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혁골 -2- >
“혹시……”
시혁의 목소리를 듣고, 산왕의 눈이 커졌다.
“의학자님?”
그러더니 한 달음에 뛰어와 시혁을 껴안았다. 두툼한 근육이 숨통을 압박하고, 복슬복슬한 털에 파묻혀 거의 졸도할 지경이 되었다.
“의학자님! 보고 싶었어요!”
산왕이 꺼끌꺼끌한 뺨을 시혁의 얼굴에다 대고 비볐다.
“크앙! 크르릉!”
짝니가 경계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옛날 꼬마일 때처럼, 오랜만에 만난 기쁨을 격렬하게 표시하고 있었다.
시혁은 얕은 기침을 뱉었다.
“켁켁! 야, 좀 살살 해! 나 죽겠다!”
“아, 죄송해요. 너무 반가워서 그만……”
산왕은 머쓱한 얼굴로 시혁을 풀어주었다.
시혁은 숨을 골랐다.
오행 순환체가 몸 안에 있는 까닭에 금방 회복되었다. 곧 놀란 몸을 진정시키고 산왕을 마주볼 수 있었다.
그런데 꼬마 곰 이름이 원래 산왕이었나? 좀 더 귀여운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그 점을 묻자, 산왕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 얼마 전에 검치호 한 마리를 잡고 새 이름을 받았어요. 경비대 대장도 됐고요. 제가 지금 곰 인간 중에서는 장로님 빼고는 가장 힘이 세거든요.”
“그래? 축하한다. 그나저나 너 못 본 사이에 엄청 컸다. 할아버지는 안녕하시고?”
“그게…… 몇 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그랬구나.”
늙은 곰은 끝내 죽은 모양이다.
하긴 시혁과 만났을 때 이미 나이를 많이 먹었었다. 아르거스 행성에서는 8년이 지났으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산왕의 얼굴이 잠깐 침울해졌다가 금방 밝아졌다.
“아직 장로님들 못 뵈셨지요? 3층에 다들 계세요.”
장로들도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용맹하게 고르코드를 밀어붙였던 곰 장로는 이미 죽었다. 다른 장로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는 막내였던 토끼 장로만 살아남아 진물이 흐르는 눈을 깜빡였다.
“오, 그때 그 의학자라고? 반갑소. 오랜만이외다. 지금 이게 원래 모습인가 보오.”
“그렇지요. 오랜만에 뵈니 기쁩니다.”
다른 장로들 중에도 아는 얼굴이 있었다.
살쾡이 장로가 꼬리를 살랑거렸다.
“오랜만이오. 나 기억하겠소?”
“알지요. 고르코드에게 경도되어 찬조 연설을 했던 분 아닙니까?”
“끄응, 그건 좀 잊어주시구랴.”
사슴 장로도 그랬다. 천상 주시자 측에서 연설을 했던 그 예쁜 사슴 인간이 장로가 되어 앉아 있었다. 더구나 살쾡이 장로와 결혼을 했다고 했다.
그때 일을 놀리듯 말하자, 사슴 장로가 얼굴을 붉혔다.
“부끄럽습니다. 그만 놀리세요.”
지금은 생명 영령에 귀의하여 주교의 역할을 한다고 했다. 원래 영적인 능력이 뛰어나서, 상당히 강력한 신성 마법과 생명 마법을 동시에 부린다던가.
다른 장로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앞선 셋 만큼은 아니어도 기억에 남아 있는 얼굴들이었다. 오랜만에 보니 매우 반가웠다.
[배고프오.]
짝니는 그런 말만 계속해서 되뇌고 있었고.
장로들과 인사를 마친 후, 산왕의 손에 이끌려 집에 따라갔다.
산왕이 신난다는 얼굴을 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의학자님, 아니 영웅님께 남긴 게 있습니다. 이제야 할아버지의 유언을 지킬 수 있게 됐네요.”
늙은 곰의 유품?
뭐 좋은 거라도 있으려나?
시혁은 좋다고 따라나섰다.
산왕은 여전히 예전의 그 집에서 살고 있었다. 이웃집 곰 처녀와 결혼을 해서, 부인의 배가 남산처럼 부풀었다.
“여기 있습니다!”
산왕은 예전에 서재로 썼던 작은 방에서 책을 한 권 찾아냈다. 자랑스러운 얼굴을 하더니, 시혁에게 책을 내밀었다.
“이게 뭐야?”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완성하신 책이에요. 대재앙 전의 아르거스에 대한 전승을 모으셨죠. 영웅님이 오시면 꼭 달라고 하셨어요.”
“아니, 이런 귀한 걸……”
“영웅님께서 저희를 도와주신 거랑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죠.”
