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물인간 [5권 끝] >
어째서?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영혼 회복은 매우 강력한 특기다. 급속 치료 및 광폭화처럼, 거장 계급에서 얻은 특기이기 때문이다.
이미 영혼이 육체를 떠났다면 모를까, 그 외의 경우라면 반드시 의식을 회복할 수 있다.
문병을 온 강찬이 시혁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원장님, 언제쯤이면 협회장님이 일어나실까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제 계산대로라면 진작 일어나셨어야 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네요.”
“협회장님이 안 계시니 요즘 정말 난립니다. 매스컴도 그렇고, 협회 돌아가는 꼴이 말이 아니에요.”
시혁이 보기에도 그랬다.
매스컴이야 그렇다 치고, 협회가 예전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뭐 하나 요청을 해도 지지부진, 알아보겠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일각에선 이대로 손문철이 식물인간이 될 거라는 관측이 나왔다. 의식을 잃은 시간이 길어질수록 예후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 점은 시혁도 잘 안다.
그래서 더 답답했다.
생각해 보면 발현자가 된 이후, 시혁은 탄탄대로를 걸어 왔다. 모든 괴수 질병을 치료하며 명성을 떨쳤다. 벽을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필이면 그 벽이 손문철이라는 게 문제.
손문철은 시혁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사람이다. 아르거스에 대한 사실도 손문철에게만 털어놓지 않았나. 협력자이자 조언자인데, 이렇게 누워만 있게 하면 안 된다.
강찬이 몸을 일으켰다.
“원장님,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협회장님 좀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좋아지실 겁니다.”
시혁은 희망을 담아 이야기했다.
시종일관 굳어 있던 강찬의 얼굴이 훈훈해졌다.
“원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마음이 놓입니다. 참, 원장님. 혹시 아사달 공격대장은 여기 안 왔었습니까?”
“아사달 공격대장이요?”
장현을 말하는 것이다.
날카로운 눈이 인상 깊었지.
강찬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은밀하게 속삭였다.
“예. 그 사람 평판이 좋지 않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할까요? 능력은 있어서 우리나라 최고 공격대를 이끌고 있습니다만, 가까이 대하기는 꺼려지는 사람입니다. 협회장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도 들리고요.”
“S급 이능력자에 능력 괜찮으면 협회장 하는 것도 좋지요. 설마 협회장님을 해코지하거나 그러진 않을 것 아닙니까?”
“하긴 그렇습니다.”
강찬이 인사를 하고 떠났다.
시혁은 원장실로 돌아왔다.
한의원은 여전히 바빴다. 하지만 예전보다는 좀 환자 수가 줄었다. 며칠 전만 해도 발 디딜 틈이 없었으나, 이젠 많이 바쁜 한의원 수준이 되었다고 할까.
꽉 차 있던 입원실도 조금 여유가 생겼다. 대략 한두 병상 정도는 남아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손문철이 회복되지 않자, 시혁에 대한 대중의 환상이 깨진 것이다. 입 가볍게 떠들어대는 언론이 거기에 한몫을 했다.
좀비 사태 때는 화타나 편작의 환생인 것처럼 선전하더니, 태도가 180도 변했다.
꼭 누군가에게 사주를 받은 듯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별로 신경 쓰진 않았다. 오로지 손문철의 회복에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언론의 행보가 깃털처럼 가볍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으니까.
민수진이 원장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원장님, 과일 좀 드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요즘 걱정이 많으시죠?”
“손문철 님이 걱정이죠. 제 계산으로는 분명히 깨어날 때가 지났는 데도 저러시니……”
“뭔가 다른 원인이 있는 게 아닐까요?”
“다른 원인이요?”
“네. 원장님 그 동안 이능 치료도 수백 번은 하시고 오색 치료에 각성 치료에 별 거 다 하셨잖아요. 어쩌면 뭔가 다른 게 숨어있을지도 몰라요.”
딴에는 그렇다.
시혁도 넋 놓고 효과 없는 이능 치료만 한 것은 아니다.
소누스 콜라보르 때 썼던 감각 치료도 했다. 아르거스에서 지식을 가져와 써먹기도 했다. 그 모든 처방이 무효였으니, 뭔가 놓친 것은 없는지 살펴봐야겠다.
시혁의 얼굴에 활기가 감돌았다.
“역시 간호과장님이십니다. 제가 놓치고 있던 걸 짚어 주셨네요. 바로 확인해봐야겠습니다.”
민수진이 빙긋 웃었다.
“네, 파이팅하세요!”
일단 통찰 마법으로는 더 알아내는 게 불가능하다. 그 점은 지난 2주 간 뼈에 사무치도록 실감했다.
