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등극 이적 -1- >
시혁은 손문철의 보물 창고에서 몇 가지 물건을 꺼내 왔다.
귀신의 눈물 조각, 유령 불꽃, 혼백 손거울.
손거울 안에 눈물 조각을 넣고, 그걸 유령 불꽃으로 지피면 영혼 돋보기가 된다. 영혼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걸 가공해서 안경처럼 만들었다.
푸르게 빛나는 안경을 쓰자, 앞에 있던 영웅 하나가 미심쩍다는 얼굴로 시혁을 보았다.
“정말 귀환만 하면 되는 겁니까?”
“예. 보물은 다음 방문 때 받아 가시면 됩니다.”
“허 참, 제가 아르거스에 많이 와본 건 아니지만 귀환 한 번 하면 보물을 주겠다는 의뢰는 또 처음입니다. 어려운 것도 아니니 그렇게 하지요.”
영웅이 눈을 감았다.
전신에서 빛이 번져 나왔다.
영웅의 몸이 점차 소멸되었다. 지우개가 슥슥 지워나가는 듯한 광경이었다.
시혁은 집중해서 그 광경을 주시했다.
번지는 빛 사이로, 옅은 그림자 같은 게 빠져나왔다.
영웅의 영혼이다.
그림자는 그 자리에서 물결처럼 출렁였다. 그것도 잠깐, 어떤 힘에 이끌려 부상하기 시작했다.
시혁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영혼이 날아가는 방향에 한 가지 천체가 보였다.
전장군.
빛나는 작은 세계들이 모여서, 흡사 달처럼 보이는 곳이다. 영혼이 그쪽으로 빠르게 날아가더니, 어느 순간 가속하여 사라져버렸다.
통찰 마법을 사용했지만 정확히 어디서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천체 망원경을 만들었다.
드워프의 기술과 시혁의 지식이 합쳐진 물건이었다. 반짝이는 세계의 겉모습도 어느 정도는 관찰이 가능했다.
두 번째로 섭외한 영웅을 통해, 영웅의 영혼이 어디서 사라지는지 알 수 있었다.
바로 한 곳에 뭉친 작은 세계들 한가운데였다. 세계가 모여 있는 것만으로도 어떤 힘이 발생하여, 일종의 차원문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손문철의 영혼을 그쪽으로 보내는 게 관건이다.
다만 한 가지.
전장에서의 전투가 끝난 다음에도 귀환하지 않는 게 좀 이상했다. 천체 망원경으로 관찰한 바로는, 중심에서 일어나는 힘에 의해 자연스럽게 귀환해야 하는데.
그에 대해 묻자, 손문철이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전투가 끝날 때마다 이상한 것을 느꼈습니다.]
[어떻게요?]
[뭔가 절 빨아들이는 느낌과 함께, 어디에 걸린 것 같은 느낌을 동시에 받았습니다.]
[걸린 것 같다라…… 더 정확히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음, 비유하자면 문은 열렸는데 빗장이 걸려 있어 통과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할까요? 이거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네요.]
손문철은 시혁의 정신에 자신의 느낌을 전달했다.
그 느낌을 직접 느끼자, 시혁도 무슨 말인지 깨달았다.
영혼 추방이 지금도 작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육체로 돌아가지 못하고, 아르거스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걸 극복하려면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써야 한다.
강력한 힘으로 지구를 향해 쏘아 보내거나, 지구에서의 영혼 추방을 중단시키거나.
시혁은 한 가지 사실에 주목했다.
영혼 추방이 계속해서 작용하는 게 가능한가? 그것도 시혁의 눈을 피해서?
불가능하다.
아니다. 딱 한 가지 가능성은 남아 있다.
천왕봉 수정. 그것을 쓴다면 손문철의 영혼이 지구로 귀환하는 것을 막는 게 가능하지 않겠나.
시혁의 추측에 손문철도 동의했다.
[천왕봉 수정이라면 가능하지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간해서는 방해를 뚫기가 힘들 것 같은데요. 원장님이 지구에서 천왕봉 수정에 접근해 보면 어떨까요?]
[힘듭니다. 천왕봉 수정을 꼭꼭 숨겨놔서, 제가 접근할 수는 없어요. 애초에 제가 협회에 깊이 관여하던 사람도 아니고요.]
[허허 참, 이거 큰일이네요.]
천왕봉 수정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당초 생각대로 아르거스에서 손문철을 지구로 쏘아 보내는 게 최선이었다.
