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색 고룡 -3- >
마법을 써서 다시 재워볼까?
하지만 시혁의 능력으로는 용의 마법 저항을 뚫을 수가 없다. 그래서 오행 순환체를 쓴 것이다.
문득,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났다.
영혼 회복을 썼다.
고통스러워하던 새끼용의 얼굴이 한결 나아졌다. 끙끙대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낫슈바켈을 직시했다.
[엄마, 울지 마. 난 괜찮아.]
한 순간에 어른스러워진 목소리다.
고통은 여전하겠지만, 영혼 회복에 의해 피폐해지던 정신이 회복되었다. 그러니 한결 편안해진 것이다.
낫슈바켈이 그것을 알아보았다.
[인간, 고맙다. 계속 그 능력을 써주지 않겠느냐? 내 아이가 편해진 것 같다.]
“그러죠.”
어려웠다.
두 오행 순환체로는 심장 주위의 독을 감싸고, 다른 하나로는 해독을 하고, 영혼 회복도 연달아 쓰고……
하지만 시혁은 힘든 줄을 몰랐다.
똘망똘망한 새끼용의 눈과, 낫슈바켈이 샘물처럼 흘리는 눈물을 보니 없던 힘이 저절로 솟구쳤다.
이윽고 거의 모든 부위를 치료하는데 성공했다.
새끼용의 상태가 매우 호전되었다. 스스로 일어나 앉기도 했다. 낫슈바켈이 새끼용을 껴안으려 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일단 제지했다.
남은 것은 딱 하나.
심장이다.
시혁은 잠시 숨을 골랐다. 무한의 주머니에서 마나 보석을 꺼내 부족한 마나도 보충했다.
다들 알다시피, 용의 심장은 막대한 마나의 집합체다. 전신에 퍼진 마나보다 심장에 모인 마나가 더 많았다. 자연히 독도 집중적으로 뭉쳐 있었다.
그냥 오행 순환체를 들여보냈다가는 낭패를 볼 것이다.
더 강력한 힘이 필요했다.
낫슈바켈이 조바심을 냈다.
[얼른 끝을 보지 않고 무얼 하느냐?]
무시하고 지팡이를 휘저었다.
방벽이 허물어졌다.
두 개의 오행 순환체는 뒤로 빠지고, 귀속된 오행 순환체만 심장으로 들어가 멸종하는 용과 맞서 싸웠다.
확연히 밀렸다.
멸종하는 용이 오행 순환체를 잡아먹을 듯 덤볐다.
그때 지팡이가 빛을 뿜었다.
머리에 달린 황금용의 심장에서 힘이 증폭되고, 어떤 명령이 물러나 있던 두 오행 순환체에게 전달되었다.
순환이 깨졌다.
상극하는 힘이 극도로 뻗어 나왔다.
그러면서 마나가 폭주했다. 부여된 마법 하나만 부여잡은 채, 세상 전체를 뒤엎을 기세로 들고 일어났다.
그 힘 전체가 멸종하는 용에게 몰려갔다.
어마어마했다.
해일이 항구 도시를 덮친 것과 같았다.
가파른 기세가 독을 휩쓸어 버렸다. 오행 순환체를 윽박지르던 게 무색했다.
그러자 당하고 있던 오행 순환체도 힘을 냈다.
더 맹렬히 회전하며 해독의 힘을 생성했다. 밖에서는 해일이, 안에서는 폭풍이 불어 닥치는 셈이었다.
결국 멸종하는 용이 졌다.
오행 순환체가 발하는 힘이 몸 전체를 가득 채웠다.
긍정적인 순환이 이루어졌다.
여기에 급속 치료와 영혼 회복이 더해지자, 새끼용은 금세 정상적인 상태를 되찾았다.
낫슈바켈이 크게 새끼용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실라! 살아났구나!]
[엄마!]
새끼용이 낫슈바켈의 품에 뛰어들었다.