탐지 계열 이능력자도 마찬가지였다. 아사달 공격대의 채현애가 방문해서는, 손문철의 몸에는 아무 이상도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것이다.
최후의 방법으로, 영혼 계열 이능력자를 섭외했다.
워낙 희귀한 계열이라 섭외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먼저 대한이능협회에 협조를 구했어도 그랬다. 최근 영혼 계열 이능력자가 필요한 곳이 많아 힘들다는 것이다.
시혁은 답답함에 가슴을 쳤다.
[협회장님 상태를 더 확인해 보려는 겁니다.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겁니다. 하루 정도만 해도 충분한데, 그 만큼도 시간을 못 냅니까?]
광주 지부장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게, 몇 달 전부터 영혼 계열 이능력자가 씨가 말랐습니다. 듣자니 중앙회에서 뭔가 진행하는 게 있어서 거기 다 투입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제 능력으로는 거기서 사람을 빼오는 건 불가능합니다.]
중앙회에서 뭔가를 하고 있다고?
뭔지 알겠다.
천왕봉 수정 관련한 일일 것이다. 그걸 다루려면 영혼 계열 이능력자들이 필수니까.
별 수 없었다.
이미라를 통해 협조를 구했다. 알아보겠다고 하더니, 얼마 후 이미라에게 전화가 왔다.
[죄송해요. 제가 아는 이능력자랑 얘기 다 됐었는데, 갑자기 협회에서 파견을 보냈대요. 중요한 일이라 광주에 못 갈 것 같다고 연락이 왔어요.]
[그래요? 공교롭네요. 다른 이능력자는 없을까요?]
[힘들 것 같아요. 영혼 계열은 너무 적어서요.]
애초에 영혼 계열 이능력자는 딱 두 병종이다.
영 인도자와 영혼술사.
그러니 수가 적을 수밖에 없다. 영혼 진영의 수도 적고, 이 두 병종은 더욱 적으니까.
다음으로 강찬에게 부탁을 했다.
강찬도 어렵게 영혼 계열 이능력자를 섭외했다. 울산에 사는 A급 이능력자인데, 출산 때문에 쉬고 있다가 연락이 닿은 것이다.
이능력자가 시혁의 한의원을 방문했다.
어렵게 구한 사람이니만큼, 반갑게 이능력자를 맞이했다.
“어서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반가워요. 그런데 영혼 계열 이능력자가 그렇게 없나요? 아무리 그래도 협회장님 살펴보는 건데, 누구 한 명은 자원할 것 같은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강찬이 옆에서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을 했다.
시혁은 눈짓으로 제지했다.
이상하다는 것은 시혁도 느끼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손문철의 치료를 위해 협조 요청을 해도 묵살된다는 것은 뭔가 야료가 있다는 뜻 아니겠나.
구린 냄새가 났다.
협잡, 야합, 뒷공작의 냄새가.
이능력자가 손문철의 바로 옆에 자리를 잡았다. 정신을 집중하자, 회색 에테르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에테르는 손문철의 머리로 스며들었다.
이능력자가 몸을 움찔했다.
“이상하네요.”
“뭐가 말입니까?”
“협회장님 영혼을 감지할 수가 없어요. 아니, 있긴 한데 아주 흐릿한 느낌? 음…… 꼭 영혼은 어디 멀리 가 있고, 영혼과 연결된 끈만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시혁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능력자 본인은 모르겠지만, 이 발언이 의미하는 바는 자명하다.
지금 손문철의 영혼은 아르거스에 가 있다는 것.
그러니까 영혼 회복으로도 깨어나지 않았겠지. 영혼이나 정신에 상처를 입은 게 아니니까.
다만 이상한 점은, 어째서 손문철이 아르거스에 가 있냐는 거였다. 이미 돌아올 시간이 한참은 지났지 않나.
시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인을 알겠습니다. 그런 거였네요.”
이능력자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뭔데요? 혼자만 알고 계시지 말고 저한테도 가르쳐주세요.”
“아직 기밀입니다. 협회장님이랑 저만 아는 사실이에요. 협회장님께서 직접 말씀하신다면 모를까, 제가 말씀드리기는 좀 그렇습니다.”
“아, 그래요?”
G급 이능력자의 비밀인가 보다, 이능력자는 그렇게 생각하고 혼자 납득했다.
시혁은 이능력자에게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희망이 보입니다.”
이능력자가 살포시 웃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사실 협회장님은 제게도 은인이에요. 2014년에 삼두룡이 나타났을 때, 친정 부모님을 살려주신 게 바로 협회장님이거든요.”
“그러셨습니까?”
이런 인연이 있어서 선뜻 돕겠다고 달려온 것이다.
시혁의 마음이 푸근해졌다.