“그러고 보니 이 도시 이름이 원래 시혁골이었어? 예전에는 이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영웅님 덕에 생명 영령에게 귀의했잖습니까? 또, 불임의 저주 치료약도 완벽하게 알려주셨고요. 그래서 몇 년 전에 이름을 바꿨어요. 시혁골이라고요. 우리 수인족은 은혜를 잊지 않는 종족이랍니다.”
산왕은 으스대듯 말했다.
시혁은 입맛을 다셨다.
자기 이름이 한 도시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무척 영광스럽다. 하지만 좀 민망한 일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기쁘면서도, 동시에 쥐구멍을 찾아 들어가고 싶어졌다.
산왕의 부인이 주전부리를 내 왔다.
귀한 손님이라고 진수성찬을 차렸다. 잘 구운 사슴 고기와 각종 야채가 있었다. 특히, 가장 중앙에 벌집 째로 담은 꿀벌 단지가 보여 웃고 말았다.
“지금도 꿀을 좋아하나 보다.”
“그럼요! 영웅님은 어떠세요? 지금도 꿀을 못 드세요?”
“조금은 먹을 수 있어. 참, 이 녀석이 먹을 만 한 건 없을까? 생고기를 특히 좋아하는데.”
옆에 엎드려 있는 짝니를 가리켰다.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큼직한 생고기 한 덩이를 내 왔다. 짝니가 그걸 낚아채더니 즐겁게 식사를 했다.
시혁은 산왕과 이야기꽃을 피웠다.
할 말은 많았다.
산왕은 집중하여 시혁의 이야기를 들었다. 때론 탄성을 지르고, 때론 같이 분노하기도 했다.
그러다 지금 시점으로 이야기가 흘렀다.
의뢰를 받아 해결하여 계급을 높이겠다고 하자, 산왕이 자신의 가슴을 땅땅 쳤다.
“영웅님, 저만 믿으세요! 제가 세계 영령의 성역에 발생하는 문제는 모두 알아오겠습니다. 수신 계급이요? 당장 내일이라도 달성할 수 있게 도와드리지요!”
“하하, 그거 고맙다. 믿음직스럽네.”
산왕은 자기가 한 말을 지켰다.
본인이 관리하는 지역의 의뢰를 몰아주었다.
그것도 난이도는 쉽고 보상은 충실한 종류였다. 시간 관계 상 이번 방문 동안 수신 계급에 도달은 못해도, 한 1주일만 하면 충분하지 싶었다.
산왕이 몰아주는 의뢰를 하면서, 늙은 곰이 남긴 책을 확인했다.
옛 아르거스에 대한 전승이 담겨 있었다.
저술하면서 엘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엘프 노인 중에는, 대재앙 이전의 아르거스를 기억하는 이가 간혹 있었으니까.
책 중에서도 한 대목이 시혁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열다섯 마법사에 대한 부분.
지금 아르거스에서는 흔히 공포의 마법사, 열다섯 마법사라고만 불렀다. 그러나 대재앙이 일어나기 전만 해도, 그들을 따로 부르는 단어가 있었다.
“대종사라……”
예전에 언뜻 듣긴 했지만, 정말이지 대단한 자들이었다.
그 전까지 번영하던 모든 종족과 제국을 정복했다. 아르거스 행성은 그들의 것이었다. 그들 스스로만이 서로의 적수가 될 수 있었다.
대종사들은 자신의 힘에 취했다. 그리하여 과욕을 부렸다.
지상계를 넘어 천계와 마계까지 정복하고, 세상의 신이 되고자 한 것이다. 심지어 이계의 신을 소환하여 지배하려고 한 대종사도 있었다.
거기까지 가자 신들이 행동을 개시했다.
대종사들과 신들, 그 사이에 대전쟁이 벌어졌다.
결과는 15 대종사의 패배.
봉인되려는 것을 피해 발악하듯 쏟아 부은 마법과 저주가 폭주했고, 그게 대재앙이 되었다. 지금도 그 여파가 남아 아르거스 행성 주변에서 넘실대고 있었다.
시혁은 고개를 들어 세계의 끝을 쳐다보았다.
성역 바깥에서, 시커먼 공허가 손짓하듯 흔들렸다.
시혁은 다시 책을 쳐다보았다.
대종사들에 대한 정보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천상 대종사 셀레티스, 생명 대종사 위그, 철의 대종사 페이룬, 권세 대종사 카로스, 숲의 대종사 루쿨루, 바다 대종사 그눔, 환상 대종사 하티오, 진리 대종사 베리타스, 영혼 대종사 네프, 파괴 대종사 볼케이누, 야만 대종사 바바, 피의 대종사 드라미언, 어둠 대종사 녹스, 죽음 대종사 데르프, 지옥 대종사 게세나.”
똑같다.
어쩜 이리도 같을 수가 있나?
