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등극 이적 -2- >
“오색 현자님! 정찰은 어떻게 할까요?”
전문 계급 장갑병의 물음에,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정찰은 필요 없습니다. 제가 알아서 하지요.”
짝니를 소환했다.
심해의 보주를 가지러 갈 때와 같았다. 오행 순환체를 하나 집어넣고 먼저 보냈다. 짝니는 의태 능력으로 몸을 숨긴 채, 앞쪽을 샅샅이 살폈다.
가끔 칭얼대곤 했다.
[맛있을 것 같소. 먹으면 안 되오?]
[안 돼. 나랑 소환자들 레벨 올려야 돼. 나중에 배 터지게 먹여줄 테니까 지금은 참아. 함정은 보이는 족족 박살내는 것 잊지 말고.]
[배고프오.]
미궁은 또 하나의 세계였다.
엄청나게 컸다.
미궁 안을 아예 비워놓은 것 같았다. 통로도 도로처럼 뻥 뚫려 있고, 조금만 걸으면 작은 운동장 크기의 공동이 나오곤 했다.
채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가장 가까운 마나 집중점에 도착했다.
따라온 드워프 노동자들이 마나 추출로와 방어 시설을 건설했다. 그때까지 주위를 돌며 지도를 작성했다.
미궁은 뾰족한 원뿔처럼 생겼다.
산사태 군주 진영은 미궁 중층부의 북동쪽에 있었다. 약탈왕 진영은 북서쪽에, 칠흑 지팡이는 남쪽에 위치했다. 셋 다 높이가 비슷하고, 인근에 마나 집중점이 하나씩 있다는 점까지 비슷했다.
시혁은 미궁 최하층으로 시선을 옮겼다.
최하층 중앙에는 마나 집중점 세 개가 밀집해 있었다. 아무래도 거기서 승부가 날 것 같은데, 커다란 공동이 정중앙에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협회장님. 미궁 최하층의 중앙 공동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뭔가 탐색하는 걸 막고 있어서요. 아마 강력한 중립 괴물이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강력한 중립 괴물이라……]
최대의 격전지가 되겠다.
강력한 중립 괴물은 진귀한 보물을 수호하고 있을 때가 많으니까. 마나 집중점이 근처에 있다는 것도 의미심장하고.
손문철과 속을 터놓고 대화를 했다.
[협회장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최하층으로 내려갈까요, 아니면 상층의 마나 집중점만 차지하고 최하층은 그냥 교란만 할까요?]
고민을 하더니, 금방 결정을 내렸다.
[후자로 하지요. 상층에는 마나 집중점이 두 개가 있지요? 그걸 둘 다 먹기는 힘들 것 같고, 하나만 점령한 후 방어를 굳히는 게 좋겠습니다.]
병력을 이끌고 올라갔다.
시혁이 목표로 삼은 마나 집중점은 상층 동쪽에 위치했다. 어쩌면 칠흑 지팡이의 군대와 마주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였다.
마나 집중점에 한 발 앞서 간 짝니가 정신 감응을 보냈다.
[깜장 귀쟁이들이 있소.]
[다크 엘프 말이야?]
시혁은 짝니의 눈에 비친 장면을 그대로 들여다보았다.
다크 엘프들이 보였다.
이제 막 도착한 모양이다. 다크 엘프 신도들이 마나 봉화를 설치하고 있었다. 방어 시설도 아직 없고, 다크 엘프 도둑들이 사방으로 정찰을 나가는 등 좀 어수선했다.
거리가 있어서 드워프 병력이 접근한 것은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그렇다면 기습을 해서 싹쓸이를 해야지.
짝니는 으슥한 곳에 숨겨 놓고 오행 순환체를 몸에서 꺼냈다. 광폭화를 건 뒤, 땅을 통해 다크 엘프들에게 오행 순환체를 집어넣었다.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다크 엘프들의 얼굴이 빨개졌다.
어둠을 빚던 다크 엘프 신도가 별안간 욕을 했다.
“젠장, 내가 엘프 노예도 아니고 왜 이 따위 단순 작업을 해야 해? 나는 유서 깊은 휠라 가문의 적자다! 이런 건 천한 네놈들이나 해!”
옆에 있던 신도가 당장 반응했다.
“뭐? 휠라 가문? 머리에 털 나고 처음 들어본다. 어디 지하 구석에 쳐 박혀 있는 가문이겠지. 밥 대신 구더기 먹고 사는 거 아니냐?”
“감히 우리 가문을 모욕하다니, 죽어라!”
“이 새끼가?”
격투가 벌어졌다.
주위의 신도들도 뛰어들었다. 검은 구체가 사방을 날아다녔다. 다크 엘프 병사들도 거기 휩쓸리고, 암살자와 검사들까지 뛰어들면서 사태가 점입가경으로 변했다.