고민을 하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진리 진영 승천 이적.
그걸 응용하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승천 이적은 축적한 마나를 이용, 세계의 진실을 엿보아 막대한 힘을 얻는다. 이걸 살짝 뒤틀어서, 손문철의 영혼을 지구로 날리는 것이다.
사실 아르거스 행성보다는 전장에서 시작하는 게 더 좋긴 했다. 두 곳은 거리가 멀고, 당연히 그 거리를 이동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테니까.
손문철도 시혁의 의견에 찬성했다.
[좋습니다. 제 생각에도 그게 낫겠습니다. 그럼 제가 원장님을 등용해야겠네요.]
[아직은 아닙니다. 이적을 변환시키는 작업이 필요해요.]
[제 영웅들의 귀환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시간에 맞출 수 있을까요? 기왕이면 저와 호흡을 맞춘 영웅들과 함께 전장에 가는 게 좋을 텐데요.]
[시간이 좀 걸리니까, 차라리 새로운 영웅들을 임시 계약해서 전장에 가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흠, 그도 그렇겠습니다. 그 부분은 원장님께 맡기지요. 이적이 다 완성되면 알려주세요.]
[알겠습니다.]
새로운 이적을 만드는 일이다. 쉽지 않았다.
그래도 참고할 승천 이적이 있어 다행이었다. 아예 맨땅에서 시작하려면 최소 몇 달은 소요되었을 텐데, 기본 골격을 다 베껴오다시피 하니 기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방향성만 살짝 트는 것으로 시작했다.
승천 이적은 전장에서 아르거스 행성 방향을 향한다. 반면 새로 만들 이적은 전장군 중심을 향해야 했다.
거기서 물꼬가 트였다.
그 다음에는 모은 마나를 통해 전장군 중심과 전장을 잇는 영혼 통로를 만들도록 했다. 이걸 통해 귀환시키는 건데, 한 가지 부수적인 효과가 생겼다.
이적이 실행되는 즉시, 전장 내의 모든 영혼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간다. 아울러 이적을 사용한 반신의 색으로 세계가 물든다.
단순히 반신의 귀환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참 재미있는 일이었다.
손문철을 귀환시키기 위해 만든 이적이, 새로운 승리 방법이 될 줄이야.
시혁은 아예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등극 이적.
원래 의도를 숨기고, 부가적으로 얻은 효과를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손문철도 웃음을 터뜨렸다.
[등극 이적이라고요? 살다 보니 별 일이 다 있네요.]
[이제 전장에 가서 등극 이적을 쓰기만 하면 됩니다. 쉽지는 않을 겁니다. 마나 집중점이 많은 전장이 걸려야 하고요.]
[제 영웅들은 이미 귀환 시간이 되어서 전장에서 전투를 치르고 돌아갔습니다. 새로운 영웅들을 섭외해야 합니다.]
[용광로 주변 술집에 영웅들이 모이는 걸 봤습니다. 그들에게 한 번 제의해보지요.]
다행히 숫자를 맞출 수 있었다. 다만 급히 모은 까닭에 출신 병종과 계급은 좀 낮은 편이었다.
능란 계급 엘프 순찰자.
수신 계급 드워프 대포병.
입문 계급 인간 마법사.
입문 계급 나무 거인.
계약하고 좋다고 따라온 드워프 대포병이 불만을 터뜨렸다.
“뭐야! 입문자들이잖아? 너무 오합지졸만 모인 거 아냐?”
인간 마법사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전직도 안 해 본 주제에. 난 2차 전직자다. 전장 경험만 따지면 너보다 다섯 배는 많이 겪어 봤을 걸?”
“뭐야? 이 허약한 마법사 나부랭이가……”
“두 분 다 진정하세요. 아무리 1회성 계약이지만, 전장에서 승리하려면 우리끼리 공조가 제대로 이뤄져야 합니다. 기왕이면 승리를 해야 우리 모두에게 이득이 되지 않겠습니까? 정 계속 시비를 거시면, 같이 가는 걸 포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흥!”
드워프가 고개를 돌렸다.
미전직자에 계급도 낮고 중급 병종 출신이었다. 계약을 맺기가 무척 어려웠다. 기껏해야 1차 확장을 끝낸 약한 반신들에게 임관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던 차에 4차 확장을 바라보는 산사태 군주가 손을 내밀었으니 잡아야지. 대가로 받기로 한 보물도 평소 꿈꾸기 어려운 진귀한 물건이었으니까.
