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 세계의 한의사-120화 (120/250)

< 환생 -2- >

쓰러져 있던 시혁의 몸이 살짝 꿈틀거렸다.

치명상을 입은 것 같았지만, 기실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세계수의 가호 덕분이었다. 단 한 번, 치명상을 무효화하는 힘이 발동한 것이다.

시혁은 슬쩍 고개를 들었다.

당분간은 몸을 사려야한다. 그래도 시혁에겐 낫슈바켈의 반지가 남아 있으니, 위험할 것 같으면 반지를 써서 몸을 빼면 된다.

바리엘과 겐타는 설전을 벌이느라 시혁이 멀쩡한 것도 몰랐다. 시간이 좀 지나자 알아채긴 했지만, 이미 재앙이 그들의 턱밑에 다가선 다음이었다.

바다가 요동쳤다.

어째 해수면이 낮아진다 싶더니, 저 멀리서 거대한 물의 벽이 밀려오고 있었다.

설전이 뚝 끊겼다.

함대가 부산하게 움직였다.

피할 수는 없었다. 조기에 발견했다면 모를까 이미 지척에 도달했으니까.

하늘에서 빛이 떨어졌다.

방어막이 함대 전체를 감쌌다. 두 반신이 합작을 한 터라, 참으로 견고한 방어 이적이었다.

해일이 그 위를 덮쳤다.

바다 진영 영웅이 대단하기로서니, 반신을 당해낼 수는 없는 법이다.

물의 벽이 산산이 흩어졌다.

방어막은 여전히 견고했다. 초대형 우산처럼 함대를 지키고 있었다.

소환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함대가 진형을 갖추자 비로소 방어막이 걷혔다.

연합 함대가 질서정연하게 전진해 왔다.

더 이상 변수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인간 선원들이 전투 배치에 들어가고, 천사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쾅! 쾅쾅!

포격을 개시했다.

소환자들이 방어 마법으로 막아냈다. 그저 큰 돌덩이를 날리는 수준의 대포라 어렵진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궁극기가 더해지면 얘기가 달라진다.

기함의 선수에 설치된 작은 대포가 인간 함대 중앙을 조준했다. 대포 전체가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폭음을 줄기차게 토해내기 시작했다.

단 한순간에, 족히 수십 발을 발사했다.

포탄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게 인간 함대를 난타했다. 특히 기함을 비롯한 몇 척에 집중되어, 손 써 볼 새도 없이 침몰하고 말았다.

섬의 마녀도 활동하고 있었다.

전진하던 함대가 암초에 걸렸다. 물의 창이 배에 구멍을 뚫어놓기도 했다. 물이 콸콸 들어오고 배가 기울어지자, 겨우 냉정을 찾았던 함대가 또 혼란에 빠졌다.

시혁도 마법을 썼다.

사용한 것은 흔한 폭발 마법이었다. 그런데 지팡이에 저장된 일곱 개까지 몽땅 사용하자, 무려 8차례 연속 폭발이 일어났다. 화염이 사방을 휩쓸며, 함선들이 도처에서 박살이 났다.

놀란 음성이 북쪽 하늘에서 울렸다.

[이게 어찌된 일이지?]

[말도 안 돼. 무슨 수작을 부린 거냐? 어떻게 창해 장로의 영웅들을 영입했지?]

비로소 네 영웅이 되살아난 것을 알아챘나 보다.

하늘이 은색으로 물들었다.

지금까지 힘을 비축하고 있던 강철왕이 이적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바탕 이적 전투가 벌어졌다.

아무래도 밀렸다.

2대 1 아닌가. 두 반신의 이적이 서로 간섭해서 효율이 떨어지긴 했지만, 강철왕 혼자 당해내기는 힘들었다.

어느새 돌아온 파도 선봉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좀 불리한 것 같은데? 괜찮겠나?”

“괜찮습니다. 궁극기는 언제 다시 사용할 수 있습니까?”

“조금만 지나면 될 것 같아. 이거 신통한데? 원래는 하루에 1번 정도가 고작인데, 그 반의 반도 안 걸리겠어.”

파도 선봉장은 자신의 가슴을 매만졌다.

지금 파도 선봉장의 몸 안에 오행 순환체 3개가 몽땅 들어가 있다. 저마다 다른 부위에 깃들어서, 파도 선봉장의 육체를 최대한으로 강화시킨 상태였다.

오장, 근육, 혈관, 살, 피부, 뼈, 눈, 코, 입, 귀, 육감……

덕택에 파도 선봉장은 엄청난 해방감을 맛보고 있었다. 잠시 후 광폭화와 급속 치료, 영혼 회복까지 더해지면 무시무시할 것이다.

“오색 현자!”

바리엘이 시혁을 노리고 날아왔다.