시혁이 의심했던 대로, 열다섯 대종사와 열다섯 진영이 정확하게 일치한다.
여기까지 확인하자 한 가지가 더 보였다.
열다섯 진영의 반신들.
그들이 사용한 이적이나 마법, 소환하는 병종이 이 책에 기록된 열다섯 대종사와 판박이 아닌가.
마치 대종사들의 제자 같다고 할까.
반신이 성장하여 신이 되면 거의 옛 대종사 수준이 될 듯했다. 대종사들은 현재의 반신처럼 자기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행성 전역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참 괴상했다.
신위 경쟁은 아르거스의 신들이 만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기껏 신이 되면 신들의 적수인 대종사를 부활시키는 꼴 아닌가.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까?
“아!”
시혁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탄성을 질렀다.
신들의 목적은 명확하다.
아르거스 행성을 복구하는 것이다. 신위 경쟁이 그걸 위한 거라고 애초에 못 박아놓지 않았나.
대재앙은 대종사들에 의해 격발되었고, 지금도 그 여파가 남아 있다.
만약 열다섯 대종사가 부활한다면, 그들이 힘을 합쳐 대재앙을 걷어낼 수 있지 않을까?
문제는 신들이 자기들의 강력한 경쟁자가 부상하는 것을 용인하느냐인데……
시혁은 편히 의자에 몸을 기댔다.
생각해 보니 상관없지 싶었다.
지금도 시혁에게 각인되어 있는 세 가지 명령.
[투쟁하라] [승급하라] [복종하라].
숲을 헤매면서도, 시혁이 화두로 삼고 있던 항목.
이것들은 반신이 되었을 때도 유효하니까. 신이 되었을 때도 유지시키면 좋은 노예 하나를 얻는 셈이다.
아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열다섯 대종사가 다시 살아온다 해도 대재앙을 해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의 마법이 뒤섞이고 폭주하여, 완전히 혼돈의 도가니가 되었기 때문이다.
뭔가 하나가 더 숨어 있었다.
마지막 퍼즐 한 조각이 부족했다.
그걸 알아야 대처를 할 수 있을 텐데……
그래도 다행이다.
많은 것을 알아냈다.
가장 급선무는 세 가지 명령을 해체할 방법을 찾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신위를 얻는다한들, 꼭두각시 신세에 불과하지 않겠나.
“영웅님! 영웅님!”
산왕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책을 덮었다.
최근 사흘, 시혁은 매일 같이 생명 영령의 성역에 방문했다. 산왕이 온갖 의뢰를 몰아주었고, 그 덕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현재 시혁은 50 레벨에 도달했다. 이대로 사나흘만 더 반복하면 수신 계급도 꿈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산왕에게 도움을 받는 것도 한계였다.
애초에 생명 영령의 성역이 너무나 작았으니까. 고작 사흘, 아르거스 기준으로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모든 의뢰를 해결한 것이다.
산왕이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나갔었는데, 잘 됐을지 모르겠다.
“영웅님! 혹시 소식 들으셨습니까?”
“무슨 소식?”
“대수림 북쪽에 적색용이 나타났답니다! 엄청 크대요. 최소한 수천 살은 먹은 고룡이랍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시혁은 눈만 멀뚱멀뚱 뜨고 산왕을 바라보았다.
산왕이 답답한지 가슴을 쳤다.
“지금 아르거스에 있는 영웅들은 다 거기로 몰려갔답니다. 고룡의 비늘 한 장만 얻어도 강력한 보물을 만든다고 하잖아요. 영웅님도 좋은 지팡이나 방어구 만드셔야지요.”
맞는 말이다.
어차피 생명 영령의 성역에서 볼 일은 다 봤다. 늙은 곰의 유품도 추슬렀고, 의뢰도 모두 해결했으니까.
시혁은 수인족 꼬마들과 놀고 있던 짝니를 불렀다.
“짝니야, 가자!”
“크르릉!”
짝니가 한 달음에 달려왔다.
그 동안 친해졌던 수인족들과 작별 인사를 했다.
산왕이 가장 섭섭해 했다.
“언제 다시 뵐 수 있을까요?”
모르겠다.
시혁은 말을 아꼈다.
“언젠가 재회할 날이 오겠지. 생명 영령에게 귀의하고 헤어질 때만 해도 정말 다시 만날 줄은 모르지 않았어?”
“그야 그렇습니다.”
“건강한 모습을 봐서 좋았어.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시기 바란다.”
“감사합니다, 영웅님. 신들의 가호가 있길 빌겠습니다.”
수인족들의 환송을 받으며 떠났다.
적색 고룡이 나타났다는 지역에 도착했다.
이미 늦은 걸까?
세상이 불타고 있었다.
< 시혁골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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