영웅들을 진정시켜놓고, 신전의 청동상 앞에 둘러앉았다.
승리 방법에 대해 설명했다.
“이번 전투 목적은 등극 이적을 쓸 마나를 모으는 겁니다.”
영웅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등극 이적이라니?”
“그런 이적도 있습니까?”
“제가 철 진영 반신 이적은 모두 겪어 봤는데, 그런 이적은 없었습니다.”
“그럴 겁니다. 이번에 새로 만들었으니까요.”
간단히 설명했다.
승천 이적을 개조했고, 등극 이적을 쓰면 무조건 승리한다는 말에 영웅들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대단하군! 그런 이적이라면 앞으로 철 진영의 승률이 무척 높아지겠어!”
“꼭 그렇진 않습니다. 모든 진영이 다 쓸 수 있거든요. 선 성향이든, 중립 성향이나 악 성향이든 가리지 않습니다.”
“히야, 그럼 진리 진영이 좀 약세로 돌아서겠는데요?”
“솔직히 그 동안 진리 진영이 유리하긴 했지. 잘 버티기만 하면서 마나를 모아서 이적 하나 쓰면 끝이었잖아? 다른 진영들도 그런 이적이 필요했어.”
승천 이적과 비슷한 이적이 아예 없진 않다.
문제는 효율.
지금까지 개발된 다른 이적은 승천 이적보다 마나가 몇 배는 더 들었다. 그럴 마나로 대규모 군대를 소환하는 게 훨씬 싸게 먹혔다.
사실 소 뒷걸음질 치다 개구리 잡은 격이긴 했다. 그래도 승천 이적과 비슷한 효율의 이적을 만들었으니 다들 놀라는 것이다.
침묵하던 나무 거인이 느린 어조로 말했다.
“소환 순서는 어떻게 되오?”
“아마도 제가 가장 먼저 소환될 것 같은데, 그 다음에는 모르겠습니다. 상황을 봐야지요.”
“알겠소. 장기전이니 우리 모두 소환되겠구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엘프 기사가 그 점을 지적했다.
“진리 진영은 연구만 해도 마나가 쌓이잖아요? 철 진영은 뭘 제작해야 마나가 생기는데, 그걸로 마나를 충당하기에는 자원이 모자라지 않을까요?”
“방법은 생각해 뒀습니다. 마나 집중점이 전혀 없다고 해도, 마나를 생산할 방법이 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손문철에게 모든 준비가 끝났음을 통보했다.
즉각 전장 참가 선언을 했다.
손문철의 성역 전체가 달아올랐다.
은색의 파도가 뒤덮더니, 손문철과 다섯 영웅을 허공으로 쏘아 올렸다.
우주를 가로질러 전장에 도착했다.
시혁은 몽롱한 와중에도 전장을 차근차근 살폈다.
거대한 산이다.
척박했다. 돌과 바위로 이루어져 있었다. 평평한 곳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분지 지형이 세 군데 있는데, 모두 반신이 위치한 듯했다.
이번 전장에서 맞붙게 될 반신은 둘.
어둠 진영의 칠흑 지팡이와 야만 진영의 약탈왕.
돌산이니만큼 쉽게 이길 줄 알았는데, 소환되어놓고 보니 그렇게 쉬운 전장이 아니었다.
손문철이 시혁에게 말했다.
[돌산 안에 거대한 미궁이 있습니다. 지상이 아니라 지하가 진짜 전장 같습니다. 탐지 이적으로 살펴보니, 지하에 마나 집중점이 여덟 개나 있고 중립 괴물도 강한 놈은 거기 다 몰려 있어요.]
[상대 반신이 칠흑 지팡이와 약탈왕이라고 했지요? 이런, 공교롭게도 세 진영 모두 지하에서의 싸움에 일가견이 있는 진영이네요.]
[그렇게 됐습니다. 드워프 수호자나 복수자 영웅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아쉽게도 그 두 병종 출신 영웅은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기존에 손문철이 등용한 강철 요새와 용암 파괴자 때문인 듯했다. 그 둘은 군주 계급의 강력한 영웅이니, 차라리 다른 반신을 찾아가는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시혁은 드워프 소환자들을 거느리고 지저로 들어갔다. 전투 초반이라 대부분이 기본 병종인 도끼병과 방패병, 쇠뇌병이었다. 장갑병과 미늘창병 정도만 조금 섞여 있었다.
< 등극 이적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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