낫슈바켈이 새끼용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시혁은 지팡이를 쥔 채 물러섰다.
새끼용이라고 하지만 심장이 가진 마나는 엄청났다. 칠대 위상의 용왕 지팡이와 두 오행 순환체의 희생, 둘 중 하나라도 없었다면 치료는 실패했을 것이다.
낫슈바켈과 새끼용은 한동안 엉엉 울부짖었다. 그러다 겨우 감정을 추슬렀다.
[영웅이여, 고맙다. 그대가 아니었다면 나는 내 사랑스러운 아이를 잃고 영세토록 절망했을 것이다.]
“아닙니다. 저도 바라는 게 있어서 한 일이었는데요.”
시혁은 웃으며 지팡이를 툭 쳤다.
지팡이에는 여러 기능이 있다. 기본적인 마나의 저장이나 마법 효과 증폭은 물론, 미리 마법을 저장하는 게 가능했다. 일곱 보석에 하나씩 저장할 수가 있는데, 유사시 의지만으로 발현이 된다.
낫슈바켈이 고개를 흔들었다.
[내 아이를 구해주었는데 겨우 지팡이 하나와 무한의 주머니 하나로 넘어갈 수는 없지. 뭐 더 바라는 것은 없느냐?]
“글쎄요?”
시혁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오히려 낫슈바켈이 더 애가 닳았다.
[금은보화를 원하느냐? 금으로 만든 궁전을 만들어 줄 수도 있다. 마법 무구를 원한다면 이 지팡이와 비슷한 것을 하나 더 주마. 그렇지, 미녀는 어떠냐? 종족 별로 최고의 미녀를 하나씩 선사하마.]
귀에 확 들어오는 제안이지만, 시혁은 따로 생각하는 게 있었다.
“그런 것보다, 나중에 제가 도움을 요청하면 도와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도와달라고?]
“예. 아마 제가 반신이 되고 신위 경쟁에서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한 뒤의 일이겠습니다만, 낫슈바켈 님께 도움을 요청할 때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 한 번만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종속되라느니 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요청은 하지 않겠습니다.”
강력한 마법 무구를 받는 것도 좋다. 당장 시혁의 능력을 크게 끌어올릴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시혁은 신들의 의도를 강하게 의심하고 있었다.
마법 무구를 받는다 해서 그들에게 대항할 수는 없다. 차라리 강력한 우군을 만들어 두는 게 좋을 것이다.
낫슈바켈이 시혁을 응시하다가 곧 승낙을 했다.
[좋다. 그렇게 하마. 언제든 네가 원한다면 내가 들어줄 수 있는 한 도움을 주겠다. 자, 받아라.]
가볍게 손짓을 하자, 허공에서 갑자기 반지 하나가 뚝 떨어졌다.
밋밋한 금반지.
하지만 평범하지는 않았다. 통찰 마법으로 관찰하니, 최소한 세 가지의 마법이 깃들어 있었다.
[내가 어린 용이었을 때 심심풀이로 만들었던 반지다. 호신용이지. 환영 마법과 단거리 도약, 장거리 이동 마법이 걸려 있다. 장거리 이동은 네가 지정하는 한 곳으로만 가능하고, 공허를 건너갈 수는 없다. 내가 어릴 때 만든 거라 조악하지만, 네 목숨을 보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시혁은 기쁘게 반지를 받아들었다.
현자 영웅인 이상, 엘프의 민첩 특전이 있어도 회피 능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환영 마법과 단거리 도약 마법은 크게 도움이 된다.
“감사합니다. 제게 아주 필요한 물건이었습니다. 참, 대모 세계수와는 어떻게 끝내실 생각이십니까? 엘프들이 이를 갈고 있던데요.”
[흥, 벌레 같은 놈들 좀 잡았기로서니 뭐 어떻다고?]
“복수를 하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낫슈바켈 님의 위엄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대모 세계수의 엘프들과 싸우는 사이 진범은 멀리 숨어버릴 겁니다.”