멕베르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비록 하늘은 날 수 없지만, 방패에서 나온 힘이 바리엘의 진로를 강제로 바꾸었다. 흰색 검이 방패를 때렸으나, 멕베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멕베르가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이봐, 네 상대는 나야! 한 번 어우러져 보자고!”

“이익! 땅꼬마는 비켜라!”

한편, 겐타는 꾸준히 시혁을 노렸다.

방어 마법을 써서 막아내고는 있지만 슬슬 한계에 봉착했다. 만약 궁극기를 쓰고 공격을 날린다면, 한두 번 막아내는 게 고작일 것이다.

시혁은 인접한 적 영웅들을 향해 마법을 퍼부었다. 약화 마법을 걸고 속박 마법을 걸었다. 화끈한 공격력은 없어도, 확실히 발목을 붙들고 있었다.

참을 성 있게 기다렸다.

다른 두 50 레벨 영웅도 시혁과 멕베르가 있는 쪽으로 공격을 날리고 있었다. 마법사와 기병대장 영웅이 합류해서 상대가 됐지, 안 그랬으면 진작 사단이 났을 것이다.

“으하하하, 오래 기다렸다!”

적 함대 가운데에서, 쩌렁쩌렁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드디어 궁극기의 대기시간이 끝났나 보다.

시혁은 세 오행 순환체를 이용, 세 가지 특기를 발현했다.

급속 치료, 광폭화, 영혼 회복.

트롤 보다 더한 재생력이 전신을 감쌌다. 광폭화로 인해 전투력이 압도적으로 증폭되고, 영혼 회복으로 멀쩡한 정신을 유지했다.

최종 병기가 출현하더라도 단신으로 찢어죽일 정도.

파도 선봉장의 눈이 흉악한 빛을 뿜었다.

삼지창을 들어 올리자, 바다가 거세게 출렁이며 거대한 벽이 일어섰다.

적 영웅들이 기겁을 했다.

“이런 미친!”

“아까 그 해일이 이적이 아니었단 말이냐?”

아까도 오행 순환체에 의해 강화되어 있어서, 궁극기라고 생각을 못한 것이다.

물의 벽이 사방으로 밀려갔다.

함대가 찢어졌다.

광포한 물거품이 함대를 집어삼켰다. 천사들의 부유선이든, 인간들의 범선이든 몽땅 박살이 났다.

여기 휩쓸린 배만 연합 함대의 절반이 훌쩍 넘었다.

자연히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었다.

숫자로 따지면 아직 연합 함대나 드워프 함대나 비등비등하다. 하지만 이런 처참한 광경을 목격하고 전투를 제대로 치를 수나 있겠나.

게다가 파도 선봉장이 날뛰고 있었다. 공격 한 번이면 배를 두 조각으로 쪼개놓으니, 어떻게 잘 대처하기가 힘들었다.

이렇게 싸우면 결국 강철왕의 승리로 돌아갈 터.

방어 이적과 회복 이적이 섬광처럼 내리꽂히고, 맹공을 퍼붓던 영웅들이 몸을 움찔했다.

한 마디씩을 남기며 몸을 돌렸다.

“치잇, 두고 보자!”

“지금은 물러가지만, 결국 패도 장군께서 승리할 것이다!”

연합 함대가 퇴각했다.

시혁은 멀리 북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올 때가 됐는데……’

과연 그러했다.

연합 함대가 허겁지겁 달아나는데, 그 앞에 소용돌이가 하나 생겼다.

하나?

아니다.

둘, 셋, 늘어나더니 십여 개까지 불었다.

연합 함대의 앞을 반원 형태로 감싸고 있었다. 이미 탄력을 받은 이상, 소용돌이를 피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시혁의 얼굴에 흐린 웃음이 걸렸다.

기다리고 있던 물건이 도착한 것이다. 바다 진영 영웅이 써서 그런지, 시혁이 사용하던 때와 비교해서 훨씬 강력한 면모를 뽐냈다.

연합 함대가 혼란을 일으켰다.

어떻게든 멈추려고 하는데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전속력으로 달아나던 참이라 더욱 그랬다.

강철왕이 강한 어조로 명령했다.

[지금이다. 적들은 독 안에 든 쥐 신세다. 총공격을 퍼부어라!]

함대의 대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연합 함대는 그대로 난타 당했다.

뒤늦게 몸을 틀어 반격하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소용돌이가 점차 다가왔을 뿐더러, 파도 선봉장의 해일 궁극기가 또 작렬했기 때문이다.

결국 함대 전체를 잃고 말았다.

그나마 영웅들은 도망을 쳤지만 그들만 가지고 뭘 하겠나. 함대를 십분의 일도 복구하기 전에 강철왕의 함대가 들이닥칠 텐데.

환호성이 터졌다.

“이겼다!”

“바다여서 긴장했는데, 별 거 아니잖아?”

“어서 갑시다! 놈들이 함대 복구하기 전에 가서 끝장을 보자고요!”

소환자들이 벌써부터 난리였다.