이능력자가 더 자세히 손문철을 살폈다.
영혼의 끈은 견고했다. 끊어지거나 할 염려는 없었다. 다만, 그 부근에 뭔가 인위적인 흔적이 남아 있다고 했다.
“인위적인 흔적이라고요?”
“네. 저 같은 영혼 계열 이능력자들이 영혼을 뽑아냈을 때랑 비슷해요. 똑같지는 않은데, 누군가 인위적으로 영혼을 육체 밖으로 추방한 것 같아요.”
“그게 정말입니까? 어떤 개새끼가 그런 짓을……”
옆에 있던 강찬이 사납게 눈을 번뜩였다.
시혁은 비로소 납득했다.
그랬으니 손문철이 아르거스로 갔겠지. 평소에도 자주 가던 곳이니까.
그게 아니었다면 영혼과 육체가 이미 단절되었을지도 몰랐다. 아르거스 신들의 힘이 영혼과 육체의 연결을 보호하니, 육체에서 추방된 영혼이 제 2의 안식처를 찾아간 것이다.
강찬이 주먹을 쥔 채 말했다.
“범인을 찾을 수는 없습니까? 감히 협회장님을 암습한 자를 찾아 단죄해야 합니다.”
이능력자가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제 힘으로는 불가능해요. 흔적이 너무 얕아요. S급 이능력자도 아마 알아보기 힘들 거예요.”
“협회장님을 치료하는 게 더 급합니다. 추방된 영혼을 다시 불러올 수는 없습니까?”
“영혼이 어디 있는지 알면 가능한데, 전 느끼지를 못하겠어요. 제 능력으로는 안 될 것 같아요.”
하긴 우주 저 멀리에 영혼이 가 있는데 어떻게 불러오겠나. 그건 G급 이능력자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딱 한 가지 방법이 있었다.
천왕봉 수정.
그걸 소모한다면 가능했다. 아르거스가 어디 있는지는 시혁도 모르지만, 손문철의 육체에 남은 영혼과의 연결을 이용하면 되니까.
천왕봉 수정을 잃지만, 아르거스의 위치를 알 수 있게 되니 충분히 의의가 있었다.
바로 협회에 요청을 했으나 협회에서는 단칼에 거절했다.
확실하지도 않은 일에 천왕봉 수정을 소모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상했던 바.
강찬이 옆에서 몸을 푸들푸들 떨었다.
“지금 협회는 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가고 있는데 비대위장이 바로 장현이랍니다. 그 새끼가 협회장님한테 무슨 수작을 부린 게 틀림없어요. 어쩌면 그 새끼가 진범일 지도 모릅니다.”
사실 시혁도 그렇게 생각했다.
우연이었을까?
외뿔 지저뱀을 잡던 때 장현이 유독 두꺼운 장갑을 끼고 있었던 게?
속으로는 수상쩍게 여기면서도, 시혁은 당부하듯 말했다.
“강찬 씨, 아무리 그래도 다른 곳에 가서 그런 얘기 하지 마세요. 진짜 그렇다고 확신할 수도 없잖아요?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협회장님이 저렇게 되시고 누가 가장 이득을 봤습니까? 바로 장현이잖습니까? 원래 사건이 벌어지고 이득을 가장 많이 보는 놈이 범인입니다.”
딴에는 그렇다.
시혁은 손문철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2주 동안 누워만 있어서 그럴까. 상당히 핼쑥해졌다. 팽팽하게 차 있던 근육도 조금씩 줄어들어 몸이 앙상하게 변했다.
말없이 앉아 있자, 강찬이 조심스럽게 시혁에게 물었다.
“원장님, 방법이 없을까요?”
담담하게, 그러나 힘을 주어 말했다.
“있습니다.”
지구에서는 없다.
대한이능협회가 훼방을 놓는 한, 손문철은 이대로 식물인간이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르거스에서는 얘기가 다르다.
손문철은 철 진영의 반신.
그들 중 최근 몇 달 동안 고향 세계로 돌아가지 않은 반신을 찾으면 된다. 손문철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르거스 방문과 고향 세계 체류를 반복하니까.
어느덧 밤이 찾아왔다.
시혁은 몸담고 있던 강철왕에게 작별을 고했다. 강철왕이 섭섭해 했지만, 마침 상위 계급이 된 시혁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8개의 신역 중 대모 세계수를 찾아갔다.
안면이 있는 엘프들을 통해, 150일이 넘게 아르거스에 남아 있는 반신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과연 있었다.
산사태 군주.
성역의 4차 확장을 눈앞에 두었고, 땅굴을 통해 병력을 수송하는 작전을 몇 차례 보인 강력한 반신이었다.
[5권 끝]
< 식물인간 [5권 끝]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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