가갈수록 공기가 무거워졌다.

음울한 힘이 목을 옥죄고 있었다.

누군가 이쪽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존재는 있으되 실체는 없는 시선.

불편했다.

가슴이 꽉 막힌 듯했다.

그걸 감수하며 나아갔다. 오행 순환체가 뿌리는 빛을 벗 삼아, 드디어 마나 집중점이 보이는 구간에 들어섰다.

쌔액!

화살이 날아왔다.

나무 거인이 무심코 쳐냈다.

실수였다.

불길이 화악 타올랐다. 순식간에 나무 거인의 몸을 휘어 감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에, 나무 거인이 비명을 질렀다.

“이런!”

오행 순환체를 집어넣었다. 특히 물의 힘을 증폭시켜 보호 마법을 걸자 나무 거인이 좀 진정했다.

문제는 다크 엘프들의 공격이 이제 막 시작이었다는 점.

어둠 속에서 다크 엘프들이 튀어나왔다.

“죽어라!”

전면은 마검사와 검사.

측면은 어둠 자객과 암살자.

이쪽으로 올지 미리 알고 있었나 보다. 이렇게 기습을 걸어온 것을 보면.

안 그래도 대비하고 있었다.

드워프 군대의 머리에 은색 빛이 일렁였다.

다크 엘프들이 눈을 부릅떴다.

이적이다.

빛이 드워프 군대 전체를 감쌌다. 영웅들과 드워프의 몸이 일시적으로 강철로 변했다.

동시에 사방의 벽이 돌에서 금속으로 변했다. 더구나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어, 아직까지 은신해 있던 다크 엘프들의 위치가 만천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강철 피부와 제한의 벽.

드워프들이 기세를 올렸다.

“좋았어!”

“다 죽여!”

전세가 금세 역전되었다.

다크 엘프들은 빠르게 후퇴했다.

이적 전투를 벌이면 다크 엘프들이 불리하니까. 지금까지 생산한 마나를 몽땅 군대에 때려 박은 탓에, 이적을 쓸 마나가 부족했다.

순조롭게 마나 집중점 하나를 점령했다.

다크 엘프들이 전략적으로 거기까진 내줬다. 강철 피부가 지금도 작용하는 탓이다.

대신 다른 마나 집중점의 요새화를 서둘렀다.

아직 마나 봉화는 설치하지 않았지만 방어 시설이 충실했다. 잘못 공격했다간 이적을 써도 당하게 생겼다.

부대를 반으로 나눴다.

상급 병종들만 데리고 나왔다. 시혁과 순찰자는 마나 봉화 건설을 방해하고, 다른 세 영웅과 소환자들은 마나 집중점을 지키기로 한 것이다.

쉽진 않았다.

다크 엘프들은 다양한 방면에서 기습을 걸었다. 실제로 아까운 10 레벨 소환자가 죽어나가기도 했다. 궁극기 환생을 쓰면 살릴 수 있지만, 일반 소환자에게 쓰기는 좀 아까웠고.

한참을 드잡이질을 벌일 무렵, 약탈왕의 군대도 마침내 마나 집중점까지 도착했다.

상당히 지친 기색이다.

미궁 최하층을 돌파하면서 고생을 많이 한 모양.

그들을 보고, 시혁은 병력을 슬금슬금 뒤로 뺐다. 다크 엘프들이 경동하지 못하게 대포 공격과 공격 마법만 퍼부었다.

약탈왕이 시혁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기세를 올리며 공격해 왔다. 이적까지 두어 개 사용하자, 다크 엘프들은 버티지 못하고 물러났다.

약탈왕의 군대가 마나 집중점을 점령했다.

최하층만 두고 본다면 1대 1대 1.

그러나 전장 전체로 보면 3대 3대 2로 바뀐다. 그 중에서도 손문철이 가장 앞서 있었다.

손문철이 잘 됐다는 투로 말했다.

[지금처럼 가면 되겠습니다. 마나 생산도 충분해서, 등극 이적을 쓸 수 있겠어요.]

[상층이나 본성은 안전합니까?]

[예. 마나 생산하려고 방어 시설을 계속 만들었거든요. 그 덕에 방어 상태가 무시무시해졌습니다. 근처에 광맥이 풍부해서 다행이었지요. 아무리 50 레벨 영웅들이 덮쳐도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러나 안심할 수는 없다.

지금도 미궁 중심에서 느껴지는 기운 때문이었다.

이미 언급했듯, 세 개의 마나 집중점 중심에는 거대한 공간이 하나 있다.

참 희한한 곳이다.

둥근 벽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 그걸 뚫고 살펴 보니 깊은 구덩이가 보였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인데, 아래쪽에서 사악한 어둠이 일렁이고 있었다.

아래쪽에 무엇이 있는지 추측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저 불길하고 위험한 기운만 넘실거렸다.

저길 내려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다크 엘프들의 요새를 정찰하고 온 순찰자가 안 좋은 소식을 전했다.

“다크 엘프들이 구덩이로 내려갔대요.”

“몇 명이나 내려왔는지는 못 보셨습니까?”

“영웅 하나가 남아 있는 건 확인했어요. 1명으로는 요새를 지키기 힘들 것 같으니까 1명 더 있다고 가정하면 3명이 내려가지 않았을까 싶어요. 이건 제 생각이고, 직접 확인한 건 아니지만요.”

시혁도 동의했다.

두 명 정도는 있어야 시간을 벌어서 다른 영웅들이 돌아올 때까지 버틸 테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다.

대포병과 나무 거인을 남겨 두었다. 순찰자와 마법사와 함께 구덩이 아래로 내려갔다.

최악의 선택이었다.

아니, 다크 엘프들이 굴린 수레바퀴가 모든 것을 부수며 구르기 시작했다.

구덩이 아래, 심연 속에서 한 존재를 만났다.

어둠 대종사와 계약했던 이계의 신.

그에게서 비롯된 최악의 마왕을.

< 등극 이적 -3- > 끝

ⓒ 산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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