하지만 드워프 함대는 움직이지 않고 잠깐 기다렸다.

몇 분 후, 심해 사냥꾼이 기함 갑판으로 올라왔다.

그 손에 파란색의 구슬 하나가 들려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간단한 일이었소. 난 수압의 영향을 받지 않으니까. 자, 이걸 어떻게 하지?”

심해 사냥꾼은 심해의 보주를 들고 생각에 잠겼다.

시혁은 파도 선봉장을 가리켰다.

“선봉장님께 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선봉장님의 해일 궁극기와 결합하면 엄청날 겁니다.”

“그게 좋겠소.”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파도 선봉장이 보주를 건네받았다.

심해 사냥꾼이 아깝다는 눈을 빛냈다.

잠깐 써본 것만으로도 그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본인이 가지면 좋겠으나, 전장 내의 물건은 오직 반신만 소유하는 게 가능했다.

슬슬 전진했다.

첫 목표는 패도 장군.

천상 진영보다 권세 진영이 더 껄끄러웠다. 비록 해군은 철 진영이 더 우위에 있으나, 위협적인 건 사실이었으니까.

심해의 보주를 이용, 날치처럼 바다 위를 달렸다.

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패도 장군의 본성에 도착했다.

다른 섬은 몽땅 무시했다. 방어 시설이 있는 곳만 멀리서 포격하고 지나갔다. 어차피 본성의 거인 석상만 부수면 끝이 나니까.

저항은 격렬했다.

패도 장군은 모든 것을 내던지며 반항했다.

부질없는 짓.

거대한 해일이 섬 전체를 쓸어버린 다음이었다. 방어 시설이고 군대고 몽땅 작살이 났으니, 방어는 불가능했다.

“커헉!”

겐타가 피를 토했다.

이번에도 시혁을 노린 참이었다. 숨어 있다가 한 발의 화살을 날렸는데, 시혁은 짝니를 통해 그걸 보고 있었다.

반지를 써서 몸을 피했다. 그 다음 짝니가 그림자 발톱을 한 방 먹였다. 상처를 통해 오행 순환체가 침범했다.

오행 순환체는 다섯 가지 극독을 생성했다. 독이 겐타의 몸을 빠르게 갉아먹었고, 결국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신세가 되었다.

겐타가 시혁을 보며 이를 갈았다.

“크으, 분하다. 그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여 놨어야 했는데……”

물론, 시혁은 그 말을 듣지도 않았다.

오행 순환체를 퍼뜨려 적들에게 상태 이상 마법을 거는 데 골몰하고 있었다.

파도 사냥꾼에게 오행 순환체를 전부 주입하지 않았냐고?

진작 회수했다. 심해의 보주가 있는 한, 굳이 오행 순환체가 없다고 해도 파도 사냥꾼은 무적의 위세를 자랑했으니까.

거인 석상이 무너졌다.

하늘이 하얗게 물들었다가 원래 색깔로 돌아갔다.

이제 하늘의 빛만 남았다.

잠시 쉬며 전열을 정비했다.

정비할 때에도 시혁의 활약이 대단했다. 오행 순환체를 넓게 퍼뜨리자, 수백 명을 동시에 치료하는 위엄을 보여준 것이다.

이 동안, 하늘의 빛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급히 만든 부유선을 이용, 강철왕의 본성을 기습했다.

이미 예측했던 바.

멕베르와 피고르가 막아냈다. 방어 시설도 충실해서, 큰 피해 없이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함대가 진격했다.

4시에서 8시 방향으로 호호탕탕 나아갔다.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

하늘의 빛이 항복을 선언했다.

시혁은 영웅들과 함께 백색과 금색이 어우러진 빛이 하늘로 솟구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바다 선봉장이 얼굴을 찌푸린 채 시혁을 돌아보았다.

“당신, 오색 현자라고 했지?”

“그렇습니다만.”

“다른 전장에서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이 또 내 적이 된다면, 난 그냥 계약을 파기해 버릴 거야.”

심해 사냥꾼은 주위를 살피더니 은밀한 제안을 했다.

“오색 현자, 그대는 선 성향과 중립 성향 반신과 계약할 수 있지? 창해 장로를 위해 봉사할 생각은 없나? 그대가 임관한다고 하면, 창해 장로께서 열 개의 촉수를 번쩍 들고 반기실 걸세.”

“하하,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아직 생각은 없습니다. 당분간 강철왕님 휘하에서 일할 생각이어서요. 혹시 바다 진영에서 일하고 싶어지면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적당한 말로 거절했다.

그러는 사이 세상이 흔들렸다.

철 진영 특유의 은색 빛이 하늘과 땅, 바다를 모두 감쌌다.

소환자들이 하나둘 귀환했다.

시혁도 그러했다.

시야가 깜깜해지고, 상무지구의 오피스텔에서 눈을 떴다.

< 환생 -2- > 끝

ⓒ 산호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