한바탕 대혼란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싸움이었지만, 곧 학살극으로 변화했다. 여기저기서 단말마의 비명이 터졌다.
시혁은 그걸 보고만 있었다.
이쯤 되면 칠흑 지팡이가 개입할 법도 하다. 혹은 이들을 이끌고 왔을 영웅이나 고위 계급 소환자가 수습을 해야 했다. 그런데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게 수상쩍었다.
은밀하게 은신 탐지 마법을 펼쳤다.
가까운 곳에서 그림자 하나가 감지되었다.
아주 조용했다. 마법적으로 흔적을 가린 상태였다. 자칫 놓칠 뻔 했지만, 시혁의 보조 분야인 통찰 마법 덕에 간파하는 것에 성공했다.
영웅이다.
암살자, 혹은 상급 병종인 어둠 자객 출신.
몰래 마법을 준비했다.
지팡이, 일곱 위상의 용왕이 반짝였다. 환영 마법과 마비 마법, 지뢰 마법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졌다. 시혁의 등에 칼이 꽂히는 순간, 칠흑 지팡이의 영웅은 황천길을 건널 것이다.
[치잇.]
혀 차는 소리가 시혁의 귓가에 들렸다.
그러더니 지근거리까지 접근했던 그림자가 사라져버렸다.
시혁이 함정을 판 것을 눈치 챘나 보다. 칠흑 지팡이가 첫 번째로 소환한 영웅다웠다.
상관없다.
이러는 사이 다크 엘프 부대는 전멸하고 말았으니까.
“흐어어어어.”
최후의 승자인 마검사 하나만 남아 괴상한 소리를 흘렸다.
뻐억!
도끼병 하나가 마검사의 머리를 날렸다.
시혁은 드워프들에게 지시했다.
“빨리 방어 준비를 서둘러라. 미궁 하부로 내려가야 한다.”
“걱정 마십쇼! 건설에는 이골이 났으니까.”
이때쯤 손문철은 두 번째 영웅을 소환했다.
엘프 순찰자.
소환되자마자 하부로 내려가는 길을 뚫기 시작했다. 지금쯤은 시작해야 늦지 않게 내려갈 테니까.
시혁은 상층 마나 집중점을 안정시키는 데에 집중했다. 그러는 한편 짝니를 다른 마나 집중점으로 정찰을 보냈다.
서쪽 마나 집중점은 약탈왕이 이미 점령했다. 소수의 오크와 다수의 고블린을 운용 중인데, 그 효율이 상당했다. 마나 집중점 주변이 벌써 요새화되어 있었다.
그걸 보며 한 가지 생각을 했다.
‘이거 뺏고 3개로 버티면 등극 이적을 충분히 쓸 것 같은데……’
손문철은 시혁과 생각이 달랐다.
그렇게 하면 상층 전역을 방어해야 한다. 방어선이 너무 길어질뿐더러, 칠흑 지팡이와 약탈왕의 합공을 받을 수도 있었다.
시혁도 그 의견을 동의했다.
이곳은 대미궁.
파악하지 못한 통로가 얼마든지 있었다. 현실적으로 그걸 다 막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상층 마나 추출로는 우선 화염 돌풍에게 방어를 맡기겠습니다. 이후 강철 대포와 무쇠껍질을 차례로 소환해서, 돌아가면서 주둔시킬 생각입니다.]
[셋 다 개활지에서 활약할 수 있는 영웅들인데 아쉽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아마 약탈왕도 사정이 비슷할 것 같은데, 칠흑 지팡이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크 엘프 영웅들은 지하에서 더 강한 힘을 발휘할 때가 많아서요.]
곧 마법사, 화염 돌풍이 소환되었다.
자리를 교대했다. 주위에 중립 괴물도 많으니 그것들을 잡으며 레벨을 올려놓으면 나중에 도움이 될 것이다.
시혁은 순찰자에게 합류했다.
최하층은 괴물이 많고 하나같이 강력했다. 함정도 그랬다. 복합적이고 치명적인 함정이 많아 쉽사리 뚫기가 힘들었다.
순찰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시간이 좀 걸리겠습니다만.”
“굳이 서두를 필요 없습니다. 다른 진영과 비슷하게 도착하기만 하면 돼요. 시간은 우리 편입니다.”
시혁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마나가 빠르게 쌓이고 있다.
어느 한 진영이 최하층 마나 집중점을 다 차지하지만 않으면 된다. 그러면 결국 등극 이적을 사용하여 승리할 수 있다.
차근차근 전진했다.
짝니가 올린 성과가 컸다. 오행 순환체를 품은 채 달려나가, 함정들을 몽땅 작동시켰기 때문이다.