[으음!]
일리가 있는 말이다.
당장 다섯 영웅을 사주했을 반신의 정체도 모르지 않나.
낫슈바켈이 얼굴을 찡그릴 때, 새끼용이 낫슈바켈에게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엄마, 나 아프게 한 놈들 다 죽여 버릴 거지?]
그 말에, 낫슈바켈이 마음을 정했다.
시혁을 똑바로 보더니 질문했다.
[그래, 그렇다면 너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간단했다.
“엘프들과 화해하시고, 정확하게 상황을 설명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 다음 공동 전선을 펴서 진범을 찾아내고, 엘프 군대와 함께 박살을 내버리시죠.”
[듣기는 좋다만 그게 가능하겠느냐? 내가 죽인 엘프만 1천이 넘는다.]
“시도해 봐야지요. 엘프들은 이성적인 종족이니까, 말은 붙여볼 수 있을 겁니다.”
시혁이 사자 역할을 했다.
낫슈바켈이 시혁을 대모 세계수에 공간 이동시켰다. 그곳에 엘프들의 최고 평의회와 섭정궁이 있으니, 한 번 얘기를 해보라는 것이다.
“누구냐!”
붉은 구멍에서 시혁이 튀어나오자, 엘프들이 일제히 경계 태세를 갖췄다.
꽤나 많다.
시혁이 도착한 곳은 세계수를 보호하는 관문인데, 널찍한 공터에 엘프 군대가 집결해 있었다. 족히 수만은 되고, 엘프 기사와 정령사, 마법사 등 상위 병종이 즐비했다.
가볍게 땅에 착지했다.
지팡이를 보여주면서 엘프 식으로 인사했다.
“현자 최시혁입니다. 적색 고룡, 낫슈바켈 님의 전언을 가지고 왔습니다.”
“뭐라고?”
“낫슈바켈?”
“저거, 용왕 지팡이잖아?”
“맙소사, 정말이네.”
“이 사악한 종자가 대모 세계수까지 노리는구나!”
엘프들이 술렁였다.
몇몇이 시혁을 압송해야 한다고 소리를 높였다. 개중에는 무기를 들고 행동에 나서는 이도 있었다.
“그만!”
그때, 한 엘프가 고함을 질렀다.
은빛 갑옷을 입고, 별빛 관을 쓴 엘프였다. 딱 보기에도 지위가 높아 보였다.
엘프는 군대를 향해 꾸짖듯 외쳤다.
“대모 세계수의 앞이다. 이 무슨 소란이냐? 모두 정숙하라!”
그제야 소란이 좀 가라앉았다.
엘프가 몸을 날렸다.
시혁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시혁이 든 지팡이와 손에 낀 반지, 동행한 짝니를 샅샅이 살폈다.
입을 열자, 탐탁지 않아 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낫슈바켈의 사자라고? 우리 종족을 학살한 악룡의 사자가 이곳엔 어쩐 일이냐?”
적대감이 가득했다.
말 한 번 잘못 했다간 당장 칼을 맞게 생겼다.
시혁은 대놓고 말했다.
“낫슈바켈 님께서는 매우 분노하고 계십니다.”
“뭐?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화를 내야 할 건 우리다! 악룡 낫슈바켈에게 죽은 엘프만……”
“여러분은 잘 모르시겠지만, 낫슈바켈 님께서 분노하실 만도 합니다. 그 분의 자식이 살해당했으니까요.”
“뭐라고?”
엘프가 말을 하려다 말고 눈을 크게 떴다.
다른 엘프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실은 까닭에, 여기 있던 엘프들 모두 시혁의 말을 똑똑히 들었다.
조용하던 엘프들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낫슈바켈의 자식이 죽었다고?”
“어떻게?”
“설마 못 살린 건 아니겠지? 고룡이니까 부활 마법 정도는 쓸 거 아냐?”
“조용, 조용!”