이동 속도가 빨라졌다. 순찰자는 자기 혼자 드워프들과 뚫을 때보다 두 배는 되는 것 같다며 좋아했다.
그러다 벽에 부딪쳤다.
거대한 문.
이걸 열어야 최하층으로 내려갈 수 있는데 열쇠가 필요했다. 심지어 반신의 이적까지 거부하는 강력한 힘을 담고 있었다.
손문철이 경고했다.
[최하층 중심에 최종 병기 정도의 강력한 괴물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중립 괴물들도 만만치 않을 거예요. 조심하셔야 합니다.]
강한 괴물이 있다고?
그럼 더 좋지.
시간을 끌기도 수월하고, 레벨을 올리는 것도 쉬워지니까.
문제는 문의 열쇠가 어디 있느냐는 것인데……
순찰자가 문을 관찰하더니 한쪽을 가리켰다.
“여길 봐요! 이게 열쇠인가 봐요!”
먼지를 털어내자, 양각으로 새긴 조각이 보였다.
거대한 악어 조각이다.
악어의 심장이 유난히 도드라지게 묘사되어 있었다. 특히 심장에 박혀 있는 십자가가 의미심장했다.
이 문의 중심에, 십자가 모양의 홈이 파여 있었으니까.
“악어를 잡고 심장을 꺼내야 되나 봅니다.”
“악어는 어디 있을까요?”
“이 근처에 있겠지요. 짝니를 시켜 찾아보겠습니다.”
멀지 않았다.
문에서 가까운 곳에 진흙 구덩이가 있었다. 짝니가 그곳에서 거대 악어를 발견했다.
무식하게 컸다. 지구의 버스보다 더 큰 것 같았다.
하지만 전투력은 생각 외로 약했다. 드워프들과 함께 공격에 들어가자 금방 쓰러뜨릴 수 있었다.
보물도 꽤 발견했다. 시혁이나 순찰자에겐 필요가 없는 물건들이라 모두 드워프들에게 나눠주었다. 자연히 드워프들의 전력이 크게 올랐다.
문을 따고 내려갔다.
항상 그랬듯 짝니부터 보냈다. 그런데 짝니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돌아왔다.
[너무 세오. 나 혼자선 못 이기오.]
“그럼 그냥 보고만 있지 그랬어?”
[놈들이 날 쫓아왔소.]
의태 정도는 꿰뚫어본다는 뜻.
짝니는 매우 강한 탈것이다. 허접한 영웅은 단신으로도 상대하곤 했으니까. 그런 짝니가 도망쳐야 했다면 그 강력함이 짐작이 갔다.
적당히 접근한 후 통찰 마법으로 정찰을 했다.
괴상하게 생긴 존재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얼핏 보면 인간형인데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몸 전체가 녹아내린 듯했다. 어찌 보면 문어나 낙지를 보는 것도 같은데, 촉수 같은 수염이 턱 아래에서 징그럽게 꿈틀거렸다.
시혁은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놈들의 강함을 측정해 봤더니 경악스러운 결과가 나왔다.
하나하나가 30레벨 영웅에 맞먹었다. 수십 명이 모여 잡는 최상급 중립 괴물에 비견되는 것이다. 더구나 개중 덩치가 큰 놈은 40레벨 영웅과 비슷할 지경이었다.
병력을 최대한 뒤로 물렸다.
혹시 놈들이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중립 괴물 여섯 마리가 있어요. 문제는 그놈들 모두 최상급 괴물이라는 점입니다. 대장격인 한 마리는 그보다 더 셉니다. 거의 지역 우두머리 수준이에요.”
“여섯 마리요? 맙소사! 공간도 좁고, 우리끼리 잡기는 힘들겠는데요?”
순찰자가 혀를 내둘렀다.
현재 시혁은 19 레벨, 순찰자는 15 레벨이다. 드워프들은 서른 명 정도만 데리고 왔다. 미궁 안이다 보니 대규모 병력은 운용하기 힘들었으니까.
이 정도로는 두 마리를 상대하는 게 한계였다. 여섯 마리를 다 상대하다간 금방 전멸하게 생겼다.
결국 물러났다.
레벨을 올리고, 영웅도 추가로 소환한 다음 내려가야겠다.
손문철도 대응했다.
풍족하게 모이는 마나를 이용하여 나무 거인 영웅을 소환했다. 미궁 하층으로 내려갈수록 통로도 커지니, 나무 거인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었다.
레벨을 25 정도로 맞춘 뒤 내려갔다.
나무 거인은 레벨 10 정도였다. 그래도 시혁의 지원을 받으면 전면에서 적들의 공격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이다.
천천히 계단을 밟았다.
음울한 공기가 시혁의 감각을 자극했다.
< 등극 이적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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