관을 쓴 엘프가 호통을 쳤다.
그러더니 복잡한 눈으로 시혁을 보았다.
“내가 처리할 일은 아닌 것 같군. 따라오시오. 섭정님께 안내해 드리겠소.”
“좋습니다.”
시혁은 엘프들과 함께 대모 세계수 안으로 들어갔다.
엘프 섭정과 만났다.
그 앞에서, 시혁은 낫슈바켈과 새끼용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다섯 영웅, 멸종하는 용, 새끼용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죽음……
엘프 섭정, 그리고 주변에 늘어서 있던 엘프들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그런 일이 있었군.”
“이거야 정체도 알 수 없는 반신에게 낫슈바켈과 우리들 모두 놀아난 셈 아닌가.”
“그래, 낫슈바켈 님의 아이는 괜찮소이까?”
“예. 지금은 완치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마을만 10개 이상이 불에 탔고, 희생된 동족의 수가 1천이 넘는다. 낫슈바켈 님의 사정은 이해하지만, 합당한 사과와 배상이 없다면 우리에겐 동족의 복수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미 의논하고 온 대목이다.
시혁은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청했다.
얼마 후, 낫슈바켈이 대모 세계수의 상공에 나타났다.
새끼용을 대동하고 있었다.
때를 맞춰 시혁은 섭정과 평의회 의원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들을 보며, 낫슈바켈이 정식으로 사과하고 배상을 약속했다. 아울러 진범을 잡는데 힘을 합칠 것을 제안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늙은 곰이 남긴 책 속에서, 용들은 자존심이 높고도 높아 절대 사과를 하지 않는 종족으로 유명했는데……
그러나 시혁이 모르는 것이 있으니, 바로 자손에 대한 용들의 집착과 애정이다.
자신의 자식을 위해서라면, 용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것이 개미 같은 존재들에게 고개를 숙이는 일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낫슈바켈과 동맹을 체결한 후, 엘프 섭정이 시혁을 돌아보았다.
“결국, 수백 영웅들과 수만 엘프 군대가 해내지 못한 일을 그대 혼자 이룬 셈이군. 아니, 앞으로 벌어졌을 전쟁까지 감안하면 아주 많은 생명을 구했다고 할 수 있겠어.”
“과찬이십니다.”
“나는 낫슈바켈의 머리나 심장을 가져오면 대모 세계수의 보물 창고에서 무기나 방어구 중 1점을 주겠다고 했었지. 보아하니 대모 세계수가 가진 그 어떤 것으로도 그대의 공적을 기릴 수는 없을 것 같다. 부족하지만, 이것으로 대신하겠다.”
엘프 섭정은 입고 있던 녹색 외투를 벗어주었다.
녹색과 갈색이 어우러진 부들부들한 외투.
주위에 서 있던 엘프들의 눈이 커졌다.
“안 됩니다, 섭정님!”
“세계수의 가호를 소환자에게 내주시다니요!”
세계수의 가호?
뭔진 몰라도 좋은 물건인가 보다.
[어서 받아라, 어서!]
멀리서 보고 있던 낫슈바켈도 채근을 했다.
자신이 준 지팡이와 비교하여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
시혁은 사양치 않고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엘프 섭정은 담담하게 웃어 보였다.
“부디 외투에 어울리는 인물이 되길 빈다. 그렇지 않으면 외투는 그대의 손을 벗어날 테니까.”
“조언 감사합니다.”
엘프 군대는 뿔뿔이 흩어졌다.
새끼용을 죽였던 다섯 영웅을 추격하고, 최근에 어떤 의뢰를 받았는지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대수림의 엘프들은 현재 아르거스 행성에서 유력한 팔대 세력 중 하나.
시혁은 정체 모를 반신의 명복을 빌었다.
어느덧 나흘이 다 지나갔다.
낫슈바켈, 엘프 섭정, 짝니의 배웅을 받으며 지구로 돌아왔다.
< 적색 고룡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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